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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8: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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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6.9.14 http://www.nosuchjesus.com |
참 용서(2)-머리로 사랑하라.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
한 사람에 대해 동일한 잘못을 일흔 번씩 용서하고 또 그런 일을 일곱 번까지 한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의의 기준을 말씀하셨는데 모든 인간이 그럴 수 없는 불쌍한 존재이니 더더욱 서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의도적으로 구분해 말씀하셨지만 그 횟수를 채우라는 것보다는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덕목인 용서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용서를 하지 말라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끝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사랑하라는 것이며 또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그런 용서를 하기위해 정말 하나님 같은 사랑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용서란 물론 반드시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용서 외에 다른 측면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용서보다 더 포괄적이며 용서는 사랑의 한 특성이 겉으로 들어난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인 용서가 불가능하다면 전체적인 것인 사랑을 먼저 하겠다는 것은 더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똑 같이 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같은 사랑을 해보려 노력마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예수님을 조금씩이라도 닮아가는 것이지 완전히 그분과 같아질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같은 사랑이 안 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 주위 사람 모두 사랑 못했다고 해서 낙망하지 말고 아무리 적어 보이는 사랑이라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은 소자에게 잘해야 하고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한 것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려면 그 잘못은 당연히 아주 작은 것입니다. 서로 간에 상처가 크고 피해가 많은 잘못이라면 일흔 번씩 용서해주려 해도 현실적으로 이미 둘 다 완전히 탈진했거나 죽어 없어졌을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선 큰 잘못은 빨리 체념할 수 있지만 사소한 잘못은 감정을 더 자극해 아주 성가시게 만듭니다. 인간이란 자체가 그리 통이 넓지 못한 존재일 뿐 아니라, 잘못이 작으니까 상대가 충분히 고칠 수 있을 텐데도 고치지 않는다고 생각되니 용서하기가 더 힘듭니다.
또 사소한 잘못을 자주 범하는 자라면 바로 자기 주위에 아주 가까운 사람입니다. 사이가 가깝지 않다면 최소한 매일 만나 일을 같이 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용서하기 힘듭니다. 부하 직원의 잘못을 일흔 번씩 용서하려면 그 부서는 차라리 벌써 폐쇄하는 편이 낫고, 자식을 일흔 번씩 용서하려면 그 자식은 벌써 소년원에 수시로 들락거려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그것도 자기와 가까운 사람인데도 너무나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데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잘못을 범한 자를 쉽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당신 특유의 방식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무한정, 무조건, 무제한으로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좋아해주는 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손자가 할아버지 무릎에 올라가 아무리 수염을 잡아 당겨도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손자가 수염을 일흔 번씩 당겼는데 화를 안 낼 할아버지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일흔 번씩 동일한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화를 안 내겠습니까? 실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수도 없이 화를 내었고 예수님도 바리새인을 저주까지 했지 않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자꾸만 연애할 때에 이성 상대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려고 합니다. 만약 사랑의 본질이 그런 것이라면 일흔 번씩 일곱 번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본질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상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입니다. 상대를 미워한다는 것은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질투와 분노가 생기는 것은 미련이 남아 있어서 어떻게 하든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다시 받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입니다. 이상하게도 정말 싫어지면 질투나 분노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하든 또 다른 상대를 만나든 말든 아예 무신경해지면 진짜 싫어진 증거입니다. 관심이 아예 끊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면 사랑은 그것의 반대 바로 관심입니다.
