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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christustraeger.tistory.com/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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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가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빅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노르웨이 경찰이 발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크롬의 영어번역서비스를 통해 보니 노르웨이 언론에서도 경찰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로 지칭했다고 전하는 보도가 있다.
노르웨이에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것도 무장테러를 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미리 밝혀 두자면, 근본주의에 극히 비판적인 나로선 정말 테러범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굳이 '기독교'라는 것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방패막이해줄 까닭이 없다. 어떤 잘못된 신념체계가 테러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걸까? 그 여부가 영 찜찜하다.
앞으로 조사가 진행되는 추이를 좀더 지켜 봐야 하겠지만, 노르웨이 경찰이 브레이빅을 'Kristenfundamentalist'라고 표현했다면 그것은 그가 기독교신자로서 자신의 테러를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하는 사람, 즉 일반적인 의미의 '원리주의자'라는 정도의 뜻이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반면, 브레이빅이 Christian fundamentalist라고 영어권에서 각인된 의미로 한번 거쳐 알아 들으면 '근본주의'라는 특정 타입의 신앙을 가진 어떤 기독교인이 무장테러를 했다는 뜻이 되는데, 앞의 것과는 뜻이 상당히 달라진다.
노르웨이 경찰이 말하는 'Kristenfundamentalist'가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와 좀 다르다고 보는 구체적인 까닭은 이렇다.
1. 우선 그가 노르웨이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렸다는 글모음의 영어번역이 인터넷에 떠 있다.(*1) 이걸 읽어 보면 그가 과대망상이 좀 심한 극우청년이긴 해도 그의 언어에서는 근본주의자들 특유의 심하게 성서주의적인 표현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10대 때 확신있는 개신교인이 되었으나 현재의 개신교는 농담'이라면서 '차라리 집단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냉소한다. 이런 태도는 특정한 종교적 체계의 가면으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치장하는데 익숙한 근본주의자들이라면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 외에 그가 개신교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의 종교별인구분포를 말할 때 정도다. 따라서 브레이빅이 말하는 소위 '기독교' 또는 '개신교'란 '기독교 유럽'과 같은 표현과 마찬가지로 유럽전통과 구분되지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2. 적어도 노르웨이 언론보도에서는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것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낱말로 검색해 보면 신뢰할 만한 노르웨이 언론사의 기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브레이빅이 핀란드의 정치인들에게 1500쪽 분량의 테러 매니페스토를 발송했는데, 여기서 '템플러 기사단'이라는 프리메이슨적 뉘앙스의 표현을 썼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실제로 브레이빅은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사건 뒤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이 서둘러 그를 제명시키고 어떠한 연관성도 부정했지만 말이다.(*2)
브레이빅의 세계관 내지 정체성에 프리메이슨이 구성요소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템플러기사'라는 표현을 썼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이 브레이빅이 저지른 테러의 실제 배후세력일 가능성은 극히 낮아 보인다. 프리메이슨은 브레이빅처럼 성전 운운하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템플러기사니 단일문화권을 목표로 하는 세계대전을 위한 혁명이니 하는 말들은 브레이빅이 중세적 세계질서의 복원을 망상하는 반동복고적(reactionary) 극우행동주의자라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기독교든 프리메이슨이든 브레이빅에게는 자신의 망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여주는 전통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망상이 실현된다고 느꼈다면 네오나치즘이든 어떤 종류의 사이비종교든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근본주의자(Kristenfundamentalist)라는 표현은 근본주의자들을 희생양 삼아 이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데 악용될 소지가 크다. 이 사건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이 아니라 무슬림들에 대한 이민정책과 다문화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한 노르웨이극우청년이 테러를 저질렀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은 다문화사회의 문제를 고민하도록 한다. 국내에도 북한에 대한 반공주의적 증오만이 아니라 다문화정책이나 조선족과 탈북자에 대한 정책에 대해 상당한 반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한 극우청년이 저지른 테러와 이들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극우세력이 준동할수록,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려는 세력이 많을수록 이 한반도에 관용과 소통을 통한 사회통합과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3)(*4)
(계속)
[덧붙임]
(*1) 브레이빅이 노르웨이의 극우정치사이트에 올린 글모임의 영어번역본이다. 과연 그가 소위 '기독교 근본주의자'인지 직접 확인해 보시라.
