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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그 평화를 누리는 곳

이사야 김남준 목사............... 조회 수 2191 추천 수 0 2012.05.20 07: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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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66:10-14 
설교자 : 김남준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는 길 6
교회, 그 평화를 누리는 곳 

2006-12-17

 

본문 말씀: 사 66:10-14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I. 본문 해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시대에 예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선지자로서의 그의 출발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고난으로 가득 찬 선지자의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사야서는 전·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장에서 39장까지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백성들을 향한 공의로운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40장에서 66장까지입니다. 여기서는 갑자기 어조가 바뀌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시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특별히 후반부에서는 심판이 끝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구속하시는 놀라운 계획이 하나님의 교회의 우주적 비전으로 나타납니다. 40장에서 선언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분의 위로와 53장에서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56장에서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놓인 66장은 이렇게 회복된 교회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어떻게 영광과 기쁨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게 되는지를 전망함으로써 대미를 장식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곳이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위로(慰勞)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II. 예루살렘을 위로하실 때

 

하나님의 교회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회복되고 번영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영광 위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이 우뚝 서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여 다 그와 함께 기뻐하라 다 그와 함께 즐거워하라 그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여 다 그의 기쁨을 인하여 그와 함께 기뻐하라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사 66:10-11). 여기서 성경은 예루살렘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때, 그 백성들의 공동체가 어떤 상태가 되는 지를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외적인 번영이나 성장이 아닌 그 공동체의 내적인 질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A. 함께 기뻐함

 

첫째,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다 예루살렘과 함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며, 나아가 예루살렘을 위해 슬퍼하던 자들도 함께 기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 누리게 되는 내적인 질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지적은 다음 두 가지를 숙고하게 합니다.
첫째로는 우리의 삶의 질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외형적인 성공과 번영을 이룩하는데 모든 마음과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고, 또 이기기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의 모든 모습들은 대부분 이러한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재산, 보다 높은 지위, 보다 큰 즐거움, 그리고 넉넉한 안락함 등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까? 그 경쟁 속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고, 이미 얻은 사람들은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 더욱 더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의 내적인 질을 고양시키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육체의 자랑은 그야말로 육신을 위한 것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소유나 높은 지위를 획득하는데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기쁨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되는 내밀한 평강의 기쁨입니다. 기쁨,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의 내적인 삶의 질을 적시(摘示)하는 단어입니다. 이 세상에는 누리는 기쁨에는 후회할 기쁨도 있고, 아무리 누려도 더욱 더 그 마음이 유열(愉悅)로 가득 차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거민들이 그 평화 안에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 복된 예루살렘으로 인해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정확히 적용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성도들은 그 평강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은밀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 더할 수도 있고 빼앗길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러한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때 자신들도 그 안에서 내적인 삶의 질이 고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리킬 뿐 아니라, 예루살렘이 이 평화를 누리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둘째로는 이 기쁨이 공동체적(共同體的)으로 누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함께’라는 단어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한 몸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맺은 각각의 그 관계에 따라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개인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루실 뿐 아니라 공동체적으로도 다루십니다. 악을 행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하나님과 공동체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오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러한 평화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축복이 분여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축복의 분여 안에서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 시간 마다 완악한 사람들이 남아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하는 경험이 있고, 공동체가 함께 기도할 때마다 성령의 위로하심이 있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 갈 때에 거기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동체적으로 경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의 노력 안에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평화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합하여 공동체 전체가 흠이 없이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도록 공동체적 연합과 화평을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교회의 공동체적 성격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합니다. 또한 교회를 바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에 대한 지식도 바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 모두의 신앙생활을 그릇된 길로 인도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때, 그 평화 안에서 위로(慰勞)를 받습니다. 그 위로는 영적인 위로입니다. 그 위로 안에서 각 성도들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어떤 것, 주님이 허락하신 어떤 도움 때문에 겨우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그 완전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주님을 기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해보지 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교회에 하나님과의 평화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과의 평화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로서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사모해야 합니다.

