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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5: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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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6.10.22/ 2006.10.23/ 2006.10.24 |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1)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기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0,21)
많은 신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가면서 종 셋을 불러 각각 금 다섯, 두, 한 달란트를 맡기고 갔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오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을,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둘을 남겨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에 파묻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조금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남긴 자나 두 달란트 남긴 자에게 주인이 똑 같이 충성했다고 칭찬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둘 다 “작은 일”이라고 했을까요? 다섯은 분명 둘의 두 배 반이나 되며 또 아무리 비유라고 하지만 당시 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인데도 말입니다. 두 달란트 남긴 자는 몰라도 다섯 달란트 남긴 자에게는 최소한 많이 충성했다든지 수고가 많았다는 식으로 좀 더 칭찬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비유의 초점은 얼마를 남겼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가를 따진 것입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은 종에게는 게을렀다고 야단 쳤습니다. 다른 두 종에게 충성했다는 말은 결국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게으름을 예수님은 심지어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작은 일”이라고 표현한 정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주인이 처음 달란트를 나눠줄 때에 “그 재능대로” 맡겼습니다. 주인은 각자가 최소한 받은 정도는 다시 남길 재능이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우열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재능이 각자 다 다르다는 것을 수치로 표현하다보니 차이가 났을 뿐입니다. 자기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또 그 재능 밖의 일은 하지 않았기에 작은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받은 재능에 맞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선 작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성실하게 산 수고를 하나님이 몰라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자기 재능에 맞추어 사는 것이 가장 기본이며 그것은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라면 최소한 아니 반드시 자기 재능대로는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생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현재 잘나가는 직업이니까, 단순히 자기가 해 보고 싶으니까, 부모나 아내가 강요하니까, 등등의 이유로 자기 재능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서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한 인생은 자기 재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어떤 일을 해보고 싶다는 소원 하나 없이 허비하는 인생도 많습니다. 재능대로 살지 못하면 무리수를 사용하게 됩니다. 소원이 없이 살면 열정이 안 생깁니다. 둘 다 힘들게 살 수밖에 없고 심지어 무리하다가 죄악이 따라 붙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신자는 그렇게 실패하는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정말 인간답게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절대로 허비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한 번밖에 기회가 없어 되돌림은 전혀 안 되고 수정이나 변경을 하기에는 여유가 넉넉지 않는 아주 짧은 것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기에 게으름을 부릴 수 없고 또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는 당사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여 그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기 전에는 그 일에 가치가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인생이 성실히 살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아무리 죄를 안 짓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봤자 여전히 허공을 치는 것이며 향방을 모르는 달음질일 뿐입니다.
신자는 또 자기가 하나님에게 무슨 재능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아 그것을 자기 소망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인생에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한번 밖에 살지 못할 인생에서 자기 재능을 과연 어떤 가치로 창출해낼 것인가에 관한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현실의 직업을 통해 자기 재능을 사용하여 참된 가치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평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 정해졌고 그 일을 열심히 하느라 시간이 아까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 소망은 반드시 자기 재능과 연관된 것이라야 합니다. 노래 솜씨라고는 없는 음치가 가수가 되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옷을 입을 때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나머지 모두 계속 우스꽝스런 모습이 될 때는 한 시라도 빨리 첫 단추를 풀어서 바로 끼어야 합니다. 자기 재능과 관계없는 일을 하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재능과 상관없는 소명을 먼저 주신 후에 그것을 이룰 능력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주로 복음의 전문사역자로 부름 받을 때에 일어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상 실력과는 상관없이 정말 하늘로부터 받은 진리의 말씀으로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재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전할 말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역을 세부적으로 수행할 때는 전문사역자에게도 각자의 재능에 적합한 일을 맡기십니다. 어쨌든 모든 성도에게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게 하십니다.”(빌2:13) 요컨대 자기 재능을 발휘해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작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로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일이 결코 뒷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재능이란 남들보다 앞선 부분입니다. 따라서 그 범위 내에서만 살아도 남들보다 그 분야에선 앞설 수 있고 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능률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구태여 무리수나 부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착하게 살면서 이웃을 돕고 전체 사회에 득이 되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하나님은 신자보다 오히려 불신자더러 당신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불신자가 당장에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그분의 일을 하면서 영광을 돌릴 리는 만무합니다. 