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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 類'의 신앙을 벗어나라!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3096 추천 수 0 2012.06.16 23:5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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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3:1-16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0.5.2 http://sungamch.net 

'니고데모 類'의 신앙을 벗어나라!
요3:1-16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유대 의회원입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에 버금가는(당시는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패망과 더불어 율법학자는 사라지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음)역할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는 깍듯한 태도로 추켜세우는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만의 견해가 아니라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표적을 많이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고전1:22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유대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는다." 고 할 만큼 유대 사람들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와 같은 연유로 인해 니고데모는 예수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보고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12:39, 16:4, 막8:12)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니고데모의 그런 말에 예수님이 좋게 반응할리 없었습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가 보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사실 이 말씀은 니고데모의 입장에서 보면 동문서답과 같습니다. 니고데모가 묻지도 않았는데 '하늘나라'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그 추켜세우는 말의 뜻을 간파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의 상식을 따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니고데모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보거나' '하나님을 느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하나님과 관계된 무엇이든' [표적]이 있어야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 역시 [표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표적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표적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도 아니며, 표적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표적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니고데모와 그의 동료들, 유대인들 그리고 오늘날 이와 유사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3절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도 이런 표적을 볼 때만 '하나님을 아는'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결국은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가능하다는 암시입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 대화는 당시대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표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같은 [표적]중심의 믿음 관을 가진 이들을 향해 '니고데모류의 신앙관을 벗어던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표적을 행해야 '하나님의 사람'이고, 표적이 있어야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다고 하는 니고데모에 대해서 표적과 같은 어떤 행위를 해야 되는 게 아니라 [다시 태어나라]고 합니다.

요즘 제가 쓰는 샴푸가 'born again'입니다. 빠진 머리털이 다시 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anothen(다시 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샴푸의 기능이 갖는 '다시 나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다시 난다'라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빠진 머리털을 회복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갓난아이가 새로운 머리털을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다시 난다'입니다. 'born again'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가능하기도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다시 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born again'으로 해석하여, 나쁜 습관을 끊는다든지,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예배당에 열심히 나오면 '아, 그 사람 다시 태어났다'그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anothen(다시 난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anothen(다시 난다)'은 날고 길만한 개인의 적극적이고 기적적인 행위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과 동일시됩니다. 여기서 '성령'이란 앞에서 말한 '인간의 행위'를 거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적하는 니고데모류의 신앙이 갖는 맹점이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맹점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뜻밖의 말을 들은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했습니다. 적어도 니고데모의 이 말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중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뜻 보기에 니고데모의 말은 어리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어리석고 어쩌고를 따지기 이전에 이해 불가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합니다(5). 이것은 예수님이 꼭 집어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니고데모처럼 뭔가 표적으로만 하나님 나라와 연관을 지으려고 하는 사고와 믿음에 대한 바른 가르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나는 것, 또는 위로부터 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며 그것은 육으로 난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6)고 말씀 하고 있죠? 여기서 예수님이 '육'이라는 표현을 하실 때 그것은 영은 귀하게 보고 육체는 천하게 여기던 그리스의 이원론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앞에 등장하는 '니고데모 류'처럼,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이해방식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표적]에 기대고 있는 그들의 믿음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일까요? 높은 도덕적인 수준을 지닌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표적을 행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럴 리 없겠죠?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만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8).

어떻습니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아리송한 말씀이지요? 그러나 그러실 거 없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믿음의 사고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렇게 난해한 말씀이 아닙니다. 절간에 스님들이 내 놓는 화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이게 전부예요. 그러니 성령도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거예요. 실제로 성령의 역사가 바람처럼 아무렇게나 되는 일이라는 게 아니라, 인간들의 정해진 사고틀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너희들처럼 '이건 해야 되고' '저건 말아야 되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일으켜야만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나라고 그렇게 못 박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신이나, 신분이나, 경험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난 사람'이고, 바로 그 사람들이 '위로부터 난'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지닌 종교적인 관성이 너무 오래 되어 견고했기 때문에, 그동안 믿어온 그의 신념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신분과, 경험과, 출신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한 사람들이 '다시 난 사람'이고, '위로부터 난 사람'이고, '성령의 사람'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아마, 요즘으로 치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다니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다'하는 말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그렇게 말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필경 니고데모처럼 처신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이미 종교적인 관성에 빠져서 '육의 사람화'되었기 때문입니다.

10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은 '그럴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유대인의 선생이 되고도 그걸 모르느냐?"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오래 교회 다니고 예수를 배웠으면서도 여태 표적에 근거한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넉넉히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미심쩍은 구석이 많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표적이 아니고 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이 뭔지 알 수 있을 텐데, 성령의 사람은 어디 매인 곳이 없이 자유롭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어떻게 '위로부터 다시 날'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16절이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여기서 '세상'은 니고데모이기도 하고, 아직 자유롭지 못한 육의 법칙에 얽매여 사는 모든 사람, 하나님을 꼭 표적을 통해서만 인지할 수 있는 감각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칭함)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은 15장에서 이를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 핵심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은, 바람과 같은 자유를 누리는 길은, 스로의 노력이나, 경험이나, 지식이나 혈통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예수에게 붙어 있음으로, 그를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은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하는 대단한 금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사를 초월한 도사도 아닙니다. 대단한 종교적인 의미의 기적을 일으키거나, 표적을 나타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몇 개의 자아로 나누어 놓고 늘 자기 자신과 싸워서 이겨내는 사람도 아닙니다.
세상살이가 그렇고 그런 것이니까 뭐 걸릴 게 있느냐면서 껄껄 웃고 사는 자유방임론자도 아닙니다. 도덕적인 완벽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누가 '위로부터 난 사람'이냐? '누가 성령으로 난 사람이냐?'

바울의 말대로 '날마다 죽는 사람'(고전15:31)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갈2:20)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때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인하여 괴로워 하지만, 그런 것으로 좌절하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때론 세상에서 바람처럼 자유로운 존재로 살면서 신바람이 나지만, 그런 것으로 거만하지도 자만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저 늘 예수에게 잇대어 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니고데모의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에게 잇대어 사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우리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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