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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김회권 교수............... 조회 수 4534 추천 수 0 2012.06.11 00:10:08
.........
성경본문 : 요3:16 
설교자 : 김회권 교수 
참고 : 2012.4.15 주일설교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16)

2012년 4월 15 주일예배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길교회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간 한완상 교수님을 통해서 새길교회에 관해서 듣고 있었지만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분들이 모이시는지 정확히 몰랐었는데 오늘 여러분 만나 보니 보통 교회와 똑같은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길교회는 87년에 창립되어 올 해 창립 25년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난 25년간 그동안 교회 건물이라는 물리적 구심점 없이 이렇게 교인들이 모이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결코 당연한 일도 자명한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가 없이는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새길 교회가 강남청소년수련회에서 모일 수 없을 만큼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길교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등 제도권 교회에는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 주님의 우주적인 몸된 교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 정상이기에 성장해야 합니다. 성장하는 것은 생명의 자기 증명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진대사를 해야 합니다. 신진대사를 하려면 생명의 말씀이 끊임없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 교회에 들어와서 세례 받는 새 교우가 늘어가야 하고 그리고 교우들의 삶의 격조가 높아지고 심화되어야 합니다. 그게 성장입니다. 그런 질과 양의 성장이 새길 교회 교우들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 자체가 참 감동적인 구절입니다.

 

(요 3:16, 개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이 말씀이 자명하게도 감동적이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사랑을 자명하게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하나님 사랑을 자명하게 느끼고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 많은 분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만 그 사실을 지구의 공전주기나, 자전 주기나, 물의 H2O 원소구성 사실과 같은 과학적 진리만큼 자명하게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이 매우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가 자기 목숨을 바치는 독생자급 인물이 시시때때로 역사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독생자급 인물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품속에 있던 독생자이면서도 죄 있는 인간을 위하여 대신 징벌 받는 자입니다. 부자로 살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스스로 가난케 된 자입니다. 집도 여러 채 있는 사람이 집 없는 이웃을 위해 집을 나누는 자이며, 건강하게 활동하는 사람이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아픈 자처럼 연약한 자처럼 자신을 비우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극대치 행복을 마땅히 누리며 살아도 되는 사람이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독생자급 성자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독생 성자급 성도들이 역사에 계속 공급될 때만이 세상 사람들은 비로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명제는 자명하게 입증된 명제라기보다는 증명의 부담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명제인 것입니다.

 