그들이 신자의 착한 행실을 보고 “역시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 다르군요. 나도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거창한 종교적 일을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받은 재능을 살려 자기 직업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장 근본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으면 한 달란트 남기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정말 자기 삶의 현장에서 전혀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 성실하고 착하게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지금처럼 교회에 모여 종교적 일에 열심을 내는 것과 과연 어느 쪽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이 비유는 예수님이 천국에 관해 하신 것으로 재능대로 성실하게 산 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죽으면 하나님이 가장 먼저 묻는 말이 “예수를 잘 믿었는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었으니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대신에 “몇 달란트 남겨 왔느냐?”라고 묻습니다. 그 때에 자기 받은 만큼 남긴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렇지 못하면 신자 쪽에서 먼저 부끄러워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당신은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혹시 악한 일에 몰두해 있는 것 아닙니까? 추악한 죄악에 빠져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한 번뿐인 이 짧은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재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 소망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라.”(롬12:3)
10/22/2006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2)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기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0,21)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려한 조명 속에서 사람들에게 각광 받는 큰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그런 마음이 좀체 없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아무 조건 없이 이웃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선뜻 생기지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라는 뿌리 깊은 원죄의 잔재가 여간해선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교회 건축 같은 일에는 수 천 만원도 헌금하지만 길거리 걸인에게는 단돈 천원 주기를 아까워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저들 뒤에 폭력배가 있으니 차라리 안 도와주는 것이 나을지 몰라” 또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동냥이나 하고 있어. 아예 모른 척해야 정신을 차릴 거야” 식의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물론 한 편으로는 그런 면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사람을 도와줘 봐야 아무 보상을 받을 수 없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더 큽니다. 한 마디로 큰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TV 방송국에서 모금만 하면 몇 시간이고 줄 서서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어도 두 달란트 남긴 자와 똑 같이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의 중요도를 수치로 측량할 수 있는 세상 가치의 경중(輕重)으로 구분 짓습니다. 하나님은 대신에 게으르지 않는 것, 즉 맡은바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느냐로 따진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작은 일은 어떤 것들입니까? 수위, 환경미화원(청소부), 우편배달부, 버스운전수 등등입니다. 정말 누구나 큰 기술 없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보수도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한 자들을 더 크게 보십니다. 하나님이 박봉으로 힘들게 사는 것을 불쌍하게 여긴 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 큰 충성이 요구되는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 일을 하는 기능은 별 것 아니라도 전혀 게으름을 피워선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최고로 힘든 일입니다. 아무나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나아가 그 일이 이뤄내는 결과도 아주 큽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존 교회 건물을 헐고 새로 수백억 들여서 짓는 일과 길거리 청소부의 일주일 분의 일과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청소부가 일주일만 일 안 해도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큽니다. 반면에 교회 건물을 새롭게 거창하게 지으면 좋겠지만 구태여 안 지어도 옛날 건물에서 사역하는 데 큰 불편이 없으면 그만입니다.
세상에서 화려하게 조명 받는 일은 누군가가 언제든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기에 누가 권면 안 해도 합니다. 신자가 나서서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대신에 정말 구석진 곳에서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보잘 것 없고 고달프며 성과가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런 일을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할 수 있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그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확고한 소명의식에서만 나옵니다. 그 일을 할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철저한 인식이 없이는 절대 충성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선하고 의미 있다는 생각만으로 안 됩니다. 음지의 궂은 일은 불신자라도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도덕적 의미 외에 그 일에 자기의 전부를 걸어도 될 만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알기 쉽게 자기 생명과 맞바꾸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고 또 꼭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시키신 일(천직의식)임에 전혀 의심이 없고 또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겠다는 헌신(소명의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불신자도 음지에서 고생하는 선한 일을 하며 어떤 때는 자기 목숨도 바칩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아주 드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고 항상 그 자신의 이름이 납니다. 심지어 일부러 이름을 내기 위해 음지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자기는 완전히 죽고 오직 주님의 이름만 드러나야 합니다. 빌딩 수위를 하면 근무시간, 순찰시간을 칼 같이 잘 지켜야 합니다. 신자 수위가 경비서는 날은 사장이하 전 직원이 안심하고 퇴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장이 밤에 불시에 근무태도를 점검해 볼 필요조차 없어야 합니다.
