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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바울이 소양인인 5가지 이유

정치건강취미 박영준 한의사............... 조회 수 3012 추천 수 0 2012.05.13 0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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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hanbangnews.pe.kr/ 
바울이 소양인인 5가지 이유

 

첫째 이유; 분을 잘냄

 

불은 '로고스(logos)'로서 인간의 정신에서는 진리를 밝히는 '이성의 빛'이 된다. 이성적 인간, 사고적 인간, 논리적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 <파스칼>이 말한 '인간은 생각하는 갈 대'라는 표현은 인간의 4가지 마인드 가운데 특별히 '소양인적 마인드'에 대한 통찰이라 하겠다. 인간의 이성은 불의와 타협지 않고 정의를 고수한다. 그래서 소양인들은 나름대로 의 '강직한 소신'을 갖고 정의의 투사로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상이 불의하다보니 이들 은 세상을 향해 늘 '의로운 분노'를 품는다.


'평화의 사도'요 '화목케 하는 직분'을 위해 타고난 소음인과 달리, 소양인은 화를 잘 내고 어디를 가든지 따지고 논쟁하기를 좋아해 자칫 트러블메이커(trouble-maker)가 되기 쉽다. 여기에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한 이들의 성격도 한몫을 한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때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넘어가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기' 때문이다. 소양인들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이건 이래서 틀 렸고, 저건 저래서 글렀다'며 팔목을 걷어부치고 싸울 기세다. 또한 말도 청산유수인지라, 그 논리적이고도 분석적으로 따지고 드는 소양인을 말로써 당해낼 장사가 없다.

똑같은 '분노'라도 태양인의 분노와 소양인의 분노는 약간 차원이 다르다. 소양인은 자 존심이나 자신의 명예가 손상될 때 나오는 분노라기 보다는 불의에 대한 의로운 분노에 가 깝다. 사사로운 개인감정의 차원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태양인은 자기 이름 석자 에 먹칠을 할 때 감당키 힘든 모멸감을 느끼며 분노를 폭발한다. "아니, 나를 뭘로 아는거 야?" 이들에게는 '자존심에 상처받는 날, 세상을 하직하라'는 말이 인생의 좌우명이 된다. 또다른 차이점이 있다.

 

소양인이 품는 불의라는 것은 주로 자신이 속한 가정, 학교, 직장에 서 느끼는 것이고 기껏해야 자기나라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예컨대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비리를 보고 미련없이 사표쓰고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태양인의 분노는 조 금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세상을 달관한 사람처럼 자신과 사회를 '거듭나야할 무엇'으로 바라본다. 태양인의 눈에 투시된 세상은 당장에 뒤집어 엎어야할 그래서 개벽이 도래할, 아 니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해야 할 불완전하고도 타락한 세상인 것이다. 이들은 나라의 장 래를 걱정하고 지구의 종말을 걱정하며 온세상을 향해 분노를 느낀다. 태양인의 분노가 소 양인보다는 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좋게 표현하면 거시적이라고나 할까!

 

사도행전 15장에 논쟁을 좋아하는 바울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바울과 바나바는 초대교 회의 대부분을 개척한 단짝 친구다.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세계선교를 위해 파송을 받았 다. 1차 전도여행을 통해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지방에 복음을 전하고 돌 아온 이들은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한 후, 다시금 2차 전도여행을 떠난다. 이때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마가는 1차 여행에도 동행했던 인 물이다. 그런데 그는 겁이 많고 소심한 소음인인지라 밤빌리아의 버가 지방에서 그냥 집으 로 돌아가 버렸다. 선교를 감당하는 바울이 볼 때는 처음부터 완전히 기운을 빼는 작태라 아니할 수 없다. 바나바는 2차 여행에도 마가를 다시 데려가 그의 여린 믿음을 북돋아주고 자 하였다. 그는 실로 풍성한 감성과 사랑, 온유를 소유한 소음인이었다. 그런데 이부분에 서 소양인 바울과는 통하지 않았다. 바울은 한번 배신(?)한 사람, 연약한 사람, 선교지에 서 기운만 빼는 사람을 데려갔다가는 될 일도 안될 것이라며 마가의 동행을 결사 반대했 다. 티격태격 싸우다가 결국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 길리기아 지방으로 향하고, 바 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지방으로 향한다.


