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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

마태복음 박신 목사............... 조회 수 2292 추천 수 0 2012.06.02 23: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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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2:37-40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2006.10.3 http://www.nosuchjesus.com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은 부활 때에 계대결혼이 어떻게 되느냐는 논쟁을 제기했던 사두개인들로 아예 대답할 수 없게끔 만드셨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율법사가 이번에는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가 물었습니다. 수많은 구전적, 성문적 계명에 능통한 그로선 계명에 관한한 어떤 논쟁을 벌여도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누가 더 계명을 많이 아는지 겨뤄보거나 정말 어느 것이 큰지 궁금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의하여 예수님에게 올무를 걸려고 물었습니다.(35절)

마가복음의 평행 기사(12:28)에 따르면 단순히 큰 계명 대신에 “첫 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은 마치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한테 1 더하기 1은 무엇인가 물은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로선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쉐마’(신 6:4,5)가 가장 큰 계명인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쉐마’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유대인은 몰라도 예수님이 ‘쉐마’가 가장 크다고 대답하면 바리새인의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 왜 하나님께 벌 받은 죄인, 세리, 이방인, 문둥병자들과 교제하는지 예수님께 따질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큰 계명을 아는지 물어본 것이 아니라 알면서 왜 실천하지 않는지 문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절묘합니다. 하나님 사랑만 대답한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도 함께 대답했습니다. 그것도 “둘째는 그(첫째)와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그 중요도에 있어서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과 세리와 교제한다고 너희가 나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 하지 않는 사람으로 몰아가려 작정을 한 모양인데, 오히려 내가 너희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율법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나그네, 이방인, 과부, 고아 같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너희야말로 그런 이웃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느냐?”

바리새인들로선 분명 율법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다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이 첫째며 이웃 사랑이 둘째라고 확실하게 구분했기 때문에 도저히 반발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반발을 하던 예수님을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자로 몰려다 도리어 자기들이 그렇다고 자인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다시 바리새인도 대답을 못하게 했습니다.      

신자라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한 크기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할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똑 같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작은 자로 취급당하는 자들에게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첫째, 둘째로 구분했듯이 그 순서는 확실히 해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흔히 목사님들이 권면하듯이 세상 일과 교회 일 중에 후자를 먼저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컨대 이웃에 죽어가는 환자가 있는데도 예배시간이 다 되었다고 외면하고 교회부터 가선 안 됩니다. 또 자녀가 힘든 일로 아주 괴로워하고 있는데 같이 붙들고 위로하며 기도해주기 보다는 구역모임 시간이 되었다고 외출해선 안 됩니다.