신자나 목회자나 사랑에 대한 이런 본질을 미처 생각 못하니까 필연적으로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살펴 본대로 감정적으로 사랑해보려는 것입니다. 잘못을 범한 상대를 좋아하려 해보아야 헛일입니다. 둘째 잘못은 감정적으로 좋아지지 않으니까 이제는 의지적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 상대적 효과에 그칩니다. 요컨대 의지적 사랑도 상대 나름이지 아무리 노력하려 해도 아예 쳐다보기조차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두 인격체가 서로 간에 자신의 인격 전부를 거는 행위입니다. 사랑에는 인간 내면의 지정의(知情意) 세 측면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일차적으로 외부적 자극에 대내 나타나는 자연스럽고도 본성적인 반응입니다. 일단 싫으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 죄라거나 나쁘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지성은 외부 자극을 분석해서 판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감정과는 별개로 냉정해져야 합니다. 감정이 인간을 속이려드는 이면의 세계를 파헤쳐 내는 것이 바로 이 지성입니다. 말하자면 믿음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나 사단의 방해를 구별하는 역할은 머리가 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머리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머리가 따르지 않고 가슴으로 믿는 믿음은 그야말로 up-and-down이 심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해 주기 위해선 지성으로 상대를 아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지는 지성이 분석하여 판단한 대응책을 지속적으로 실행하려는 힘입니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사랑하기 힘드니까 그 다음에 바로 의지적으로 사랑하라고 하면 그 중간에 있는 지성적 판단을 생략하라는 뜻이 됩니다. 논리적으로나, 인간의 본성으로나 말이 안 되며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말로 상대를 지성을 동원해서 분석하고 알아가는 단계 즉 관심을 두는 상태를 빼버리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관심인데 사랑 자체를 하지 말라는 말과 같아집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에도 어떻게 합니까?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무엇인지 등을 일일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지식을 갖고 그에 맞게 의지적으로 반응해 가는 것이 사랑의 행위 아닙니까? 사랑이란 한 마디로 상대를 알아가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소한 잘못을 자기에게 하더라도 평생을 두고 상대를 하나씩 알아가지 않으면 사랑도 용서도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지적으로 용서하면 사랑이 자동으로 생길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용서 자체에 그런 능력이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셔서 사랑이 생기게 합니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여전히 죄인이라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나, 특별히 누구에게나 의지를 동원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를 동원할 부분은 오히려 사랑이나, 용서가 아니라 상대를 알아가고자 하는 열심을 내는 부분이어야 합니다. 자꾸 관심이 멀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의지를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관심이 생겨야 사랑이 되고 또 사랑이 되어야 용서가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고 항상 지켜봐 주십니다. 우리의 출입을 지키며 우리가 땅 끝이나 하늘 끝에 가 있을 지라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외면, 배반, 저주하며 원수 된 자리에 있을 때에도 우리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에게 사랑할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기에 대신에 관심을 가져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한없는 긍휼을 가진 것은 맞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무제한적인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진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속속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셨고 에덴에서 타락할 때부터 시작해서 골고다 언덕에 있었던 우리까지 다 아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체질이 얼마나 진토 같으며 죄에 찌들어 정말 버러지보다 못한 존재임을 아십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분의 마음에 심히 흡족해 했던 존재였는데도 사단과 죄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아시기에 한없는 긍휼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이며 또 바로 그것이 그분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상대를 사랑해서 평생을 두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려면 뭔가 사랑스런 구석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에게 우리가 너무나 불쌍한 존재라는 한 가지 이유라도 있었듯이 말입니다. 아니 평생을 할 수 있는 사랑은커녕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용서하려면 뭔가 용서할 건더기가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내가 발견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건더기가 감정이나 의지를 동원해서 붙잡아질 수 있습니까? 지성을 동원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지푸라기 같이 작은 건더기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사랑은 가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머리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사랑은 가슴으로 먼저 온 후에 머리가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입니다. 대신에 머리는 그 사랑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 잃어버린 사랑을 되돌리는 것도 머리가 하지 가슴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용서란 바로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일흔 번씩 용서하려면 가슴에 이미 수도 없이 멍이 든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가슴에 먼저 오는 사랑의 첫 단계로는 아예 되돌아 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멀리 지나쳤습니다. 그것을 자꾸 가슴으로 용서하려 해봐야 힘만 들뿐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야 용서가 될지 머리로 분석해 찾아내어야 합니다. 의지는 지성으로 분석하는 일에, 말하자면 절대로 상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히는데 동원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구실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찾고 또 찾으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뜻입니다.
