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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임계점 앞에서

욥기 김필곤 목사............... 조회 수 4315 추천 수 0 2012.07.30 2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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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욥1:13-22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2012.3.11주일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신앙인의 회복탄력성(8) 고난의 임계점 앞에서
욥기1:13-22

모 무역회사 이사로 계신 분의 간증을 읽어 보았습니다. 한 때 그는 타락하여 술과 담배를 즐기며 룸살롱과 고급 나이트클럽을 다니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앙이 좋은 아내를 통하여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 되었답니다. 아내의 청을 들어 주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기는 하였지만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무런 재미도 없었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그러고를 몇 번 사용하고 있는가를 세어 보고, 성가대에 앉은 사람이 여자가 많은가 남자가 많은가 해아여 보곤 했답니다. 그런데 1983년 동해안에서 있었던 온 교인들의 가족 수련회에 가서 그는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가대 지휘를 하고 아내는 반주를 하며 신앙생활을 즐겁게 했습니다. 여름이 되어 임진강변에 가족 캠핑을 계획하고 집에서 출발하였답니다. 아내와 여동생, 두 딸과 조카 모두 신이 났답니다. 매형은 멋진 요트를 매달고 앞서 출발하였고 그의 아내는 뒤따라갔답니다. 그는 회사일로 바빠 만나기로 한 약속된 장소를 정하고 저녁 늦게 출발하였답니다. 그런데 약속된 장소에 가 보니 아무도 없었답니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집으로 전화하였더니 교통사고가 났답니다. 갈현동 일신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급히 달려 밤 11시에 병원에 도착하였답니다. 사실을 확인해 본 결과 큰 딸은 현장에서 즉사하여 아래층 응급실에 흰 시트로 덮여 있고 둘째 딸은 뇌에 심한 손상을 입어 그대로 놓아두면 곧 사망을 한다는 것입니다. 수술해도 회생할 가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성공해도 정상적인 기능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 뇌 수술하였으나 수술 받던 중 사망하였습니다. 아내는 경추 5-7번 치명적 손상이 있었으며 갈비뼈 4개가 골절되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온 가족이 재난을 당하였습니다.
얼마 전 한 10여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같이 학교를 다니며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하던 친구인데 어느 날 갑자기 목회를 그만 두고 연락이 되지 않은 친구입니다. 제가 개척하여 목회를 할 때 어려운 저의 사정을 알고 쌀도 갖다 주고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에버랜드도 같이 놀러 가 주었던 좋은 친구입니다. 동기들 세 명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목회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막노동을 하며, 온갖 힘들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10여 년 동안 목회를 하지 않고 목회자가 아니라 생활인으로 남이 하기 싫은 온갖 힘겨운 일을 하다보니까 세상이 참 살기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힘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 목사가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의 가정에 큰 딸이 자폐아로 태어났습니다. 매일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자신들 부부가 죽으면 누구도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아이보다 부부가 오래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재미가 있고, 흥겹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주변에는 참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잘 사는 것 같지만 내면에 들어가 보면 참 고통스러운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계속되면 마치 고무줄을 계속 늘이면 나중에는 탄성이 없어지는 것처럼 자포자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끝없이 고난이 다가오면 어느 순간에 포기해 버립니다. 임계점을 넘어서 버린 것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을 포기해 버리기도 하고 직장인이 직장을 그만 두기도 하고, 부부가 이혼하기도 하고, 부모가 자녀 교육을 방치하기도 하고, 스스로 노숙자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자살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의 임계점 앞에서도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 당한 사람보다 험한 고난을 당한 한 인물이 오늘 성경에 나옵니다. 신앙 생활을 하시는 분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시는 욥이라는 사람입니다. 남들이 다 부러울 정도로 참으로 부요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정직한 사람입니다(1:1).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온전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가정적으로 7남 3녀를 둔 다복한 가정이었습니다(2). 거기다가 그는 부자였습니다(1:3). 양이 7000마리, 약대가 3000 마리, 소가 500 겨리, 암나귀가 500 겨리가 있는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에는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자일 뿐 아니라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5).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자식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려고, 자식의 수대로 일일이 번제를 드렸고, 자식 가운데서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라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죄를 지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잔치가 끝나고 난 뒤에는 늘 그렇게 하였습니다. 욥은 모든 일에 늘 이렇게 신중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인 것을 하나님도 인정해 주었습니다(8)
