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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웃되기

누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4727 추천 수 0 2012.07.30 2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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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0:25-37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2012.3.25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좋은 세상 만들기(1) 좋은 이웃되기
눅10:25-37

올해 3월부터 토요일 대부분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 신앙으로 잘 양육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까하여 토요일마다 “토요 해피 데이”를 만들어 우리 교회 식구들의 가정을 도우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자녀교육과 부모 교육을 동시에 시키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많은 가정이 참여하지 않아 우선 참여한 아이들 역사탐방을 시키고 있습니다. 첫 주에는 유관순 기념관과 제암리 교회를, 둘째 주일에는 독립 기념관을, 어제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선교를 가려고 박전도사님이 예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천이나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해서 다음에 가기로 하고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 다녀오게 했습니다. 사순절 주간이라 교회에서 많이 견학을 오는가 봅니다. 통계 자료에 의하면 1885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에 주재해 있던 총 선교사수 1,559명이었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지는 이 땅을 '복음의 땅끝'으로 알고 찾아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입니다. 그들은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좀더 좋은 세상,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들입니다. 이 땅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복지시설을 세우며 젊음을 불태웠습니다. 가난한 나라, 소망 없는 나라, 노예가 된 나라, 자유가 없는 나라, 자랑할 것이 없는 이 나라를 보다 좋은 나라로 만들려 하다가 칼에 맞아 죽기도 했고, 병에 걸려 죽기도 했으며, 갖은 핍박을 당하며 대한민국 국민을 사랑하다가 죽어갔습니다. 1886년 스물 네 살 처녀로 조선 땅에 온 엘리스 선교사는 이곳에 와서 일생을 바치고 정신여고를 세워 훌륭한 여성 교육의 명문 학교로 남겨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결핵 요양소를 만들고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던 셔우드 홀이라는 의료 선교사 가족은 그의 부모와 동생 그와 그의 부인까지 양화진에 묻혀있습니다. 모두 의사인 가족이지만 복음 때문에 이 땅에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며 환자를 치료하다가 천국에 가신 분들입니다.
이분이 자신의 가정 이야기를 담아 "닥터 홀의 조선회상"이라는 자서전을 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부의사였는데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며 열심히 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자신이 질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하나님 품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딸 역시 한국에서 질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딸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었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했고 맹인들을 위해 점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광혜여원'을 만들었고 '어린이 병동' '평양외국인학교' 조선 여자 의과대학을 설립해 서울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이것은 최초로 조선에 세워진 여성을 위한 의학교로 우석대병원과 고려대학병원의 전신이 되었답니다. 왜 이분들이 이런 모신 수난을 겪으면서 환영받지 못하는 조선 땅에 와서 선교했을까요? 그의 어머니는 이런 일기를 남겨 놓았습니다.
[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보내셨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은 말로 형언키 어려운 사랑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나를 보내셨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같이 나는 저들을 사랑합니다. 어째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압니다. 그토록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라고 예수님을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이 조선 사람들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이 좋은 소식'을 말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게 되었다.]
남편과 딸을 이방 땅에 묻으면서까지 좀더 조선 땅을 좋은 나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한 한 선교사님의 고백입니다.
여기에 가면 루비 켄트릭의 묘비가 있습니다.
그 묘비명에는 "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 Korea should have them all ." - Ruby Kendric –라고 쓰여 있습니다.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라는 말입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이곳에 가서 이 묘비명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처녀 선교사님입니다. 한국에 온지 8개월 만에 병에 걸려 천국에 갔습니다. 그녀는 병상에서 “만일 내가 죽으면 텍사스 청년회원들에게 열씩, 스물씩, 쉰씩 아침저녁으로 한국으로 나오라고 전해주세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을 후원하는 텍사스 웹윗 청년회 친구들에게 “만일 내게 일천 생명이 있으면 그것을 모두 한국에 주렵니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청년들은 뜨겁게 기도했지만 그가 죽었다는 편지가 그들에게 도착했고 함께 모여 있던 웹윗 청년회 회원들은 자신들도 이방 땅에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다가 죽겠다고 20명의 청년이 선교사로 자원하였다고 합니다. 이 청년들이 돈을 내어 아름다운 친구의 묘비를 세워주었고 그 묘에 그녀의 말 "내게 줄 수 있는 천 번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그 천 번의 삶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라는 말을 새겨놓았다고 합니다. 그들의 헌신으로 얼마나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까? 술과, 놀음으로 멍들었던 나라, 남녀 차별로 여성이 사람 대접받지 못했던 나라, 첩 제도로 가정이 불행했던 나라, 신분차별로 설움 받던 나라, 일제의 압제로 정치적 자유가 없던 나라, 빈부차이로 경제적 자유도 절대빈곤으로 경제적 풍요도 없던 나라, 무지와 미신이 지배했던 나라가 아직은 멀었지만 그래도 지금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까?
