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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전12: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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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인생의 노년기 준ql
본문: 전도서 12: 1- 14
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6.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9.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여전히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10.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하였느니라
11.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
12.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주후 1세기에 이그나티우스라는 교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안디옥교회의 감독으로 시리아에서 복음의 역사를 많이 펼쳤습니다. 그의 노년기에 로마의 트라얀 황제(AD 98~117)가 동방의 도시들을 순회하던 중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황제는 이그나티우스의 명성에 끌려 그를 만났지만, 기독교를 멸시했던 황제는 혹독한 말로 이그나티우스를 빈정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사악한 마귀, 사람들을 속이는 자가 있구나!” “나는 마귀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입니다.” “네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본디오 빌라도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리스도가 너에게 그렇게 중요한 존재인가?” “그렇습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답을 들은 황제는 적법한 절차도 없이 그를 로마로 압송해 콜로세움에 세웠다. 약 4만 5천 명의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그를 맹수에게 던지라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때 이그나티우스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맹수의 이빨 사이에 낀 하나님의 곡식으로 빻아져서 주님을 위한 거룩한 빵이 되고자 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를 덮쳤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이 조롱은 주후 1세기 때부터 행해진 박해의 유형입니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며 온갖 멸시의 포화를 다 퍼부어 댔습니다. 하지만 보라. 최후의 승자가 누구였는가를.
우리의 인생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하며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마음껏 누리기에 한이 없습니다. 이를 위하여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목표를 세우고 전진해 나아가며, 특별히 왕성한 청년의 때가 되면 욕망과 야심에 불타올라 정신없이 생활하곤 합니다. 모든 것을 쟁취할 것만 같은 자신감에 차 있을 때가 바로 이 청년의 때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힘에 차있는 청년의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기억해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바로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이사야 40: 30, 31)
한 소녀가 전도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소녀는 온통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집회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이 놀라운 경험을 할아버지와 함께 나누기 위하여 곧장 할아버지 방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집회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고 “할아버지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세요”라고 간곡한 권유도 잊지 않았습니다. 손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슬픔의 눈물이 흐리고 있었습니다.
“제니야 나도 너처럼 전도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단다. 내가 12살 되던 해였지. 그때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단다. 그러나 난 너무나도 반항적이었고 젊었었기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지. ”나를 떠나 주시면 주님을 괴롭히지 않겠으니 제발 나를 부르지 마십시오‘라고, 제니야, 그 후로 나는 하나님을 영접할 기회를 영영 잃고 말았던 거란다.“
기회는 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있는 기회를 너무도 소홀히 여겨 놓쳐 버리고 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인간은 오래 전부터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생의 어느 한 시기에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질문은 생의 사계절 중에 체력이나 활동력이 점차 감퇴되어 가는 노년기에 더 마음을 차지하는 물음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노년기는 생의 가치를 재검토하는 시기입니다.
자연계에도 이 계절에서 다음의 계절로 변해 가는 것이 매우 점진적이며 은밀한 것처럼 생의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그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 분명히 의식되지 않습니다. 생의 여름에서 가을을 맞이했는가 했는데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 이유는 생의 가을에 이미 노년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의 가을에 노년기를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준비는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노년기를 맞이해서도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분은 은퇴 후에 급속히 노쇠현상을 맞이하는데 그러한 경우 대부분 의미 있는 일을 갖지 못해서 입니다. 반면에 은퇴 후에도 계속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분은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해가고 있는 경우입니다.
제가 캐나다 뱅쿠버에 갔을 때 60세 이상된 노년기를 맞이한 분들로 구성된 시온 성가단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주 목요일 그 시에 있는 컴유니티센타에 모여 한 시간 성경공부, 함께 점심식사, 오후 한 시간 합창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매해 상반기·하반기 공연회도 갖습니다. 그분들의 말에 의하면 주간에 그 날이 제일 기다려진다고 합니다. 그 시간은 자기들에게 이민 생활에서 유일한 의미라고 했습니다. 노년에 의미 있는 일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노년기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노년기에 들어서면서 생의 다른 계절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두 가지 현저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먼저 개인적으로는 생리적인 변화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의 노년기를 표현한 글 가운데 이러한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나는 나의 젊은 시절이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전연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밤마다 잠자리에 들어 그 다음날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나는 귀는 서랍 안에, 나의 이는 컵 속에, 나의 눈은 책상 위에 놓여져 있곤 한다."
이 글은 생의 노년기에 경험하게 되는 상반된 의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노년기에 들어선 분들로부터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마음은 아직도 젊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반된 의식이 노년기를 쉽게 받아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전도서를 기록한 지혜자도 노년기에 찾아오는 변화를 아주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날에는, 그 때가 되면
1) 집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손과 발에 힘이 없어진다. 팔이 떨리고,
2)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두 다리가 약해지고,
3)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란 우리가 먹는 음식을 씹는 치아입니다.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4)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 질 것이며- 시력이 감퇴해 눈이 침침해지고 잘 안보이게 되고,
5)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치아가 빠져 입술이 오그라듭니다.