물이 H2O로 구성되었다든지 지구가 자전한다는 진실은 선교사의 의도적인 전파행위가 필요 없이 널리 전파되고 확산되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계 만민을 사랑하신다든지, 하나님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통회한 자를 돌보신다 등의 명제는 자명하게 다가오는 명제가 아니라 누군가가 입증해주어야 하는 증명 부담이 있는 명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행동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상 사랑을 감지하고 향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 사랑의 진실이 믿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말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의 한국 사랑을 알게 되려면 한국 사람 중 하나님의 독생자급 인물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국에 대한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또 한번 한국 사람의 육신을 입고 한번 더 십자가에 못박혀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념적 신앙은 한국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배달민족의 자손 중에서 독생 성자 예수급 사람이 나타나야지만 한국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 사랑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노예적인 정신적 의존 근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하는 큰 부담을 끌어안는 매우 현실적인 신앙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이중계명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부담을 끌어안는 이런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감화 감동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감화감동 없이는 아무도 “예수를 주(主)”라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고(고전 12:3)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나면 하나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쏟아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롬 5:5)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이 폭포수처럼 체감되고 감지될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독생자 예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독생자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선물로 받은 그 감격이 일생동안 계속 지속되는 그 사람만이, 독생 성자급 삶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부단한 감동을 받는 사람만이 오늘날 한국 사람을 사랑하신 배달민족을 사랑하신 하나님 사랑을 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옛날 이천년 전 나사렛에 오신 그 분의 옛날 사랑의 행적을 희미하게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한국 사랑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 사랑을 지금 이 순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람 중 독생성자급 인물들이 그 독생자 예수의 하나님 사랑을 체현하고, 재현할 때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 한국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한국 사람 예수, 코리안 복제 예수들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은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그 명제가 납득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이 감동적인 구절에 결정적인 논점은 ‘이처럼’에 있습니다. ‘이처럼’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그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처럼’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3장 14,15절을 읽어야 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에서 ‘같이’가 ‘이처럼’의 비교의 대상입니다. 여기에 예수님 사랑을 구약의 빛에 의해 해석할 수 있는 원형적 사건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표현된다는 것이 이 구절의 핵심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먼저 모세를 알아야 하고, 모세를 알려면 신명기, 민수기를 알아야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든 내용은 민수기 21:4-9에 나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자 하나님이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쳐서 만들어 번쩍 쳐들게 하여 그것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아나게 하신 사건입니다. 이 민수기 사건을 이해하려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방황을 이해해야 하고, 그러려면 출애굽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 출애굽을 이해하려면 창세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창세기 1:1부터 요한복음 3:14절까지를 이해해야만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처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한 순간부터 인간을 사랑해 오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순식간에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울림이 큰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는 원리가 모세가 광야에 뱀을 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한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논리적으로 적합하고 명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범한 이스라엘(인류의 대표)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순간마다 놋뱀을 쳐들어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심판의 행렬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 행렬을 돌이킬 수 있게 만든 놋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했습니다. 그 놋뱀들은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고난 받는 종,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얼을 구현한 의인들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대의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몸을 버린 사람들이 바로 놋뱀들입니다. 인류역사가 죄와 패역의 역사이지만 또한 놋뱀처럼 자기 몸을 바친 사랑의 역사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불뱀의 역사와 놋뱀의 역사로 인류역사를 해석하고 계십니다. 인류의 죄악은 인류의 역사를 불뱀들로 들끓게 했습니다. 불뱀은 죄범한 인류를 죽이는 율법적 공의입니다. 죄를 징치하는 벌입니다. 불뱀 자체는 인간의 악행을 징벌하는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 회초리인 셈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보자면 인류 역사가 무엇입니까? 죄 범한 인류가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죽음의 경각에 홀연히 나타난 놋뱀의 대반전 역사 아닙니까?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 하신 놋뱀을 보고 치유받고 소생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예비하신 놋뱀급 의인, 성자, 노아, 에녹같은 사람들의 순종의 삶을 쳐다보고, 죄인들이 구원받고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물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은 놋뱀의 삶을 살다간 의인의 삶을 사모하고 존경하면(looking up to) 치료를 받습니다. 물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도 의롭게 산 사람들을 쳐다보고, 의로운 순종을 완성하기 위해 자발적 희생을 감수한 사람들을 쳐다보고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높이 쳐들린 놋뱀, 즉 십자가에 달려 자발적 희생을 완성하신 의인들을 쳐다보면서 인류가 멸망치 않고 생명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높이 쳐들린 놋뱀이 되어 인류를 멸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인류가 멸망의 길을 떠나 영생의 길로 질주하도록 유도하는 놋뱀급 성자들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멸망당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라고요? 놋뱀같이 높이 쳐들린 의인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한 순종 때문에 인류는 멸망이 아니라 영생의 길을 확보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그를 따르면 영생의 길이 열립니다. 요약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실 때 불뱀에 물려 죽음의 순간에 내몰린 인간들을 위해 쳐들린 놋뱀같은 의인들을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죽어가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놋뱀같은 독생자급 의인들을 쳐다보고 살아나는 그런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해왔습니다.

