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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 예수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993 추천 수 0 2012.07.28 2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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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9:33-3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1.4.10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백남준 & 예수
막9:33-37

퍼포먼스 [performance]란 예술의 완결성, 개별성을 거부하는 조류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완성된 작품을 보여 주기보다는 우연성이 뒤섞인 표현 행위를 해서 작품의 의미를 시도하는 일체의 행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리 정해진 줄거리나 대본 없이 미술ㆍ음악ㆍ육체 표현 등 모든 기법을 사용해 일회적 표현 속에 방관자인 관객까지 창작 과정 속에 참여시키려는 것입니다. 백남준 같은 분들이 대표적인 퍼포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서 속에서 앞에서 말한 일종의 예술적인 퍼포먼스와 같은 예수의 행동들을 보게 됩니다. 다르다면, 예술로서의 퍼포먼스는 관중을 참여케 하려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이 퍼포먼스는 제자들을 잘 가르치려고 할 뿐만 이니라, 실제적인 인간 삶의 척도로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릅니다. 예술로서의 퍼포먼스는 일회적입니다. 늘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 때만 반짝하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린아이 퍼포먼스는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영속적으로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수난 예고를 하신 다음에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길에서 누가 더 크냐 하는 것으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길에서’ 그랬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차분하게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꼭 제자들을 비판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이미 초대교회 상황에서 교회들이 서로 경쟁하고 교우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행동하려고 하는 세태를 비판하는 의미도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이것은 오늘날 그저 경쟁을 부추기면서, 내가 더 크다, 내가 더 많다, 내가 더 잘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의미도 됩니다.

예수는 그런 제자들에게 전혀 다른 질서, 가치를 제시합니다. 첫째가 되려고 하면 전력질주하여 맨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오히려 꼴찌가 되라고 합니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되려고 기를 쓰고 위로 올라가야 하는 마당에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여전히 ‘첫째가 되려면’이라는 단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꼴찌가 되고 섬기는 것도 여전히 첫째가 되기 위한 것인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우월주의가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항상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한 것뿐입니다. 그들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이 관심하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진정한 첫째의 길을 제시하여 기존의 가치를 뒤집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주위 사람들을 대접하거나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데는 관심이 없지만, 예수께는 잘 해드리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스승일 뿐 아니라, 그가 앞으로 무슨 기적을 일으키고 무슨 큰 벼슬을 그들에게 줄지 모른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말이고, 뭘 얻어먹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요. 또 그들은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 바쳐야 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는 또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이러한 사실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하려고 합니다. 그들의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첫째가 되고 싶으면,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싶으면, 지극히 작은 사람을 섬기고 영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자기를 보내신 이와 일치시키는 것이요, 이 세상의 지극히 작은 자들과 일치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예수는 어린아이를 그들 가운데 세우고 껴안으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초대교회 상황에서 해석하면, 능력 있는 부활의 그리스도는 찬양하면서 주위의 작은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신자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이런 어린아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나아가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잘 해 드리려면 이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잘 해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의 전복입니다. 새로운 가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의무니까 무조건 그렇게 하라거나, 이것이 종교이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 같은 데서는 이런 동기가 매우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양과 염소로 나누는 심판 자리에서 임금은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보고 먹을 것을 주고 입히고 감옥에 가보고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심판 받지 않으려면 지금 여기에 있는 헐벗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입히고 먹이고 찾아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에 강조점이 있지만, 이것은 아마도 후대의 형태일 것이고 본래는 그런 심판에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초점은 예수의 퍼포먼스, 실천에 있었습니다.


예수는 참 교육적입니다. 이 점을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이번에는 그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하신 겁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껴안으셨습니다. 지금은 이 장면이 퍽 친근하고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당시로서는 뜻밖의 행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퍼포먼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아이를 가리키는 단어로 teknon, hyos, pais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 사용된 paidion은 pais에서 나온 말이랍니다. 그런데 teknon은 자녀라는 뜻이고, hyos는 상속자라는 뜻인데, pais는 나이가 어리다는 뜻이라는군요. 즉 teknon이나 hyos는 가족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긍정적 의미가 있지만, pais는 단지 어리다는 의미, 즉 사회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지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pais는 아이라는 뜻 외에 종, 노예, 하인이라는 뜻도 된다고 합니다.