세상 일과 하나님 일 중에선 당연히 후자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일과 종교적 일과는 별개입니다. 하나님 일은 다 종교적일 수 있지만 종교적일이라고 해서 전부 하나님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가축부터 건지라고 했습니다.(눅 14:5)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면 종교적 일이 되어버리지만 안식일에도 생명을 귀하게 여겨 가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하나님 사랑부터 하라는 의미는 자신의 근본을 어디에  두느냐는 차원입니다. 신자의 존재, 삶, 인생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렸고 또 그 근본에서부터 모든 생각, 말, 행동이 근거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히 이웃도 사랑할 수 있지만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근본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그로부터 나오는 다른 모든 것도 당연히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은 도덕, 종교, 사상, 심지어 체면, 자존심, 가식, 이해관계, 자기 자랑 등에도 얼마든지 바탕을 둘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사랑이 신앙의 본질이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그 크기나 순수성의 차이 때문에 순서를 나눈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에 크기나 순수성에 차이가 나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 자체에는 순서가 없고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순서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신앙은 사랑에 근거하는 아니라 그 사랑을 바칠 대상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랑이 그 결과로 따라 나와야 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신자로 만들고 사랑은 그가 신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진실임을 믿으나 사랑은 그 신앙이 진실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에게는 신앙을 바쳐야 하고 이웃에게는 사랑을 바쳐야 합니다.  신앙이 자신이 하나님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사랑은 이웃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우리를 완전히 내워준다는 의미가 가진 것 다 팔아서 구제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웃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주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 죄와 허물로 인해 차별 대우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 아무도 상대하지 않던 죄인, 세리, 창녀 등을 어떤 차별도 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다 받아주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최소한 이웃을 차별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 둘 다 사랑하려 들면 오히려 이웃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두 가지  대상을 전심을 가지고 사랑할 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한분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기에도 모자라는 사랑을 이웃과 나누려니 그렇습니다. 이웃은 자신이 직접 사랑하려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한 것이 하나님 사랑을 세상으로 나눠지게 하는 통로로 삼았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가 지금 바리새인 같은 위치에 서 있지나 않은지요? 말씀에는 빠르되 그 실천에는 느린 것이 아닐까요? 또는 그 실천에는 아주 열심을 내지만 혹시 그 안에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자꾸 이웃을 온전히 사랑해야겠다고 덤비지 말고 대신에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가운데 자신의 전부를 맡기십시오. 그러면 첫째 둘째 순서와도 상관없이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을 통해 주위에 아무런 차별 없이 전할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온 강령이 하나님과 이웃 사랑 둘에 있지만 그 둘은 사실 골고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0/3/2006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아인슈타인이 인생 말년에 "전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해졌는데도 아직도 외롭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물론 그 일차적 의미는 인생에서 돈과 명예와 권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인생을 스스로 되돌아 봐도 완전히 성공한 인생을 살지 못했고 여전히 뭔가 부족한 부분이 남아 있더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반드시 고상한 도덕을 실천하고 심오한 사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프리카의 성자라고까지 불리었던 신학자이자 의사인 슈바이처는 실상은 아주 냉혹한 의사로서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성공이 과학이라는 한정된 분야였듯이 그 또한 선을 실천했다는 부분을 빼고는 성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인간 사회에선 범인들은 상상도 못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여자를 수도 없이 사귄 플레이보이로 판명 났습니다. 그럼에도 인생에서 가장 아쉬워했던 부분이 무엇이었습니까? 외롭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는 혼자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기가 사랑할 대상도 없었고 또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 해주는 상대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외로움이란 인간 존재의 가장 심층적인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고독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하나님만 잘 믿으면 그 외로움이 없어지고 충만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담은 범죄 하기 전 역사상 어느 누구도 체험 못한 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동행을 체험했던 자였습니다. 그런 아담도 그것도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외로웠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외에 인간끼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그 사랑이 없으면 외로워지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외로움을 없애려면 하나님 사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웃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서 그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들어 함께 살며 서로 사랑하게 했습니다.

다른 말로 아담과 이브는 타락하기 전까지는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유일하게 인간이 고독과는 전혀 관계없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들 각자가 하나님과, 또 서로 간에도 진정한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거벗었으나 서로가 서로에게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범죄 하자마자 바로 서로 손가락질 하며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각자가 자기 살 방도부터 먼저 챙겼습니다. 자기에게 속한 것을 따로 움켜쥐려는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 사이에 감출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서로를 완전히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죄란 이처럼 자기의 것으로 자기를 둘러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은 있을 수 없으며 또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외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타락 후의 모든 인간에게 고독은 생래적인 영원한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려면 그 근본적인 외로움을 없애주어야 합니다. 도덕적 죄를 짓지 않고, 선행을 열심히 하고, 철학적 사고를 깊이 있게 하며, 과학적 업적을 많이 쌓아도 인간은 여전히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있기에 그 교제를 회복하지 않고는 절대로 외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죄가 인간으로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을 못하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완전한 사랑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자리인 십자가에 스스로 오르셨습니다. 삼년간 동고동락하며 인간적 사랑을 가장 깊이 나눴던 제자들마저 외면했던 그 외로운 자리에서 인간의 고독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켜 생래적 고독의 첫 번째 원인을 제거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한 죄와 그로부터 생긴 인간 사회의 온갖 죄악도 깨끗이 씻어주셔서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지옥의 형벌로 떨어질 심판에선 구원이 되었지만 또 다른 고독은 해결 안 된 채 구원 받은 신자의 책임으로 넘겨졌습니다.  