나아가 평소 언행이 아주 인자하고 예의 발라서 그 품성으로도 회사 직원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박봉에도 항상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야 하고 아내와 자녀들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기도와 말씀으로 이겨내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찾아가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이름이 추켜세워지는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정말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했습니다.(고전4:1) 다른 사람들이 신자를 보고 마땅히 그렇게 여길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해야 할 것은 충성인데(2절),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을”(5절)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에 단순히 선하게 살았는지 악한 짓을 많이 했는가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생전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석진 곳에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궂은일을 한 동기마저 하나님은 다 꿰뚫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스포트라이트가 비취는 무대 복판에서 서서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 살았던 인생인지 아닌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있습니까? 신자의 충성도는 맡은 직분을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만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각광을 받고 싶어서 한 일이라면 아무리 하나님에게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하나님의 일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어도 여전히 악하고 게으른 종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면 정작 그분의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지 않습니까? 오직 목사 아무개, 선교사 아무개, 장로 아무개의 일만 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할 것은 신자 본인입니다. 섞어질 것 같은 일을 했다고 밀알 자체가 썩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구석진 곳에서 아무나 쉽게 하기 힘든 일을 했어도 얼마든지 밀알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밀알은 반드시 땅에 파묻혀 완전히 죽어야만 밀알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자문(自問)해 봅시다. 지금 하나님의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주위에 내 자신을 향해 설치된 모든 조명등과 마이크 시설과 심지어 무대마저 다 걷어치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과연 충성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10/23/2006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3)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기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0,21)
인간은 얼마나 게으른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저 하는 일 없이 놀고먹고 싶은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데도 하지 않는, 아니 해보지도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그것을 전부 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서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는 핑계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사랑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한 가지 일을 돌보는 것부터라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무엇인가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도 작은 일 하나부터 일단 시작하고 보아야 합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밀물로 떠밀려온 불가사리가 햇볕에 말라가자 한 노인이 하나씩 집어서 바다로 던져 넣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청년이 “여기에 수백 마리가 넘는 불가사리가 있는데 당신이 그런다고 무슨 큰 차이가 있겠소?”라고 빈정거렸습니다. 노인이 “바로 이것에게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법이네”라고 대답하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노인으로선 수백 마리를 다 살려주는 큰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나는 그 한 마리에겐 생명이 오고가는 너무나 아니 제일 큰일이 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닮아 남을 돕고 싶은 애끓는 심정을 갖고 있어도 모두를 다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보다는 한 명을 도와주는 것이 낫습니다.
다 도와줄 수 없으니, 끝까지 책임질 수 없으니 차라리 안 도와주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형편만 생각한 것에 불과합니다. 상대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도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해 종일을 굶어야 했던 노숙자에게 단돈 천원은 엄청난 역할을 합니다. 따뜻한 호빵에 우유 한 잔이라도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만은 세상의 어떤 최고급 호텔의 뷔페 식사보다 더 맛있고 풍성한 식탁이 될 수 있습니다.
현세대의 가장 큰 문제를 사랑이 실종된 무관심이라고들 말합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의 Life Style이 삼시 세끼만 채워도 행복했던 시절과는 달라졌습니다. 사람마다 반드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활동들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너무나 다양해졌습니다. 그래서 정말 한두 개 도와주어 보아야 실제로 별다른 도움이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모든 사람이 내가 사랑을 다 할 수 없으니 아예 아무에게도 사랑을 베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혀 서로 돌보지 않는 무관심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무언(無言)중에 모두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며 살기로 약정을 맺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도 냉철해진 개인들이 따로따로 모인 곳입니다. 아예 공동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지금의 세상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반면에 모든 사람이 나는 다 할 수 없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사랑만이라도 베풀겠다고 하는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작은 사랑이 또 다른 작은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여지는 아름답고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진정한 공동체가 됩니다.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이뤄내어야 할 사회가 아닙니까?
