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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마음의 고통

로마서 김남준 목사............... 조회 수 4083 추천 수 0 2012.07.23 23: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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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9:1-3 
설교자 : 김남준 목사 
참고 : 2007-04-29 주일설교 안양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영혼을 위한 마음의 고통  2007-04-29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I. 본문해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가 무엇인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가슴에 안고 피를 토하듯이 고백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앞서, 사도 바울은 8장 전반부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는 장엄한 승리의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8장 후반부에서 와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격렬한 표현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놀라운 특권에 대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고 말할 때,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감당하기 벅찬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조를 바꾸면서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고뇌에 대해서 피력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골육지친(骨肉之親)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는 사도의 절절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많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까? 그는 이방인 사도로 부름 받아 가는 곳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와 회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의 골육지친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바로 구원받지 못한 자기의 가족들, 친척들 나아가서는 한 피 받은 자기의 동포와 민족들을 인해서 아파하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이었습니다.

 

II. 골육지친을 향한 고통

 

골수에 사무치기까지 파고든 근심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그 근심이 해결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망하는 바가 워낙 강한데 현실이 그 소망을 이루어 주지 못할 때, 그 강력한 소원은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통증을 가져다줍니다.

 

A. 골수에 사무친 근심

 

“골수(骨髓)”라고 하는 성경의 표현은 인간의 영혼 깊숙이 있는 핵심적인 자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골수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뼈 속에 흐르고 있는 육체적인 골수를 가리키지만, 실제적인 의미로 인간의 영혼의 깊은 심장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존재 전체가 내면으로부터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골수에 사무치는 근심은 바로 구원받지 못한 자신의 가족과 동포들에 대한 근심이었습니다.

 

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고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사렛의 이단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구약에 수많은 역사는 이 한분을 바라보고 달려온 역사이고, 앞으로 펼쳐질 세상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고된 그 하나님의 나라와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바로 선교라는 활동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인간 이하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경실색(大驚失色)할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이방인들이 복음의 빛을 받게 되자 그렇게 무지한 상태에서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단정한 삶을 사는 사랑받는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고, 짐승이나 다름없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자 그 어떤 구약시대의 백성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이방인들 가운데 나타나는 구원의 풍성함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을 위한 깊은 근심과 염려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더 많은 계시를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을 먼저 받은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로부터 멀어져서 예전에 자신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뼈 속 깊이 타들어가는 근심과 걱정으로 멍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 동포 및 골육의 구원에 대한 처절한 근심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이토록 크고 놀라운데, 내 사랑하는 동포, 내 사랑하는 친척, 어린 시절부터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내 형제들, 그리고 나의 부모,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 그들은 이 사랑을 모른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자기와 더불어 증거하는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자신의 골육지친을 향한 애끓는 고통이었습니다.

 

B. 아나데마의 정신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말씀에서 “저주를 받아”라는 말이 바로 희랍어로 “아나데마(avna,qema)”의 수동태입니다. 글자 그대로 그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저주를 받아서 예수께로부터 끊어지는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입니다. 저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당사자와 관련하여 고통을 당합니다. 둘째로, 공동체와 관련하여 교제에서 끊어지는 버림을 받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관련하여 고통을 당합니다. 예를 들어, 그 당시 문둥병은 저주를 받아서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로부터 하나님과의 영적인 모든 축복과 교제가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을 일을 행한 사람은 그렇게 사랑을 나누던 지체들로부터 끊어질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영영히 버림을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골육지친 중 몇 명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한 것은 골육지친을 향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 고통이 “저주를 받아 끊어질” 정도로 크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인격 속에는 영적인 기쁨과 슬픔이 함께 공존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이후로 가장 기뻤던 때가 언제냐 하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참회의 눈물이 가장 많았던 시기입니다. 오랫동안 불순종한 것 때문에 참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제대로 못살아서 아파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참회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새 희망과 기쁨이 새록새록 솟아나게 하십니다. 그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구원을 하찮게 여긴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수사법입니다. 이 표현은 “지옥도 안 무섭고 하나님의 저주는 상관없다.”는 그런 표현이 아닙니다. 골육지친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얻은 구원에 함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아나데마”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이러한 “아나데마”의 정신으로 우리 가족들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아론의 죽은 지팡이에서 싹이 돋는 것 같은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정신을 가지고 영혼들을 위해서 간절히 매달리는 것이 먼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신자의 의무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물을 때, 우리는 ‘섭리가 아직 안되었다.’, ‘때가 이르지 않았다.’, ‘마음이 강퍅하다.’는 따위의 핑계를 대서는 안됩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만 정작 문제는 우리에게 사도 바울과 같은 깊은 고뇌와 아픔, 즉 “아나데마”의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골육지친을 향한 “아나데마”의 고통은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견기기 힘든 괴로움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내 가족, 내 친척, 내 동포들이 구원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그러한 애타는 가슴앓이가 있습니까?