 

이것은 창세기부터 적용된 원리였습니다. 창세기 아담이 범죄했을 때 짐승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셔서 그를 죽음의 행렬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노아시대에는 노아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에는 이들의 생애를 번쩍 쳐들어서 인류에게 살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사무엘을 번쩍 쳐드시고, 주전 8세기에는 민족 멸망기에는 이사야, 미가를 쳐들고, 주전 6세기에는 예레미야를 놋뱀처럼 쳐들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인류가 죽음의 행로로 질주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그 죽음을 무효화시킨 순종을 바침으로써 그 죽음의 행렬을 중단시킨 의인의 삶을 희생시켜서 불뱀에 물려가는 죄인을 구원하는 이런 어처구니없이 부조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어처구니없고 부조리한 방식이란 죄 있는 자들 때문에 죄 없는 자들이 희생을 감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만 이 세상이 존속가능한 영생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만약 이 세상에 놋뱀처럼 쳐들린 의인이 없으면 세상은 멸망합니다. 세상은 오작동하게 되고 세상은 카오스로 빠져듭니다. 지금 세상이 이만큼 이라도 살만한 곳으로 보이는 까닭은 높이 쳐들린 놋뱀들 때문입니다. 온 세상 거리들을 악인들이 활보하는 그 때에도 남들이 아무도 안 보는 사적 공간에서도 의를 행하고 신실함을 행하는 놋뱀급 의인들 때문에 이 세상이 정상처럼 작동됩니다. 사실 이름없는 놋뱀들의 부단한 비영웅적 희생이 세상을 그래도 삶의 존속을 가능한 곳으로 만들어냅니다. 사실 우리가 그 은닉된 놋뱀들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길은 망하게 하지만 의인의 길을 아시고 감찰하시고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불의와 사법적 불의와, 행정적 악행이 범해지는 이 세상도 이별하기에는 아쉬운 곳으로 느끼는 까닭은 이 은닉된 놋뱀들의 부단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아쉬워할 만큼 이 세상을 그래도 불완전한 천국의 복사판 쯤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놋뱀들입니다. 숨어있는 놋뱀들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대다수는 불뱀에 물려 죽어가면서 놋뱀을 쳐다보고 치료받지 못합니다.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세상 사랑의 방식은 놋뱀을 쳐들러 물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되살려내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명제는 놋뱀들이 얼마나 쳐들려 올라가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쳐들려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다가 고난을 자초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발적인 순종에 의해서 진리의 길 따라 가난케 된 자들입니다. 남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쳐들려진 놋뱀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에 이 세상의 하나님 사랑의 유효성, 효과성을 논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지요.

 

제가 볼 때는 우리나라 한국 교회가 아직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잘 모릅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는 도덕적으로 파탄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감수성 붕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감화감동을 모르는 교회는 나쁜 제도권 종교로 쉽게 전락합니다. 한 교회가 전체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성령의 감화감동을 모르는 햇수가 굉장히 길어야만 부자 혹은 가족세습이 가능합니다. 집단으로 바보가 되고 집단적 완악함에 사로잡힌 교회만이 그런 악행을 감히 할 수 있습니다. 집단적 완악함과 패역함이 불뱀에 물린 중독처럼 판단력의 중추부를 마비시켜야만 17억짜리 총회장 선거가 가능합니다. 코메디보다 못한 코메디가 한국 제도권 교회 안에 일어납니다. 이런 제도권 종교, 즉 유급 성직자 집단이 지배하는 제도권 종교는 도무지 항구적 진리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타당성과 공익성은 사실 조화가 안됩니다. 그래서 실지로 여러분 같은 교회도 탄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여러분과 저는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절박한 위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불뱀에 물려서 죽음의 독이 퍼져가는 공동체 한복판에 와 있습니다. 못살겠다고 아우성 치는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은 자기의 죄 때문에도 물리지만 반역적 사회 무리에 속했다는 이유로 불뱀에 물립니다. 불뱀은 가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공동체에 불뱀을 출현하게 만들어 심판의 죽음을 강요하게 만드는 그런 주체는 소수이지만 불뱀에 물려 죽는 사람은 다수인 것입니다. 후쿠시마나 체르노빌의 원자력 사태가 발생할 때, 그 비참한 사건은 그 곳의 관료들이나 회사직원들의 불성실 때문에 발생했다고 치더라도 방사능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합니다. 불뱀의 공격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옵니다. 이것이 어처구니없는 모순과 역설입니다.