그의 성품(1절), 가족사항(2절), 재산 정도(3절), 가정의 질서(4절), 종교적 경건성(5절) 등에 있어서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3, 7, 10은 성경에서 완전수를 말합니다. 의도적으로 성경은 참으로 온전한 사람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한 순간에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1:15) 어느 날 갑자기 쓰나미가 다가 온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부도가 나고,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스바 사람이 쳐들어와 종을 죽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불이 내려 양과 종을 살라 버렸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갈대아 사람 세 패거리가 약대를 약탈해 가고, 종들은 죽였습니다. 한 순간에 사업이 망한 것입니다. 한 순간에 직장에서 내몰린 것입니다. 소득원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으로 고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들딸이 다 죽었습니다.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 집에서 잔치를 하였는데 갑자기 불어 닥친 태풍이 집을 무너뜨려 다 죽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으로 고통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2장 7절을 보십시오. 자신은 악창에 걸렸습니다. 발다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얼마나 가려우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겠습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내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욥은 까닦을 모르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1:9;2:3) 그런데 욥은 이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났습니다. 1-3장까지 보면 고난에 대한 욥의 세 번의 반응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고난의 임계점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것인가를 교훈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경우에 신앙의 회복 탄력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이유 없는 고난 앞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끝까지 가져야 합니다.
욥이 이런 좋은 좋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것을 보며 사단이 시험을 합니다. 사단의 시험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유혹과 핍박입니다.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 유혹하고 우는 사자로 나타나 핍박합니다. 욥은 핍박을 택한 것입니다. 다 빼앗아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가 시험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만한 조건이 주어졌으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그 조건을 빼앗아 가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저주하고 떠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1장 9절을 읽어 보십시오.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경외할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의 집과 소유물을 하나님이 지켜 주어서 그 소유물을 복되게 하여 부자되게 하였기 때문에 그것 보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출세하고, 잘되고, 성공하고, 합격하고, 건강하게 하고, 기도응답해 주니까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지 그 조건 빼앗아 가면 하나님 경외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을 뿐 아니라 틀림없이 욕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의 몸만 건들지 말라고 사단의 핍박을 허용합니다. 그래서 자연 재해를 통한 사단의 핍박에 의해 재산과 가족을 일순간에 다 잃어 버렸습니다. 그 때 욥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형언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한 욥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20절 보십시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었습니다. 극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머리털을 미는 것도 슬픔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나 비신앙인이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타내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왔음을 인정하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을 가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조건이 주어지고, 복을 받고, 부자가 되고, 건강을 주고... 그러기 때문에 믿는 신앙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잃을 때도 변함없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감정적으로 슬픔에 빠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합니다. 그 때 두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고난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은 죄의식, 죄책감에 사로잡힙니다. 둘째, 고난의 원인이 타인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은 원망합니다. 하나님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부모를 원망하고 아내, 남편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남편과 아내를 원망합니다.
왜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21절의 고백을 보십시오. 모태에서 날 때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몸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인생은 단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니다. 하나님을 불의하며 야비한 하나님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느브갓네살 앞에 잡혀간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신상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만약 절하지 아니하면 용광로에 던져 넣는다는 것입니다. 절하지 않자 왕이 불러 절하지 않으면 즉시 맹렬한 용광로에 던진다고 합니다. 그 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면 어떤 고난의 현장 앞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이런 신앙을 어떻게 인정해 주십니까? 2장 3절을 보십시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우리도 고난의 현장에서 이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합리적 이유 없는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바로 최상의 신앙입니다.