이처럼 한 공동체가 극과 극의 반대가 될 만큼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품성이나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과 게으르지 않는 것의 아주 단순한 차이뿐입니다. 그것도 자기 주위에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사랑 하나라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쉬운 예로 제가 이민 와서 처음 10년간을 살았던 곳이 몰몬교도들의 천국으로 거의 백인들만 모여 사는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였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이단이지만 그들에게는 항상 “Thank you"와 "Excuse Me"가 완전히 입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서 말입니다. 이국땅에서 이단들에 둘려 싸여 살았지만 불편하거나 기분 나쁘다는 심정을 거의 못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곳 LA에서의 사정은 판이합니다. 백인들은 조금 덜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주쳐도 얼굴이 잔뜩 궂어진 채 "하이”도 잘 하지 않습니다. 괜히 불안하고 저까지 상이 궂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그 품성이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거듭난 신자라도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모두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회복은 안 되었지만 조금은 회복되었습니다. 완전하게 사랑은 못해도 조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조금은 할 수 있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게으르지 않는 것이자 충성된 것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다 순교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게으르지 말라고만 하십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거듭날 때에 그 사랑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 자체에 확대재생산 되는 능력이 이미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베풀기 시작하면 그 감화력과 영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기에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일로 변합니다. 그래서 신자더러 아주 작은 사랑부터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면 또 다시 교만의 극치에 올라 하나님을 외면할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는 사랑은 하나님 당신의 고유의 품성이지 인간 본연의 품성이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의 영역 안에서 그분이 이끄는 대로 그분의 사랑을 갖고 그분이 지정한 일과 사람에 전해주는 배달꾼의 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도 배달꾼 노릇이 하기 싫어서 게으름을 부립니다. 배달꾼으로는 마음에 안 차고 자기가 직접 큰일을 해보고 싶은 뿌리 깊은 원죄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재능을 아무리 다섯 달란트만큼 많이 갖고 있어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나눠준 것입니다. 그분의 뜻과 방법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일단 사용만 하면 그분이 알아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게으르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개인의 게으름과 성실함의 차이도 개인의 품성과 능력의 차이에서 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열매를 맺고 자기가 따 먹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돌릴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공로와 명예와 이득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일을 게을리 할 바보는 없습니다. 반면에 전혀 그렇지 않는데도 열심을 내는 바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아주 작은 일부터 자기가 이미 받은 재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 되는 일을 일단 시작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오직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공로나 명예나 보상이 따라 오지 않아도 해야 됩니다.
물론 그 일과 그 사람을 신자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만 믿고 주님의 사랑으로 하는 일에는 주님의 권능과 감화력이 반드시 따라 옵니다. 당장 눈에는 안 보이지만 엄청나게 큰일이 배후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혹시 게으름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충성하고 있습니까? 또 다시 얼마나 종교적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지를 가지고 제발 판단하지 마십시오. 신자의 게으름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길 믿음이 모자라니까 선뜻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걱정과 염려가 앞서며 또 혼자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아 지금 당장 반드시 해야 할 아주 작은 일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결코 힘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모든 것을 다 바쳐 희생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니까 힘든 것뿐입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보다는 단 한 명이라도 도와주는 것이 낫다고 확신하는 것이 충성의 시작입니다. 자기 재능으로는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라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부터 시작하면 아주 크게 충성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책임져 주고 모든 사람을 돌보실 이는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아직도 게으름에 빠져 있습니까?
