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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3: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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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서해원 목사 |
참고 : | 대광교회 |
화목한 형제
본문: 창 33:1-11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에 ‘시가 나오야’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73년에 세상을 떠난 이 사람은 일본에서 ‘소설의 신’으로 불릴 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이 사람의 대표적인 작품가운데 ‘화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 일본사람의 손에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책입니다. 이 소설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작가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면서 아버지와 심한 불화를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극적으로 화해가 되면서 그때의 심경을 소설로 잘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대립과 반목과 갈등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싸움을 하지 않는 곳이 아니라 화해하는 곳이다.”
화해는 인간 삶에 가장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물론 싸우지 않는 것이 더 좋게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곳에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보기 좋은 모습이 화해입니다. 마음을 풀고, 용서하고, 부둥켜안고 울면서 과거를 푸는 것이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파란만장한 야곱의 생애에 가장 감동적인 장면중의 하나입니다. 야곱은 형을 속여 장자 권을 빼앗았습니다. 이 일로 가정은 어려워졌고, 형제는 서로 대립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20년 동안 고향을 떠나게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야곱이 고향을 찾아오는데, 고향 땅을 밟으면서 제일 먼저 보여준 감동의 사건이 바로 ‘화해’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 정말 멋진 광경 아닙니까?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읽고 또 읽을 때마다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는 장면입니다. 화해가 바로 그런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이런 화해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합니다. 분명 형은 20년 동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욱 옛날 일을 생각하며 화가 치밀어 오고 있었습니다. 32장 초반에 보면, 야곱이 형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화해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순간에 화해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화해는 저절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반드시 방법과 통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소위 ‘얍복강 사건’입니다. 야곱의 생애에 평생 잊지 못할 곳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을 건넌 뒤에야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해라는 결과에 오기까지 야곱이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얍복강 사건은 한마디로 야곱이 엄청나게 달라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의 생애는 얍복강을 중심으로 전과 후로 나누어집니다. 고생고생 하면서 성공도 하고, 많은 축복도 받았지만, 새사람으로 바뀌는 이 사건 없이 야곱은 결코 야곱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야곱 인생을 진정한 승리로 이끌었고, 당장 눈앞에 닥친 형과의 화해도 극적으로 이루게 된 것입니다. 과연 얍복강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도대체 뭐가 달라졌을까요?
우선,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얍복강 이전에 그는 야곱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이름이 바뀝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집니다. 야곱의 이름은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 싸워 이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길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이제부터 하나님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고, 뗄 수 없는 관계, 하나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후부터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야곱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둘째,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야곱이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한 곳은 ‘얍복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생애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가 머무는 모든 현장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생각의 전환입니다. 그 이후 야곱은 그가 가는 곳, 머무는 어떤 현장이든지 그곳을 브니엘로 생각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곳으로 알았습니다. 본문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야곱이 형을 만나는 곳도 분명 가나안의 어느 한 장소인데, 야곱은 그곳을 브니엘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곳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형과의 화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던 것입니다.
셋째, 말이 바뀌었습니다. 형을 만나 그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달라졌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말입니다. 5절, 8절, 10절, 그리고 11절입니다. 그는 정말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입에는 ‘은혜’를 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면서 은혜를 경험한 자의 귀한 모습을 말로서 표현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특히 말이 달라진 부분은 10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습니다” 얼마나 듣기 좋고, 보기 좋고, 감동적인 언어입니까? 이런 말을 하는데도 칼을 들이댈 사람은 아마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말의 감동을 받으면 마음이 풀어지는 법입니다. 이것이 말의 힘입니다. 속담처럼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습니다. 반대로 말 한마디로 평생 원수가 됩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넷째, 행동도 바뀌었습니다. 3절에 보면 형을 만난 뒤 그가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합니다. 그것도 일곱 번 반복합니다. 보통 이렇게 엎드려 절하는 것은 부모나 어른에게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형에게 이렇게 절하고 있습니다. 말이 형이지 쌍둥인데, 그것도 몇 초 사이의 형인데, 우리 같으면 그런 형에게 엎드려 절하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아주 깍듯이 대합니다. 그것도 일곱 번 절합니다. 보통 달라진 모습이 아닙니다. 이 행동은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그의 행동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습이 흘러 넘칩니다. 은혜를 아는 자의 겸손함이 행동에 베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라도 고개를 숙이며 존중하고, 엎드려 절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아래 사람을 적당히 무시하고, 비슷한 사람을 경쟁상대로 보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야곱을 보면서 형은 그야말로 감동한 것입니다. 분노가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그것을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실제 몸이 달라졌습니다. 얍복강에서 그가 은혜를 체험한 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되었습니다. 