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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순전한 신앙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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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이라는 말은 생소한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대중적으로 쓰여 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보면 주로 정치의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쓰여 지는 용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인들에 있어서는 매우 생소한 용어처럼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앙지도자들도 이 용어와 거리가 멉니다. 그만큼 교회개혁을 모른다거나 안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개혁을 모르는 개혁파 교회들>
개혁파교회라 하면 곧 장로교회를 말합니다. 칼빈의 종교개혁으로 시작되어 그의 복음적인 교리를 따라 교회개혁을 실현해가는 교회가 개혁파 교회요 정치적으로 장로교회라 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장로교회는 수많은데 개혁을 하지 않거나 모르는 이름만 개혁파 장로교회들이 즐비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카톨릭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장로교회들이 많은 지경에 이르렀을 정도입니다. 예배당 건물도 성당건축 방식을 취하는 장로교회들도 많고 카톨릭에서 만들고 이행해온 영성훈련이나 무슨 코스 프로그램이나 수도사들의 묵상방식이었던 관상기도 등을 그대로 받아들여 써먹는 장로교회들이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새 목사들은 사제들처럼 여러 색깔별로 가운을 만들고 각 의식마다 계절마다 다른 현란한 색깔의 후두를 유행처럼 서로 맞추어 몸에 두르고 옛날 십자군처럼 십자가상 표시의 무늬는 크게 해달고 집회에 나와 섭니다. 뿐만 아니라 카톨릭식 공동체 의식이나 사회에 대한 복지의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장로교회고 말이 개혁파교회이지 카톨릭의 상태로 회귀 하는 것입니다.
간혹 보면 개혁을 운운하며 뭔가 한다고 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그것은 시대를 따라 변형을 추구하려는 경우거나 사람들 요구나 원함에 따라 새롭게 나가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보수주의를 벗어 버리고 진보주의로 나가는 것을 개혁이라 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해온 예배의식이나 전통형태를 과감히 버리고 열린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방식의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도전적인 자세로 나가는 것을 개혁으로 삼기도 합니다.아주 드물게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주의도 보이지만 순전하지 못하고 자기 의에 치우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개혁을 너무 오버시켜 무율법주의로 가는 경향의 개혁주의자들도 있습니다.
<교회 개혁의 본질>
개혁이라는 말은 교회보다 사회가 더 많이 쓰고 실제로 개혁파 교회가 되는 장로교회서도 잘 쓰지 않습니다. 사실 개혁이라는 말을 쓴다고 개혁이 되는 것도 아니요 이 용어를 안 쓴다고 해서 개혁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개혁은 이 용어를 표어삼고 목적 삼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복음을 통해 능력으로 실현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개혁의 원리입니다.
본래 개혁이라는 개념은 묵은 제도나 기구 등을 원리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합리적으로 하는 변혁이나 개조를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쓰는 개혁은 교회본질을 찾아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개혁파 교회입니다. 개혁파교회는 종교개혁시대에 나왔지만 교회 개혁은 교회 구원의 언약에서부터 성취과정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의”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개혁이라는 말이 딱 한번 나오는데 보면 “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피로 영원한 속죄로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9:9-15)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제사법에서의 속죄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대속의 은혜로 완성되고 참 새롭게 변형되는 것을 개혁 이라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증거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는데 아무리 변형시키고 새롭게 만들어도 다 옛적에 있던 것이라 했습니다.(전1:9-10) 그러니까 인간적인 그 어떤 변혁도 교회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을 모르는 자들은 시스템을 바꾸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기존의 것들을 과감히 버리거나 과거의 제도나 의식 따위를 확 바꾸고 무슨 운동을 벌이고 교인들을 목적과정을 통해 교육시키고 훈련시키면 교회개혁이 되는줄 아는 무지한 자들이 많습니다.
교회개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교회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개혁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고 거룩하게 변혁시켜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개혁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는 이미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죄의 형벌로 인한 사망에서 영생으로, 어둠의 상태에서 빛의 자녀로, 저주받은 인간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새롭게 되고 거룩히 변혁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사람인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산자로 된것입니다.
<교회 개혁의 실제>
교회 개혁의 실제는 교회 개혁 본질의 실현 또는 성취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교회 본질모습으로 돌아가고 온전케 되는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잘 아는 야곱은 이미 어미의 태중에서부터 언약의 백성으로 택함을 입은자 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두 민족으로 나누이는데 형 에서가 작은 동생 야곱을 섬기리라고 했고(창25:22-23)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했습니다.(말1:2-3) 사도바울은 “리브가가 우리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0-13)고 증거 했습니다.