(*2) 미국CNN 쪽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표현이 그릇된 함의를 전달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3) 국내 주류언론들이 기독교 근본주의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 자극적인 후속기사를 내보내는 게 눈에 띈다. (가령, 조선일보, 중앙일보) 국내언론이 일부러 오보를 내보내는 듯한 낌새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브레이빅이 언급한 까닭을 놓고 '가부장제' 운운하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브레이빅의 글모음을 읽어 보면 한국과 일본은 1970년대 이후 단일문화정책을 써서 승승장구한 케이스로 주로 언급된다. 이걸 그냥 넘어가고 가부장제부터 말한다는 건 테러리스트를 희화화하기 편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4) 한국교회의 어떤 분들이 노르웨이의 어떤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테러를 저질렀다니까 앗 뜨거 싶은 것 같다. 한국교회 언론회에서는 '범죄자의 말만 믿고 근본주의 기독교를 비난해선 안 될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기독교는 남을 해하는 종교가 아니라 봉사하고 희생하는 종교'라니, 안타깝게도 변명이 참 궁색하게 들린다. 지금 한국개신교는 연일 종교갈등에 기득권 감싸기에 수많은 사건사고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
더욱 씁쓸한 것은 노컷뉴스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뭔데?"라는 기사다. 현재 한국교회의 신앙이 근본주의와 전혀 상관 없다니, 딱한 현실부정에 불과하다. 한국개신교를 오늘도 처절하게 관통하는 반공주의,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동료그리스도인을 마녀사냥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타종교와 문화를 백안시하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태도, 기득권층과 밀착하여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하게 대변하고 두둔하는 행태, 소위 '오직 성경으로만'이라는 미명하에 굉장히 타계적이고 몰역사적인 신앙을 부추기면서도 교회규모와 돈과 명예와 정치적 영향력을 성공과 축복의 척도로 여기는 반성경적이고 비성경적인 삶의 방식은 더도 덜도 아닌 근본주의 개신교다. 특히 복음주의와 근본주의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주장은 '복음주의'라는 미명하에 근본주의라는 한국개신교의 현실을 은폐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당사자께서는 자신의 신학에서부터 소위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경계가 확연히 구분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되돌아 보시면 좋겠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에 대해 지난 포스트에서는 테러범 브레이빅에게서 통상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로서의 특징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미국적 의미의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일반적이고 중립적인 의미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문제의 핵심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반다문화주의에 있다고 주장했었다.
지난 포스트에서의 필자의 주장은 그가 dokument.no에 올린 글모음과 노르웨이 언론기사들을 주로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테러범이 앤드류 버윅(Andrew Berwick)이라는 이름으로 유포한 1500여쪽 분량의 '2083 유럽독립선언문'은 미처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이때문에 과연 정말 사실관계에 부합한 것인지 여전히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해서, 문제의 '선언문'을 구해서 검토해 본 결과 앞의 포스트에서 제기했던 필자의 주장을 상당부분 뒤집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상에 대한 의혹과 분노를 세상에 대한 악마시와 자유주의신학 단죄와 음모론, 그리고 수구세력에 대한 정치적 압력행사로 푸는데 머물러 있지 않고 테러라는 행동으로 옮기는 새로운 유형의 근본주의라니, 불쾌감을 넘어 정말 놀라움과 전율마저 느껴졌다. dokument.no의 글모음에서 과대망상끼만이 풍겨나왔다면 상당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한 이 '선언문'에서는 기괴한 정연함이 느껴졌다.
테러범이 신봉하는 '기독교'의 윤곽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주의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하에서 괄호 안의 숫자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선언문'의 쪽수를 나타낸다.)
1. 성경을 신비화, 절대화하고 자기 신념의 전거로 삼는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근본주의적 특징은 우선 성경을 하나님의 신비한 진리의 원천으로 보고 성경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주장하며, 성경의 전거를 대어가며 자기 신념과 행동을 정당화하는 점에 있다.
- '남성들의 위대한 문학작품과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성경을 읽기 보다 르네상스 시대 여성의 역할이나 문학으로서의 성경을 연구하는 페미니스트적이고 맑스주의적인 시대분위기'를 개탄한다.(28)
- 무슬림들에게 성경이 모독당했지만 기독교에서 별 반응이 없는 파키스탄의 사례에 대해 분노를 표시한다. (428)
- 꾸란에 견주어 성경이 문학적으로 더욱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블로거 Fjordman의 글을 통째로 인용하기도 했다.(706f.) (자신은 Fjordman의 글을 자신에게 중요한 책 목록에 넣었다.(1407) 그러나 Fjordman가 2005년 이후 활동한 것으로 보아 범인이 2009년 이후 구체적으로 테러를 준비하면서 자신 혹은 자기 신념을 중요한 것으로 돋보이게 하려고 예전에 쓰던 아이디를 일종의 멀티아이디로 언급했을 수 있다. 그가 '선언문'의 심화연구 파트에 실어놓은 성전기사와의 인터뷰에 나오는 성전기사도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었다.(1349ff.))