 

C. 주님의 마음

 

아직까지도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모든 사람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가르침을 들으며 회개했습니다. 창녀와 같이 더러운 여자도 회개했고, 세리와 같이 부패한 인간들도 통회자복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완악하고 강퍅하기 그지없는 수많은 죄인들, 문둥병자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저주받은 사람들도 주님을 믿고 그 사랑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를 위해 아끼신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일평생 이 세상에 사시면서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신데도 그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낮은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멸시와 욕을 당하시면서 왕의 길이 아니라 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금 마차, 금 수레를 타고 다니지 않고 행로에 피곤하도록 걸어 다니셨고 고작해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박해와 멸시 속에서 사시다가 결국에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눈앞에 있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죽음으로 영혼을 하나님 앞에 세우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 대신 희생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들이 도저히 치를 수 없는 죄의 대가를 우리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서 율법 아래 태어나 그 비참함을 맛보시고, 율법의 정죄대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장 흉악한 죄인처럼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한 번도 그분은 자신의 육신의 고난 때문에 마음을 빼앗기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에는 깊은 고뇌가 있었으니 바로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슬픔과 근심이었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믿음이 없는 많은 사람들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 멸망을 앞에 두고도 거짓 평화에 붙잡혀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살아가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시던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의 영혼을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예수님, 그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고통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 영혼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영혼들이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 이외에 그 무엇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있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이 예수님의 시대였고 주님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면, 아마 똑같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속에는 우리의 골육들도 포함되지 않았겠습니까?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그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골육들에게는 아직 그 은혜가 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예수를 믿은 줄 알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님을 하늘나라에 가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보좌 우편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우리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영혼을 자기의 영혼처럼 부여안고 깊은 밤에, 이른 새벽에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생애의 보람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마음의 기쁨이 아닙니까? 우리의 생애의 최고의 고통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마음의 아픔이 아닙니까?

 

III. 골육지친의 구원을 위해

 

우리들이 얼마나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우리들이 얼마나 깊이 예수의 사랑을 알고 있는지를 지금 즉각적으로 잴 수 있는 시금석(試金石)이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과 영혼들을 향한 깊은 고통은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 비례합니다.

 

A. 사랑하라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감격이 넘치면 넘칠수록, 가슴 한 편에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토록 깊이 근심하는 원인은 골육의 친척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사 먼저 택함 받은 한 민족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유대인을 택하셔서 그토록 애지중지(愛之重之)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예수를 통해서 발견하고 이 사랑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택함 받고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민족이 도리어 가장 완고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미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거절했습니다. 또한 그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핍박하여 옥에 가두고 죽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옛날에 유대교에 대한 열심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는 데 큰 몫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분 안에서 자신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그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변화된 이후로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나니, 그 은혜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골육지친을 향한 찢어지는 아픔 때문에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자녀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봄눈 녹듯 녹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붙잡혀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염려와 근심 속에 살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런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염려나 근심이 아닙니다. 오직 내 마음속에서 단 하나,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영혼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주님의 마음의 고통과 눈물이 나의 마음속에도 동일한 염려와 근심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를 우리의 영혼 속에 소유하고 있으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어가는 그들의 영혼을 보면서 가슴 아파할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입니다. 그는 18세기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21살에 회심했고, 25살에 선교사로 소명을 받았고, 29살에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그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기도에 자신을 바치고 인디언 선교에 자신을 다 드렸습니다. 결국에는 건강을 돌보지 않은 이유로 폐결핵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에 남겨놓은 일기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하지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속에 임하고 그 놀라운 사랑이 그를 강권하게 되었을 때, 잃어버린 영혼들,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에 대한 사랑의 불길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민족 가운데 이런 선교사임을 잊지 마십시오.

