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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모험을 시도하라!

창세기 허태수 목사............... 조회 수 4190 추천 수 0 2012.07.27 23:4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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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6:13-2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1.12.19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2011년, 신앙의 모험을 시도하라!      
창6:13-22, 히11:1-7

결혼은 굉장한 모험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장한 배경과 생각 그리고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일생을 같이 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쌍방이 서로를 다 알기 때문에 모험이 아니라고 하지만 살아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까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경제적인 모험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주식이나 증권에 투자하는 것도 일종의 모험 아닙니까? 이런 모험들은 대체로 자신의 경험과 이성과 지식을 믿거나, 전문가를 믿고 하는 이기적인 모험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감행하는 모험도 있습니다. 이런 모험들은 결과의 성패와 상관없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갖게 되죠. 스토리가 있는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독립운동에 뛰어 든다든가, 우주로 가는 우주선을 탄다든가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노아가 했던 모험은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모험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높은 산정에서 커다란 배를 건조해야 하는 모험이었죠. 하늘의 들창이 열리고 땅의 샘구멍이 열려서 높은 산정까지 물속에 잠길 것이라는 신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를 것, 그것이 모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믿음은 항상 모험을 동반한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모험’이 없이 믿는다면 그것은 ‘행함이 없는’ 관념상의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미쳤다고 조롱을 할 때도 그걸 믿고 실행하는 일은 의당 [모험]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어처구니없는 일을 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신앙이란 노아의 경우처럼 [모험]속에서 자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인 서를 보면 그런 신앙의 모험을 했던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애시 당초 모험을 전제로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험을 먹고 자라고, 믿음이 있으면 모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약한 자들을 통해서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에게 예배를 드린 아벨의 후손 에녹과 노아는 물론 그 후손으로 태어난 아브라함을 보시지요. 백 살이 되도록 아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리다가 얻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 올라가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아내가 죽은 뒤에 그녀를 묻을 땅이 없었는데도 그의 후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여 큰 나라를 이룩할 것이요, 그의 후손을 통해서 인류가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살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도대체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모험으로서의 삶 아닙니까?  

모세의 경우를 보세요. 그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던 청년이었습니다. 바로의 왕자였던 그가 동족이 애굽인에게 억울하게 학대를 받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서 그 애굽인을 처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대자적 민중) 동족에게 쫓겨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쳤지요. 동족들 간에 분쟁 하는 것을 보고 중재를 하려다가 "네가 어제는 애굽인을 때려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려 하느냐?”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아 도망을 쳤습니다. 그 말이 애굽인들의 귀에 들어 갈 것을 두려워 한 것도 있겠지만, 이렇게 의식화되지 않은 동족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바로 왕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야말로 사람의 상식을 벗어난 명령 아닙니까? 어떻게 그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온 세계를 호령하는 바로의 손에서 그를 배반한 모세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국민이 해방 의식으로 하나 되어 그의 지시를 따른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요즘 코메디 프로그램에 나오는 대사로 하자면, ‘기가차고 코가 막히는’, 만약 그대로 할라치면 엄청난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명령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저하던 모세는 이 엄청난 명령을 수행하려고 애굽을 향해서 발걸음을 옳긴 것입니다. 이 역시 놀라운 모험이 아닙니까?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여호수아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왕 밑에서 훈련된 강한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는 여리고 성을 이레 동안 묵묵히 돌다가 나팔 소리와 함께 함성을 지르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침묵 속에 여리고 성을 돈 것입니다. 이 역시 큰 모험입니다.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죠.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모든 것이 잘된다고 말하는 어용 예언자들이 수두룩한데 하나님의 징계가 내릴 것이라고, 길고 긴 고난의 길을 통해서야 새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고난 끝에 새 날이 올 찌 어쩔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예언자들은 이런 듣기 싫은 예언을 했습니다. 특히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말을 하다가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이 역시 모험이었습니다.