 

B. 함께 만족함

 

둘째, 함께 만족(滿足)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예루살렘이 그분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11절).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예루살렘의 특징은 만족입니다. 엄마의 품에서 젖을 물고 곤히 잠든 어린아이의 표정을 기억하십니까? 허기짐 속에서 엄마의 품을 파고들어 열심히 젖을 빨던 아이가 배부르게 되자 잠이 밀려옵니다. 충분히 젖을 빤 후에 젖꼭지를 입에서 떼어놓으며 잠드는 아이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눈가에는 잠이 가득하고, 떨어지는 젖이 묻은 입술은 약간 벌어져 있습니다. 온 얼굴에 평화가 가득하고, 엄마의 품 안에서 편안히 잠이 듭니다. 쌔근쌔근 하는 숨소리와 옷깃을 스치는 젖 내음, 가냘프게 떠는 눈썹…….

 

이것이 바로 젖을 빨고 만족을 누린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모든 평안은 만족에서 비롯됩니다. 만족시킬 수 없는 물질에 대한 욕망(慾望)을 가진 사람들이 평화를 누릴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러한 만족을 누려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만족,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때 얻게 되는 참된 위로입니다. 우리의 모든 만족은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세상의 헛된 욕망과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물질들에 대한 부패한 욕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영혼에는 쉼이 있을 수 없고, 마음에는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그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때 거기에는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고양된 영혼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만족해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배부르게 젖을 빨고 엄마의 품에 잠든 어린아이의 마음에 더 이상의 욕망이 없는 것처럼 성도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영혼의 자유를 누리며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내면의 만족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선물입니다. 기쁨과 같이 이 만족함도 공동체적으로 경험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인간들의 활동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 만족 역시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기쁨과 마찬가지로 이 만족함 역시 공동체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그분의 위로로 가득 채워질 때, 성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자신 때문에 만족을 누립니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 자신 때문에 만족을 누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사모하는 자의 영혼에 참된 만족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III.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을 때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회복은 하나님과의 평화의 회복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평화’는 남다른 단어였습니다. 그들은 계속되는 전쟁에 시달린 민족이었습니다. 세력이 커지면 남하(南下)하려는 북방 세력과 북상(北上)하려는 애굽이나 블레셋 같은 남방 세력들과 끊임없이 싸워야하는 투쟁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언제나 평화를 빼앗아갔습니다. 그들이 갈망했던 평화는 이민족(異民族)을 이길 힘을 가지고 있는 데서 비롯된 평화였습니다. 다윗의 시대에 그들이 누렸던 평화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평화도 이민족의 세력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에서 나온 평화였습니다. 승리를 통한 평화와 굴복을 통한 평화 중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평화는 어떤 것입니까? 핍박과 시련 앞에서 굴복하는 것은 잠시 세상과의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육체의 부패한 욕망에 대한 굴복은 잠시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굴복을 통한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잠시 맛보는 평화보다 더 큰 고통을 곧 경험하게 됩니다. 회복될 예루살렘이 누리게 될 평화는 그런 종류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이 평화는 메시아의 대속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에 수립될 평화였습니다. 그 평화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드러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한 공동체로 하나님 앞에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러한 평화를 유지할 때 얻게 되는 실제적인 네 가지 축복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A. 평강을 누림

 