바울은 초대 기독교에서 베드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거물급 인사다. 그는 유럽, 북아 프리카, 소아시아에 걸쳐 대부분의 초대 교회를 개척했고, 신약성경의 서신서를 대부분 기 록함으로써 기독교 교리를 확립했다. 무엇보다 그가 기록한 <로마서>는 기독교 복음의 진 수를 가장 잘 표현한 '복음 중의 복음'이라 하겠다. 초대 기독교에서의 문제는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 세계 종교로 전파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늘날 처럼 기독교가 범세계적이지 못했고, 단순히 유대인들이 믿는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것도, 가지지 못한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믿는 어찌보면 내세지 향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종교에 불과했다.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것은 '구원관'에 있다. '죄악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로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이를 위 한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의(義)'에 이르 고자 하였다. 반면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이 '의'에 이를 수 있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를 주장한다. 그런데 초대교회 당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교리가 오 늘날처럼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다. 물론 바울을 통해 이 구분은 명확해졌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함께 유대교와는 다른 기독교만의 본질을 밝힌 책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출현으로 '갈라디아 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싹을 틔웠다. 이는 기독 교와 유대교를 혼합한 애매한 사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와 유대교에서 주장하는 '율법준수'를 합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를 믿고 그 이후에는 할례도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구원을 완성할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 다. 어찌보면 가장 그럴듯하고,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본질을 흐릴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이단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일찌기 이를 간파하고 유대교에 맞서 기독교를 변호한 사람이 '사도바울'이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자. 바울은 그의 동역자인 바나바,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를 방 문했다. 누가뭐라고 해도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본 고장이었고, 베드로를 통해 초대교회가 태동했으므로 기독교와 유대교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디도는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 즉 이 방인이었으므로 유대교 식으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바울은 노골적으로 디도를 할례받지 않게 하며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만났다. 은연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할례도 필요없다'는 기독교 교리를 주장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베드로가 바울이 있는 안디옥 교회를 찾아왔 다. 안디옥은 이방교회였고 게다가 할례가 필요없다고 주장한 바울로 인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 가증스럽고 상종할 수도 없는 이방 인들인 것이다. 베드로는 이들이 마련해 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식탁에는 할례받 지 않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끼어 있었다. '시장이 반찬'인지라 한참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보낸 스파이(?)들이 도착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슬며서 그 식탁을 빠져 나왔다. 유대인들이 볼 때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상종도 해서는 안되며, 더군다나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어디 베드로 뿐이랴! 믿음 좋고 카운셀링 잘하기로 소문난 바나바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수저를 놓고 뒷걸음질 쳤다. 이 장면 을 보고 바울이 잠자코 있을 리가 없다. 베드로를 면전에 두고 사정없이 호통을 친다. "네 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 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그러고도 네가 감히 사도라 할 수 있느냐?" 어느 누가 감히 초대교 회의 대부(?)격인 베드로를 호통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소양인 바울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을 통해 초대 기독교는 유대교의 벽을 넘어 범세계적인 종교로 확산된 다.


둘째 이유; 자립적

 