2. 우리는 이유 없는 고난 앞에서 그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욥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단이 또 무엇을 요구합니까? 5절을 보십시오. 욥이 아직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생명이 붙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의 뼈와 살을 치게 되면 그의 순점함을 버리고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하고 신앙을 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4절을 통해 들고 있습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는 것은 일종의 격언입니다. 당시의 무역상들에게 잘 알려진 격언으로 ‘이는 이, 눈은 눈’과 같은 표현형식입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생명을 지키기 위해 버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족이 당하고 재산이 당해서 그렇지 자기가 직접 당하면 입장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암을 앓고 자기가 직접 부도가 나고, 자기가 직접 극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 입장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생명은 해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여 사탄의 손에 욥을 맡깁니다. 그래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습니다. 악성종기입니다. 온몸에 퍼지는 악질적인 피부병입니다. 고름이 흐르는 창병입니다. 심한 가려움증(2:8)이 있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으리만큼 변한 몰골(2:12)입니다. 살에 박혀 있는 구더기와 흙부스러기, 피부가 합창되었습니다(7:5). 식욕부진(3:24), 공포의 꿈(7:14), 피부와 살이 상접해 있고(19:20), 뼈가 쑤시며(30:17), 피부가 검게 되고 벗겨진 증상(30:30)을 겪는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고통 중에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폭언을 퍼붓고 사탄의 세력에 합류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사단의 도구가 됩니다. 위로해 주고 용기를 주어야 할 아내가 사단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제 희망이 없으니 인생 끝내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욥의 아내를 ‘악마의 보조자’라고 했으며 칼빈은 ‘사탄의 도구’라고 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욥의 아내가 그 어떠한 수단보다 더 악랄하게 재앙을 주는 채찍으로 생각된다고 말했습니다. 하벨은 “욥의 아내는 현실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이 고난의 임계점 앞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아내의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의 섭리를 비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모르며 외적으로 나타난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련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실 뿐 아니라 화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은혜로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주면 나도 너에게 줄 것이다’는 식의 사고 구조로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에 의해 설명되는 세계 안에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은혜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자유와 신비와 함께 원인과 결과의 세계 너머에서 무지하고 나약한 인간에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고난도 은혜의 섭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꼭 축복만 통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과정을 겪으며 고백하는 욥의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 19:25)”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는 메가폰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않습니다. 강한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약해질 때 사람은 남의 말을 듣습니다. 강할 때 사람은 얼마나 교만합니까? 약할 때 사람이 겸손해집니다.

3. 우리는 고난 앞에서 절대 자유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이해 못하는 어떤 고난도 극복하여야 합니다.
이제 사단의 핍박을 끝이 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으로 욥에게 다가옵니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통해 유혹합니다. 신앙 논리로 무장한 친구들을 통해 욥을 유혹합니다. 욥 자신을 통해 유혹당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극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유혹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보십시오. 2장 11절을 보십시오. 고난받는 욥에게 세명의 친구가 왔습니다. 욥이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 7일 한 마디 말을 못했습니다.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소리 질러 울었습니다. 각각 자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렸습니다. 7일이 지나자 욥이 반응합니다. 고난이 계속 되자 그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었던 욥의 모습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7일라는 수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기록했을 것입니다. 고난의 임계점입니다. 무너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고통이 계속 되자 그는 마음에 회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3장에 보십시오. 1장 21절의 반응과는 전혀 다릅니다. 2장 10절의 반응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떻게 반응합니까? 첫 번 반응과 두 번째 반응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 첫 반응은 모태에서 나옴을 긍정하였습니다. 그러나 1절을 보십시오. 모태에 대하여 부정합니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합니다(1-10). 죽고 사는 것이 주님께 있다고 인정하던 사람이 죽음의 늦어짐에 대하여 후회합니다(11-19). 주님의 주권에 대하여 인정하던 사람이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20-21). 하나님을 찬양하던 사람이 탄식합니다(22-26) 일주일 만에 이렇게 변해 버렸습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낮과 밤을 저주합니다(3-10절). 고난의 원인이 더 이상 자신에게 있지 않고 자신을 존재하게 한 낮과 밤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이는 창조자 하나님에게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죽기를 바랍니다(11-19절). “어찌하여”라고 탄식합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하여 갈망합니다(20-26절). 죽음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평화가 없고, 안정도 없고, 안식도 없다. 두려움만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태도가 이렇게 갑작스레 변하고 충격적인 불평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특별히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너무 가혹한 고난 앞에서 회복 불능의 좌절감을 느끼며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세 친구가 말합니다. 4:7을 보십시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네가 고난을 받는 것은 네가 죄를 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하나님 억울합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여야 합니까? 라고 말하고 친구들은 계속해서 “네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으로 보아서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죄를 빨리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그 때 욥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래서 나도 이해가 안 간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고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이해가 가겠는데 잘못한 것이 없고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한번 만나 주셨으면 좋겠다. 따져 보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친구들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지금 대답하는 것만 들어 봐도 너는 벌써 틀렸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난 잘못한 것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만 봐도 너는 틀렸다.” 친구들은 인과응보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고난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죄라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고난에 대하여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인과응보적 고난입니다. 자기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비인과응보적 고난입니다. 나쁜 사람도 부자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초인과응보적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에 의해 알지 못하는 고난입니다.
