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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믿음, 의연한 삶

마태복음 오강남 교수............... 조회 수 2335 추천 수 0 2012.06.11 00:14:38
.........
성경본문 : 마9:22 
설교자 : 오강남 교수 
참고 : 2012.5.22 주일설교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자라나는 믿음, 의연한 삶

(마태복음 9:22)

2012년 5월 22 주일예배

오강남 교수

 

본문: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마태복음 9: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요, 너희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7:20

 

들어가면서

다시 5월이 되어 새길 교회를 방문하고, 여러 자매 형제님들과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늘 무슨 말씀으로 서로 은혜를 받을까 생각하다가 우리가 종교생활에서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마커스 보그가 그의 책 <기독교의 심장>에 소상하게 풀이를 해 놓았기에 그것을 소개하고 우리 나름으로 그 뜻을 새겨보고자 합니다.

 

믿음의 종류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믿음’ 에는 크게 네 가지 각이한 뜻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에서부터 가장 덜 알려진 것에 이르기까지 그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우리가 무의식중에라도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바로 잡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1) 승인으로서의 믿음

첫째 종류의 믿음이란 “남의 말을 참말이라 혹은 정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고 할 때 그가 서울 남대문에 문턱이 있다고 하면 정말로 문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내가 직접 서울에 가서 남대문에 문턱이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 유무를 알았으면 믿을 필요가 없는데, 내가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남이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은 남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한 다리 건넌 지식’(second-hand knowledge)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거창한 말로 표현하면 이런 식의 믿음이란 "우리가 직접 경험하거나 확인할 길이 없는 것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 입니다. 이런 식의 믿음을 좀 더 전문적 용어로 하면 “faith as assensus”라 합니다. 여기 assensus라는 라틴어 단어는 영어 assent 의 어근입니다. 우리말로 ‘승인(承認)’이라 옮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라고 하면 우선 이런‘승인으로서의 믿음’을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립니다. 이런 식 믿음이 지금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제일 강조되는 가장 보편적인 믿음의 형태이기 때문이지요. 거의 모든 경우 교회에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면 무조건, 덮어놓고, 모두 사실인 것,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믿음이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 또 처음부터 가장 보편적 형태의 믿음으로 내려 온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주 후대에 와서야 이런 형태의 믿음이 하나의 '믿음'으로 나타나고 강조되기 시작하다가 근래에 와서는 급기야 믿음이라면 바로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되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식 믿음도 물론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 믿음도 중요합니다.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알 수도 없기에, 남의 말을 듣고 그 중에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믿음만이 믿음이 아니고, 이런 식 믿음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만 가지고는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믿음의 실체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은 이런 믿음 그 이상입니다.

 

더욱 심각하게 생각할 것은 런 종류의 믿음이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 그렇게 중요한가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교리를 다 믿고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우리의 삶이 바뀌어지는가요? 우리의 삶이 신나게 되는가요? 우리의 삶이 남을 위한 것으로 옮겨가는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머리 속에 무슨 교리를 넣고 다니는가 하는 것을 그렇게 중요시 여기실까요? 나중 양과 염소를 가를 때, 네가 삼위일체를 받아들였는가? 예수의 신성을 믿었는가? 하는 등 우리의 ‘믿는 바’에 대해 물어보실까요? 믿음이 ‘승인으로서의 믿음’만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것일 수 있을까요? (성경을 믿는다 vs. 심청전을 믿는다)

 

2) 맡김으로서의 믿음

둘째 형태의 믿음이란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내가 내 친구를 보고 “나는 자네만 믿네.”할 때의 믿음 같은 것입니다. 이 때 그 친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 친구가 한 말을 참말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거의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식의 믿음은 어떤 사물에 대한 진술이나 명제, 교리나 신조 같이 ‘말’로 된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의와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전문 용어로 ‘faith as fiduncia’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신뢰로서의 믿음’ ‘턱 맡기는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어로 'trust'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말입니다.