소양인은 비록 여성이라도 남성 뺨치는 생활력과 자립심이 많다. 그러다보니 여성다운 나긋나긋한 맛이나 순종의 미덕은 부족하다. 하지만 무능력한 남성이라면 이런 소양인 여 성과 결혼하는 것도 좋으리라. 놀면서 인생을 편히 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남편을 일찍 잃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으며 6남매를 명문대에 보낸 억척스런 어머니. 한 남자에 게 예속(?)되는 결혼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며 캐리어 우먼으로 성공하는 노처녀. 이들에게 소양인이 많은 것이다. 밤하늘을 밝히는 등불! 이는 밝지만 외로운 빛이다. '밝은 외로움' 인 것이다. 불기운이 많은 소양인들이 볼 때 세상은 어차피 혼자 왔다가 혼자 떠나는 것이 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소음인들이 새로운 모임 에도 혼자 못 가고 누군가와 같이 가야만 안심이 되는 것과 달리 소양인은 정반대다. 이들 은 선교 일선에 나가더라도 남들에게 생활비를 지원받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교회에서건, 친구나 부모에게서건 남들의 지원을 원치않고, 자신이 자기의 생활비를 직접 벌어서 사역 을 하는 자비량 선교사가 된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헬라 문화의 중심지인 그리이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 는 장면이 나온다. 아테네는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의 '지성의 도시'다. 철학의 거장들이 대부분 아테네에서 나왔고, 그래서 그들은 '철학을 논할 줄 모르는 자는 아테네 시(市)를 거닐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그들은 창조적인 지성으로 각종 신들을 만들어 내어 <그리이스 로마 신화>를 창출한다.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그 도시는 온 성이 각종 우 상으로 가득찼다. 신(神)들의 이름이 너무 많았고,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을 향해 예 배하는 곳도 있었다. 참으로 종교성이 많은 곳이다.

 

또한 스토아 철학자, 에피큐러스 철학자들이 광장에서 철학과 인생을 논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되면 복음을 전하더라도 위 축되기 마련이다. 적으로 둘러싸인 소굴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기분이 아니겠는가! 최소한 잠잠히 있다가 아군의 지원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소양인 바울의 행동은 어떤가? 그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서서 무리들을 향해 담대히 복음을 전한다. "아테네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그리고는 청산유수와 같은 논리정연한 메시지를 전 한다. 그 결과 디오누시오, 다마리 두 명을 개종자로 얻는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 자립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겼다. 사도행전18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대 부분을 개척하는 바쁜 와중에도, 장막 만드는 일(tent-maker)을 하며 자신의 생활비를 버 는 장면이 나온다. 참으로 혀를 내두르게 하는 부분이다. 대단도 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몸뚱아리가 열 개'라도 못할 일을 소양인은 가볍게 해내는 것이다.


셋째 이유; 활동적

 

불은 활활 타오르는 역동적인 생명력이다. 불기운이 많은 소양인을 하루종일 사무실에 앉혀 놓았다가는 갑갑해 견디지 못한다. 공연히 책상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화장실을 들락 날락, 허공을 향해 줄담배만 뻐끔뻐끔 뿜어댈 공산이 크다. 이들은 발로 뛰어다니는 활동적 인 일, 스릴있고 신나는 일이 맡겨질 때 숨겨진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동해번쩍 서해번 쩍' 하는 소양인의 통통 튀는 순발력! 역동적인 불기운에서 온 것이다.


이들은 일 자체를 좋아한다. 또 일을 벌려 놓고 한가지 한가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인 생을 사는 보람과 쾌감을 느낀다. 타고난 순발력과 추진력으로 인해 일처리가 신속하고 다 부지다. 때로 덜렁대는 성격과 건망증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얼마든 지 실수를 만회한다. 이들은 직접 몸으로 뛰는 액팅맨(acting-man)이다. 불의를 싫어하는 기질과 합쳐지면, 소양인들은 독재정권 타도에 앞장서는 데모부대의 행동대원이 되기도 한 다. 때로 몸에 신나를 껴얹고 불을 지르며 투신자살한다. 그런데 이들이 데모 일선에 나서 는 것은 나름대로 정립된 이념이나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도, 탄압받는 민중들을 향한 동정 심의 발로도 아닌, 단순히 행동을 좋아하는 그들의 기질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데모에 앞 장 선 소양인 주동자를 잡아다가 심문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이 사회의 부조리 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부르조아'니 '프롤레타리아'니 '계급투쟁'이니 하면서 논리정연한 말로 열변을 토할지 모르지만, "네가 생각하는 자유라는 것이 뭐냐"하고 추상 적인 질문을 하면 이들은 버벅(?)대며 중언부언할 것이다. '자유'라고 하는 추상명사에 대 해서 갑론을박(甲論乙駁)하는 것이 소양인이 볼 때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으며, 직접 자유 를 위해 몸을 던져 투쟁하는 것만이 의미있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양인과 태양인의 차이점이다.