 

B. 기도하라

 

이후에 천국에 가면, 여러분들은 깜짝 놀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지도 않았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위해서 울었는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어린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그 응답으로 이토록 귀한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탄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고, 유대인보다도 더 예수 믿기 힘든 헬라의 사람들과 이방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통해서 복음을 맛보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들과 주위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 영혼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전혀 모르고 살다가 죽으면, 멸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들 곁에 두신 것은 그들 가운데 등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안전한 구원의 포구로 인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구원을 주시고 믿음도 주시고 은혜도 주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이 가족을 위해서 울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의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지금보다도 더 많이 가슴 아파하면서 마치 그들의 영혼이 내 영혼인 것처럼 아픔의 흘린다면, 이제껏 철옹성과 같았던 그들의 마음이 무너지고, 불가능해 보였던 그 영혼들의 구원이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으려던 그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던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는 그런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눈물의 간절한 기도가 당장 응답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영혼들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의 기도의 눈물을 자기의 병에 담으시고 그 병이 가득 차면 그 일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고민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끈질기고 간절하게 기도한 적은 얼마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그 가족들의 구원이 속히 임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뜻을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셔야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골육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나도 내 사랑하는 부모님, 내 사랑하는 형제자매, 내 사랑하는 친지, 거듭나지 못한 우리 겨레들이 구원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셨던 것처럼 내가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각오로 기도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C. 희생하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 놀라운 사랑을 베푸신 이유는 이 사랑을 가지고 여러분들의 가족,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친지들과 동포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이 사랑의 은혜에는 항상 소명이 내포되어있으니, 곧 희생의 소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어떻게 무제한의 희생을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일평생 받으면서 사신 분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에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셨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그 본체를 버리고 사람의 형상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신 후에도 더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셨기에,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평생을 희생하며 사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애였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희생하신 생애였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더 많이 사랑받으신 생애였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한 희생으로 동기간들이 서로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가운데 하나의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모님을 용서하고 깊이 사랑해야합니다. 이 미움과 증오를 우리 대(代)에서 종식시켜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섭섭한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을 깊이 용서하고 사랑해야하며, 이제는 더 이상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횡포를 부리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동기간들이 서로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부모님 모시는 문제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사이가 갈라져서 연락도 하지 않는 채, 그런 깨어진 관계로 산다면 어찌 믿음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가족들이 강퍅해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눈물 흘려주며 희생하는 섬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이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가족을 위해 더 많이 희생하고, 내 가족에게 더 많이 멸시를 당하고,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내 것이 되었더라면, 지금쯤 우리 가족은 하늘가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골육에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그들의 장례식 날은 그들이 지옥의 불길 속으로 떨어지는 영벌의 날이 될 것입니다. 아직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 울어주는 기회가 있고, 아직은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구원 얻기를 바라시며 그들에게 끊임없이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지만, 마지막 심판의 그 날에는 어떤 긍휼도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골육지친들이 그 지옥의 유황불길 속에 타오를 그 때에, 천군천사들은 엄위하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대해 경배와 찬송을 돌릴 것입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날입니까?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리니 더 이상 지체하며 골육지친의 전도를 미룰 수 없습니다. 당장 시작하십시오. 더디 말고, 바로 오늘!