10/2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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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기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0,21)
많은 신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가면서 종 셋을 불러 각각 금 다섯, 두, 한 달란트를 맡기고 갔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오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을,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둘을 남겨서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에 파묻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조금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남긴 자나 두 달란트 남긴 자에게 주인이 똑 같이 충성했다고 칭찬한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둘 다 “작은 일”이라고 했을까요? 다섯은 분명 둘의 두 배 반이나 되며 또 아무리 비유라고 하지만 당시 달란트는 엄청난 액수인데도 말입니다. 두 달란트 남긴 자는 몰라도 다섯 달란트 남긴 자에게는 최소한 많이 충성했다든지 수고가 많았다는 식으로 좀 더 칭찬해주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 비유의 초점은 얼마를 남겼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가를 따진 것입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은 종에게는 게을렀다고 야단 쳤습니다. 다른 두 종에게 충성했다는 말은 결국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게으름을 예수님은 심지어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작은 일”이라고 표현한 정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주인이 처음 달란트를 나눠줄 때에 “그 재능대로” 맡겼습니다. 주인은 각자가 최소한 받은 정도는 다시 남길 재능이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우열의 차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재능이 각자 다 다르다는 것을 수치로 표현하다보니 차이가 났을 뿐입니다. 자기 재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또 그 재능 밖의 일은 하지 않았기에 작은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에게 받은 재능에 맞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선 작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성실하게 산 수고를 하나님이 몰라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자기 재능에 맞추어 사는 것이 가장 기본이며 그것은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라면 최소한 아니 반드시 자기 재능대로는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생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현재 잘나가는 직업이니까, 단순히 자기가 해 보고 싶으니까, 부모나 아내가 강요하니까, 등등의 이유로 자기 재능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서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불행한 인생은 자기 재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을 때까지도 자기가 어떤 일을 해보고 싶다는 소원 하나 없이 허비하는 인생도 많습니다. 재능대로 살지 못하면 무리수를 사용하게 됩니다. 소원이 없이 살면 열정이 안 생깁니다. 둘 다 힘들게 살 수밖에 없고 심지어 무리하다가 죄악이 따라 붙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신자는 그렇게 실패하는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정말 인간답게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절대로 허비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한 번밖에 기회가 없어 되돌림은 전혀 안 되고 수정이나 변경을 하기에는 여유가 넉넉지 않는 아주 짧은 것임을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기에 게으름을 부릴 수 없고 또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하는 당사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여 그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기 전에는 그 일에 가치가 절대 생기지 않습니다. 인생이 성실히 살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없이는 아무리 죄를 안 짓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봤자 여전히 허공을 치는 것이며 향방을 모르는 달음질일 뿐입니다.
신자는 또 자기가 하나님에게 무슨 재능을 받았는지 정확히 알아 그것을 자기 소망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인생에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한번 밖에 살지 못할 인생에서 자기 재능을 과연 어떤 가치로 창출해낼 것인가에 관한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현실의 직업을 통해 자기 재능을 사용하여 참된 가치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평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 정해졌고 그 일을 열심히 하느라 시간이 아까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건대 그 소망은 반드시 자기 재능과 연관된 것이라야 합니다. 노래 솜씨라고는 없는 음치가 가수가 되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옷을 입을 때에 첫 단추를 잘못 끼워 나머지 모두 계속 우스꽝스런 모습이 될 때는 한 시라도 빨리 첫 단추를 풀어서 바로 끼어야 합니다. 자기 재능과 관계없는 일을 하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재능과 상관없는 소명을 먼저 주신 후에 그것을 이룰 능력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주로 복음의 전문사역자로 부름 받을 때에 일어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세상 실력과는 상관없이 정말 하늘로부터 받은 진리의 말씀으로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재능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전할 말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역을 세부적으로 수행할 때는 전문사역자에게도 각자의 재능에 적합한 일을 맡기십니다. 어쨌든 모든 성도에게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게 하십니다.”(빌2:13) 요컨대 자기 재능을 발휘해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작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신자로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는 일이 결코 뒷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재능이란 남들보다 앞선 부분입니다. 따라서 그 범위 내에서만 살아도 남들보다 그 분야에선 앞설 수 있고 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능률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구태여 무리수나 부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착하게 살면서 이웃을 돕고 전체 사회에 득이 되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하나님은 신자보다 오히려 불신자더러 당신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불신자가 당장에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그분의 일을 하면서 영광을 돌릴 리는 만무합니다. 