6)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귀는 잘 들리지 않게 되고,
7)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조그마한 소리에도 잠을 못 이루고 일찍 일어납니다.
8)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 질 것이며- 귀가 어두워서 노래를 못하며,
9) 높은 곳을 두려워 할 것이며- 두려움이 많으며,
10)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머리털이 희어지며,
11)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몸이 쇠약해져 힘든 것을 들 수 없고, 젊은 시절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 못하며,
12) 정욕이 그치리니- 식욕, 성욕, 성취욕 등 육체적 정신적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며
13)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될 것-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슬퍼하게 될 것입니다.
14)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진다(6절)- 육체는 흙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고 생기는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혈기왕성한 자신의 힘만을 믿고 살다가 그 힘이 쇠약해지고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헛된 인생을 살았노라 한탄하지 말고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철학과 신앙(종교)의 차이는 철학이란 인간이 말하기라고 말할 수 있고 신앙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들으라,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듣기 훈련이 필요합니다. 전도서는 철학이라기에는 신앙에 가깝고, 종교라기에는 철학에 가깝습니다. 철학은 질문하고 신앙은 계시로 대답하는 것을 듣습니다.
전도서 기자의 실존: 일상생활이 지루하다.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세상의 큰 일을 시도한다.
단테의 신곡: 지옥문 위에 ‘여기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리라’ 즉 지옥이란 희망을 멈춘 곳, 희망이 사라진 곳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고통과 역경의 환경보다는 오히려 그 고통과 역경을 견디기 어려운 삶의 무의미성입니다. 허무하게 삶을 낭비하는 것이 지옥의 본질입니다.
욥기의 고통은 기다림이 있기에 희망도 있다는 것에 비해 전도서의 무의미성과 허무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8절)전도서는 고난받는 자리 곧 배고픔과 역경의 자리에서 생겨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 사는 풍요로운 삶에서 생겨납니다. 못먹는 사람이 아니라, 배부른 사람이, 가진 것이 없는 평민이 아니라 왕과 같은 환락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의 입에서 이런 권태와 싫증이 쏟아져 나옵니다.
왜 허무합니까?
첫째, 해 아래서(29번 등장): 모든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 때문에 무관심하게 되고, 습관화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반복됩니다. 어제 있었던 것이 오늘 다시 오고, 그것이 내일 또 다시 다가옵니다. 일상의 반복이 전도자를 지치게 하고 권태 속에 빠져들게 합니다.
둘째, 반드시 죽습니다. 그렇게 뽐내던 인간들이 예외 없이 죽음의 자리로 나갑니다.
셋째, 세상 속의 악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질서 없이 마구 뒤죽박죽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비를 알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태양)아래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시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번 만드신 것. 예를 들어 구부려 놓은 것을 인간이 감히 펼 수 없습니다.(전7:13)
전도서 기자는 이러한 노년기를 곤고한 날이라 말씀합니다. 전도서 기자가 노년기를 곤고한 날이라 말씀한 것은 육체의 기력이 쇠하여지고, 모든 일에 흥미를 잃게 되고, 우울함을 더욱 느끼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이러한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노년기를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자를 의뢰하며 살아가면 생을 의미 있게 살게 되고 노년기 위기를 바르게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회적인 면에서 노년기는 사회적 책임과 의무에서 해방되는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기에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는 동시에 아쉬움·후회·당황이 있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느 권사님 한 분이 젊은 시절 결혼을 해서 자신의 생을 거의 자녀 양육과 건강하지 못한 남편을 위해 다 보냈습니다. 한 여인의 헌신적인 자기 희생을 통해서 자녀들이 모두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갖게 되고,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분의 생애에 무거운 짐이 되었던 남편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드디어 그 분은 자신의 생의 모든 짐을 벗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 때는 그의 생의 노년기였습니다.
생의 모든 짐을 다 벗고 이제부터 자신의 생을 살려고 할 때, 생의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노년기에 맞이한 자유는 그에게 아쉬움·허탈·초조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생의 위기에서 조용히 기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신학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도사 일을 위해서가 아니고, 남은 생의 시간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삼년간 오직 그 일에 몰두하면서 생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되었고, 그 후 그는 캐나다로 이민하여 시온 성가단을 창단해서 16년 동안 그 합창단을 지도해오고 있습니다. 이 권사님은 생의 곤고한 날을 젊은 시절부터 의지하여 오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잘 보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이 힘겨워집니다. 하지만 노년에는 노년 나름의 특별한 기쁨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기쁨, 버거운 책임에서 벗어난 기쁨,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소소한 것들을 즐기는 기쁨 등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노년은 매일의 삶을 주님 손에 맡기며 그분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계절입니다. 그리스도, 그분이야말로 인생 최대의 기쁨입니다.