당신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를 지금 바로 사랑하려 하지 마십시오. 용서도 할 수 있으면 좋지만 바로 하려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십시오. 그런데 그 전에 꼭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과연 내가 그 사람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진정한 마음이 있는지, 만약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에게 그 마음부터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후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으면 반드시 용서할 수 있는 선하고도 분명한 이유와 더불어 사랑스런 부분까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9/1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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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
한 사람에 대해 동일한 잘못을 일흔 번씩 용서하고 또 그런 일을 일곱 번까지 한다는 것은 사실상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의의 기준을 말씀하셨는데 모든 인간이 그럴 수 없는 불쌍한 존재이니 더더욱 서로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의도적으로 구분해 말씀하셨지만 그 횟수를 채우라는 것보다는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덕목인 용서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용서를 하지 말라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끝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사랑하라는 것이며 또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그런 용서를 하기위해 정말 하나님 같은 사랑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용서란 물론 반드시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랑에는 용서 외에 다른 측면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용서보다 더 포괄적이며 용서는 사랑의 한 특성이 겉으로 들어난 것입니다. 부분적인 것인 용서가 불가능하다면 전체적인 것인 사랑을 먼저 하겠다는 것은 더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똑 같이 할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같은 사랑을 해보려 노력마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예수님을 조금씩이라도 닮아가는 것이지 완전히 그분과 같아질 수는 결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같은 사랑이 안 된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죄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 주위 사람 모두 사랑 못했다고 해서 낙망하지 말고 아무리 적어 보이는 사랑이라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은 소자에게 잘해야 하고 적은 일에 충성하라고 한 것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려면 그 잘못은 당연히 아주 작은 것입니다. 서로 간에 상처가 크고 피해가 많은 잘못이라면 일흔 번씩 용서해주려 해도 현실적으로 이미 둘 다 완전히 탈진했거나 죽어 없어졌을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선 큰 잘못은 빨리 체념할 수 있지만 사소한 잘못은 감정을 더 자극해 아주 성가시게 만듭니다. 인간이란 자체가 그리 통이 넓지 못한 존재일 뿐 아니라, 잘못이 작으니까 상대가 충분히 고칠 수 있을 텐데도 고치지 않는다고 생각되니 용서하기가 더 힘듭니다.
또 사소한 잘못을 자주 범하는 자라면 바로 자기 주위에 아주 가까운 사람입니다. 사이가 가깝지 않다면 최소한 매일 만나 일을 같이 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용서하기 힘듭니다. 부하 직원의 잘못을 일흔 번씩 용서하려면 그 부서는 차라리 벌써 폐쇄하는 편이 낫고, 자식을 일흔 번씩 용서하려면 그 자식은 벌써 소년원에 수시로 들락거려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그것도 자기와 가까운 사람인데도 너무나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데에 있습니다. 맞습니다. 잘못을 범한 자를 쉽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당신 특유의 방식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무한정, 무조건, 무제한으로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좋아해주는 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손자가 할아버지 무릎에 올라가 아무리 수염을 잡아 당겨도 화를 내지 않은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손자가 수염을 일흔 번씩 당겼는데 화를 안 낼 할아버지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일흔 번씩 동일한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이 화를 안 내겠습니까? 실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수도 없이 화를 내었고 예수님도 바리새인을 저주까지 했지 않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자꾸만 연애할 때에 이성 상대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려고 합니다. 만약 사랑의 본질이 그런 것이라면 일흔 번씩 일곱 번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천하의 바람둥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본질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상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입니다. 상대를 미워한다는 것은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질투와 분노가 생기는 것은 미련이 남아 있어서 어떻게 하든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다시 받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입니다. 이상하게도 정말 싫어지면 질투나 분노가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하든 또 다른 상대를 만나든 말든 아예 무신경해지면 진짜 싫어진 증거입니다. 관심이 아예 끊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의 반대가 무관심이라면 사랑은 그것의 반대 바로 관심입니다.
신자나 목회자나 사랑에 대한 이런 본질을 미처 생각 못하니까 필연적으로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살펴 본대로 감정적으로 사랑해보려는 것입니다. 잘못을 범한 상대를 좋아하려 해보아야 헛일입니다. 둘째 잘못은 감정적으로 좋아지지 않으니까 이제는 의지적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 상대적 효과에 그칩니다. 요컨대 의지적 사랑도 상대 나름이지 아무리 노력하려 해도 아예 쳐다보기조차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두 인격체가 서로 간에 자신의 인격 전부를 거는 행위입니다. 사랑에는 인간 내면의 지정의(知情意) 세 측면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은 일차적으로 외부적 자극에 대내 나타나는 자연스럽고도 본성적인 반응입니다. 일단 싫으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 죄라거나 나쁘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지성은 외부 자극을 분석해서 판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감정과는 별개로 냉정해져야 합니다. 감정이 인간을 속이려드는 이면의 세계를 파헤쳐 내는 것이 바로 이 지성입니다. 말하자면 믿음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나 사단의 방해를 구별하는 역할은 머리가 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머리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머리가 따르지 않고 가슴으로 믿는 믿음은 그야말로 up-and-down이 심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해 주기 위해선 지성으로 상대를 아주 냉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지는 지성이 분석하여 판단한 대응책을 지속적으로 실행하려는 힘입니다. 그런데 감정적으로 사랑하기 힘드니까 그 다음에 바로 의지적으로 사랑하라고 하면 그 중간에 있는 지성적 판단을 생략하라는 뜻이 됩니다. 논리적으로나, 인간의 본성으로나 말이 안 되며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말로 상대를 지성을 동원해서 분석하고 알아가는 단계 즉 관심을 두는 상태를 빼버리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본질이 관심인데 사랑 자체를 하지 말라는 말과 같아집니다.