바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동료 인간을 사랑 못해 외로웠던, 즉 죄와 상관없이 생긴 고독의 문제는 신자더러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해도 외로워지는 문제는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없어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자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룰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웃 사랑의 모습을 아담과 이브의 예처럼 부부 간의 사랑에서부터 찾으려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신적인 결합이자, 최초의 교회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더불어 아내도, 아내와 더불어 남편도 천국 가는 그날까지 하나님과 완전한 동행을 이루어야 합니다. 또 그런 사랑의 결합이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도 되어야 합니다.  

간혹 구조적으로 가정을 못 갖는 불행한 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휠체어 탄 핸디캡 여인이 목사님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저는 너무 외롭습니다. 저는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를 만나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동행을 이루었어도 이웃과 사랑을 나누지 못하니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회복시켰습니다. 이제 이웃끼리 사랑은 신자가 회복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있는 증거는 자신의 인생이 외롭게 여겨지는지 아닌지 여부입니다. 신자니까 하나님은 당연히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이웃이 자신에게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진정한 사랑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숨기는 것 하나 없이 벌거벗어도 서로 간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지 자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럴만한 가족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외로움에 떨고 있는 불신자나 핸디캡을 이웃으로 알고 지냅니까?

외로움은 반드시 외로운 자들끼리 만나야만 없어지는 법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으면 인간이 한 없이 고독해지는 존재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은 자라야 그 고독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상쇄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이웃들의 그런 외로움을 덜어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면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완전하게 성공한 인생을 살려는 소망을 키우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0/4/2006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입니다. 동료 예술가와 심한 싸움을 한 후에 그 동료가 너무 미워서 유다의 얼굴을 그 사람으로 그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가장 먼저 신나게 그렸는데 누가 봐도 그 동료인줄 알 정도로 잘 그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 차례가 되자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윤곽조차 잡히지 않았고 대신에 뭔가 자신을 억누르는 힘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결국 마음속의 그 동료에 대한 미움이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이미 그려진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다시 그리기 시작하자 예수님을 비롯해 전체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이웃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일일이 벌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빈치의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죄악과 공존하지 못하기에 용서하지 않으면 그 은혜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에게만 자유의지를 주었습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사랑과 증오를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도 사랑과 증오를 하지만 오직 생존과 번식을 위해서, 즉 먹이 다툼과 짝짓기 때만 그렇게 합니다. 생존이나 번식과 상관없는 문제, 간단한 예로 말 한마디에 자존심 상해 밤잠을 설치면서까지 복수의 칼을 갈며 증오하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따라서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은 당신과 이웃을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하라는 것이며 그중에서 당연히 사랑을 택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결과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당장 하나님을 미워하고 이웃도 미워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자기 사랑에 방해가 되면 하나님도 이웃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하나님이 악을 허락하시고는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불평합니다. 타락할 줄 미리 알면서 자유의지를 주면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범죄 하도록 내몬 것이 아니냐는 논리입니다. 뒤집어 말해 오직 선(善)으로만 작동되는 의지를 주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은 인간을 악으로 몰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이 베풀 은혜가 진정한 은혜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신께선 절대 죄악과는 공존하지 못하기에 인간이 진정으로 당신께로 돌아서기만 해도 그 넘치는 은혜를 바로 받을 수 있습니다. 구태여 선을 얻으려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인간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순간 죄악의 구렁텅이로 바로 빠져 썩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악이 인간을 일부러 못살게 군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동을 들리는 순간 악 속에 그대로 묶여버리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그 의지를 악(惡)으로만 작동되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인간 스스로 악을 향해 달려가 놓고 하나님더러 막아주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갱단과 어울려 온갖 나쁜 짓을 하는 십대 아들이 아버지더러 나쁜 짓 할 때마다 찾아와 말리지 않았으니 아버지 책임이라고 하는 셈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있는 곳에는 은혜가, 없는 곳에는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비록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선택에 죄가 들어갔습니다. 그는 복을 선택한 것이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가 처음으로 주어졌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비롯해 모든 좋은 것을  전혀 부족할 것 없이 마련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완벽한 여건을 조성해 주었습니다. 모든 축복이 다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조건 때문에 그분을 택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죄악으로 내몰려 했기 보다는 오히려 선으로만 내몰았다는 뜻입니다. 악이 침범할 여건이 전혀 없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인간 스스로 하나님만 제외한 다른 모든 여건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보다는 그분이 주신 복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당신과 선악과 중에 어느 것을 사랑할 것인가를 물었는데 인간은  선악과를 사랑해버렸습니다. 오늘 날 신자가 그분이 주시는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사랑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축복은 마음대로 누리는 것이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바로 이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처음 원하셨던 대로 제대로 사용할 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사단 중에 자의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완악한 불신자라도 하나님과 사단 중에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대놓고 물었을 때에 사단 종교 신자가 아닌 다음에 사단을 택할 바보는 없습니다. 신자가 된 의미를 그렇게 가볍게 보아선 안 됩니다.  