 

이럴 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독생자를 주시는 이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모방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 선사된 독생자가 누군가 이 땅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명제는 여전히 공중에 걸려있습니다. 진리인지 아닌지 불확실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속한 한국사회에서 하나님이 정말 한국 사람을 사랑하셨는가? 아직도 사랑하시는가는 하는 질문은 아직도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2천년간 존속되어온 뿌리깊은 종교입니다. 아무리 타락해도 2500만 추종자를 거느린 종교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아직까지 한국 사람 마음 본토에 상륙했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어쩌면 한국 기독교는 그야말로 1866년에 대동강변에서 성경을 찢어서 뿌려버렸던 토마스 선교사처럼 한국 땅에 상륙하지 못한 종교가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황석영은 <손님>에서 기독교를 천연두처럼 왔다가는 손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암시를 던짐으로써 하나님 사랑을 입증하는 데 무기력한 기독교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진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분단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세계 유일한 분단 적대국이라는 이 문제를 해결 안 해주시면 하나님이 우리 민족 사랑했다고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한국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실 수 있을까요? 분단체제를 해소하는 데 앞장서는 평화주창의 놋뱀들을 쳐들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실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못 믿게 만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분단 문제를 영구적으로 존속시켜서 악과 증오의 다이나믹스로 세상을 살아가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사랑을 못 믿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믿게 만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계급적 적대심과 계층적 갈등이 심화될 때 이걸 해소시키는 데 앞장서는 사람들입니다. 분단문제 누가 해결합니까? 하나님 사랑에 감복된 독생자급 의인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요. 예수님이 다시 한국사람 육신을 입고 아시아 황인종 피부로 내려 오셔야 합니까? 아닙니다. 아시아 황인종의 피부를 가진 우리 한국사람이 하나님 사랑에 감화 감동되어 분단문제를 위해 높이 쳐들린 화해의 놋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원죄적 분단체제에 사로잡힌 한국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 하는 객관적 명제가 성립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입증할 부담은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워져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순종과 십자가 짊어짐에 투신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쳐들린 놋뱀처럼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놋뱀처럼 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개인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보편적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나를 사랑하신다는 진리를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놋뱀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촉발된 성령의 조명과 확신으로만 생겨납니다. 문제는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은 매우 우발적입니다. 어떤 여고생은 다이어트 했는데 몸무게가 빠지지 않는다고 하나님 사랑을 의심합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면 하나님 사랑을 못 믿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부모가 너무 도덕적 슬럼지대의 삶을 살면 하나님 사랑을 못믿습니다. 자신이 쓴 논문이나 페이퍼를 빌려주었는데 베낀 친구는 A를 받고 빌려준 사람은 원저자는 오히려 표절로 의심받는 부조리한 문제로 고난을 받으면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친구가 군대 가면서 애인을 친구에게 맡기고 갔다 왔더니 자기 애인을 그 친구가 가로채버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도저히 안 믿어집니다. 이같은 개인적 재난을 겪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사랑이 우발적으로 임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동정은 하지만 제가 아무리 해도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시키지는 못합니다. 다만 은혜에 맡길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 자녀가 하나님을 믿지 못해도 은혜에 맡길 뿐이지 왜 하나님 사랑 못 믿느냐고 지적으로 논박할 수 는 없습니다.

 

