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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

고린도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3132 추천 수 0 2012.05.18 18: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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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2:12-2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선성암교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
고전12:12-27

지난주일 저녁에는 '老稼齊'(정세환 장로의 별장)에서 여러 명의 목사들이 모여 밤을 새워 가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마 새벽 2시30분 까지는 이야기가 계속되었을 겁니다.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들이 모였기 때문에 대화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먼동이 터 올 무렵까지 이어진 이야기의 중심은 '교회'였습니다. '교회란 뭔가?', '오늘 교회는 제 구실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들은 우리가 이번 2월 달 내내 성서를 통해 답을 구하고 있던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노예 신분 철학자인 에픽테투스는 "당신은 세계의 시민이며 세계의 한 부분이다. 누구나 이성을 갖고 있고 자연의 질서를 이해한다면 손이나 발이 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황제, 귀족, 평민, 노예가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 속에서 귀족이나 평민이나 전체로서 다 한 몸이라는 선언이나 말은 대단한 체제전복적인 발언입니다.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Seneca)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다. 우리는 거대한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근사한 말이나 이념도 누가 그걸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완전이 그 뜻이 뒤바뀝니다. 철학자들이 하고자했던 의도가 무엇이든지간에 로마의 통치자들은 이 말을 어떻게 썼는지 아십니까? 이 '몸과 지체의 비유'를 가지고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 했습니다. 그들은 불만이 가득한 평민들과 반항심이 가득한 노예들을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우리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노예든 다 같은 지체이며 전체로 한 몸으로 이루어진 관계다. 그러니 여러분이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면 그것이 곧 여러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B.C. 494년 경 메네니우스 아그립바는 당시에 유행하던 '몸과 지체의 비유'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여 불만 계층을 설득했습니다. 이건 속임수입니다. 평민이나 노예들을 '영혼을 가진 도구'정도로나 알고 있던 시대에 이 말뜻이 진심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몸과 지체의 비유'가 성경에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한 몸임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합니다"(12절).

바울 사도의 이 비유는 앞에서 말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비유들과 형식상 비슷합니다. 그러면 바울도 로마의 통치자들이 속임수로 했던 것과 유사한 의미로 이 말을 썼는가 하는 것이죠. 좀 더 바울의 비유를 들어 보십시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14-16).

손이 무엇을 잡으려고 하면 발은 동시적으로 그것을 향해 걸어가기 마련입니다.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리면 눈은 자동적으로 소리의 방향을 쫓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발과 손, 눈과 귀는 대립하지 않고 더불어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뻔한 이치를 본문에서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립하는 기능처럼 표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이 사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습니다. 이 비유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개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고린도 교회를 시작하던 처음에 부르심을 받아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고전1:26-28).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구성원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가진 사람들이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분열의 위기에 까지 몰렸습니다. 예를 들면, 교우들이 친교를 나누고 하나를 이루어야 할 공동식사 자리에서, 가진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잔뜩 먹고 취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배고파했습니다(11:21). 또 많이 배워 유식한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을 깔보고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바울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들은 이교도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교회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매사가 불안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제물로 바친 고기를 앞에 놓고서도 두려워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배운 사람들은 우상 따위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모든 것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이다"(6:12, 10:23),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은 음식이 아니다"(8:8)등등의 말을 구호처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구호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호가 틀렸는지 맞았는지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그와 같은 신앙 인식을 동의하고 있는 듯 보여 집니다. 바울이 문제를 삼는 것은,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들의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의 어느 편도 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의 지체이니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여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중재는 둘 다를 아우르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가진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체들 간의 '차이'를 무마하려는 게 아니라, '차별'을 극복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너는 네게 쓸데가 없다"(21절).

이것은 바울이 의인법으로 표현한 어느 지체의 말을 빌려온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게 아니라 그런 말이 교회 안에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우들 간에 노골적인 반목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바울은 계속 교우들에게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할 수 없고, 머리가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할 수 없습니다"(21).

다른 사람을 향해서 '너는 내게 쓸데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이 몸 가운데서 더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22).

'약하지만 요긴한 지체'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체의 어느 부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사정이나 형편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는 요긴하게 생각지 않았던 손가락이 다쳤을 때, 절실히 손가락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신체 부위 중에서 '손가락'이 가장 중요한 부위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뭡니까? 바울의 다음 말이 그것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몸 가운데서 덜 귀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들은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볼품없는 지체들을 더욱더 아름답게 꾸며 줍니다"(23절).

약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더 요긴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덜 귀하게 여기는 지체들을 귀한 것으로 돌보고 보호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볼품없는 사람을 아름답게 꾸며주려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은 발보다는 손을 더 가꾸며, 귀보다는 눈을 더 치장하며, 발보다는 얼굴을 더 화려하게 꾸미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파격적인 언어를 읽어야 합니다. 이걸 읽지 못하니까  지금까지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이, 공동체의 불화를 무마하려는 아그립바 왕의 정치적인 전술쯤으로 생각을 합니다. 급기야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타협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협이란 이 세상의 상식선을 고수하는 것을 목표로 할 때 지어내는 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말은 그런 세상의 고질적인 문제가 교회 안에서 생겼으니 그냥 덮고 가자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그러한 현실을, 인간들의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이세상의 상식에서 어떤 타협점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약하고 부족한 지체에게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도 없이 더 큰 존귀함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 아래로부터의 사랑, 상식적이 아니라 파괴적인 그 사랑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그의 계속되는 말에서 더욱 분명해 집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지체들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함을 주셨습니다"(24).

아름다운 지체는 더 꾸미고 부족한 지체는 소홀히 하는 것이 세상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내용은 그런 상식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앞에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주어 '하나님께서는' 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주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부족한 지체에게 더 큰 존귀함을 주는 것은, 실제적으로 신체 기관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이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 아니라, 그런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가진 사람과 지식이 있는 사람이 그러하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약한 지체를 무시하여 "너는 내게 쓸모가 없다"고 함부로 말하는 강한 지체들을 꾸짖으며 반성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한 지체의 권리를 복권하여 진정으로 소중하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겉으로만 하나처럼 보이는 위선적인 일치가 아니라, 속까지 하나가 되어서 한 몸을 이루는 운명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25-26).

여기에서 '그래서'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이 단어 앞에 나오는 내용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즉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하나가 되는 일,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을 하게 되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앞의 내용, 곧 아름다운 지체는 더 존귀하게 대접하는 그런 파격적인 사랑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파될 때 사람들은 고통도 함께 하고 영광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입니다."(27절).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죄 많고 흠투성이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른 사람에게 "너는 쓸데가 없다"고 말하지 않을 때,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배운 사람이 배우지 못한 사람을, 잘난 사람이 못난 사람을 깔보지 않고(경우의 상황을 더 확장하여 설명해야 함)더불어 한 몸을 이루는 소중한 지체로 여길 때, 그리하여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운명 공동체를 이룰 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의 문제는 크냐 작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걸 바울도 2000년 전에 말하고 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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