이러한 고난에 대한 논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침묵하시는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뜨리고 말씀하십니다.
1)고난을 당할 때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그 고통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42장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욥 42:7)”
그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이 꼭 죄의 징계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징계로서의 고난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징계를 당하여 고난을 당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 징계를 당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징계를 당합니다. 다윗이 간음하다 징계를 당하여 아들이 죽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도망가다 징계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연단으로서 고난도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욥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요셉도 연단으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 1:7)”
자발적인 고난도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바울이나 실라나 스데반처럼 사명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죗값으로 주어지는 고난은 회개하면 성화되어집니다. 연단으로 주어지는 고난은 인내함으로 견뎌 하나님의 쓰임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인과응보적으로만 해석하면서 고난받은 자를 위로하거나 사랑하는 것보다는 정죄합니다.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고난당하는 이유를 묻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 주어야 합니다. 일본에 원적 폭파 사고가 나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매도하지 말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의인도 대속적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정당치 못한 것을 말씀하시면서 욥에게 무엇을 시킵니까? 42장 8-9절을 보십시오. 친구들의 죄를 속죄하는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면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친구들을 하나님이 용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고난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속한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욥의 고난이 의인의 고난임을 의미하며, 의인의 고난은 세상의 죄를 위한 대속적 고난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인과응보적 고난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런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거절, 멸시, 갖은 수모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당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찔림과 상함과 버림받음의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의인 욥이 까닭 모를 고난을 당하여 비록 불평과 격렬함과 대결의 길을 거쳤음에도 하나님과의 완전한 만남을 이룩함으로 말미암아 친구들의 죄를 대속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곧 인류의 죄를 위해 대속적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욥을 정죄하고 비난하였습니다.

2) 인간은 한계를 알고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욥은 칭찬받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38:2절을 보십시오.
38장에서 시작하여 41장까지의 하나님의 말씀은 전부 이런 말씀뿐입니다. "네가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무지개가 어떻게 뜨는지 아는냐 산야이 새끼나는 데를 아느냐?"