- 그리스도인의 '자기방어'의 성경적 정당성을 상당히 길게 주장한다.(1327-34) (여기서 말하는 '자기방어'란 무슬림의 공세에 대한 자기방어를 가리키는 것 같다. 그의 주장은 자의적인 취사선택이라는 근본주의 성경인용의 맹점을 그대로 답습했다.)
- 성경을 모독하거나 공격한 무신론자들을 열거하고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서부터 볼테르와 맑스를 거쳐 도킨스에 이르는 인물들이 열거된다.(1341ff.) (근본주의에서 성경을 신비화하는 전형적인 설교내용이다.)
그러나 브레이빅의 성경에 대한 집착은 성경영감론을 기독교의 시금석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근본주의과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오히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서구유럽전통의 모체로서의 기독교전통이며, 성경은 그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성경관은 '오직 성경으로만'이라기보다 '성경과 전통을 동일한 경외와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가톨릭의 그것에 가깝다.
2. 성경의 왜곡과 변개를 주장한다.
'선언문'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근본주의적 특징은 성경이 원문에서 왜곡되고 변개되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그는 현대성경이 가부장적 어휘가 아니라 양성평등적 어휘를 사용하고, 문자적 일치가 아니라 역동적 일치, 즉 문자 그대로 옮기는 번역이 아니라 뜻이 통하도록 옮기는 번역으로 자기 해석과 교리를 말하기 때문에 왜곡되었다고 믿는다. 아울러 그들, 즉 서구인들의 뿌리는 불가타성경이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이며, 이것이 무슬림에 대항하여 자기방어를 행사하는 기독교세계를 대변하는 상징이라고 주장한다.(1137)
그러나 1611년 흠정역 성경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근본주의 집단 가운데서도 이단시되는 특정한 부류의 주장에 국한된다. 게다가, 흠정역과 무슬림 대항을 연관짓는 것이나 히브리어, 헬라어 성경원문판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1611년판 흠정역 성경을 절대시하는 그룹들의 주장과도 다르며, 더더군다나 1611년 흠정역 성경은 무슬림에 대항하는 것과 아무런 역사적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브레이빅이 이들의 주장을 인터넷을 통해 접한 뒤에 자기 신념에 나름대로 갖다 붙이고 빼고 한 것으로 보인다.
3. 종교간 대화를 비롯한 그리스도교의 진보적 어젠다를 비난한다.
그는 여러 곳에서 종교간 대화와 상대종교를 공존의 파트너로 인정하며, 각종 진보적 이슈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노동당 교회'가 된 현대 서구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다. (특히 1403등) 이 역시 근본주의 기독교의 특징을 정확히 반영한다.
4. 예언에 대한 근본주의적 집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왜 하필이면 '2083년'인가에 대해 주목해 본다. 혹시 특정예언에 따라 시간표를 만드는 부류의 근본주의대로 기독교나 서구세계에 전해지는 소위 미래예언과 관련있는 게 아닐까? 이슬람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브레이빅이 이슬람에 관한 예언에 따라 자신의 시간표를 짰던 것은 아닐까?
이슬람과 범유럽세계라는 두 개의 키워드가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예언에 대한 집착을 물려 받았다면 찾아내게 되었을 예언가로 바바뱅가라는 이가 있다. 그는 이슬람이 서구세계를 석권하리라는 내용의 예언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와 달리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바바뱅가의 예언이 원용된 경우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브레이빅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프레임 속에서 어떤 시간표를 짜고자 했다면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닐까.
바바뱅가에 따르면 유럽은 2010년 11월에 시작될 제3차 세계대전에서 핵전쟁을 겪고, 핵전쟁 이후 이슬람과 전쟁을 하여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2043년에도 이슬람은 유럽을 지배하고, 이슬람에 대한 무장봉기가 이루어지며, 2066년에는 미국이 이슬람 치하의 로마를 공격하게 된다. 2076년에는 계급없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2084년은 '자연의 회복'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브레이빅이 유독 2083년에 맞출 때 이 '예언'을 의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것은 명확하게 브레이빅 자신의 말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근본주의 프레임을 따라 적용해 본 나의 추측임을 밝혀둔다.
(4번을 제외하더라도) 이상과 같은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 타입과 겹치는 면모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점에 무게를 두어 브레이빅을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브레이빅의 '기독교'는 '브레이빅 유형'이라고 부를 만한 새로운 근본주의로서, 일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온전히 구분된다. 이점은 앞서 필자가 주장했던 것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5. 그가 (근본주의) 기독교를 (취사)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성 때문이었다.
