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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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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년 5월6일 http://dabia.net/xe/590647 |
정용섭 목사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요한복음 15:1-8, 부활절 다섯째 주일, 2012년 5월6일
전체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4권이 예수님의 공생애를 서술한 복음서입니다. 각각의 복음서에 특징이 있습니다. 그중에 요한복음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예컨대 “나는 ....이다.”고 하는 정형화된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요 15: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에고 에이미 헤 암펠로스 헤 알레티네...”(나는 참포도나무요...) 포도나무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 포도나무는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했습니다. 포도주는 일상적으로 마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구약성경에도 포도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도 포도나무와 관련된 게 많습니다. 특히 포도나무는 포도주가 사용되는 성찬예식과 깊이 연관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라는 멘트는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것은 내 몸이요, ... 이것은 내 피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마 14:22, 24) 기독교인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생명을,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말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이것은 우선 구원이 나사렛 예수라는 인격체에게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구원의 토대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신앙의 중심을 세우기 위해서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컨대 불교 신자들에게 부처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부처의 깨달음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절대적입니다. 이런 신앙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기에 대한 관심이 본능적으로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런 신앙적 태도는 두 가지 극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예수 영접’에만 초점을 두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대세입니다. 이들은 예수 영접이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삽니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자기에 대한 관심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그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아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단순히 그를 믿고 있다는 자기 자신을 확대하고 강화하는 일에 매달리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불가능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과 사회의 변화에만 초점을 두는 신앙행태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믿음보다는 그 믿음에 걸맞은 변화된 삶이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다는 말만 크게 할 뿐이지 실제 삶은 세속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결국은 예수 영접에만 몰입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예수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구원 문제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그에게서 일어난 사건에 집중했습니다. 그와의 일치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구원은 ‘extra nos’(우리 밖에서), 그리고 ‘in Christo’(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종교 의식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이 세례이며, 그 세례의 반복이 성만찬입니다.
오늘 본문도 반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기독교인은 포도나무인 예수에게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쓸모없는 가지가 되어 불에 태워집니다. 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7절에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런 말씀은 기독교인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상호내주(相互內住)를 가리킵니다. 이런 상호내주 사상은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바울 신학 사상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즉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사전적인 의미는 어렵지 않지만 실제적인 의미나, 더 나가서 그것에 대한 경험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늘 상대방을 그리워하듯이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감정이라는 것이 늘 옳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빠부대 소녀들이 스타들의 공연을 위해서 밤새도록 줄을 서면서 느끼는 감정은 허상일 가능성이 많은 것과 비슷합니다. 예배, 기도, 묵상, 찬송 등등의 경건생활에 열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경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 교회에 가서 살든지, 매일 성경을 끼고 삽니다. 이런 경건생활이 중요하긴 합니다. 사람은 이런 종교형식을 통해서 본질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내가 늘 붙어산다고 해서 일치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경건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완전히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이름으로 사회봉사에 매달립니다. 일종의 휴머니즘의 발현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희생적인 박애주의도 이기심의 발로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꿈이나 환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거나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증거일까요? 우리는 위에서 열거한 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객관적인 사건으로 증거를 삼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가지에 열매가 많이 맺혔는지를 보면 됩니다.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다 하면서 아무런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허무한 주장이 되고 맙니다. 열매를 보면 가지 상태를 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도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나무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좋은 나무라는 게 증명된다는 말씀을 사람들은 믿음도 좋고, 삶의 행위도 좋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비교적 건강한 교회로 이름이 있는 교회는 이 두 가지를, 즉 믿음과 행위, 또는 칭의와 성화를 강조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기독교인은 이 두 가지에 매진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나무와 열매의 비유가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인지를 보십시오. 이 비유는 거짓 선지자들을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나무와 열매의 비유는 일반 대중에게 필요한 말씀이 아닙니다. ‘네 행동에 네 믿음이 다 드러나니까 똑바로 살아!’ 하고 윤리적으로 충고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순간에도 도덕군자처럼 가르치시거나 행동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짓선지자들을 향한 비판입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그들의 말에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마 11:28)는 말씀에 나오는 수고와 무거운 짐은 당시 종교 권력자들이 내세운 율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는 율법 주장에 현혹당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일치의 존재론적 능력
잘 기억하십시오. 본문에서 열매를 많이 맺으라고 말한 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이 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주장입니다. 일반 도덕 윤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열매 자체가 아니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전제 조건이 그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열매를 맺느냐 아니냐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당연히 포도를 맺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아닌지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앞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확인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열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바람처럼 임의로 움직이는 생명의 힘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람을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불게 할 수 없습니다. 바람은 스스로 붑니다. 생명의 힘인 성령도 그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령이여, 오소서!’ 하고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과 일치한다는 것이 마음을 먹는다고 됩니까? 너무 거리가 먼 걸로 느껴질 겁니다. 그 의미는 대충 알 수 있지만, 믿는 시늉은 할 수 있지만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건 전혀 다른 겁니다. 성령이 창조의 영이고, 종말의 영이며, 진리의 영이고, 생명의 영이라는 사실을 낱말 뜻으로는 알지만 그런 앎과 일치해서 사는 건 다른 차원입니다. 그 다른 차원의 삶은 성령 충만으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존재론적 능력인 성령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 영이 우리에게 임해야만 우리는 부활의 그리스도와 일치될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일까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도하기만 하면 될까요? 이 부분은 아무래도 비유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시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억지로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언어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시가 자기에게 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청년이 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는 좋은 시를 읽고 쓰고 외우는 것입니다. 좋은 시는 이미 검증이 끝난 것들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 청년은 언어와 일치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그는 좋은 시를, 좋은 열매를 자연스럽게 맺을 수 있습니다. 그건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됩니다. 여러분의 삶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실 겁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잠시 흉내를 내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근원에서, 즉 영혼의 깊이에서 주어지는 것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마음을 더 두십시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그렇습니다. 생명의 근원과 붙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모든 일은 허무할 뿐입니다. 교향악단 단원들이 악보에 집중하지 않으면 아무리 개인기가 뛰어나더라도 잡소리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곧 열매입니다. 생명의 열매입니다. 그와의 일치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즉 구원을 얻습니다. 아니, 이미 얻었습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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