욥의 질문에 대한 답이 일차적으로 없습니다. 욥의 질문은 세 친구에 비해서는 정당합니다만 욥은 지금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인식의 한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도전합니다. 모르는 세계를 뚫고 올라가려 합니다. 욥기에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평이 100개 이상 나옵니다. “언제까지, 어찌하여”
하나님은 엘리후의 입을 통하여 그의 죄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욥32:2)”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욥33:13)”
신약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 9:19-21)”
(1)능력의 한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자기 아들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고 자신 마저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인간의 극한 생존 능력을 대체로 「3·3·3」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공기를 3분 동안 접촉하지 못하면 목숨을 잃고 물은 3일, 음식은 3개월 동안 먹지 않으면 사망합니다.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이상 기온으로 벼 3백만석 감산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1-2도 정도 만 낮아도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 기상재해는 홍수로 지난 67년부터 91년까지 25년간 모두 1천 3백 58건의 홍수가 발생, 30만 4천 8백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인명피해가 가장 큰 기상재해는 가뭄으로 이 기간 중 4백 30차례 가뭄이 들어 1백 33만 3천 7백 28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이면서 철학자인 파스칼은 "이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성의 최고 업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알브레스 웰레스 20세가 위대한 영국의 자연주의 학자입니다. 그는 산누에 나비의 일종인 첨잠 나방의 새끼가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답니다. 어린 첨잠 나방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누에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힘을 다해서 고생하는 것이 너무 애처롭게 보여 그 누에고치를 잘 찢어 주어 나방이 쉽게 나오게 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누에고치에서 나온 새끼 나비를 계속 관찰해 보니 아직 날개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천잠 나방의 자랑인 아름다운 색깔과 무늬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얼마 안 되어 그 새끼 나비는 죽고 말았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능력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이해 못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을 현세적으로만 한정짓는 욥의 아내처럼 현실만 보면 안 됩니다.
사고를 당하여 육체와 돈은 손해 볼지 몰라도 그 일을 계기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그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8)”
고난을 통과한 욥의 결론적인 고백은 무엇입니까?
42:1-6을 보십시오. 우리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귀로 듣고 알았던 하나님을 실제 삶의 경험을 통해 눈으로 보고 체험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그리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42:10-17).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도 고난의 현장에 있을 때 이런 수준으로 회복되시길 원하십니다.

(2) 인식의 한계를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것 이 전부인주 알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에도 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의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모세의 고난, 아브라함의 고난, 스데반의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고난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날씨 좋은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하루살이와 매미 그리고 개구리가 모임을 가졌습니다. 모처럼의 회동이라선지 할 말들이 많았습니다. 안부 인사를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촐랑대는 하루살이가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세상살이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습니다. 손사래를 쳐가며 자기가 겪은 세계가 신기한 듯 장광설을 늘어놓았습니다. 매미와 개구리는 물끄러미 하루살이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루살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내일 만나자는 것입니다. 매미가 개구리에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루살이는 제 분수도 모른다고 툴툴거립니다. "개구리 형님. 쟤는 언제나 철이 들지 걱정입니다. 자기수분도 모르고 날뛰니.. 자기가 이 세상을 보면 얼마나 본다고. 오죽하면 하루를 살다 가는 것이 하루살이 아닙니까. 제 주제에 감히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닌데." 매미는 하루살이가 겪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일주일을 살기위해 7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는 구더기 생활에서부터 이슬을 먹고 사는 이야기 등을 흥미진진하게 말했습니다. 여름이 지나가자 개구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합니다. 동그마니 앉아 있던 개구리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구시렁댑니다. "야, 여름 한철 사는 너희들이 어찌 내 삶과 견줄 수 있다고 떠벌려. 고작 하루나 일주일을 살면서 세상을 다 본 양 떠들고 있으니..” 하나님은 욥의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 자신의 자유성과 전능성과 신비성만을 선포하십니다(욥 38:1 -39:30; 40:6 - 41:34).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와 지혜로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인간 이해와 지혜를 훨씬 뛰어 넘는 신비가 있습니다. 욥은 이유를 모르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5). 이것이 욥이 얻은 해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능력으로 헤아릴 수 없는 전능성과 신비성을 가지신 분이며, 인간은 그러한 하나님 앞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능력의 한계, 인식의 한계를 깨닫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실존적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욥과 같이 탄식하고, 울부짖는다는 것은 불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실존적 고민입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한 회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한 정직한 질문입니다. 신앙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받고 절규하고 탄식하였지만 곧 ‘아버지여, 당신의 손에 내 영혼을 맡깁니다.’라는 신뢰의 결단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우리고 알지 못하는 고난 앞에 하나님의 뜻에 내어 맡기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절규와 탄식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맡기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것처럼, 까닭 없는 고난 가운데 있는 자 역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나아가는 길이 바로 신앙의 길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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