첫째로 평강(平康)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12절).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강 같은 평강은 하나님과의 평화로 말미암아 그 백성들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 누리게 될 전쟁이 없는 육체의 상태와 모든 결핍과 근심으로부터 해방된 안정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에게 내적인 유열(愉悅)과 안녕(安寧)을 가져다주는데, 이것을 가리켜 “평강”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평화할 때, 이러한 평강을 실제적인 삶 속에서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안에서 신자가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 외적인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의 내적이고 외적인 질서들을 바로 잡으십니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경험은 개인의 삶 속에서도 획득됩니다.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은 자신들을 둘러싼 사물들이 흐트러진 질서를 의미하고, 고통은 그러한 질서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갈등하는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에 위로와 소망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개입하십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 잡으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하시고, 편안하게 하십니다. 환란(患亂)과 위기(危機)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지만 자신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부족한 자원이나 마음의 기대에 어긋난 삶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자신의 모습을 인하여 아파하고 고통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회개(悔改)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온전한 삶을 살려고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듯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고통스런 사물들의 질서를 올바르게 잡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실제적인 삶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온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작용들은 외적 사물들의 질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것과 우리 밖에 있는 것들 사이에 구별이 모호할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 잡으심으로써 우리의 삶을 유쾌하고 안정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둘째, 내면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남과의 깨어진 평화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당신에게로 돌아오려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내면의 질서를 바로 잡아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면의 질서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 그리고 마음, 또한 육체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작용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영혼의 상태와 관련되고, 영혼의 상태는 육체와 더불어 그의 마음과 정신의 작용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마치 같은 악기라 할지라도 줄이 바르게 조율되어 있으면 아름다운 가락이 흘러나오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이상한 음이 나와 악보를 따라 연주할지라도 원래의 곡을 들려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의 틀은 하나님께서 고유하게 부여하신 질서 잡힌 틀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즉시 그 모든 사물의 질서를 올바르게 돌려놓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진실하게 회개하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때로는 오랜 동안 잘못된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 잡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심으로써 그를 단련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를 지은 저들에 대해 보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꿔진 마음으로 바꿔지지 않은 고통스러운 사물들의 질서를 대하는 과정을 통해 그들의 마음의 틀을 새롭게 회복시키셔서 바로 잡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의 질서를 바로 잡으십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깊이 회개하고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의 빛을 주시며,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 짧은 경험으로 그들의 내면의 질서가 다시 구축된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이것은 외적인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 잡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바치는 헌신, 그리고 하나님의 자극하시는 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외적인 사물들의 질서의 정돈을 포함하지만, 사물들의 질서를 바로잡지 않고는 어떠한 평강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의 평화를 누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평강은 때때로 초자연적입니다. 이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때때로 인간의 모든 지각, 곧 총명이나 이해를 초월합니다. 하나님 밖에서 누리는 평강은 사물들의 질서를 보고 누리게 되는 안정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때때로 그 평강의 근원을 인간의 지혜와 생각으로는 모두 이해할 수 없을 때조차도 누리게 하시는 평강입니다. 평강의 경험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에 대해 확신하게 만들어줍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이러한 초월적 평강이 있었습니다. 이성적 추론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초자연적 성격을 가진 평화였습니다. 레오 톨스토이(Lev Nikolajewitsch Tolstoi)는 자신의 『참회록』속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기둥들이 나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 끝은 구름이 가려 볼 수 없었으나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단단한 기반위에 내가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교회의 사명(使命)이 무엇입니까? 방황하고 흔들리는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교회가 참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아니면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그리고 세상이 너무나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줄을 알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평화 속으로 들어올 때,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평강(平康)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도록 힘쓰십시오. 그러면 이 초자연적인 평강이 여러분들을 붙들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게 되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근심하실 어떠한 일도 꿈꾸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당신이 그 소중한 신적 평강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B. 영광을 얻음

 

둘째로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과의 평화 아래 있을 때, 성도들은 그 평화 안에서 영광을 얻게 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에게 열방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12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 아래 있을 때 성도들이 영광을 얻게 하십니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열방의 영광”은 하나님 없는 세상 왕국이 가지는 그 영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열방의 영광은 모든 열방 속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며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정받게 해주는 그러한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시냇물이 범람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풍족히 누리며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을 오늘 성경은 세 가지로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행복입니다. “그 젖을 빨 것이며”, 여기에서 젖은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양식인 동시에 자신의 어미와의 관계를 확인시켜 주는 행복입니다. 그들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 젖”은 “모든 행복을 위한 완전한 조건과 만족”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분과의 평화를 누릴 때 성도들이 어떠한 행복을 누리는지, 하나님 자녀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행복이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행복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행복은 그들이 얻고자 하는 행복과 같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그들이 동의할 수 없는 것을 인하여 즐거워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상태가 그들이 누리지 못하는 지복의 상태에 있다면 그들은 우리를 그렇게 행복하게 하는 근원에 대하여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의 행복의 이유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친밀함입니다. “옆에 안기며”, 이것은 사랑하는 자를 감싸 안은 연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때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때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과 사랑을 누림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행복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얻게 될 영광입니다. 비천한 여성이 뛰어나고 훌륭한 남성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어찌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영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랑은 곧 연합의 감정이며, 하나님과의 불화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반(離叛)하게 하였던 모든 악한 욕망에 대한 포기로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백성들을 옆에 안으시며,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열방에 자랑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셋째로는 희락입니다.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이는 어린아이가 배부르게 젖을 먹은 후, 부모의 두 손에 안겨 무릎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기쁨의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젖을 빨고 육체의 만족을 얻은 그 아이가 어미의 무릎에서 자유롭게 뛰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교회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이런 희락의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성결의 삶은 기쁨의 삶으로 인도하지만 죄와 불순종은 사람을 외롭게 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고립시키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따돌린 적이 없지만 죄에 대한 사랑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등 돌리게 하고 그 하나님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하나님을 추구하는 공동체를 미워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진실한 성도로부터 소외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희락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등진 사람이 어떻게 기쁨을 누릴 수 있겠으며, 불순종을 고집하는 자들이 어떻게 희락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희락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에게는 없는 그 희락의 자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기쁨을 원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든지,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세상 사람들이든지 누구나 스스로 이런 기쁨 속에서 살기 원하기에, 흔들리지 않는 평강 속에서 이런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야말로 모든 관용하는 삶의 토대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함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비결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교회 안에서 이런 희락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C. 위로를 받음