아담은 하나님과 하나님 외의 모든 것들 중에 후자를 택했지 사단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의 꾐에 넘어간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범죄의 책임을 물었을 때에 이브도 당장 사단을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자유의지가 왜곡되었다는 뜻은 하나님 당신은 선택하지 않고 나머지 모든 것에만 관심을 두는 고집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중에는 당연히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선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야만 자유의지가 바로 된 것입니다. 이웃과의 사랑에도 마찬가지로 이 자유의지를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이웃과 잘 지내 도움을 받으려고 사랑해선 안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이웃과 은혜롭게 지내게 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이웃의 모든 여건과 아무 상관없이 이웃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똑 같은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 외의 모든 것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들을 미워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영향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동물은 자기 종족의 생존과 번식만을 목적으로 이 땅에 창조되었지만 인간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와 자기 집의 생존과 번식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만 하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와 자기 집의 생존과 번식은 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 청지기로, 세상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제사장으로 서 있는 한 하나님 당신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었다는 확신을 가진 신자는 주위에 많습니다. 그러나 그 증거가 확실한 신자는 참으로 드문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그분 때문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분이 주시는 축복 때문에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만을 그것도 풍요로우나 궁핍하나 관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이웃의 외모를 보지 않고 단지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5/2006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하나님은 신자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습니다.(마10:30) 모든 세대의 수도 없는 인간들을 일일이 당신의 주권 아래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신자는 오직 그 한 사람만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보다 몇 배로 큰 사랑을 쏟아 부어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각자 인생에 독특한 계획을 따로 마련하여 남과는 전혀 다른 은혜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계획이 영향을 받지 않으며 당신이 세우신 계획은 반드시 당신께서 신실하게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자마다 다 다른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입니다. 신자의 머리털 숫자와 굵기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일란성 쌍둥이를 포함해 이 세상에 똑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서로 다른 사랑을 베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이 사랑의 강도를 최고로 높이고 순교까지 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각자가 다르게 받은 그 은혜에 걸맞게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받은 만큼만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정말 진실한 개인적인 교제를 하며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 세상의 어떤 다른 것으로도 그 사랑이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또한 세상에 똑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웃사랑을 도덕적, 종교적 계명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만이 참된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니까 사랑을 더 많이 크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으니까 그분의 창조질서에 바탕을 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만 두고 보았을 때에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불신자는 예수님의 두 강령 중에 첫째에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둘째 계명인 이웃 사랑만 잘하여도 인간끼리  화목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동일하게 이웃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출발이 다르며 또 출발이 다르기에 결과도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단 한 명도 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인간끼리는 처음부터 경쟁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경쟁이란 반드시 동일한 조건에서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일학년과 대학원생이 경쟁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미국대학의 교수는 리포트를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내면 일단 한 Grade 낮추어 점수를 매기는데 시간을 그만큼 더 사용했다면 당연히 내용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한 것입니다.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조건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쟁이란 다 같은 조건과 능력과 자원을 가진 상태에서 누가 더 성실하게 그것들을 활용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성실도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우선되는 사회가 바른 것이지 성취도만 중시되는 사회는 벌써 불공정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와 재능이 전부 다릅니다. 체격, 건강, 지성, 성격 등에서 하나라도 같은 자 없습니다. 조건이 다를 때는 경쟁 대신에 보완, 협력, 연합하는 섬김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경쟁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처음부터 불공정 게임을 하겠다는 도덕적 모순을 잉태한 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이웃 사랑은 경쟁을 전제로 한 사랑에 불과합니다. 처음부터 불공정 게임을 한 결과 승자가 패자에게 동정을 베푸는 사랑입니다. 반드시 외적 조건이 나은 자가 못한 자에게 베푸는 사랑뿐입니다. 그 반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홈리스 거지가 재벌 회장을 도우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됩니까? 미친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을 우습게 봤다고 난리치지 않겠습니까?