야곱이 택자였지만 에서보다 더 간교한 자였음을 성경은 보여 줍니다. 장자의 혜택을 받고자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원한을사 망명길을 떠납니다. 위험하고 외로운 길의 여정,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십니다. 그가 꿈에 본즉 땅위에선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그 위에 여호와께서 서서 계심을 봅니다. 이것은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교통되는 것인데 그것이 야곱에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교회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라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1-15)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언약의 백성이요 구약교회된 야곱의 상태가 본질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실제로 개혁시켜 갈 것인가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교회개혁은 실제로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야곱의 생애는 언약의 백성으로 택정함에 있었습니다. 그의 망명생활은 하나님께서 그를 언약의 백성으로서 택하심에 합당하도록 특별히 간섭하시며 이끄시는 섭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처럼 살면서 두 아내와 자식들을 얻었고 20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다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라 명하십니다.(창31:3) 그 말씀의 명령에 따라 야곱은 외삼촌 몰래 도주하다시피 하여 그곳 하란에서 떠났고 분노한 외삼촌 라반의 추격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라반이 야곱에게 어떤일도 못하게 막아주셨고 또한 4백명을 데리고 야곱을 향해 오는 원한을 품고 있던 형 에서도 화평한 해후가 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그러나 얍복강에서 주께서 사자로 오셔서 야곱에게 씨름을 걸으십니다. 그가 더 이상 그 이름된 야곱의 모습으로서는 언약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굴복되지 않는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고 울며 구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부여합니다.(창32:24-28) 간교한 본성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씨름을 거는 간섭을 통해 언약의 백성의 모습으로 변화된 이스라엘로 개혁시켜 주신 것입니다.이후 그의 여정은 연약한 형편을 따라 모든 식솔들을 거느리고 세겜에 머물러 거기서 안주하며 살려고 하자 하나님은 야곱의 집에 환난을 주십니다. 그것은 딸 디나를 통한 세겜에서의 괴로움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처음에 약속했던 벧엘로 돌아가 거기서 하나님께 단을 쌓으라고 명하십니다.(창35:1) 그 명령의 능력이 야곱을 일으키고 또한 야곱을 통해 그 가정까지 개혁되게 됩니다.
야곱은 가족과 그 외 식솔들에게 “너희중의 이방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자 가족들은 야곱의 가정개혁의 의지를 따라 이방신상과 귀고리 등을 야곱에게 주어 그것을 땅에 묻어 버리고 함께 벧엘로 돌아가 하나님께 단을 쌓고 경배하게 됩니다.(창35:2-7) 이것이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고 네게 허락한(언약함)을 이룰때까지 함께 하시겠다던 하나님의 언약대로 (창28:15) 야곱을 개혁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창48:15)이라고 후손에게 증거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개혁의 모습과 삶은 스스로는 불가능한 것이였고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돌아가도록 도우시고 말씀하심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개혁의 본질과 실제를 한 구절로 증거하기를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고 했습니다.
디도서2:11-13절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바울은 증거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개혁은 언약의 백성들을 합당한 모습으로 양육하신 것처럼 오늘날 교회도 그 분의 교회로서 거룩하고 온전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실제 역사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개혁>
교회개혁은 시대적 갱신도 아니요 과거의 제도나 전통을 깨고 과감히 탈바꿈 하는 것도 아니요 옛 의식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보수가 진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의를 세워가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교회 개혁의 진실은 언약대로 교회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 그리스도 교회의 모습인 그리스도로 서가는 것이 참된 교회 개혁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도는 자라며 온전케 되어 짐에 있고 성령의 교통하심 속에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며 거룩한 일체의 통일을 이루어 감에 있는 것이 교회 개혁의 실제입니다. 이런 교회개혁은 사람의 의지나 합력이나 갱신적 운동이나 수련에 있지 않고 오직 복음의 능력의 역사에 있습니다.
에베소서3:6절을 보면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했고 요17:17절에 보면 진리가 거룩케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교회의 거룩성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구별되고 온전해지는 것인데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개혁인 것입니다. 그것은 진리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은 헛된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한다고 했습니다. (행14:15) 또한 어두웠던 눈을 뜨게 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거룩케 되고 기업을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행26:18) 또한 복음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했고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롬1:16-17)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구원의 작정과 그것이 계시되고 언약되고 그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이 없거나 가감된 것이면 그것은 복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처럼 그것은 다른 복음이고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가르쳐 지는 곳에는 교회 개혁이 있을 수 없고 개혁이라는 용어를 쓰며 운동을 벌인다 해도 인본적이고 세속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복음은 교회 구원의 비밀로서 하나님만이 품으셨다가 교회된 자들에게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0나타내 주셨고 그 복음은 언약대로 거룩한 교회를 진리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교회 개혁의 진실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의 합당한 신앙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에 합당한 신앙에 일심하고 합력할 때 (빌 1:27) 비로소 개혁파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개혁을 외치며 우리가 목적하거나 주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우리의 ‘의’나 기대가 반영되어 우리 중심으로 곁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복음에만 충실하고 그 능력에만 의지하고 소망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복음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성령께서 진리가운데로 이끄시고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로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의 개혁은 하나님의 주권의 역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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