남녀가 연애할 때에도 어떻게 합니까?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무엇인지 등을 일일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지식을 갖고 그에 맞게 의지적으로 반응해 가는 것이 사랑의 행위 아닙니까? 사랑이란 한 마디로 상대를 알아가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소한 잘못을 자기에게 하더라도 평생을 두고 상대를 하나씩 알아가지 않으면 사랑도 용서도 결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지적으로 용서하면 사랑이 자동으로 생길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용서 자체에 그런 능력이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셔서 사랑이 생기게 합니다. 그러나 항상 문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여전히 죄인이라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나, 특별히 누구에게나 의지를 동원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를 동원할 부분은 오히려 사랑이나, 용서가 아니라 상대를 알아가고자 하는 열심을 내는 부분이어야 합니다. 자꾸 관심이 멀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의지를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관심이 생겨야 사랑이 되고 또 사랑이 되어야 용서가 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되었고 침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름을 손바닥에 새기고 항상 지켜봐 주십니다. 우리의 출입을 지키며 우리가 땅 끝이나 하늘 끝에 가 있을 지라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신을 외면, 배반, 저주하며 원수 된 자리에 있을 때에도 우리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우리에게 사랑할 구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기에 대신에 관심을 가져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한없는 긍휼을 가진 것은 맞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무제한적인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진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속속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셨고 에덴에서 타락할 때부터 시작해서 골고다 언덕에 있었던 우리까지 다 아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체질이 얼마나 진토 같으며 죄에 찌들어 정말 버러지보다 못한 존재임을 아십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분의 마음에 심히 흡족해 했던 존재였는데도 사단과 죄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아시기에 한없는 긍휼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이며 또 바로 그것이 그분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상대를 사랑해서 평생을 두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려면 뭔가 사랑스런 구석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에게 우리가 너무나 불쌍한 존재라는 한 가지 이유라도 있었듯이 말입니다. 아니 평생을 할 수 있는 사랑은커녕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용서하려면 뭔가 용서할 건더기가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을 내가 발견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건더기가 감정이나 의지를 동원해서 붙잡아질 수 있습니까? 지성을 동원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지푸라기 같이 작은 건더기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사랑은 가슴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머리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사랑은 가슴으로 먼저 온 후에 머리가 따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입니다. 대신에 머리는 그 사랑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또 잃어버린 사랑을 되돌리는 것도 머리가 하지 가슴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용서란 바로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일흔 번씩 용서하려면 가슴에 이미 수도 없이 멍이 든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가슴에 먼저 오는 사랑의 첫 단계로는 아예 되돌아 갈 수조차 없을 정도로 멀리 지나쳤습니다. 그것을 자꾸 가슴으로 용서하려 해봐야 힘만 들뿐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야 용서가 될지 머리로 분석해 찾아내어야 합니다. 의지는 지성으로 분석하는 일에, 말하자면 절대로 상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히는데 동원되어야 합니다.
용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구실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찾고 또 찾으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뜻입니다.
당신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를 지금 바로 사랑하려 하지 마십시오. 용서도 할 수 있으면 좋지만 바로 하려하지 마십시오. 대신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십시오. 그런데 그 전에 꼭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과연 내가 그 사람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진정한 마음이 있는지, 만약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에게 그 마음부터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후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으면 반드시 용서할 수 있는 선하고도 분명한 이유와 더불어 사랑스런 부분까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9/1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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