 

같은 양기운(陽氣運)이 많은 체질이지만 소양인은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반면, 태양인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소 양인들은 데모부대 일선에 앞장서는 행동대원이 되지만, 태양인은 '범민족 궐기대회'를 이 끄는 정신적 지주요 상징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수십년간 지속된 아파르 트헤이트(흑백 인종차별)의 벽을 허문 '넬슨 만델라'처럼! 그러나 소양인에게는 태양인과 달리 추상적인 이념이나 사상 면에서 약하기 쉽다. 이들은 그저 행동하기를 좋아하고 가만 히 있으면 몸이 간질간질한 것이다.


소양인들은 활동적이고 나다니기를 좋아한다. 봉사정신도 강해 남의 일을 자기일 돌보듯 한다. 삼풍백화점 붕괴 후 곳곳에서 피해자를 돕고자 모인 자원봉사자들처럼! 소양인들은 때로 남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자기의 실속은 하나도 못 차리는 수가 많다. 이들의 마인드가 외향적으로 치우쳐 있어 자기것을 꾸리기 보다는 열심히 나누어주고 봉사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사회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소양인들! 과연 이들의 마음 가운데에는 불쌍한 이웃을 향한 동정심이랄찌, 동포애가 남달리 풍성한 것일까? 재밌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 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하기를 좋아하고 또 자신의 일을 통해 뭔가 현실에서 긍정 적인 결과들이 이루어지는데 대한 '자기만족'과, 또 그로 인해 따르는 남들의 '칭찬과 인 정'에 끌려 일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만약 이들에게 자신의 삶에 철저한 희생이 따르는 봉 사를 하라고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것이다. 왕성한 활동력과 냉철한 이성이 발달한 반면, 진정한 사랑과 인류애와 같은 풍성한 감수성이 이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치명적인 약 점이기 때문이다. 자칫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을 보고 속기 쉽다. 이들에겐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쩌'라든지, 인도의 천사 '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사랑의 실천 자는 드물다.

 

행동가적인 소양인 여성 중에는 간혹 ywca같은 사회단체에서 '상담분야'에 뛰어들어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양인 여성은 그들의 외향적 기질로 인해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것보다 사회활동에 참여하기를 좋아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들 속에 파 묻혀 있을 때 존재의미를 느끼기 때문에 '상담'이라는 분야가 적성에 맞는 것처럼 보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한 착각이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상담자의 기본자질은 남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력'과 그들의 마음을 함께 공감해줄 수 있는 '이해심'일 것이다. 그런데 소양인에게는 이런 인내력이 이들에게 부족한 치명적인 약점일 뿐더러, 남 의 마음을 헤아리고 상한갈대처럼 연약한 자들을 격려해주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 이 들은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어디를 가든 자기가 '대장'이 되야 만족하기 때문이다. 활동적인 소양인들이 대장이 되어 동분서주할 때 마음이 여린 소음인과 태음인들은 기가 죽고, 비교의식과 열등감으로 인해 그나마 갖고 있던 능력마저도 발휘를 못하는 수가 많다. 성숙하지 못한 소양인들은 선교사로 나가더라도 잘 다투고 따지기 좋아하는 속성으로 인해 남들에게 상처를 주며 트러블메이커가 되기 쉽다.