이 나라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생을 바친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예수를 믿고 많은 혜택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한 번 땅에 살다 가는 인생입니다.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우리 아이들, 청소년, 젊은이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 나 하나 출세하여 잘 먹고 잘살겠다고 몸부림치지 말고 나로 인해 조금은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만만만 생명운동을 하며 학교를 짓고 학사를 마련하여 최빈국 어린이 만 명을 품고 기독교 지도자로 양육하려는 것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꿈 때문입니다. 세계에 100개의 교회를 건축하는 것도 좋은 세상에 대한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 장학재단을 만들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도 좋은 세상에 대한 비전 때문입니다. 97년 개척하여 입당 예배 때 들어온 헌금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있으면 시행할 이웃 사랑 바자회를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것도, 교회 다니다가 실직하거나 사업하다가 어려운 교인들을 돕기 위한 펀드를 마련하려고 하는 것도 좋은 세상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좋게 만들어야 하겠다는 비전을 갖는 우리 열린 교회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신앙인은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 땅에 삶으로 인해 조금은 좋은 가정, 좋은 학교, 좋은 회사, 좋은 교회,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 때문에 마을 교회가 좋아지고, 나 때문에 성가대가 좋아지고, 나 때문에 주일학교와 학생회 청년회가 좋아지고, 나 때문에 전도회가 좋아지고, 나 때문에 주방이 좋아지고, 나 때문에 교회가 좋아지고, 나 때문에 가정이 좋아지고, 나 때문에 학교가 좋아지고, 나 때문에 회사가 좋아지고, 나 때문에 나라가 좋아지고, 나 때문에 세상이 좋아지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좋은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습니까?
성경적 용어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 천국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이 땅이 천국처럼 변할 수 있도록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처음 창조하시고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일곱 번이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좋지 않는 세상, 나쁜 세상이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범죄함으로 좋은 세상 에덴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좋지 않는 세상이 되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의 죄, 사람의 탐욕, 사람의 교만, 사람의 지배욕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사람의 죄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아 수고의 고통을 감당해야 했고, 사람의 죄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받아야 했고, 사람의 죄 때문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람의 죄 때문에 전쟁과 질병, 가난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보시기에 심히 좋지 않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시대 홍수로 심판하였고,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이 쓸어 버렸고,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철저히 망하게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먼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끝없이 유토피아를 추구합니다. 함께 부자로 잘 사는 나라, 먹고 살 것 걱정 없는 나라, 범죄 없는 나라, 오래도록 건강하게 하는 나라, 심지어 영원히 죽지 않는 나라가 좋은 세상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하면 좋은 세상은 올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니까 세상이 나쁜 세상이 된 것이기 때문에 먼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좋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좋은 이웃이 되면 세상은 좋은 세상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나쁜 사람이 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반역하였기 때문에 에덴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성경에 좋은 세상에 대한 모델이 4개 나옵니다. 참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죄없는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입니다. 두 번째는 예배 공동체로 제물을 통해 속죄함을 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받고 새로운 예배 공동체의 삶을 산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좋은 세상은 그야말로 완벽한 새하늘과 새땅 천국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죄가 없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왕이라고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율법사처럼 자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자기 스스로 옳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율법 교사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능통한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에 대하여 능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예수님을 왕으로 예수님의 자신의 죄를 해결하실 분으로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시험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자기가 무엇을 해야만 천국에 들어가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야,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야, 예수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믿어야 영생함을 받는데 그것을 모른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물어 봅니다. 너가 잘 아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그 질문을 받는 율법 선생님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 학생들과 어린이만 읽어 보세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28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나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는데 영생을 얻으려면 이것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을 실천하는 좋은 이웃이 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불쌍한 사람을 보면 아무 조건 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은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동족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내 자신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좋은 세상으로 주신 땅이지만 인간들이 좋지 않아 서로 욕심을 부려 빈부 격차가 심하게 되었습니다. 도둑도 생기고 강도도 많았습니다. 돈을 빼앗기 위해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덥쳐 돈을 빼앗았습니다. 돈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옷까지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분풀이 하듯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때렸습니다. 그리고 강도들은 시체처럼 되어 버린 그를 버려두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 때 마침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예배드리로 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신음하는 그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못 본체하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또 한 레위인이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도 그 장면을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바로 네가 이런 유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볼 때 외면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참 후 어떤 여행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개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입니다. 