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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예수 제자로 살기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941 추천 수 0 2012.06.11 20: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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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7:6-1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년 5월20일 http://dabia.net/xe/593035 

jys.jpg 정용섭 목사

 

세상에서 예수 제자로 살기

요한복음 17:6-19,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2년 5월20일


 공관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종종 조용한 곳에 홀로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전합니다.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예수님 당신이 스스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습니다. 단 한 군데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가능하면 십자가 사건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막 14:36) 아주 짤막한 기도입니다.

 

이에 반해서 요한복음 기자는 오늘 설교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아주 긴 기도문을 실었습니다.(요 17:1-26) 요한복음은 모든 부분에서 공관복음과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말씀입니다. 기원후 100년 전후입니다. 그 시절은 이미 예루살렘 교회가 힘을 잃고 이방인 교회가 주류 교회로 자리를 잡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는 당시 헬라파 교회의 상황이 크게 반영되었습니다. 그 상황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기도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기독교인의 형편이 어떤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크게 세 대목으로 구성됩니다. 1)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을 다 이룬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1-5). 2)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 3) 제자들 이후의 기독교인들을 위한 기도(20-33).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즉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입니다. 이게 요한공동체에게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그런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형식적인 기독교인에 불과하겠지요. 우리는 어떤 쪽에 속합니까?


 

세상과의 충돌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한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고 제자들만 홀로 세상에 남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를 남겨두고 죽을병에 걸린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린 자녀들이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요 17:11,13)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이런 염려는 노파심처럼 들립니다. 제자들도 이미 어른들이고, 요 16장에서 이미 성령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하셨으니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역사에 자리 잡는 동안 위기가 많았습니다.

 

초기 기독교에 닥친 위기 중의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부터 왔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귀한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에서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만으로는 교회가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이게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다른 종교는 창시자의 가르침만으로 유지될 수 있지만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독교인답게 살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이 중요하긴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를 그 정체성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의 차원이 아니라 ‘무엇’의 차원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사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핵심입니다. 방법론의 문제(how)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what, 혹은 to be)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 믿음이 바로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너무 관념적이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더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사태를 말하는 겁니다. 쉽게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실 겁니다. 세상살이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각자 처한 상황도 다르고 그것에 대한 판단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 무저항 윤리, 비폭력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감옥에 갈지언정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옳은지, 분단체제에서는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군대에 가야하는지, 그렇게 분명하게 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작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생명을 부지하려면 숨을 쉬어야 하듯이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만이 구원의 길로 믿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은 지금 부활 승천 이후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마음으로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그의 말씀을 단순히 기억하면 될까요? 성찬식을 바르게 거행하면서 예배만 잘 드리면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게 될까요? 흔하게 말하듯이 성령을 받으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이 세 가지 질문은 신학적으로도 중요하고, 기독교의 삶에서도 중요합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신앙적으로 사는 것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적으로 무장해도 끊임없는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오늘 본문은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17:14)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과의 충돌입니다. 이게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요한공동체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전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기독교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을 받기 전까지 그 시대정신인 로마와 계속해서 충돌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순교의 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거창한 순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이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가르침이 유대교 권력자들과 로마정치 권력자들에게 불편했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이상하게 생각되실 겁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전하시고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전하셨는데 사람들이 왜 불편해했느냐고 말입니다.

 

진리 앞에서 진리 아닌 것은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안식일 논쟁만 해도 그렇습니다.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지 말고 그 다음날 고쳤으며 유대교 당국자도 좋고 예수님에게도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비를 걸려면 걸어봐라 하는 식으로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지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충돌은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처럼 개신교회도 교회의 보편성과 단일성을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이 많을 겁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목사의 사례비에 차이를 두지 않는 제도나 담임 목사를 청빙이 아니라 파송 식으로 바꾸는 제도를 누가 반대할지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 말씀대로 산다면 당연히 미움을 당하게 될 겁니다. 거꾸로 미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금의 맛을 잃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공동체의 영적 실존은 바로 오늘 우리의 영적 실존과 같습니다.


거룩한 존재

 

충돌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과 계속해서 싸워야 할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싸움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일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지 않도록 하는 일을 위해서,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악한 힘에 대항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싸움에만 매달리는 것으로는 기독교인으로 사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오히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롬 12:17) 아무리 명분이 있는 싸움이라고 해도 세상에서의 싸움은 결국 가시적인, 불가시적인 폭력을 수반하게 됩니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그것을 거부하고 살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할까요? 무조건 참으라는 말씀인가요? 세상을 너무 나이브하게 보고 있는 걸까요?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6)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고유한 통찰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바울은 이렇게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미움당하는 것은 별로 심각한 문제가 못 됩니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서로 싸우면서 노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집에서 사랑을 받는 아이라고 한다면 비록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이런 말씀이 오해될 수 있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세상일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산신령처럼 살아갑니다.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것처럼 사는 겁니다. 주로 밀의적인 소종파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정통교회의 신자들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철저하게 교회의 프로그램에만 매몰되어 있는 신앙이 그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 그 기도를 19절에서 반복하셨습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세상 안에 있지만, 당연히 세상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 안에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밖이 아니라 안에서의 거룩한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진리로 거룩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로 거룩해진다는 말이 혹시 복잡하게 들리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성경은 전혀 복잡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추상적이지도 않습니다. 명백합니다. 다만 우리의 안목이 다른 것에 길들여져서 그 말씀을 외면하거나 오해하는 게 문제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스스로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거룩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인정하실 때만 우리는 거룩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초보와 연관됩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가르침이 초보입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곧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의로워지고, 거룩해집니다. 너무 간단해서 시시한가요?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고, 가장 명백한 현실입니다. 이 사실을 명백하게 깨달은 사람은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신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복음 공동체는 제자로 산다는 것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민조차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없으면 신앙의 성장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다시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이 제자로 사는 출발은 진리로 거룩해지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의로워지고 거룩해졌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미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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