넷째 이유; 낙천적 기질

 

소양인의 또다른 속성 가운데 하나가 타고난 '낙천가' 라는 것이다. 이들은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고 남들에게 희망을 준다. 이는 어두움을 밝히는 불의 속성 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색하고 썰렁한 모임도 소양인의 밝음 앞에서는 맥을 못춘 다. 이내 까르르 하며 웃음꽃이 활짝 핀다. 통통 튀는 소양인의 밝음은 인생의 윤활유요 활 력소가 된다. 예수님의 말씀과도 같이 이들은 '세상의 빛'인 것이다. 생활영어의 대명사 '민병철 생활영어'를 뒤집고, 밝은 소양인의 유머와 위트로써 새로운 판도를 꾸민 '오성식 생활영어'! 웃음을 선사하는 소양인들의 발랄하고 명랑한 개그! 바로 소양인의 '밝은 기 운'에서 온 것이다. 이들은 주로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마이크를 잡으면 청중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다. 삼풍백화점 붕괴 후, 낙천적이고 밝은 성격의 소유자인 신세대 3인 방만이 칠흙같은 어둠과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유유히 살아나왔다. 승리의 v자를 그리면 서! 이것 역시 소양인의 밝음이다.

 

사도바울! 교회 역사상 그토록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한 성도가 또 있을까? 만약 오늘날 한국의 천만이 넘는 크리스찬 가운데 바울과 같이 고난을 받으라고 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 날까? 아마도 80%는 쭉쩡이로 걸러지지 않을까 싶다. 고린도후서11장에는 바울이 받은 고 난을 열거하고 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 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사도행전 14장에는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는 '불사조' 사도바울 의 모습이 보인다. 루스드라 지방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에게 훼방꾼 유대인들이 또다시 나 타나 괴롭힌다. 이번에는 정도가 지나쳐 무리들을 선동하여 돌로 바울을 쳐죽였다. 그리고 개패듯(?) 팼다. 이들은 이 정도면 바울이 죽었으려니 하면서 성(城) 밖에 시체를 던져버 렸다. 그런데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난 바울! 흙먼지를 툭툭 털고는 저는 다리를 이끌고 다 시 성(城)으로 들어가 담대히 말씀을 전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 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과연 밝고 낙천적인 소양인 기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똑같은 믿음의 사람일지라도 조그만 두려움 앞에서도 벌벌 떨며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소음인 아브라함이 있는 반면, 어떤 고난도 가볍게 헤쳐나가는 소양인 바울이 있다. 우리 는 여기서 무조건 '성령이여 임하소서'하고 무분별한 기도를 하기에 앞서 자신의 기질을 알 필요가 있다. 즉 타고난 기질에서 오는 나의 장점과 약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 님은 우리의 기질을 잘 아시고 또한 약점은 감당해 주시고, 장점은 키워주시면서 인도하신 다. 자기의 기질도 모른 채 무조건 성령만 달라고 부앙부앙대는 자에게는 '무지한 열심( ?)'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쌓이는 신앙연륜에 비해 별다른 성령의 열매도 맺지 못할 것 이다. 그리고는 그 내면에 불신의 벽만 높아간다. "뭐, 기도해봐도 별 수 없던데!"

다섯째 이유; 굳센 의지력

 

작심삼일에 그치는 태양인과 달리 소양인은 자신을 다스리는 의지와 절제력을 타고났다. '세상을 정복하기보다 나를 정복하기가 더 어렵다'고 하지만 소양인은 맺고 끊는게 분명하 고, 자신의 의지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추진력이 있다. 이들은 규칙적인 생활과 한시도 허송 세월하며 보내는 무의미한 시간이 없이 시간관리를 잘 한다. 새벽에 맞춰 놓은 자명종을 누르고 다시 잠드는 일이 소양인들에게는 드문 것이다. 겉으로는 담대해 보이지만 내심 두 려움이 많은 태양인과 달리 소양인은 굳센 의지력과 지칠줄 모르는 박력의 소유자가 많다.


이들은 기질 자체가 워낙 강한 체질이다. 또 능력도 탁월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더라 도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인지 주님을 믿는 것인지 애매할 때가 많다. 또 나의 결심과 목 표대로 일을 하는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하는지 불분명하다. 벌려놓은 일이 많아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의 시간이 부족하기 쉽다. 또 일에 대한 성취감과 자기만족 속에 쉽게 빠지기 때문에 성령이 주는 참된 기쁨을 맛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소양인은 '활동적 인 크리스찬'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행복한 크리스찬'은 되지 못하는 수가 많다.