 

이런 믿음은,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골이 표현한대로, 천만 길도 더되는 깊은 바다 물에 나를 턱 맡기고 떠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잔뜩 긴장을 하고 허우적거리면 허우적거릴수록 더욱더 빨리 가라앉고 말지만, 긴장을 풀고 느긋한 마음으로 몸을 물에 턱 맡기면 결국 뜨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뜨게 하심을 믿고 거기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 믿음의 반대 개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심이나 불신이 아니라 바로 불안, 걱정, 앙달함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하는 찬송처럼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근심걱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을 때 우리는 근심하고 걱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강조해서 가르치려 하신 믿음도 바로 이런 믿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믿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마6:25-32 참조)

 

믿음을 이런 것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교리를 수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믿음의 많고 적음이 저울질 되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느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믿음의 크고 작음이 측정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아직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처럼 불안과 초조, 근심과 걱정, 스트레스와 긴장이 많은 사회에서 우리에게 이런 신뢰로서의 믿음, 마음 놓고 턱 맡김으로서의 믿음은 어떤 진술에 대한 승인이나 동의로서의 믿음보다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런 믿음, 예수의 대한 이런 믿음은 이런 면에서 우리를 이 모든 어려움에서 풀어주는 해방과 자유를 위한 믿음입니다.

 

3) 믿음직스러움으로서의 믿음

"믿음"이라고 할 때 세 번째 뜻은 ‘믿음직스러움’, ‘믿을 만함’이라고 할 때의 믿음입니다. 내가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을 만한 사람,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faith as fidelitas’라 합니다. 영어로 faithfulness라 옮길 수 있습니다.

 

믿음을 이렇게 생각할 경우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계속 믿음직스러움, 믿을만 함, 성실함, 충성스러움을 견지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때 조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대해 성실함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교리"나 "진술"이나 "신조"에 대해 그렇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충성과 성실함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일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개념은 시대에 따라, 개인의 신앙 성숙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직스러움으로서의 믿음이 없다는 것을 성경적 용어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참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아닌 것에 우리의 절대적 충성을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셨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의 간음하는 것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배신과 불성실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믿음은 하나님 아닌 일체의 것, 예를 들어 돈이나 명예나 출세나 성공이나 권력이나 교회나 교리나 교단이나 국가나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무슨 주의나 사상 같은 가짜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일을 금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절대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교리를 우상화는 행위에 해당하는 "믿음 없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성실한다는 의미로서의 믿음은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또 그가 사랑하시는 것, 우리의 이웃과 그가 만드신 이 세계를 사랑하는데 성실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 봄으로서의 믿음

이제 마지막으로 앞에 예거한 것들과 약간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일종의 믿음이라 할 수 있는 “봄으로서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이른바 “faith as visio”입니다.

 

이런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seeing things as they really are)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사물의 본성(nature)이나 실재(reality), 사물의 본모습, 실상, 총체적인 모습(the whole, totality)을 꿰뚫어 봄입니다. 이런 믿음은, 말하자면, 직관, 통찰, 예지, 깨달음, 깨침, 의식의 변화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일종의 확신(conviction) 같은 것입니다. 일종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이나 역사관 같이 세계와 삶에 대한 총체적 확신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깨달음이 일치하는 경지를 보는 셈입니다.

 

우리가 가지게 되는 확신을 꼴 지우는 봄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이분법적 “적대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위험하고 위협적인 것으로 보는 태도입니다. 상극(相克)의 세계관입니다.

 

세상을 이런 식으로 보는 믿음은 결국 우리를 방어적인 사람, 일종의 피해망상증 환자로 만들기 쉽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면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우리를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노심초사하며 사느라,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한없이 고달프게 되고 맙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데서 온 비극적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두 번째 방법은 세상을 아름다운 것, 좋은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있는 것, 우리를 ‘살리기 위한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상생(相生)의 세계관입니다. 성경적 용어로 말하면, 세계를 신묘막측한 것으로, 은혜스러운 것으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모두에게 때를 따라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보살피시는 세계로 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세계관, 이런 실재관을 가지고 있으면 넉넉해질 수 있습니다. 자유와 기쁨과 평화와 사랑으로 특징지워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 외의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나도 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상호의존, 상호연관의 원리로 세계를 바라보므로, 화해와 조화의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믿음, 확신, 세계관이 있을 때 하나님께, 혹은 우주의 원리에 나를 턱 맡길 수 있는 신뢰로서의 믿음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적극적 세계관에 입각한 올바른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될까? 여기에 기도라든가 성경 공부라든가 예배 등과 같은 종교적 “실천과 수행”의 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사물을 바르게 보는 ‘관(觀, visio)’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략 이렇게 믿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 무조건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목사님 등 어느 분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올바른 태도였던가 우리 스스로 자문해볼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 셈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처음 믿음’을 고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처럼 자라나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믿음이 줄 수 있는 청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기도

믿음의 주 되신 하느님, 저희들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옵니다. 저희들에게 참된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실상을 그대로 뚫어 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시므로 당신이 저희 안에, 저희가 당신 안에 있음을 보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당신과 우리, 그리고 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믿음을 가질 때 누릴 수 있는 의연하고 당당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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