 

IV. 결론과 적용

 

여러분은 얼마나 골육지친의 영혼을 위해 우십니까? 그들을 위해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면, 아마 벌써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여러분보다 더 신실한 신자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지금이 그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우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우리의 육신의 가족과 영혼의 가족이 하나 될 때, 그 때에 우리의 가정은 얼마나 복됩니까? 먼저 골육지친을 위해 희생과 사랑의 손길을 펼치십시오. 물론, 어렵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남은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내 가족, 내 친척, 내 동포들을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기죽음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처럼 그렇게 희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결심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잠잠할 수 없는 소식(왕하 7:9)”을 듣고 실천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사도가 구원받지 못한 골육지친을 향해 가진 마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 가족 중 불신자들에 대한 우리의 부담을 나누어 봅시다.
3.“아나데마”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이러한 마음과 까리따스의 사랑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4. 잃어버린 영혼들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들,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5.“한 영혼을 주님께로”에 대한 각자의 마음을 나누어 보고,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누어 봅시다.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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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4 호세아 광야 호13:5-6  최창모 교수  2009-06-07 4133
17643 사사기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삿7:1-8  김영봉 목사  2011-04-30 4132
17642 사도행전 스데반의 순교 ..... 행7:51-60  이정원 목사  2011-06-15 4130
17641 요한복음 판단과 관련된 3대 교훈 요8:12-20  이한규 목사  2010-11-10 4128
17640 베드로전 아름다운 신앙생활 벧전5:1-14  최장환 목사  2013-03-13 4126
17639 출애굽기 3계명과 4계명 말씀 출20:7-11  이한규 목사  2012-09-14 4125
17638 창세기 축복의 통로 창12:2  한태완 목사  2012-03-31 4112
17637 열왕기상 솔로몬의 꿈 이야기 왕상 3:3-15  정용섭 목사  2010-07-15 4110
17636 시편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한가? 시42:1-43:5  이정수 목사  2010-09-08 4109
17635 마태복음 겸손의 위력 마20:20-28  김필곤 목사  2009-11-07 4107
17634 고린도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 고후9:1-15  최장환 목사  2013-01-23 4106
17633 출애굽기 물이 피가 되리라 출7:14-19  이성희 목사  2013-01-22 4105
17632 히브리서 주님으로 어려움을 이기자 히8:1-13  최장환 목사  2012-12-26 4101
17631 출애굽기 여호와의 절기를 지킬 것이라 출10:1-15  김우찬 목사  2013-04-18 4100
17630 마가복음 철저한 주인 의식 막4:21-32  최장환 목사  2013-02-20 4099
17629 시편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1] 시73:23-28  한태완 목사  2013-09-21 4098
17628 예레미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 렘17:7  한태완 목사  2012-09-23 4095
17627 로마서 말 한마디의 능력, '이신칭의(以信稱義)' 롬4:16-25  전병욱 목사  2008-02-10 4094
17626 누가복음 세 종류의 사람 눅10:30-37  한태완 목사  2012-03-11 4093
17625 룻기 룻기의 배경 룻1:1  박상훈 목사  2010-10-27 4093
17624 잠언 어떤 길과 사망의 길 잠14:12-16  민병석 목사  2010-04-28 4090
17623 창세기 인생의 분기점에서(하프타임) 창35:1-7  이상호 목사  2013-06-12 4089
17622 마태복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마5:1-12  이정원 목사  2013-03-04 4089
17621 마태복음 아, 기독교인임이 부끄럽구나 마23:37-39  한완상 형제  2003-07-08 4086
17620 마가복음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막12:38-44  정용섭 목사  2012-12-06 4085
17619 요한계시 빌라델비아교회 계3:7-13  강종수 목사  2012-08-26 4084
» 로마서 영혼을 위한 마음의 고통 롬9:1-3  김남준 목사  2012-07-23 4083
17617 설교자료 남서울 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의 설교 설교비평  정용섭 목사  2008-08-09 4078
17616 레위기 번제의 길 레1:1-17  정용섭 목사  2010-08-05 4072
17615 로마서 복음 전하는 아름다운 발 롬10:13-18  이정원 목사  2009-11-08 4072
17614 마태복음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저주받은 이유? 마25:14-30  이정수 목사  2010-08-20 4071
17613 예레미야 토기장이와 진흙 렘18:1-6  조용기 목사  2010-03-12 4057
17612 골로새서 그리스도의 옷을 입자 골3:12-15  한태완 목사  2008-01-16 4055
17611 레위기 역전의 새로운 인생 레16:1-19  최장환 목사  2013-02-20 4052
17610 마태복음 시험과 표적 마4:7  황성현 목사  2012-12-30 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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