 

소양인의 낙천적인 성격은 이들의 굳센 의지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왠만해서는 실의와 좌절을 모른다. 혹 있다해도 그 기간이 무척 짧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 뚜기처럼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양인 청춘 남녀가 사랑을 했다고 하자. 불같 이 달아오르는 성격에다가 호기심까지 많은 소양인인지라, 실수로 불장난(?)을 했다. 그런 데 그 이후로 티격태격 싸우다가 생이별을 했다. 똑같이 양기운이 많은 사람이라도 태양인 의 경우라면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밤마다 술독에 빠져 허우적댄다. 이들의 마음이 여리고 약하기 때문이다. 마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와 했던' 어느 시인처럼! 그러나 소양인들에게는 그런 연약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헤어지면 마음 속에 조그만 미련도 남지 않는다. 단 소양인 남자라면 '그 여자를 데리고 놀았다는 우월감'만이, 소양인 여자라면 '아직도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거라는 자만심'만이 남는다. '갑작 사랑 영 이별'인 것이다.

 

사도행전 20장을 보자. 바울은 에베소 지방에서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2년 반 동안 제자양육에 힘썼다. 그 결과 소아시아 지방에 엄청난 복음역사가 일어났다. 우상이 판을 치던 그곳에 마술하는 사람들이 마술책을 한데 모아 태워버렸는데 그 값이 은(銀) 오만냥 어치나 되었다. 실로 복음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은 능력이 있었다. 그후 '데메드리오'라 는 사람의 소요가 있자 바울은 마게도냐, 고린도, 드로아, 밀레도 지방으로 내려가 사역을 한다. 이때 바울은 밀레도에서 한가지 결심을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 렘에 가야겠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이 세운 목표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소양인 바울의 추진 력과 굳센 의지력을 발견한다.

 

바울은 에베소로 사람들을 보내 교회 장로들을 부른다. 시간 관계상 에베소에 들렀다 오 면 기일내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밀레도에서 고별 메시지를 마친 후 '두 로' 지방에 이른 바울! 이때 성령에 감동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 바울을 만류 한다. 그러나 바울은 한번 세운 계획은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후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 러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는데 '아가보'란 선지자가 바울에게 와서 성령의 뜻을 전해준다. '예루살렘에 가면 바울이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우리라'는 사실을. 성경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는 바울의 계획이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말하는 구절은 한군 데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강한 소망이요 계획에 기초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성령에 이 끌림 받고 나아가는게 아니라 그저 '심령'에 매인바 되어 가고자 하는 것이다.(행20:22) 반면 성령의 뜻은 달랐다. 성령은 거듭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이 기다릴 것이라 고 예언하셨다. 바울의 마음 속에 깨달음을 주셨고(행20:23), 두로 지방에서는 성령에 충 만한 제자들을 통해(행21:4), 가아사랴 지방에서는 선지자 아가보를 통해(행21:11) 성령의 뜻을 알려주셨다. 그러나 결국 바울의 강한 의지를 꺾을 장사는 아무도 없었다. 성령도 손 을 드신 것이다. 그는 당당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야 만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이 자기 뜻이냐 아니면 성령의 뜻이냐, 잘 한 것 이냐 아니면 잘못한 것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사건을 통해 나타난 바울의 기 질과 또 이렇게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를 성령께서는 어떻게 인도하시며 쓰시는가 알아보고 자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기질을 덮어서 쓰시며 선을 악으로 갚으신다. 우리의 옹고집과 소심함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셔서 구원역사에 쓰신다. 때로 그것이 성 령의 궁극적인 방향에 어긋나거나 죄악된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동기가 아닌 이상, 성령께서는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와 기질의 연약함을 선하게 바꾸어 쓰신다는 것이다. 사 도행전16장에는 아시아 지방으로 가고자 하는 바울을 성령께서 강력으로 막으시고 유럽으 로 향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바울의 계획이 성령의 궁극적인 방향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강력으로 막으시고 진로변경 시키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양인처럼 강한 기질은 회개시키는 데에도 특수한 방법이 필요하다. 사도행전 9장에 나 오는 바울의 극적인(dramatic) 회심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사람막대기, 인생채찍 으로 완전히 두들겨 맞고 녹초가 된 후에야 두손들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사업하는 사람이 부도가 나서 전재산을 홀랑 다 까먹든가 아니면 멀쩡하던 사람이 간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든가...