혼혈인이라고 비난받는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상종을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을 볼 때 어떤 마음을 가졌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한 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인간대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멸시한 사람입니다. 천대하고 왕따 시킨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려움을 당하니까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좋은 남편이 되려면 박박 바가지 긁어도 아내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좋은 부모 되려면 마음에 들지 않은 아들 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아들 딸 되려면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긍휼(矜恤)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긍휼이란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마음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헬라어로는 '엘레에모네스'로서 "인자, 자비, 사랑, 불쌍히 여긴다, 민망히 여긴다" 등으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입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해도 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율법사들은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남을 불쌍히 여길 줄을 몰랐습니다. 안식일 날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남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늙은 부모를 마음대로 학대해도 성전에 가서 헌금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로마사회가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했습니까? 아이를 낳아도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하면 버렸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긍휼이 여기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정하고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는 이를 악물고 정을 억제해야 하고, 표독스럽게 살아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주님은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 만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 긍휼히 여겨라. 그래야 만이 너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긍휼이 여겨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이 여겼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주 긍휼히 여겼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실 때 그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그가 귀족이든지 천민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살면 그들을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신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자를 긍휼이 여겼습니다. 병든 자, 장애인, 세상에서 버림받고 천대받는 죄인들, 귀신 들린 자, 이런 사람들을 주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는지 모릅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 이하를 보십시오. 나병환자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그이 손을 내밀어 문둥이 몸에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남편 죽고 아들 죽었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과부에게 '울지 말라. 울지 말라.'고 말씀하신 뒤 관에 손을 얹으시고 '청년아, 내가 명하노니 일어나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처형하는 사람에게까지 용서를 통해서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저희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시대는 무한 경쟁의 시대입니다. 남이 죽어야 자신이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34살의 어느 평범한 회사원의 글을 보았습니다. 용인 민속촌 근방의 회사에서 근무를 하다가 회사일로 인해 서울 역삼역 근처 본사에 가게 되었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3~4명 정도가 서 있고 모두 앉아있었답니다. 구성쯤 도착해서 막 출발을 하려고 할 때 한 할아버지가 양손 가득히 짐을 들고 버스를 간신히 탔답니다. 그런데 한 10미터 정도 앞으로 가다가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를 했답니다. 운전기사가 할아버지에게 차비 없으면 빨리 내리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한번만 태워 달라고 애원했답니다. 운전기사가 어르신한테 너무한다며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떨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때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답니다. 그리고는 가방을 내려놓고 여기저기 뒤지더니 기사아저씨에게 소리를 질렀답니다.
"할아버지 잖아요! 아저씨 앞으로는 이렇게 불쌍하신 분들 타시면 공짜로 10번 태워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만 원짜리를 돈 통에 넣었답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에게 자기 자리를 양보했답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그는 눈물이 핑~돌 정도의 찡~~~함이 가슴에 스쳐갔답니다. 그는 오리역에 왔을 때 만원을 지갑에서 꺼내 꼬마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도망치듯 뛰어 내렸답니다.
긍휼은 사람의 마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어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누구든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 말씀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어려운 사람을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좋은 이웃입니다.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첫 단계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두 번째 단계는 그 마음이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려운 처지를 당한 사람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에 불쌍한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고 그것이 행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만큼 행동하려면 마음의 감동이 강해야 하고 마음의 감동을 행동으로 옮길 만한 의지력 즉 용기 있는 결단과 분명한 가치관, 여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단지 종교적 상품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분을 통해 적당히 군림할 줄은 알았는데 그 직분은 통해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행동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가까이 갔습니다. 상처 난 사람, 죽어가는 사람, 빚으로 고통 받는 사람, 질병으로 어려움 받는 사람, 한센병에 걸린 사람 가까이 하기 싫어합니다. 부담스러운 사람, 자신에게 피해를 줄 것 같은 사람 가까이 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까이 갑니다. 희생이 따랐습니다. 언제 강도가 나타날지 모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도움을 줍니다. 여행용 기름과 포도주가 있습니다. 응급조치를 취합니다. 포도주로 소독을 합니다. 기름으로 약을 바릅니다. 자기 짐승을 태워 주고 자신은 걸어갑니다. 주막까지 가서 바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튿날까지 그를 돌보아 줍니다. 좋은 이웃이 되려면 우리는 때때로 걷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기름과 포도주를 사용해야 합니다. 시간을 할애하여 어려운 이웃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소모해야 합니다.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노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37).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실제적으로 사용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자비는 마음에서 끝나는 덕목이 아니라 행동을 베풀 때 가치가 있는 덕목입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했습니다. 끝없이 불우한 이웃들, 가난한 자, 굶주린 자, 병든 자를 위해 자신의 몸과 시간과 정열을 희생하였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십자가에서 못 박히기까지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어본 율법학자는 바로 이것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영생에 대한 관심은 있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이런 관심을 가진 사람을 찾기도 힘듭니다. 현실 삶 속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까? 어떻게 하면 멋지게 살까? 