그들이 신자의 착한 행실을 보고 “역시 하나님을 믿는 신자라 다르군요. 나도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거창한 종교적 일을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받은 재능을 살려 자기 직업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장 근본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으면 한 달란트 남기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정말 자기 삶의 현장에서 전혀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 성실하고 착하게 산다고 가정해봅시다. 지금처럼 교회에 모여 종교적 일에 열심을 내는 것과 과연 어느 쪽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이 비유는 예수님이 천국에 관해 하신 것으로 재능대로 성실하게 산 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죽으면 하나님이 가장 먼저 묻는 말이 “예수를 잘 믿었는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믿었으니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대신에 “몇 달란트 남겨 왔느냐?”라고 묻습니다. 그 때에 자기 받은 만큼 남긴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렇지 못하면 신자 쪽에서 먼저 부끄러워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당신은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혹시 악한 일에 몰두해 있는 것 아닙니까? 추악한 죄악에 빠져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한 번뿐인 이 짧은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재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 소망조차 없는 것은 아닌지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해라.”(롬12:3)
10/22/2006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2)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기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0,21)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려한 조명 속에서 사람들에게 각광 받는 큰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그런 마음이 좀체 없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아무 조건 없이 이웃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선뜻 생기지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이라는 뿌리 깊은 원죄의 잔재가 여간해선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로 교회 건축 같은 일에는 수 천 만원도 헌금하지만 길거리 걸인에게는 단돈 천원 주기를 아까워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저들 뒤에 폭력배가 있으니 차라리 안 도와주는 것이 나을지 몰라” 또는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동냥이나 하고 있어. 아예 모른 척해야 정신을 차릴 거야” 식의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물론 한 편으로는 그런 면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사람을 도와줘 봐야 아무 보상을 받을 수 없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더 큽니다. 한 마디로 큰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TV 방송국에서 모금만 하면 몇 시간이고 줄 서서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어도 두 달란트 남긴 자와 똑 같이 작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의 중요도를 수치로 측량할 수 있는 세상 가치의 경중(輕重)으로 구분 짓습니다. 하나님은 대신에 게으르지 않는 것, 즉 맡은바 일을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느냐로 따진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작은 일은 어떤 것들입니까? 수위, 환경미화원(청소부), 우편배달부, 버스운전수 등등입니다. 정말 누구나 큰 기술 없이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 보수도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한 자들을 더 크게 보십니다. 하나님이 박봉으로 힘들게 사는 것을 불쌍하게 여긴 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 큰 충성이 요구되는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 일을 하는 기능은 별 것 아니라도 전혀 게으름을 피워선 안 되기 때문에 오히려 최고로 힘든 일입니다. 아무나 쉽게 해낼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나아가 그 일이 이뤄내는 결과도 아주 큽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존 교회 건물을 헐고 새로 수백억 들여서 짓는 일과 길거리 청소부의 일주일 분의 일과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청소부가 일주일만 일 안 해도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큽니다. 반면에 교회 건물을 새롭게 거창하게 지으면 좋겠지만 구태여 안 지어도 옛날 건물에서 사역하는 데 큰 불편이 없으면 그만입니다.
세상에서 화려하게 조명 받는 일은 누군가가 언제든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일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기에 누가 권면 안 해도 합니다. 신자가 나서서 안 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대신에 정말 구석진 곳에서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보잘 것 없고 고달프며 성과가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런 일을 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할 수 있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 그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확고한 소명의식에서만 나옵니다. 그 일을 할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철저한 인식이 없이는 절대 충성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선하고 의미 있다는 생각만으로 안 됩니다. 음지의 궂은 일은 불신자라도 도덕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도덕적 의미 외에 그 일에 자기의 전부를 걸어도 될 만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해야 합니다. 알기 쉽게 자기 생명과 맞바꾸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고 또 꼭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시키신 일(천직의식)임에 전혀 의심이 없고 또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내겠다는 헌신(소명의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불신자도 음지에서 고생하는 선한 일을 하며 어떤 때는 자기 목숨도 바칩니다. 그러나 그런 분은 아주 드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고 항상 그 자신의 이름이 납니다. 심지어 일부러 이름을 내기 위해 음지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신자는 달라야 합니다. 신자라면 누구라도 자기는 완전히 죽고 오직 주님의 이름만 드러나야 합니다. 빌딩 수위를 하면 근무시간, 순찰시간을 칼 같이 잘 지켜야 합니다. 신자 수위가 경비서는 날은 사장이하 전 직원이 안심하고 퇴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장이 밤에 불시에 근무태도를 점검해 볼 필요조차 없어야 합니다.