 

소양인은 저돌적인 돌파력과 굳센 의지력으로 인해 '바늘로 찔러 피한방울 안 나올 냉 혈인간'이 되기도 한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인정사정 볼 것도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소양인들의 메마른 감정, 앞만 보고 전진하는 추진력, 성숙치 않은 인격이 한데 뭉쳐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었던 가!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 서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죽이고자 가가호호 방 문하던 자가 아닌가!

 

우리는 역사에서 종교의 탈을 쓰고 대규모의 살육을 일삼은 소양인 마인드의 잔인함을 잊을 수 없다. 신성해야 할 종교의 역사에 남아있는 커다란 오점인 것이다. 성전(聖戰)으 로 치부된 십자군 전쟁에서의 비인간적인 살상행위, 이에 맞서 '코란 아니면 칼을 받으라' 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포교한 이슬람교도들의 잔인함,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수백년간 지 속된 신교와 구교간의 갈등, 그로 말미암은 처참한 순교(?)의 역사, 유태인을 향한 기독교 인들의 이유없는 차별, 미국 개척 당시 침례교도들을 향한 무자비한 학살과 만행! 어찌 영 혼의 구원을 위한다는 종교인들이 그 영혼이 거하는 육체를 그토록 처참하게 유린하며 짓 밟을 수 있단 말인가! 천인공노할 일이다. 또한 자신의 정권욕을 위해 광주시민을 무작위 로 학살한 소양인 대통령도 있었다. "광주? 이 종간나 새끼들, 싹쓸이 해버려!" 살기가 넘치는 소양인의 잔인무도함이다.


소양인은 4가지 체질 중 진단이 가장 쉬운 체질이다. 외형적으로도 어깨와 가슴이 발달 하고 엉덩이가 왜소해 역삼각형 구조를 이루는 경우가 많고, 기질적으로도 솔직담백하고 단순하며 투명한 성격이라 겉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장부 기질을 타고났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의 경우에도 체질이 소양인이라면 여장부로서 뭇사내들을 뺨 치는 억센 성격을 지녔다. 이들은 화끈한 박력을 지녔고 의리를 중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사내답다> <대장부답다>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매사에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고 시 원시원하며 골목대장의 기질이 있어 따르는 사람들도 많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소양인 기질이 출세하기 가장 무난할 듯 싶다. 특히 폭넓은 대인 관계를 요구하는 분야, 즉 영업사원, 사업가, 정치가 등의 직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 다. 사실 사회의 각 분야를 이끌며 동분서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소양인 체질이 가장 많다. 그러나 이런 소양인 기질의 위대한 장점들이 간혹 치명적인 약점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 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이들의 감정표현을 경우에 따라서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만 불같은 성격과 합쳐지면 잔인무도함이나 타협을 모르는 자기주장 만을 낳기도 한다. 조직의 리더가 될 경우 이들의 즉흥적이고도 자기중심적인 감정표현은 마음이 여린 사람들에게 감당키 힘든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기 십상이다. <왜 하는 짓이 그 모양이야?> <맘에 안 들면 언제든지 나가라구! 언제나 뒷문은 활짝 열려있으니까...> 뭐, 이런 식이다.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무감각한 기질의 소양인들은 감정표현이 투박하고 서툴 러서 언뜻 보면 친구도 많고 정도 많아 보이지만, 실상은 깊은 정을 나눌 만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고독을 씹는 경우도 있다. 이들의 문제는 박력있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취해 사는 것이며 그러다 보니 남들이 자신을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면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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