환도는 원래 군복에 갖추어 차던 군도(軍刀)를 말합니다. 그것을 허리에 차기 때문에 허리의 뼈를 환도 뼈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곱은 허리가 부러졌습니다. 허리는 몸의 중심입니다. 그 중요한 허리를 다쳤습니다. 그 이후 야곱은 제대로 서지도 못했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꼭 하나님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왕 은혜를 주시려면 얼굴에 광채를 나게 한다든지, 말의 위엄을 주든지, 삼손처럼 강한 힘을 주시든지 하는 것이 우리가 볼 때는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도 뼈를 부러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것이 결정적으로 형의 마음을 돌리게 했던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항상 선을 이루고,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닐고 올 때 어떤 동생의 모습을 상상했겠습니까? 아마 금의환향하며 성공한 야곱을 연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 앞에서 거드름피우는 모습입니다. 좋은 옷을 입고, 보란 듯이 성공한 자의 오만함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자기 앞에 나타난 야곱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동생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밤새 한잠도 못 자서 머리는 헝클어졌습니다. 이리저리 뒹구느라고 옷도 더러웠습니다. 게다가 허리는 구부정하고, 다리는 고통스럽게 절고 있습니다. 이것이 형에게 비친 동생의 첫 모습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형의 마음이 녹아진 것입니다. 그런 야곱을 보면서 형은 어릴 때 함께 놀던 생각이 왜 나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혈육의 정입니다. 하나님은 당시 야곱의 몸을 망가트렸지만, 그것이 오히려 에서와 화해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이고, 엄청난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얍복강을 건넌 후에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이름이 바뀌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말이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지고, 사람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고스란히 연결되어 화해의 현장까지 가는 것입니다. 화해는 그냥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달라짐 속에서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달라짐을 신앙적으로는 은혜를 체험한 것으로 말합니다. 인격적으로는 인격과 체질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상담학적으로는 내적 치유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이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 뒤에 얍복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형을 만납니다. 거기에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을 감동적으로 연출하게 된 것입니다.
화해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감격의 현장입니다. 가정에서 형제끼리 화목한 것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부부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고, 시부모와 며느리가 화목하게 사는 것보다 더 큰 가정의 축복이 없습니다. 화목은 교회에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된 우리가 서로 존중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목한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전도의 방법이 없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또한 화목은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요즘과 같이 다툼과 갈등이 있는 사회에 화목보다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전쟁과 테러가 그치지 않는 세계에 평화보다 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모든 인간은 화해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화해를 우리가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떻게’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경험한 얍복강의 사건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 사건이 우리 삶에 다시 재현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 가정이 화목하기를 원하십니까? 이제 우리가 야곱에게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새로운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냥 모두가 가진 일반적인 이름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믿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입니다. 주님처럼 살기를 결심하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보였던 가장 귀한 삶의 모습은 ‘화평’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화목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 던졌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제자라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화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가, 나의 이름이 그리스도인가를 확인하는 길은 화평케 하는 자인가를 보면 압니다. 나는 화평케 하는 자, peace maker입니까, 아니면 treble maker 입니까?
다툼이 있고, 화해가 안될 때마다 하나님이 지금 거기에 계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곳이 바로 ‘브니엘’ 입니다.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드릴 때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머무는 모든 곳이 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싸우려고 할 때마다, 거친 호흡으로 상처를 줄 때마다, 분노가 치밀 때마다, 지금 바로 그 현장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말과 행동을 보신다고 느껴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툼이 사라지게 되고, 혹 있더라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다투면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근심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 번 십자가에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를 대해 보십시오. 자녀와 부모를 대하고, 형제를 대하여 보십시오.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결국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면 말과 행동이 바뀝니다. 이제 우리의 인격과 체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은혜의 도가니에 들어가야 하고, 내적 치유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화목을 모르지 않습니다. 싸움이 추하고, 미움이 얼마나 괴로운가를 압니다.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내가 달라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인생에 꼭 한번 얍복강을 건너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벧엘의 체험도 중요하고, 하란에서의 축복을 누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얍복강을 체험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판단해 보십시오. 얍복강을 건넜습니까, 얍복강에 이르렀습니까, 아니면 얍복강과는 관계가 없습니까?
이제 오늘로서 가정의 달을 마감합니다. 지난 한달 동안 야곱의 생애를 통해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을 살펴보았습니다. 소중한 자녀, 든든한 부모, 확실한 멘토, 행복한 부부, 그리고 화목한 형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두를 통틀어 무엇보다도 ‘화목’입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가정에 날마다 순간마다 평화와 화목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늘 야곱이 경험했던 얍복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생애를 더욱 아름답고 귀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대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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