물론 객관적인 조건이 다 갖춰졌다고 해서 하나님 사랑이 잘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은 종교적 감수성 계발이나 이성의 추론, 객관적 환경 조성으로 믿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이 우발적으로 불어오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개개인에게 불어오지 않는 한 도저히 인력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이런 저런 상황으로 개인이 하나님 사랑을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도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까 하나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저 자신도 임의적인, 우발적인,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성령의 바람을 쐬어서 하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79년 대학 1학년 때 하나님 사랑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전도하려고 전도자에게 소개했던 그 친구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저를 열성적인 전도자에게 대신 보내서 저를 하나님 믿게 만든 그 친구는 아직도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습니다. 그 친구가 결코 저보다 덜 착하거나 덜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끝까지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나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개인적 이유는 객관적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입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독생성자급 정치인이나 단체가 나타나 적대적 분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사랑하신다는 명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빈부격차 문제와 강남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한국 그리스도인 중에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현실감있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108%의 주택을 지어놓고도 주택을 찾지 못하는 주택 광풍을 잠재울 수 그런 독생성자급 인물이 강남에서 나타난다면 하나님 사랑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독생 성자를 주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 사랑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부는 성령의 바람, 요한복음 3: 8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바람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나게 하는, 마음대로 부는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이 바람은 사람이 조정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여기서 하나님 사랑의 신비, 하나님 사랑의 우발적 임의성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목사님들조차 자유로우시고 주체적 기준으로 불어오시는 성령님을 마음대로 못합니다 목사님이 원하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부자인 사람이 예수님 믿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셔도 돈 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먼저 믿고 돈 많은 사람은 예수님 안 믿고 떠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은 목사님이나 교회가 통제 못합니다. 성령은 목사님 손에 안 잡히는 주권을 가진 자유의 영이시고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주지 않는 한 어떤 설교자도 설교단에서 하나님 사랑을 입증하는 길이 원천 봉쇄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할 객관적 증거를 다 보여준다고 누구나 자명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보여주고 성자급 희생을 바치는것은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고, 하나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합니다. 성령의 감화감동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만드는 충분조건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로마서 5장 5절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 사랑을 쏟아부어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감화감동은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놋뱀들을 통해 불어온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임의로 불어가지만 성령감화 감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그런 동아리에서 불어오기에 성령역사를 너무 신비주의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놋뱀들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성령의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높이 쳐들린 놋뱀들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치료받고 구원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945년 함부르크에 18세 소년이 있었습니다. 물리학자가 될 꿈을 가진 그 고등학생은 영국군의 폭격을 받아 온 가족과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죽는 참담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벨기에 포로수용소에 갇힙니다.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며 죽으려고 했지만 봄이 되어 피는 자목련꽃을 보면서 죽음 저편에 있는 봄을 생각하고 자기 삶의 애착을 되찾습니다. 그후 그 소년은 스코틀랜드의 군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에서 농부 출신의 군인들이 이 소년을 가족처럼 돌보았습니다. 소년은 그들로부터 그야말로 감동에 감동이 쌓여가는 독생 성자급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 독일 포로수용소에 잡힌 사람 중 전쟁 후 독일교회를 재건할 신학자나 목사를 교육시킬 독일 재건 목회자 양성 신학교가 임시로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된 이 소년이 여기에 지원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희망의 신학, 삼위일체와 성령의 신학을 전후 세계신학계와 교회에 확산시킨 위대한 독일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입니다. 몰트만은 스코틀랜드 농부들의 그 다함없는 지침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몰트만과 같은 그런 극적인 방식으로 하나님 사랑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독생성자급 사랑의 화신들을 자주 만나고, 그들을 많이 쳐다보고 존경하면 치료되고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맛볼 가능성이 커질 것입니다. 물론 민수기 21장에서처럼 우리가 한꺼번에 치유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일생을 통해 서서히 치료되어도 됩니다. 독생 성자급 의인의 삶을 존경하다보면 서서히 치료가 발생하고 일생을 통해 치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독생성자급 의인의 삶을 주목하는 것이 신문 사설 읽는것 보다 낫습니다. 어떤 신문이건 신문을 보면 악행자들의 이야기가 너무 디테일하게 나옵니다. 그걸 읽고 나면 비소와 크롬을 마신 것 같아 우리 마음이 완악해지고 흐려집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아침마다 성경을 읽어야 하고 놋뱀처럼 번쩍 쳐들린 이태석 신부님, 한경직 목사님, 위르겐 몰트만 같은 분의 생애를 읽으면서 치료를 경험하고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이런 은혜와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이 소박한 약속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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