또한 인생의 노년기에는 아쉬움과 후회만이 있는 계절은 아닙니다. 인생의 노년기는 많은 경험을 재산으로 축적하고 있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가치를 재검토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인생의 노년기는 많은 학위를 가지고 있는 매우 값진 시기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그들의 공동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노년기에 갖게되는 경험은 교실에서 지식으로 배운 것이 아니며, 지금까지 삶의 현실에서 체험적으로 익힌 것들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입니다. 값지다는 것은 시행착오를 거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젊은 신혼부부가 결혼 전에 육아법에 관한 책을 사서 육아 양육에 관한 지식을 다 습득했다고 해도, 생의 노년기를 맞이한 어머님의 경험에 비할 바 아닙니다. 인생의 노년기는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값진 시기입니다. 잘못하면 노년기에 이르러 지나온 과거를 모두 경멸해버릴 수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노년기는 더욱 아쉬움과 공허만이 남게 됩니다. 그러한 태도는 노년기를 건강하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지나온 날의 경험들에서 값진 교훈들을 찾아내어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그것을 후세들에게 글로 또는 말로 유산으로 전수해 주는 것이 노년기를 건강하게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경멸하지 않고 값진 것으로 받아드리는 데서 노년기를 쉽게 긍정적으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한편 노년기에서는 지나온 날들에서 경험한 값진 경험의 유산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면서, 다가오고 있는 마지막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서야 할 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 시간을 위한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어떤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노부부가 `캠핑 카'를 타고 미국 대륙을 여행하던 중, 어느 국립공원 높은 지대에서 폭설을 만났습니다. 갑자기 내리는 폭설로 자동차는 눈에 갇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계속 눈이 내려 자동차 전체가 눈에 덥히게 되었습니다. 노부부는 자동차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약 일주일 후에 눈 속에 있던 차가 발견되어 구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노부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평화롭게 숨을 거둔 그들 옆에 한 권의 일기장이 있었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노부부가 눈에 갇힌 시간부터 죽음의 시간을 내다보며 남편이 기록한 일기와 남편이 먼저 숨을 거둔 후 옆에 있던 부인이 대신 계속해서 기록한 일기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거기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의 남편은 우리가 눈에 갇히게 되면서 운명하는 순간까지 줄곧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옆에서 지켜 본 남편의 모습에는 조금도 두려움의 빛이 없었고 매우 평화로웠으며, 안정되어 있었다. 드디어 남편이 숨을 거둔 후, 나는 그를 대신해서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가 나 역시 나의 마지막 시간을 맞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눈 속에 갇혀 있는 고독한 노부부의 모습은, 고독하고 외로운 노년기를 맞이한 사람의 모습으로 상징화 시켜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드리고 다가오고 있는 영원의 시간을 내다보며 일기를 써 갈 수 있을 정도라면, 그야말로 훌륭한 노년기를 보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의 모습 자체가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의 모습은 그가 살아온 생 전체의 모습을 반영해 주는 시간입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그리스도를 위해 살다가 드디어 그리스도 안에서 노년기를 맞이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려드립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간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운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 : 6∼8)
지금까지 우리가 본 전도서의 질문(인간이 말하기): 내면의 자기 존재 의미/시간에 대한 의미/인간관계/말/친구/사회적 악에 대한 문제/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다양합니다. 결론적인 전도서의 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3절)
우리가 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은 궁극적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14절)
둘째, 하나님은 가르치기를 좋아하시는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11절)여기서 한 목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계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평생 하나님께 듣고 배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지혜자인 전도자는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것이 헛된 줄 알면서도 그러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세요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
허무와 무의미성을 넘어서려면 절대적으로 신앙과 하나님의 약속이 필요합니다. 전도자는 비록 인생의 허무로부터 전도서를 시작했지만, 인생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찾은 것입니다.
* 전도서: 태양이 지는 일몰(희망의 끝. 믿음이 요구된다)
* 욥기: 아침을 기다리는 한 밤중(희망의 시작, 소망을 품는다)
* 아가서: 동터오는 아침(희망의 성취, 사랑의 잔치, 사람의 예찬)
성도 여러분! 인생의 겨울, 인생의 노년기는 우리 모두의 미래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노년기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서야할 시간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창조주 하나님께 우리의 생의 모든 물음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창조주 하나님 앞에 가서 서야 합니다. 그 시간이 갑자기 닥치기 전에 그 분을 깊이깊이 신뢰해가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사실은 노년기에 나이 많다고 해서 결코 낙심해서는 아니됩니다.모세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이 80세였으며, 그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빌면서도 그의 늙은 나이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70세에 유명한 철학을 세계인에게 주었고, 그런 나이인데도 악기 연주법을 배웠습니다. 플라톤은 50세에 겨우 학생이었고, 60세에 이른 이후부터 최선을 다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죽을 때까지 시를 썼고, 89세에 그의 삶을 설계했으며, 90가까이 되어서도 발판 위에 올라가 로마 교황청 예배당의 천장을 조각했습니다. 페트라르카는 70세에서 80세 사이에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루도비코는 115세에 그의 자서전을 썼습니다. 오늘도 꿈을 가지고 희망 중에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지금이 내 인생 가운데서 가장 젊은 시절임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은 시간을 사용할 줄 아는 복된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내 평생에 주님을 찬양하며 살게 하옵소서. 탐욕과 이기심을 좇아 살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불우한 이웃과 연약한 사람을 돌보는 힘과 눈을 주시옵소서. 해 아래에 새 것이 없지만 해 위에 계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함으로 매일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빛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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