나아가 평소 언행이 아주 인자하고 예의 발라서 그 품성으로도 회사 직원들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박봉에도 항상 감사하며 즐겁게 살아야 하고 아내와 자녀들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기도와 말씀으로 이겨내고 자기보다 못한 자를 찾아가 도와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자기 이름이 추켜세워지는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정말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라고 했습니다.(고전4:1) 다른 사람들이 신자를 보고 마땅히 그렇게 여길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해야 할 것은 충성인데(2절),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을”(5절)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에 단순히 선하게 살았는지 악한 짓을 많이 했는가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생전의 삶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구석진 곳에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궂은일을 한 동기마저 하나님은 다 꿰뚫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스포트라이트가 비취는 무대 복판에서 서서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 살았던 인생인지 아닌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있습니까? 신자의 충성도는 맡은 직분을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만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각광을 받고 싶어서 한 일이라면 아무리 하나님에게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하나님의 일로 다섯 달란트를 남겼어도 여전히 악하고 게으른 종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도 드러나지 않았다면 정작 그분의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지 않습니까? 오직 목사 아무개, 선교사 아무개, 장로 아무개의 일만 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할 것은 신자 본인입니다. 섞어질 것 같은 일을 했다고 밀알 자체가 썩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구석진 곳에서 아무나 쉽게 하기 힘든 일을 했어도 얼마든지 밀알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밀알은 반드시 땅에 파묻혀 완전히 죽어야만 밀알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자문(自問)해 봅시다. 지금 하나님의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주위에 내 자신을 향해 설치된 모든 조명등과 마이크 시설과 심지어 무대마저 다 걷어치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과연 충성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10/23/2006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는가?(3)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기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25:20,21)
인간은 얼마나 게으른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저 하는 일 없이 놀고먹고 싶은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데도 하지 않는, 아니 해보지도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그것을 전부 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서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다는 핑계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사랑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 한 가지 일을 돌보는 것부터라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무엇인가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손쉽고도 작은 일 하나부터 일단 시작하고 보아야 합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밀물로 떠밀려온 불가사리가 햇볕에 말라가자 한 노인이 하나씩 집어서 바다로 던져 넣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청년이 “여기에 수백 마리가 넘는 불가사리가 있는데 당신이 그런다고 무슨 큰 차이가 있겠소?”라고 빈정거렸습니다. 노인이 “바로 이것에게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법이네”라고 대답하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노인으로선 수백 마리를 다 살려주는 큰일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나는 그 한 마리에겐 생명이 오고가는 너무나 아니 제일 큰일이 됩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닮아 남을 돕고 싶은 애끓는 심정을 갖고 있어도 모두를 다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보다는 한 명을 도와주는 것이 낫습니다.
다 도와줄 수 없으니, 끝까지 책임질 수 없으니 차라리 안 도와주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형편만 생각한 것에 불과합니다. 상대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도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해 종일을 굶어야 했던 노숙자에게 단돈 천원은 엄청난 역할을 합니다. 따뜻한 호빵에 우유 한 잔이라도 마실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만은 세상의 어떤 최고급 호텔의 뷔페 식사보다 더 맛있고 풍성한 식탁이 될 수 있습니다.
현세대의 가장 큰 문제를 사랑이 실종된 무관심이라고들 말합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의 Life Style이 삼시 세끼만 채워도 행복했던 시절과는 달라졌습니다. 사람마다 반드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활동들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너무나 다양해졌습니다. 그래서 정말 한두 개 도와주어 보아야 실제로 별다른 도움이 안 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모든 사람이 내가 사랑을 다 할 수 없으니 아예 아무에게도 사랑을 베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혀 서로 돌보지 않는 무관심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무언(無言)중에 모두 남에게 피해만 주지 말며 살기로 약정을 맺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도 냉철해진 개인들이 따로따로 모인 곳입니다. 아예 공동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지금의 세상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반면에 모든 사람이 나는 다 할 수 없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사랑만이라도 베풀겠다고 하는 사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작은 사랑이 또 다른 작은 사랑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여지는 아름답고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진정한 공동체가 됩니다.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이뤄내어야 할 사회가 아닙니까?