신자의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현실적으로 아무 가진 것이 없는 자가 더 많이 가진 자를 도리어 도와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벌써 외적 조건으로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외적인 것으로는 도울 수도 이유도 없습니다. 현실의 가진 것으로만 도운다면 불가능하지만  하늘에 속한 위로와 평강으로 그들을 섬기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재벌회장을 위해 예수를 아는 홈리스 신자가 기도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서로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하는 사랑과 인간 스스로 도덕적으로  노력하는 사랑은 이만큼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합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에 제한된 조건에서 한정된 자원을 나눠야 합니다. 그들의 인생은 경쟁을 통해 누가 더 큰 파이를 차지하느냐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자도 현실적으로는 동일한 여건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동일한 파이를 나누는 대열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경쟁에 참여하여 합니다. 다른 말로 파이의 크기를 문제 삼지 않아야 합니다. 꼭 공산주의 식으로 동일하게 나누거나 남을 위해 전부 다 양보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재능과 은사가 다르므로 나눠진 파이 크기도 달라야 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자본주의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섣불리 오해하면 안 됩니다. 파이를 나눌 때에 반드시 인간의 상대적인 도덕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이 그 원리로 적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힘이 있다는 이유로 분배에 우선권을 차지하거나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선 안 됩니다. 절대적으로 공정한 룰에 따라 경쟁을 하여 성실도에 따라 차등 분배가 되더라도 소외된 자들을 반드시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모두를 다르게 창조한 것은 세상을 권력이 지배하는 경쟁과 차별의 세계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공의와 사랑이 지배하는 보완하고 협력하는 세계로 만드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여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무참히 짓밟아버렸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무한 경쟁 시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상대적 도덕과 인간적 사랑으로는 경쟁 자체도 공정하게 못하는데 이미 벌어지고 있는 무한 경쟁을 바로 잡을 방도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한 인류에게는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요컨대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종된 인간 사회는 결국 파국으로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성적으로 앞선 자들은 절대적 도덕과 절대자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을 마치 인간이 깨우쳐서 자유로워졌다는 증거인 양 착각합니다. 그들이야 말로 사단의 종이 되어   완전히 죄악에 묶여 있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모릅니다. 스스로 사단의 종이 되겠다고 나섰거나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고 자랑하는 꼴입니다.  

예수를 믿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아주 단순한 것입니다. 이웃을 경쟁상대로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단순한 것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더더욱 예수님의 십자가외에 살 길이 없지 않습니까?  

10/6/2006

예수 믿은 증거가 있는가?(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평케 해주신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그 은혜를 실질적으로 갚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실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그럼에도 목사님들은 교회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하나님 사랑을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자발적으로 교회 일에 기쁨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동원해 의도적으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자칫 순진한 신자들이 담임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거나 필연적으로 그런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자가 지켜야 할 가장 큰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갚을 은혜가 있다면 이웃 사랑으로 갚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 대한 사랑을 받지 않으려 사양을 했거나 하나님 대신에 신자들이 불쌍한 이웃을 도우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는 자입니다.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된 자입니다.(엡1:17-19) 그래서 신자는 개인적으로는 항상 그 은혜 가운데서 행해야 하며, 성도끼리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서로 연결하여 주의 성전을 이루어야 하고, 교회 밖으로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이방인과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이웃 사랑을 단순히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 차원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업이 부도나거나 치명적 병에 걸리면 연로한 부모에게 걱정을 끼칠까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효도 잘하는 것으로 칭찬받습니다.