 

셋째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13절). 예루살렘이 하나님과의 평화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위로를 받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자기 아이 편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 놀던 그 골목길을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들 혹은 동네 형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던 그 시절, 그 골목길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좋은 오락기구도 없고, 책도 변변치 않았던 시대에 우리 어린 시절의 모든 애환은 그 골목에 있었습니다. 잘 어울려 놀다가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친구들과 다투거나 동네 형들에게 구박을 받아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울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우리의 어머니들은 나타나셔서, 우리의 역성을 드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치마폭에 당신의 아들을 감싸고, 행주치마로 그 아이의 눈물을 씻어주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 아이에게는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위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로는 사랑의 관계에서부터 오는 위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 아래 있고, 그 지체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위로를 받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상처받은 자들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의 위로를 구하나 위로받고자 하는 자는 많지만 위로하고자 하는 자는 너무나 소수입니다. 끊임없는 미움과 갈등도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지만 남들과는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 끝없는 무관심은 우리를 더더욱 고립시킵니다. 자신의 행복에 대한 집중과 이기적인 욕망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를 앗아가고, 우리는 점점 하나님과 성도들로부터 고립되어 갑니다. 자기를 잊고 남을 위해 사는 자들은 항상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섬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하는 열심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섬겨주어도 스스로 외롭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는 외로울 수 있으나, 한 사람이라도 진실하게 사랑함으로써 자기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 위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는 그 까리따스의 사랑이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이러한 위로를 받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위로가 필요합니다. 값싼 동정과 연민에서 비롯되는 일시적인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의 회복에서 비롯된 신적인 위로가 필요합니다. 도덕적인 선의(善意)에서 비롯된 인간적 위로도 부분적으로 도움을 줄 때가 있거늘, 진실한 까리따스(caritas)의 사랑에서 비롯된 이 신적인 위로를 성도들 사이에서 함께 교통하며 누릴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 얼마나 달라질까요? 그리고 이러한 위로는 신자 각자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림으로써, 이타적(利他的)인 사랑을 소유함으로써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 아래 있을 때, 모든 성도들은 바로 그 평화 안에서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서로를 따뜻하게 위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바로 그런 생애가 아니었습니까? 그분의 일생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가 위로해주던 날들이었습니다. 또한 하늘로 승천하신 후 제일 먼저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은 보혜사 성령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위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비롯된 위로야말로 하늘에 오르신 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 일을 물려받은 자들입니다. 도대체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고난과 무지, 잘못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분여해주신 모든 자원과 축복을 가지고 우리가 흘러가야 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입니다. 양식이 없어 주린 자의 고통스러운 눈물을 씻겨주며 그들의 빈손에 양식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미움의 칼을 품고 원한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눈물을 씻기며 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허기져 눈물을 흘리는 영혼들에게 이 위로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지만, 찾아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자들에게도 이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하나님의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해양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오래 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품게 하신 그 비전을 이제 바다를 향해서도 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흘러갈 것입니다. 찾아가는 이 없이는 결코 복음을 들을 수 없는 낙도의 주민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줄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는 치료를, 주린 자에게는 양식을, 마음에 한이 맺힌 자들에게는 용서와 사랑을 전할 것입니다. 세상이 할퀴고 간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을 것입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위로받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바다 위에 외롭게 떠있는 작은 섬들 사이 사이를 위로의 복음을 들고 항해하게 될 아름다운 선교선 ‘열린호’의 취항(就航)을 꿈꿉니다.