이처럼 한 공동체가 극과 극의 반대가 될 만큼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구성원들의 품성이나 능력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게으름과 게으르지 않는 것의 아주 단순한 차이뿐입니다. 그것도 자기 주위에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사랑 하나라도 실천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쉬운 예로 제가 이민 와서 처음 10년간을 살았던 곳이 몰몬교도들의 천국으로 거의 백인들만 모여 사는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였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이단이지만 그들에게는 항상 “Thank you"와 "Excuse Me"가 완전히 입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서 말입니다. 이국땅에서 이단들에 둘려 싸여 살았지만 불편하거나 기분 나쁘다는 심정을 거의 못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곳 LA에서의 사정은 판이합니다. 백인들은 조금 덜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주쳐도 얼굴이 잔뜩 궂어진 채 "하이”도 잘 하지 않습니다. 괜히 불안하고 저까지 상이 궂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그 품성이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거듭난 신자라도 완전하게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모두를 끝까지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회복은 안 되었지만 조금은 회복되었습니다. 완전하게 사랑은 못해도 조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조금은 할 수 있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게으르지 않는 것이자 충성된 것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다 순교 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게으르지 말라고만 하십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거듭날 때에 그 사랑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 자체에 확대재생산 되는 능력이 이미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베풀기 시작하면 그 감화력과 영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기에 인간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일로 변합니다. 그래서 신자더러 아주 작은 사랑부터 일단 시작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인간에게 완전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면 또 다시 교만의 극치에 올라 하나님을 외면할 것을 하나님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전히 바뀌기 전까지는 사랑은 하나님 당신의 고유의 품성이지 인간 본연의 품성이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의 영역 안에서 그분이 이끄는 대로 그분의 사랑을 갖고 그분이 지정한 일과 사람에 전해주는 배달꾼의 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도 배달꾼 노릇이 하기 싫어서 게으름을 부립니다. 배달꾼으로는 마음에 안 차고 자기가 직접 큰일을 해보고 싶은 뿌리 깊은 원죄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재능을 아무리 다섯 달란트만큼 많이 갖고 있어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나눠준 것입니다. 그분의 뜻과 방법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일단 사용만 하면 그분이 알아서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게으르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한 개인의 게으름과 성실함의 차이도 개인의 품성과 능력의 차이에서 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열매를 맺고 자기가 따 먹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돌릴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공로와 명예와 이득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일을 게을리 할 바보는 없습니다. 반면에 전혀 그렇지 않는데도 열심을 내는 바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아주 작은 일부터 자기가 이미 받은 재능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증거 되는 일을 일단 시작부터 해야 합니다. 지금 만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에게 오직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아무런 공로나 명예나 보상이 따라 오지 않아도 해야 됩니다.
물론 그 일과 그 사람을 신자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만 믿고 주님의 사랑으로 하는 일에는 주님의 권능과 감화력이 반드시 따라 옵니다. 당장 눈에는 안 보이지만 엄청나게 큰일이 배후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혹시 게으름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충성하고 있습니까? 또 다시 얼마나 종교적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지를 가지고 제발 판단하지 마십시오. 신자의 게으름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길 믿음이 모자라니까 선뜻 맡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걱정과 염려가 앞서며 또 혼자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아 지금 당장 반드시 해야 할 아주 작은 일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결코 힘든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모든 것을 다 바쳐 희생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니까 힘든 것뿐입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보다는 단 한 명이라도 도와주는 것이 낫다고 확신하는 것이 충성의 시작입니다. 자기 재능으로는 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라 지금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부터 시작하면 아주 크게 충성한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책임져 주고 모든 사람을 돌보실 이는 하나님이지 우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아직도 게으름에 빠져 있습니까?
10/2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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