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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렴치한 한국의 부자들에게 돌을 던진다
[정운현칼럼] 이 시대엔 ‘경주 최부자’ 같은 청부(淸富)·덕부(德富)는 없나
정운현 기자 | 등록:2012-07-25
어제(24일) 몇몇 신문에 한국 부자들의 부끄러운 얘기가 하나 실렸다. 이들이 지난 40년간 해외로 빼돌린 돈이 무려 ‘890조원’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보도였다. 참고로 2012년 대한민국 예산은 325조 4,000억원 (2011년 대비 5.3% 증가) 규모다. 단순비교 해도 올 예산의 3배가량이나 되는 거액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 부자들만 그런 것은 아니나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음은 주목할만 하다 하겠다.
영국 시민단체 ‘조세정의네트워크’가 22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에서 조세피난처로 빠져나간 자산은 7790억 달러(약 893조원)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조사 대상 139개국 가운데 중국(1조1890억 달러)과 러시아(7980억 달러)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한다. 특히 개발도상국은 1970년대 이후 조세피난처로 빠져나간 자산의 누적 총액이 이들 국가의 부채를 상환하고도 남는 다고 하니 국적을 떠나 그들의 '범죄행위'를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 한국 부자동네의 상징 강남 타워팰리스를 탄천 쪽에서 바라본 모습 |
며칠 전에도 한국의 부자들에 대한 기사가 하나 소개된 적 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지난 7월2일 펴낸 ‘2012년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부자는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인 사람을 지칭하는 데 그 숫자는 14만2천 명이라고 한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6만8000명으로 전국 부자 수의 48%를 차지하고, 서울 중에서는 강남3구는 2만6000명으로 38%를 차지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경기도-부산 순으로 집계됐다.
이들이 보유한 금융자산은 약 318조원에 이르며 1인당 평균 22억원 꼴이다. 전체 국민의 상위 0.28%가 총 개인 금융자산의 13.8%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중 4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68%는 본인이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보유 자산이 50억~100억원에 이르는 이들 가운데서도 본인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27.5%에 그쳤다고 한다. 응답자의 68.7%는 최소 100억원 이상을 가져야 부자라고 답했다고 하니 부자일수록 욕심은 끝이 없는 셈이다.
전남 해남 고산 윤선도 집안의 ‘녹우당(綠雨堂)’, 전남 구례의 대저택 ‘운조루(雲鳥樓)’, 경주 최부자 고택(古宅) 이들 셋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조선 후기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못이겨 일어난 ‘동학민란’(동학혁명) 때나 한국전쟁기 인민군 치하에서도 불타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돼 왔다는 점이다. 당시로선 대지주 집안이었으니까 이들은 화(禍)를 입을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화를 입기는커녕 농민들의 보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들 집안들은 평소 주변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왔다.
‘운조루’의 경우 빨치산 근거지가 있던 지리산 피아골과 노고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또 이 집안의 머슴 가운데 상당수가 빨치산에 가담해 활동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상전 집이던 운조루를 불태우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고 이에 다른 빨치산들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이 운조루를 불태우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단 하나, 운조루의 주인이 적선을 많이 한 덕가(德家)로서 평판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던 사랑채 '녹우당(綠雨堂)' 현판 |
윤씨 집안의 ‘녹우당’도 만만찮다. 조선 중기 이후 이 지역의 대표적 부자였던 해남 윤씨들은 ‘삼개옥문 적선지가’(三開獄門 積善之家)로 불렸다. 흉년이 들거나 가난해서 세금을 내지 못해 인근 지역의 주민들이 감옥에 갇히자 그때마다 세금을 대신 내줘 세 번이나 감옥에서 꺼내줬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좌-우 어느 쪽이 세력을 잡아도 이 집안의 덕망과 카리스마를 훼손시킬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엎어져도 윤가(尹家)요, 뒤집어져도 윤가”라는 말이다.
경주 최부자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동학혁명 당시 경주지역도 예외가 아니었지만 만석꾼의 재산을 자랑하던 영남 제일 부자 최 부자집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빨치산들이 전국적으로 부자들을 습격할 때도 경주 최 부잣집은 피해갔다고 한다. 이 집안은 ‘육훈(六訓)’을 통해 후세들에게 과욕을 금물로 가르치면서 이웃에 베푸는 삶을 실천해 왔다.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또 흉년에는 곳간을 열어 주위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원성을 살 일이 있겠는가?
이 집안의 살림을 크게 일군 최국선에 얽힌 일화가 하나 전해오고 있다. 그는 임종 때 아들을 불러 서랍에 있던 빚문서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토지나 가옥 문서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돈을 빌려준 차용증서는 불태워라. 돈을 갚을 사람이면 없어도 갚을 터이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담보가 있어도 갚지 못한다. 형편이 안 되는데 문서를 뺏어 뭣하겠느냐”고. 그의 아들은 부친의 유언을 실천했고, 이후 이 집안의 명성은 온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우리 근대사에서 소문난 부자를 들라면 공주갑부 김갑순(金甲順)을 뺄 수 없다. 그는 일찍 부친과 형님을 여의고 13세 때 호주, 요즘으로 치면 ‘소년가장’이 되었다. 그런 그가 부자가 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졸지에 봉세관이 돼 세금을 횡령하였으며, 관직에 물러나서는 인맥을 총동원해 개발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거나, 혹은 일제당국으로부터 인허가특혜를 받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한 결과였다. 말하자면 그는 당대에 발복(發福)한 졸부(猝富), 즉 벼락부자인 셈이다. 그래서 풍수꾼들은 정작 그의 무덤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선대 묘소만 찾는다고 한다.
▲ 공주시내에 남아 있는 '공주갑부' 김갑순의 옛집(1998년, 필자 촬영)
서울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한 때 조선 제일의 땅부자였던 그는 당시 공주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다. <일제하 대지주 명부>에 따르면, 1930년말 그가 공주, 대전지역에 소유한 땅은 3천371정보(1정보는 3천평)로, 평(坪)으로 환산하면 1천11만여 평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대전 땅만 총 22만평으로, 당시 대전시 전체토지의 40%가 그의 소유였다. 사업을 위해 친일파들과 정략적으로 사돈을 맺었고 그 자신 역시 중추원 참의를 지내며 호사스럽게 살았지만 그의 재산은 당대에 모두 끝나고 말았다.
공자는 <논어>에서 “가난한 사람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것보다 부자가 겸손해지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존경을 받기란 어려운 법이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써 붙였다는 ‘빈이무첨 부이무교(貧而無諂 富而無驕)’라는 문구는 새겨둘 만하다.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경련, 경총 같은 대기업이나 재벌(부자)들을 대변하는 단체에서는 일반인들의 반(反)기업정서, 부자들에 대한 반감을 더러 불만으로 내비치기도 한다. 그들로서야 불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게 있다. 글 첫머리에서 소개했듯이 외국으로 거액을 빼돌리거나 탈세와 비자금으로 사복을 채운 부자들까지 존경하는 나라(혹은 국민)는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국민들도 경주 최부자 같은 청부(淸富)·덕부(德富)에게는 박수와 존경을 표할 자세가 언제든지 돼 있다. 문제는 소위 ‘부자’라고 하는 집단(혹은 개인)들이 오히려 늘 문제였다. 그들의 끝없는 물욕과 비상식-비인도적인 경영에 대해서는 박수는커녕 돌팔매를 던지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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