신자는 부모가 신자일 경우는 즉시 알려야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그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고 어쩌면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하나님께 더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문제 해결을 잘 받기 위해 부모에게 기도 부탁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리 부모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주님의 온전하시고 절대적인 사랑만이 인간을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어떤 문제든 성도들은 주위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더 큰 은혜가 나타나는데 주위 사람 가운데 부모 이상 가까운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의 이웃 사랑은 단순히 이웃의 고통을 경감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신자끼리라면 나눠지거나 불신자라면 신자가 대신하여 지고 주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물론 가슴이 찢어지지만 같은 신자로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큰 특권입니다. 나아가 부모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식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 또한 주님께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습니다.  

만약 신자의 부모가 불신자라면 어떻게 됩니까? 자식의 고통을 자신의 것 이상으로 더 염려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불신자 부모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 믿음이 없는 부모지만 신자 자식이 정말로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해야 합니다.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부모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최소한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신다는 사실만이라도 체험시킬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 자식은 어떤 환난이 닥쳐도 더 담대하여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불신자 부모에게 보여야 합니다. 오히려 부모를 위로하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십자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분들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고난이 닥칠 때에 믿음을 가진 것과 안 가진 것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부모더러 깨닫게 해야 합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마19:17) 당연히 신자가 세상에 드러내는 선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신자의 어떠한 행동, 말, 생각이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해야만 진짜로 선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관점을 너무 신령하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에 계시된 말씀과 그분의 성품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당신의 긍휼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나와서 당신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미 당신의 백성이 된 자는 오직 당신의 은혜와 권능 안에서만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이고도 유일한 선이기에 인간이, 특별히 신자에게는 그분께 속해 있느냐 아니면 벗어났느냐 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어떤 선도 상대적일 뿐 아니라 인간 자체가 이미 부패된 죄인이라 어떤 인간적 선도 온전한 선이 될 수 없습니다.

효도하기 위해 부모에게 자식의 어려움을 알리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 관점에서 본 덕목일 뿐입니다. 불신자들의 사회에선 하나님이 없으니까 부모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고 당연히 부모 사랑만큼 큰 미덕은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매사를 바라보아야 하듯이 불신자는 부모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됩니다. 연로한 부모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면 큰 심려를 끼쳐 드리는 것은 당연히 큰 불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부모 또한 어서 빨리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입니다. 또 구원 받은 부모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더 많이 맛보며 살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자식의 문제를 함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부모와 자식이 함께 체험하고 나누는 것이 바로 효도이자 사랑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님의 은혜를 함께 누리며 사는 것만큼 신자로서 더 큰 기쁨이 따로 있겠습니까?

신자 부모의 입장에서 역으로 따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염려를 신자 자식에게 솔직히 다 털어놓고 함께 기도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부모의 체면과 자존심과 권위를 내세우거나 자식을 힘들게 하기 싫다는 정이 앞서면 여전히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아가 인간의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선, 의리, 정 같은 것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보다 더 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이자 어리석음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너무나 큰 은혜의 용광로 안에 인간과 세상의 모든 것을 던져 넣어 녹여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자식의 효도가 아무리 소중하고 선해 보여도 부모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서 있는 자식이 그 사랑으로 부모를 초대하는 효도라야 참 효도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가 신자끼리, 혹은 불신자와 함께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먼저 받았고 또 어떻게 받는지 아는 신자가 불신자에게 소개하고 나눠주는 방법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종교적인 일로 갚으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보다는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갚으셔야 합니다. 예수 믿은 증거는 언제 찾아가도 기꺼이 반겨주거나 또는 언제든  찾아와서 도와주기를 청하는 그런 이웃의 숫자가 말할 뿐입니다.    

10/15/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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