그의 '기독교'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의 컬트적 속성와는 거리가 멀다. 즉, 전형적인 근본주의는 성경으로부터(만) 취사선택한 신념체계로서 근본주의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배타적인 창이 되고자 하는 데 비해, 그는 스스로 자신이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인 척하려고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종교는 약한 사람의 버팀목일 뿐이다. 자신은 아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진 않았지만 거사를 치를 때는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기독교는 "참호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로 간추릴 수 있다.(1344)
그는 스스로 자신이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는 것이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서 실용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으로서 기도나 성찬참여를 들고 있다. 또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죽음 이후에 내세가 있다는 믿음이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1345)
아울러 그가 기독교적 가치를 가진 그룹과 연대하기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실용적인 이유에서라고 밝힌다. 그는 많은 민족주의 그룹이 기독교의 깃발 아래 싸우기를 거절하는 것을 이해하긴 하지만, 기독교는 남유럽과 북유럽을 하나로 묶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1380ff.)
기독교를 이데올로기로 하는 테러리스트가 나타났다며 새삼 혀를 차고 고개를 흔들며 좋아하는 기독교안티와 이웃종교인들이 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당신들이 신봉하는 신념이나 종교를 포함하여 어떤 신념체계나 종교든 실용적인 이유에서 악용될 수 있다.
6. 그는 자신의 목적을 다한 개신교가 가톨릭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403f.)
이것은 dokument.no 글모음에서도 일관되게 나온 얘기다. 이 주장은 두말할 것 없이 그의 범유럽주의에 대한 '실용적' 관심과 일맥상통한다.
7. 그는 자신을 템플러기사라고 지칭하면서 프리메이슨의 일원으로 지칭한다.
문제의 '선언문' 표지에서부터 노르웨이 프리메이슨의 문장이 나온다. 그는 자신을 Justiciar Knight Commander, Knight Templar Europe, Knight Templar Norway 등의 프리메이슨 칭호로 지칭했다. 앞의 포스트에서 지적했다시피 통상적인 근본주의자라면 자신이 프리메이슨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의 포스트에서 소개했듯이 노르웨이 프리메이슨 측은 사건이 일어나자 브레이빅을 제명하고 자신들과의 관련성을 서둘러 부인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그는 2010년에서 2030년까지 '첫번째 국면' 동안 자신이 속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템플기사단그룹인 PCCTS에 개인이 가입의식을 치르도록 했다.(1113f에 가입의식이 자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템플기사단은 기독교의 '자기방어'를 위한 저항운동단체를 뜻한다.(1118) 저항은 비폭력운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1121f.) 그는 '청년유럽운동'(1127)과 같은 전위조직을 통해 우익자유주의자, 기독교 극단주의 무장단체, 전투적 민족주의 등의 그룹을 묶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고 슬쩍 흘리기도 한다. 그는 자신 뒤에 뭔가 굉장한 배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려고 한다.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소위 프리메이슨이 어떻게 그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연결되어 있느냐이다. 많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프리메이슨이라면 치를 떠는 것과 달리, 브레이빅은 프리메이슨 템플 기사단이 서구 기독교세계의 이슬람교에 대한 자기방어를 위한 것으로 파악한다. 실제로 가톨릭에서는 아직도 프리메이슨과 별개로 '기사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브레이빅은 자신이 말하는 '기사단'을 기독교의 또다른 양태로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범유럽주의를 위해 실용적으로 선택된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허울이고, 실체는 범유럽주의이다. 이와 같은 기독교와 프리메이슨의 연결은 근본주의의 프리메이슨 음모론에서 나타나는 적대관계와는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서 프리메이슨 음모론으로 비약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브레이빅의 '선언문'을 검토하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거기 나오는 내용들이 도대체 현실은 어디까지인가, 어디부터가 그의 망상 또는 희망사항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과연 브레이빅 배후에 어떤 무장단체가 있는지, 혹은 허세인지 여부는 노르웨이 경찰 당국의 수사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브레이빅 개인의 허세로만 보자니 정신착란의 정도가 너무 심하고, 배후에 정말 어떤 그룹이 있다고 보자니 이 또한 무서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사건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이 약간 길어졌기 때문에 결론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 브레이빅이 말하는 타입의 기독교는 근본주의와 프리메이슨 템플기사단을 합한 형태로서, '이슬람 세력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자기방어'를 위한 범유럽주의와 다름없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자기 나름의 기독교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와 같지 않다. 그것은 기독교 원리주의 내지, 자신이 표현한 대로 기독교 극단주의라는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브레이빅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정신적 안정과 범유럽주의라는 사회문화적 가치의 활용이라는 실용적 목적에서 선택적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이다.(*1)
