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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증언

로마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138 추천 수 0 2012.07.08 00: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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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8:12-1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년 6월3일 http://dabia.net/xe/595246 

jys.jpg 정용섭 목사

 

성령의 증언

로마서 8:12-17, 성령강림절후 첫째 (삼위일체) 주일, 2012년 6월3일

 

교회의 신학적 성격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피조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교회가 세상에서 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신자들은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성령의 피조물이라는 말은 교회가 세상의 친목 단체나 정치 결사체처럼 사상과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시작되고 이끌림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서방교회의 니케아신조에는 성령이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로부터 오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소위 ‘필리오 께’(그리고 아들로부터)논쟁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분리된 중요한 신학 논쟁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별 것 아니거나 너무 사변적인 것이지만 기독교의 역사에서 보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문제를 교파 분리를 각오할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성령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성령을 받으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성령을 받았다고 큰소리치기도 하고, 어떤 신자들은 그런 경험이 없거나 확실하지 않아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성령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을 겁니다. 지금 세상살이가 힘들기도 하고, 또는 너무 재미있기 때문에 성령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온통 복지 논쟁에만 빠져 있어서 성경이 말하는 성령은 관심의 대상이 못됩니다. 이건 불행한 일입니다. 특히 성령의 피조물인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에게는 더 불행한 일입니다. 삶의 본질을 놓치고 껍데기에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교육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으면서 학교를 운영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율법과 죽음

 

성령이 누구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롬 8: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서 바울은 삶의 태도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육신대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신의 삶은 그 결과가 죽음이고, 영적인 삶은 생명입니다. 바울은 이미 앞에서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6) 육신의 삶과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두 삶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성령이 누군지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사람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성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체의 본능을 거부하고 금욕적이고, 더 나가서 자학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그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18,19세기 유럽의 기독교는 기독교 영성을 그런 방식으로 생각했습니다. 도덕주의적인 영성입니다. 청교도 영성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신앙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그의 무의식에 죄의식이 자리합니다. 니체는 이런 신앙을 가리켜 사육당하는 가축떼 윤리라고 비판했고, 프로이트는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의 비판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런 영성은 생명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겁니다. 죽이는 영성을 성령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육신대로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그것을 파렴치하거나 이기적으로 사는 것, 또는 육체의 본능에 따라서 사는 천박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바울은 더 근본적인 것을 말합니다. 육신대로는 사는 것은 율법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리는 도덕적 엄숙주의가 육신대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일관되게 전하는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롬 8:2절에서 그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죄와 사망의 법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가장 인간다운 삶을 위한 규범들입니다. 율법대로 살아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율법주의는 법대로 살아야 세상이 바르게 돌아간다는 법치주의와 기본 개념이 똑같습니다. 다 좋은 것들입니다. 율법적으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인정받습니다. 세상의 실정법대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인정받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삶이 바로 육신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삶은 결국 죄와 사망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주장입니다.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혁명적인 발언을 하는 것일까요?

 

바울은 율법의 속성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율법 앞에 직면하면 할수록 인간은 율법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율법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앞부분에서 그 사실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율법을 최선으로 지켜보려고 노력한 이들이 유대인들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도 율법을 다른 사람보다는 잘 지켰지만 완벽하게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한민국의 모든 법을 완벽하게 지키고 사는지를 보면 됩니다. 정치인들은 교도소 담장을 걷는다고 합니다. 법을 다루는 법관과 검찰, 변호사들도 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합니다. 도로교통법을 여러분은 다 지키시나요? 상대적으로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구분될 뿐입니다. 만약 도로교통법을 한번이라도 어기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건 끔찍한 일입니다. 죄와 죽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 8:7)

 

오해 마십시오. 율법과 실정법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효도하라는 말이 있다고 합시다. 그걸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지킬 수는 없습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참여한 사람들이 상식적인 차원에서 자신들이 감당할 정도를 감당하면 됩니다. 상식과 교양에 속한 것들은 그런 원리에 따라서 처리하십시오. 이런 점에서 루터가 말한 ‘두왕국론’은 옳습니다. 교회가 영주의 일까지 일일이 간섭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영주는 영지를 통치해야 하고, 군대를 운영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모든 세속의 일상을 신앙의 문제와 일치시킬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세속의 일상은 육신의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세속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에 몰두하면 결국 죄와 죽음에 이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전혀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의 자리이동입니다. 그래야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설명하기도 했고(롬 8:2),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설명했습니다(롬 8:13). 성령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면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바울은 14절이 이하에서 다른 문장으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과 생명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마찬가지로 죄와 죽음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생명의 성령의 법’ 무엇일까요? 롬 8:3절에서 바울은 아주 자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 집중하는 것이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이룬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셨다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믿고 따르는 것이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며, 그것이 곧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입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오늘 본문 롬 8:15절에서 종의 영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의 양자가,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종교적인 교양이나 세속적인 업적에 영혼의 중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율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행하신 구원 사건에 영혼을 걸어둡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만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멀게 느껴지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 양자의 영, 생명과 평화 같은 단어들이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우선 구체적인 삶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십시오. 국내외에 걸친 온갖 뉴스를 들어보십시오. 모든 나라와 정부와 정당과 사회단체가 인간과 세계 구원을 위해서 방향을 제시하고 서로 투쟁합니다. 거기서 참된 평화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현재 박근혜 씨와 안철수 씨가 올 대선 후보 중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서로 지지하는 사람들도 다릅니다. 그들 중의 한 분이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멋진 나라가 될까요? 아무도 인간과 세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합니다. 저는 정치 허무주의자는 아닙니다. 모두 투표를 통해서 자신의 입장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치가 삶을 망칠 때가 많습니다. 개인의 인생을 놓고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을만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해방을 얻지는 못합니다. 자식들이 모두 출세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그게 바로 인생이 아니냐, 너무 절대적인 신앙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현실적으로 직관하자는 것뿐입니다. 성서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말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게 믿어지십니까?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게 억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8:16절에서 성령이 이 사실을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예수 사건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믿는 것은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험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경험을 열광적인 은사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오히려 이성적입니다. 바울은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언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영’은 우리의 생명 현상 중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이성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을 인식하는 것이 가장 이성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영이 곧 성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성령 공동체입니다. 가장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육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집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특별한 현상이 없다하더라도 분명히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성령의 증언에 온전히 의지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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