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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근본

고린도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37 추천 수 0 2012.05.05 23: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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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5: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85871 

jys.jpg 정용섭 목사

 

부활신앙의 근본

고린도전서 15:1-11,

부활주일, 2012년 4월8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부활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도 중요합니다만 십자가는 부활에 근거해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사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었던 치병, 축귀 등도 그것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부활에서 나오고 부활을 향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논하는 고전 15장에서 그 복음의 진수를 이렇게 서술합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이 짤막한 문장이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바로 이 문장에 자리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각각 생각이 다르겠지요. 어떤 분들은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할 겁니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부활절은 일 년에 한번 부활절에 부활 찬송을 부르고 부활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또 어떤 분들은 부활을 ‘확신’하겠지요.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 영원한 천국에 가서 잘 먹고 잘살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부활을 확신하는 것은 좋지만 ‘묻지 마’ 식으로 믿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닙니다. 부활을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부활을 부정합니다. 별로 의미가 없는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노골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마음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불가지론적인 지성인들에게 이런 생각이 많습니다.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도대체 우리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요?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부활 문제를 다루는 이유는 고린도교회 신자들 중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다음 구절인 12절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렇게 부활을 믿지 않는, 또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상황을 가리킵니다. 첫째, 부활은 믿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둘째,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은 가능합니다.

    

첫째 문제부터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아무도 부활을 직접적으로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바울이 오늘 본문 5-8절에서 목록으로 제시한 일부의 사람들만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습니다. 게바, 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이 그들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그들이 살아있을 때는 부활 신앙이 생생했지만 그들이 죽은 뒤에는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 자체는 실증적인 아닙니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통해서 똑같이 반복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은 로마 총독이나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데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문기자가 보도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쉽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을까요?

    

부활 신앙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하다는 둘째 문제는 좀더 실제적인 것입니다. 오늘의 신앙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큰 동기는 기복주의입니다. 복 받는 것이 최대의 목표입니다. 오죽 했으면 ‘삼박자 축복’이라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유혹은 사람들의 종교 심리를 자극합니다. 부도 직전에 몰렸다가 기사회생했다거나 죽을병에 걸렸다가 치료되었다는 간증 류의 신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부활 신앙은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모른 채 그냥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기 위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또는 모태신앙이니까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부활 신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범주에는 초기 기독교의 큰 틀에서 볼 때 영지주의 신자들이 포함됩니다. 영지주의 신자들은 신앙적으로 진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기독교 신앙에 냉소적인 사람도 아니고 기복적인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 철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에게는 부활 신앙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체적인 몸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온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우리와 똑같이 죽고 땅에 묻힌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고난당하는 하나님, 죽어 땅에 묻히는 하나님은 불가능합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도 많은 경우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을 그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죽을 수 없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죽었다고 하더라도 무덤 속에서 벌떡 일어나서 무덤 문의 돌을 밀어내고 걸어 나오셨다고 말입니다.

    

기독교의 정통 신앙을 가르친 교부들은 영지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가현설적인 그들의 신앙을 교회 밖으로 밀쳐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부활신앙은 죽음을 전제합니다. 임사(臨死)나 가사(假死)가 아니라 실제의 죽음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조는 언제나 예수님이 죽으시고 땅에 묻히셨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사도신경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라고 말하고, 오늘 본문도 ‘장사 지낸 바 되셨다.’고 말합니다.(4절) 예수님이 실제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절망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확신했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거나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지 않으셨을 겁니다. 부활 신앙의 전제는 절망적인 죽음입니다. 이 세상과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해체되는 사건입니다. 이해하시지요? 고대 영지주의자들과 오늘의 유사 영지주의자들은 죽음까지 낭만적으로 해석합니다. 잠시 숨을 거뒀다가 다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아주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나는 사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주장들은 모두 교회에서 쫓아냈습니다.


헛된 믿음을 넘어서

    

사실 부활을 복음의 중심으로 삼는 것은 선교 전략적으로 지혜롭지 못합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기복신앙과 도덕주의적 교훈을 핵심으로 삼는 게, 불교처럼 내면의 불성을 찾으라고 하는 게 더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 중에서 어떤 이들이 부활을 부정한 것은 나름으로 타당성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신앙을 가리켜 ‘헛되다’고 말합니다.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서 두 가지 믿음이 대별됩니다. 하나는 헛되게 믿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구원을 받는 믿음입니다. 헛되이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겠지요. 구원을 받는 믿음은 바로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꾸로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신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설마 그럴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냥 착하게 잘 살고 교회에 잘 나오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복음이 성립되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복음은 아주 극단적으로 이 사실을 주장합니다.

    

왜 그럴까요? 구원이 무엇인지를 일단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물론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곧 그것은 끝납니다. 그 어떤 방식으로도 끝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순서도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순식간에 생명을 잃습니다. 젊다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업적을 쌓았어도 죽음 앞에서는 업적이 없는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국회의원으로 죽는 거나 일용직 노동자로 죽는 거나 다를 게 없습니다. 그 죽음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폭력으로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생명이 있으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죽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이 허무로 빠져들게 된 것일까요?

    

성서는 죄가 그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 단절이 곧 죽음입니다. 이 죄를 단순히 겉으로 나타난 파렴치한 행위나 부도덕한 행위로 한정하면 죄의 본질을 놓치는 겁니다. 죄는 존재론적인 능력입니다. 아무리 율법적으로 철저하게 훈련을 거친 사람이라고 해도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율법 없이 자유롭게 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설명이 교리적으로만 들리시나요?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도사처럼 말을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내면적으로 불안해합니다. 모든 걸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합니다. 철이 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철이 든 사람은 세련되게 나타난다는 차이만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것을 가리켜 원죄라고 말합니다. 아무도 거기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악한 능력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부활은 죄로 파괴된 삶이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질적으로 다른 삶으로의 변화입니다. 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지금의 몸은 먹고 마셔야만 만족하지만 부활의 몸은 그런 것에 지배당하지 않고 만족합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야만 만족하지만 부활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생명 통치에 일치되어 절정의 기쁨을 얻습니다. 여기서는 경쟁력이 높아야만 좋은 대우를 받지만 거기서는 경쟁력 따위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이들이 생명의 능력에 붙잡히게 됩니다. 놀랍지요? 기대가 되지요?

    

이런 부활이 예수님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의 절망에 떨어졌던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부활하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 겁니다.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신 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예수님을 죄와 죽음의 어둠으로부터 의와 생명의 빛으로 끌어내셨습니다. 부활 신앙은 새로운 창조에 대한 강력한 기대와 신뢰입니다. 요한계시록 기자는 그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적당하게 개량된 세상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향한 희망과 신뢰가 바로 부활 신앙의 근본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모두 그러실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단지 희망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미 우리는 부활의 빛에 사로잡혀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생명이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다면 죽음과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부활 생명의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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