 

이 민족을 향한 가슴 저리는 눈물과 고통 받는 자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진 성도들이 자신들과 같은 죄인들을 살려주신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선교선에 몸을 싣고 점점이 떠 있는 바다의 그 섬들을 찾아가 그들의 눈물을 씻기고 마음의 슬픔을 덜어주는 그날을 꿈꿉니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가 회복될 때, 그 기쁜 복음의 소식이 먼 섬에까지 전파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렘 31:10). 우리 모두 이런 위로자가 되어 우리의 남은 생애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 아래 있고, 그 평화 아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의 평화로 돌아와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한때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지만,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참회함으로써 그분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더 뛰어난 사랑으로 이렇게 이웃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D. 승리를 거둠

 

넷째로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14절).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 아래 있을 때 성도들은 이러한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승리는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강림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불순종과 죄로 인하여 어그러진 질서 속에서 신음하는 경건한 사람들을 위하여 주님이 친히 강림하시기를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사 64:1-2).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 자신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느 순간에도 모든 승리를 가져오는 힘과 자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모든 힘과 능력과 자원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대적들에게 승리하는 그 방식에 대하여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여기서 여호와의 손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의 종들에게 부어질 때 그들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약한 자 같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강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하십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릴 때 성도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주시는 승리의 감격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평화를 누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렇게 승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운명에 매여 사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내 편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싸워 이기기에 너무 큰 대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를 에워 싼 대적들의 수가 아닙니다.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점과 흠이 없이 능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 평화 속에서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고 외칠 수 있는 자들은 이미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주고서라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사십시오. 그것 없이는 여러분들의 인생은 끊임없는 패배의 연속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도록 이 공동체적 마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애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삶에 공을 들이십시오. 그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IV. 결론: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하심

 

이러한 모든 평화의 유익을 어디서 누리게 되는 지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13).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유익을 예루살렘에서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공의가 횃불처럼 타오르기를 기도할 것이라고 단언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의 영광은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타날 이스라엘의 영광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통해 예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교회에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 오늘의 교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축복의 상태에 있는지에 대한 여부도 이 세상의 상태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설교단은 세상의 뱃머리다”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을 앞둔 도성 한 가운데는 잠들어있는 교회가 있고, 잠든 교회 한 복판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줄 수 없는 불 꺼진 설교단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병들어도 교회가 살아있는 한 세상은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지키십니다. 원수와 같은 세상의 핍박이 교회를 무너뜨린 적은 없었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파괴되기도 하고 다시 세워지기도 하였으나,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영영히 서왔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들은 옷 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 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사 51:8).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상태보다 예루살렘의 상태에 대해 더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언젠가 하나님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한 삶인지, 아니면 그 평화를 헤친 삶인지는 각자 행한 대로 하나님 앞에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도록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자신의 영혼을 위한 일인 것처럼 신명을 바치십시오. 그리하여 교회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하고, 여러분들은 이 평화 안에서 모든 유익을 누리며 사십시오. 이 모든 일들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선지자처럼 마음을 모아 교회를 통해 회복될 무궁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꿈꾸며, 거룩한 전망을 가지고 날마다 이기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호 2:5-7)”을 듣고 실천 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로하실 때 누리는 교회의 두 가지 유익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누림에 있어서의 공동체적 성격에 대해 나누어 봅시다.
3. 예루살렘이 하나님과의 평화 아래 있을 때, 성도들이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누리게 되는 네 가지 특권에 대해 말해 봅시다.
4. 우리가 얼마나 실패에 익숙한 자들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반복해서 실패하는 실제적인 원인들을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를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 봅시다.
5. 성도는 이중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경주하여야 합니다.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개인과 하나님과의 평화가 그것인데,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거나 유지하는데 있어 교회 생활의 중요성에 대해 서로의 간증을 나누어 봅시다. 200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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