갈릴리 청년 예수를 보세요. 그 역시 무모한 모험을 하다가 십자가상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당시 사회를 주물럭거리는 대사제들을 강도의 무리라고 질타했으니 그것은 죽음을 자초한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는 이런 죽음을 통해서야 새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모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의 뒤를 따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보세요. 그 강대한 로마를 의인의 피에 취한 창녀라고 하면서 그 창녀가 영원한 유황 불구덩이 속에 떨어질 것이라고 언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생하는 무리들을 통해서 생명이 차 넘치는 신천 신지가 올 것이라고 목청을 높여서 외쳤습니다, 그러기에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교회사를 읽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름 떼와도 같은 무리들이 새 내일을 위해서 믿음의 모험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서는 처음부터 모험 이야기로 점철이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결국 모험이었습니다. 모험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저들은 이런 모험을 할 수 있었을까요? 성서는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이런 모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저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겠죠.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나는 한 발자국도 신앙의 모험을 할 수 없는데, 땅 사고 집사서 파는 모험은 내가 할 수 있어도, 주식에 모험을 걸 수는 있어도, 내가 믿는 바를 실행으로 옮기는 모험은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성서에 나오는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믿었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세 가지의 대답이 있습니다.

첫째로 당시의 힘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악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삶이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그의 후예들이 힘을 길러서 세상을 무자비한 아수라장이 되게 하는데,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아벨의 후손들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고래 싸움에 새우처럼 등 터지듯이 고향 땅에서 쫓겨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에게 새 내일을 약속해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다면 무엇을 보고 생을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애급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없었다면 저들이 어떻게 생을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의 말발굽 아래에서 짓밟혀서 질질 이 고생을 하는 갈릴리 농민들에게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시어 그들에게 새 내일을 주신다는 약속이 없었다면 어떻게 생을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당시의 힘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저들은 삶에서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자유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서로 위하고 아끼는 삶을 살 때 저들은 참 기쁨과 보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아무 힘이 없더라도 야훼를 섬기면서 오순도순 사는데서 아벨의 후손들은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꼈었습니다. 그래서 야훼에게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라도 이웃을 도우면서 사는데서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의 뜻을 따랐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과부, 고아 ,나그네까지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함으로 평화의 세계를 창출할 수 있었습니다. 갈릴리 농민들은 비록 가난할 지라도 서로 용서하고 나누면서 사는데서 하늘나라의 잔치를 맛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난과 로마 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없었으면 그들도 욕망이 있고 궁리가 있는데 그렇게 자기 목숨을 내놓고 살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일견 강자들이 천하를 호령하면서 사는 것 같아도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참한 종말을 갖게 되고, 새로운 내일의 창출은 억압을 받던 약자들을 통해서 이룩하신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보세요. 천하를 뒤흔들던 거인 족들이 다 물속에 장사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던 노아의 식구들이 새 역사의 주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바로의 군대들이 홍해에 빠져서 멸절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복지에서 평등공동체를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로마의 세력과 야합을 한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 사제의 무리들의 힘이 그렇게도 막강했는데도, 하나님나라 운동은 저들에게서 천대받고 수탈을 당하는 갈릴리의 작은 무리들을 통해서 이룩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갈릴리 청년 예수는 용감히 예루살렘에 도사리고 앉아 있은 권력자들에게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모험을 하셨던 것입니다. 저들은 다 하나님과 더불어 감행하는 모험만이 새 내일을 창출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인 서를 쓴 기자는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을 확증해 준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 선생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인들에게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때가 이르면 거둔다”라고 그의 편지의 결론에서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모험이란 때가 이르면 많은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같이 끝까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은 신앙의 모험을 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신앙의 모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모험을 위한 준비와도 같아야 합니다. 모험을 하려고 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험을 하자고 하니까, 자기 욕망을 채우는 이기적이고 교조적인 모험을 말하는 줄 알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크게 짓는데 모험을 하자든지, 헌금을 많이 내서 더 큰 축복을 받는데 모험을 하자는 식의 모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이기적인 모험을 선동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모험은 마치 공산당이 김정일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헛된 모험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릇된 모험이라는 뜻에서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신앙의 모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생명을 해치는 악의 세력이 우는 사자와도 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물질을 하늘과도 같이 여기고 힘과 권력을 진리인양 강변하는 풍조가 만연합니다.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 여념이 없으면서 스스로 정의를 수호자라고 자처하는 무리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느 편에 계시는지를 명확히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악의 세력에 도전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는 모험>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그 일에 충성을 다하여야 합니다. 노아처럼, 아브라함처럼,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모든 예언자와 예수님처럼, 끝까지 모험으로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명 살리는 일에 목숨을 걸고 모험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험하는 신앙생활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서 태어났다는 신앙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의 삶이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암시 아닙니까? 그 예수의 탄생을 우리가 기뻐하고 환영한다는 뜻은 또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나도 내가 믿는 바를 모험으로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러면 모험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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