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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울지 않겠습니다.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217 추천 수 0 2012.06.17 23: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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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0:46-6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0.10.10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다시는 울지 않겠습니다.  
막10:46-62


우리 홈페이지에 정용치 목사님 설교가 한 편 올라가 있습니다. 지방 부흥회 기간 중에 수요일에 오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명 설교였고, 감동적인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저와 제 옆에 앉아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던 박영주 목사는 울었습니다. '저토록 피를 토하며 전하시는 말씀을 과연 몇 명이나 진정으로 알아들을까'하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뭘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마가복음서 8장에서 10 장까지에는 비장한 각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이야기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언행을 하는 이야기로 엮어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 받는 것을 말리려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책망을 들은 일, 변화산상에서 장막 셋을 짓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한 이야기, 산 아래에 있는 제자들이 악령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해서 당황해 한 일, 수난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예고를 듣고도 깨닫지 못 한 일,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높으냐 하고 분쟁을 한 일,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이 등극을 할 때 자기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다고 해서 제자들 가운데서 물의가 일어났던 이야기 등등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거기에 영생을 찾는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돌아간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이야기들입니다. 예수님이 거듭 설명을 했는데도 저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는 바디매오라는 한 소경의 이야기로 끝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나시려고 했을 때 길가에 앉았던 바디매오라는 한 소경이 예수님이 그 곳을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예수님의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해도 듣지를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던 발을 멈추시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소경은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그의 눈은 밝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기뻐서 예수님의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서 기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말 하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자 청년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본다고 하면서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은 이런 소경들의 눈을 밝혀서 선과 악을 바르게 분별해 볼 수 있게 하여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바디매오를 보세오. 눈이 뜨이자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은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여 이 소경처럼 보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경이면서도 소경인 줄을 모르는 자들에게 대해서 가장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자기가 부자가 된 것은 율법을 잘 준수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많은 부를 독점하고 있음으로 많은 사람을 빈곤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처했으나 사실은 살인을 하고 도적질하고 거짓 증언을 하고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 삶의 자세 때문에 삶이 공허하고 불안에 가득 찬 것을 몰랐습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과 더불어 섬김의 길을 걷는 것만이 참된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의 뒤를 따르기에 메시아 왕국에서 한 자리 할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저들이 버렸다고 하나 사실은 더 큰 것을 받으려고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한 자리 하겠다는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정 반대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지내면서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고, 섬기는 것이 섬김을 받는 것 보다 더 보람되고 기쁜 삶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본다고 하면서 사실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9장에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보고, “차라리 눈이 멀었다면 좋았을 텐데, 스스로 잘 본다고 하니 너희들의 죄는 그대로 있다”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입니다.

이런 자들은 진정으로 소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이런 자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고 예수의 뒤를 따른다는 자들이 소경이면서도 소경인 줄을 모르니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소망 없는 자를 어떻게 취급하실까요? 이사야 6장에 있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를 부르신 이야기는 이것을 잘 밝혀줍니다.

비교적 하느님의 뜻을 잘 섬기려고 했던 웃시야 왕이 죽자 젊은 이사야는 걱정이 태산 같아서 성전을 찾아갔다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받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하고 묻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말아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이 백성들이란 아무리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 구제불능이 되었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는 “언제까지입니까?” 하고 묻자 하나님은 대답하십니다.

“도시들은 헐려 주민들이 없고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 . . . .. . . . .
주민의 십분의 일이 남아 있더라고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찍히듯이 넘어지리라.
그러나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

이 신앙시가 말하려는 것은 저들이 깨닫지 못해서 결국 철저하게 패망을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서 새롭게 깨닫고 피어나는 후손들이 있을 텐데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처럼 탕자가 비참한 수렁에 빠져서야 깨닫고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6, 7백년간 비참한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딛고 일어선 공동체라고 해서 다 하느님의 뜻을 명확히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도 아직도 그릇된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고 잠꼬대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의로운 자가 저들을 위해서 희생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의로운 자가 희생을 당함으로 저들의 눈을 뜨게 해서 악의 정체를 명확히 보고 가던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가 무덤에 묻힌 후 3일 동안 온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캄캄했습니다. 그렇게 선하신 분이 악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종말을 고했으니 이 세상에 무슨 소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결국 힘이 진리라는 강자들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닙니까? 제자들은 영적인 소경으로 캄캄한 밤들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두운 밤을 통해서 제자들은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무엇이 악인지를 말입니다. 무엇이 허망인지를 말입니다. 예수님처럼 선하신 분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이 죽이다니. 자기들의 탐욕과 지위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까지를 오용하는 무리들이야말로 악의 장본인인 것이 확연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고 섬길 때에는 거기에 보람과 기쁨이 샘솟는다는 것을 저들은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희들의 마음눈이 밝아지자 예수님께서 영으로 그들 가운데 살아서 임재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부활 경험입니다. 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서 바디매오가 보기를 원하듯이 주님의 임재를 갈구할 때 예수님은 영으로 그들 사이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소경도 귀머거리도 아닙니다. 우리는 보고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대로 보고, 옳게 듣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보기도 하고, 사건에 직접 간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때, 우리는 그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습니까?

바르게 보고 정당하게 판단을 하려면 갈릴리 청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희생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희생해야 합니다. 깨달음이 없는 대중들을 보며 안타까워만 하지 말고, 희생하라고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대중은 예수님 시대이후 언제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걸 보고 안타까워하지 말고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 신앙이 되게 봉사 하라는 겁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질 때 까지 희생하고 기다리라는 겁니다. 그게 제 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는 울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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