- 근본주의나 프리메이슨, 심지어 그의 의심스러운 정신상태가 아니라, 테러범이 유럽의 다문화주의와 관용에 반대하여 테러를 저지른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문제는 한국사회에도 동일하게 노출되어 있고,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2)
[덧붙임]
*1: "그는 단순한 테러범일 뿐 기독교인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국민일보 기사에서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한다. "브레이비크가 잘못된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는 결정적 단서는 선언서 1307쪽에 표현한 자기 정체성이다. 그는 "만약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다면 종교적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갖는 것을 불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문화와 사회, 도덕적 토대 안에서 기독교를 믿는다. 이것이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든다"고 주장했다." 근본주의 성향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두 분 신학자들이 근본주의 기독교와 테러범의 '기독교'를 구분짓는 주장도 대체로 괜찮았는데, 제목은 교계의 딱한 현실부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 좀 민망스럽다. 아예 확 세게 나가야 한다는 심산이셨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원... 사고치고 집나간 자식은 자식도 아닌가.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짚어두어야 할 사실관계는, 이 기사에서 근본주의와 테러리즘과 관계가 없다고 전문가들이 말했다고 한 부분은 명백히 틀렸다는 점이다. 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 찾아보면서 새삼 인식하게 된 부분인데, 기독교 근본주의 테러리스트 그룹은 분명히 존재한다. 미국의 경우, 인종차별테러를 자행한 것으로 잘 알려진 백인기독교근본주의그룹 KKK단을 빼놓을 수 없다. 이밖에도 '하나님의 군대(the Army of God)', '그리스도의 어린 양(the Lamb of Christ)' 등이 낙태, 애국심 등과 같은 특정사안에 대해 테러를 저지른 극단적 근본주의 그룹들이 존재해 왔고, 오늘도 미국 어디에선가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사례와 기독교 테러리즘에 관한 온라인자료로서 영문위키백과의 해당항목을 참고할 것.) 더 나아가, 기독교는 북아일랜드, 세르비아 등 세계분쟁지역에서 폭력과 테러의 이데올로기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기독교는 분명 잘못되고 거짓된 형태의 기독교이지만, 이건 기독교도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말했든 간에 그의 교회관은 왜곡되어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론으로는 애시당초 공교회의 회개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게 된다. 이런 교회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이를테면, 삼일절주일에 한국개신교회 강단에서 민족대표33인중 절반 이상이 개신교인이었고, 개신교가 삼일운동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회주체였다는 영광스러운 과거만을 기억하고, 주기철, 길선주 목사 같은 극소수 목회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의 참람된 변절과 배교의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으며, 공교회적인 참회를 행하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유의 배타적이고 분파주의적인 교회관는 근본주의적이다. 테러리즘을 저지르지 않고 음모론이나 사이비이단, 자유주의, 공산주의 단죄에 골몰해 있기 때문에 그 배타적인 폭력성이 당장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근본주의가 테러리즘으로 발전하는 것은 단지 한끝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의 희망사항과 본인의 주장 사이에 분명히 선을 그어두고 싶다. 노르웨이의 테러범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의 신봉자는 아니다. 나는 두 편의 글에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이에 관해 노르웨이 테러와 기독교 근본주의의 무관함을 주장하는 이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그러나 테러리즘과 기독교 근본주의가 결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는 이들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본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논지를 재확인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극히 위험한 폭력성과 폐쇄성, 배타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속성은 기독교 근본주의가 사회적 관계의 폭력을 저지르는 형태로 이미 수없이 표출되어 왔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을 정당화한 사례도 결코 없지 않다.
문제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자신이 스스로가 근본주의자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복음주의나 개혁주의 같은 다른 이름으로 진짜 정체성을 남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공교회의 형제요 친구인 근본주의자들에게 주님이 은혜를 더하시기를! 죄많고 허물많은 우리 자신과 모든 형제자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께서 동일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2: 미국이 조지 W 부시 시대에 테러 이후 교회는 근본주의화하고 국가는 경찰국가로 돌변한 것과 달리 노르웨이 사회는 이 비극적 사건 이후에도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서 노르웨이에 대한 존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회통합전략으로서의 관용에 관해서는 좀더 심도있는 연구와 토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자유, 관용의 가치를 포기할 까닭은 없다. 테러의 비극을 겪은 노르웨이 사회의 의연한 대처에서 이것을 배울 수 있다. 부디 우리 한국사회도 자유와 관용의 가치가 뿌리내리는 위대한 사회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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