어린이에 대한 고대인들의 태도는 대체로 중립적이거나 특히 소녀일 경우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대체로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구약성서에서도 어린이는 방자하고 이해력이 부족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엄한 훈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나오기도 합니다(사 3:4; 열하 2:23-24: 어린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보고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고 놀려 댔습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그들을 보고, 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곧 두 마리의 곰이 숲에서 나와서, 마흔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찢어 죽였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신 것은 세상의 가장 작은 사람, 하인 가운데 한 사람을 세우신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아이를 껴안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누구를 껴안으셨다는 표현은 어린아이에게만 사용될 뿐입니다. 이는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예수의 파격적 사랑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일 수 있습니다. 더 이 상 말로는 안 되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했던 절박함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아이를 껴안으신 퍼포먼스는 단지 행위가 지닌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아이를 껴안으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이래야 한다고 의도적으로 섬기는 척, 하는 위선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사를 전달하려고 아이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측은하고 귀엽고 좋아서 껴안는 것입니다. 그 행동 자체가 목적이지 그것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이미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보면 안아주고 싶고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일어납니다. 물론 요즈음은 아동 성 폭행 범으로 몰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약한 사람을 보면 돕고 싶고, 불쌍한 노인을 보면 무엇이라도 드리고 싶은 동정심이 속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 심어놓은 어떤 장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는 어쩌면 우리 속에 있는 이것, 아직은 잠자고 있는 이것을 일깨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를 세우고 껴안는 퍼포먼스를 제자들 앞에서 해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관념적 사랑, 머리로 하는 사랑 하지 말고, 실제로 손을 잡고 껴안아주는 터치(touch)를 하는 사랑을 하라고 일깨워 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왜 문제입니까? 아니 뭐가 문제입니까? 이전보다는 다들 잘 살게 되었는데 왜 다들 삭막하다고 하고, 살기 힘들다고 하고, 행복지수는 떨어지고, 자살률은 높아만 가는 것입니까? 전에 한국 사람은 오늘 우리들보다 훨씬 더 순박했습니다. 옛날에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그 인상이 사람들이 순박했다고 하고, 길을 잘 양보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즘은 한국 사람이 길을 잘 양보한다거나 순박하다거나 여유가 있다거나 인정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합니다.

요즘 우리는 사회 안전망을 갖추어야 한다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이전에는 비록 우리가 지금 같이 잘 살지도 못하고 복지 시설도 없었지만 그래도 사회안전망은 잘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잘 모시고, 사촌도 형제처럼 돕고, 일가 간에 무슨 일이 있으면 도우며 살고, 고아가 생기면 친척들이 다 맡아서 길렀습니다. 가난하기는 해도 인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저마다 잘 난 사람들밖에 없고, 서로 자기가 더 크다고 하고, 강하다고 하고, 늘 상대방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풍토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살면 안정망 구축하는데 대부분의 사회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세덤이라는 것도 있어서, 내가 궁핍하게 살아도 누군가를 위해 밥 한 그릇은 떠 놓고 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고, 특히 한국 사람들이 인정이 많은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이전의 그런 인정어린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까? 너무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하신 것을 따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껴안아 주는 것부터 실천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머리로는 모르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고 마음속에서 솟아날 것입니다.

모세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 왕궁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고 동족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할 수 있었지만, 동족이 이집트 병사에게 맞는 것을 보고 같이 아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 병사를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미디안 광야로 간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인정만 있고, 미디안 광야로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기에 그는 개인의 감상적 인정에 머물지 않고 민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속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인정 공동체를 이루고 나아가 서로 걱정하고 돌보는 밥상공동체, 운명공동체로 발전이 되었습니다. 인정 많은 사람과 예수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예수도 인정이 많은 분이셨지만 그분은 그냥 마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런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인정을 한 데 모으고 서로 돕고 격려하는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예수운동이고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그것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는 정도 많고 인정도 많고 좋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개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가족을 사랑하는 일을 넘어서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자신만 사랑하고 가족만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를 예수를 대하듯 하고, 하나님을 대하듯 하는 삶을 배우고, 훈련하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 인정 어린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크리스천의 마음이요, 예수의 이 퍼포먼스를 따라하고 실천을 따라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매 년 마다 사순절을 지키잖아요. 그러면서 40일 동안 금식도하고, 특별새벽기도 하고, 목사들이 시키는 대로 마음가짐도 달리해보잖아요. 이것도 일종의 종교적인 퍼포먼스에 해당한다고 할 때, 이것은 백남준 식의 퍼포먼스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하신 방식의 퍼포먼스일까요? 다시 말해, 반짝 그때만 하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가는 쇼인지, 아니면 주~욱 그것을 삶의 가치로 여기고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 되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남들처럼 예수 믿는 흉내나 내지 말고, 매년 종교 퍼포먼스에만 참여하는 것으로 믿음의 도리를 다했다고 하지 말고, 삶 자체가 세상을 향해 퍼포먼스인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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