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질문은 그 동기가 진정 내세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질문은 지극히 현실적인데 있었습니다. 자신의 현실적 목적을 성취하는데 있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가 질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 구원의 길을 몰라서 물어 본 것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대부분 구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길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시험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거슬리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도 내세적 관심도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위해 사용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랬습니다. 이 땅에서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주 한 분 심방하였습니다. 젊은 날 자식들을 위해 수고하며 양육하였습니다. 손자들까지 맡아 양육해 주었습니다. 재산도 다 손자에게 주어 버렸습니다. 늙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저에게 빨리 죽어야 한다고 빨리 죽어야 한다고 눈물 흘리며 말씀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아서 퇴원해도 마음 놓고 갈 곳이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자식들한테 대우받으려면 죽을 때까지 재산 물려주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들이 ‘머지않아 아빠 엄마가 집 한 채 물려 줄 텐데 뭐.’라고 생각하며 무직, 무 저축, 무방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식들에게 집을 물려주면 굶어 죽고 물려주지 않으면 목 졸려 죽는다는 말이 있어도 목이 졸릴지언정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100살까지 살 때가 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기증하여 좋은 세상 만드는데 쓰임 받으십시오. 긍휼의 자금을 만들어 실직한 교인들, 사업에 실패한 교인들 일어 설 수 있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내와 함께 차 속에서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천국에 대한 확신, 내세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저렇게 살지 않을 텐데”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기꾼이나 거짓말 장이가 아닙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통해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의의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 양과 염소로 나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사의 상을 의인의 상을 받을 때가 옵니다. 우리가 눈물로 봉사하는 것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대답하는 것보다 다시 그에게 질문을 합니다. "네가 잘 알고 있는 율법에서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그는 27절에서 대답을 합니다. 구약 신6:5; 레19:18를 들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28절 "네 대답이 옳다. 그러면 이것을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해 보라. 그러면 산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대 강령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구약의 진리입니다. 이것은 율법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찾아보십시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 18:5)"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8:9)" 그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영생을 얻는 방법이라고 가르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무능력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차라리 이렇게 말했어야 합니다. "저는 노력해 보았지만 도저히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제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 질문을 했다면 바로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 6:47)"라는 말씀을 명쾌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완벽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하며 그의 위선과 무능력을 깨우쳐 주고 실제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다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행동을 할 것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도 물어 보시는 질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그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 정말로 가기 싫은 곳에 가고 주기 싫은 사람에게 주고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시간을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려면 바로 자기를 냉대하고 천대하는 사람, 인간 대접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포도주와 기름을 발라 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두 달란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 이틀을 머물러야 하고 그를 위해 자신의 나귀를 내어주어야 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도 지셨습니다.

좋은 이웃은 선행 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이 회복 될 때까지 끝까지 책임져 주는 사람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려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회복 될 때까지 끝까지 책임져 주는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선행도 마케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쇼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처럼 보임으로 또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인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35절을 같이 읽습니다. “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눅10:35)” 책임감을 가지고 지속적인 배려를 하는 것입니다. 일회성 돌봄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도움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정상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배려해 준다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돌본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주일, 한 달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아니 일 년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까지 병 수발을 한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 외에는 십자가 없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인에게 줍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하루의 품삯입니다. 당시 로마의 하루의 숙박비 1/32데나리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두 데나리온은 두 달 치 숙박비입니다. 그만큼 그가 중환자였다는 이야기이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가 회복될 때까지를 배려한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면 더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확실히 회복될 때까지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책임감을 갔습니다. 끝까지 책임의식을 가지고 정상적으로 회복될 때까지 배려를 해줍니다.
진정 좋은 이웃은 끝까지 책임지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브라함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아들을 주겠다고 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버려버립니까? 아닙니다. 끌까지 그를 붙들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야곱 형을 속이고 도망을 갑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5)"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형제 자매입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도 배려하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이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대하여 그런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구조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받아야 합니다.
한센병 환자가 인간대접을 받지 못할 때였습니다. 1909년 4월, 유진 벨 목사와 함께 목포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벌이던 오웬 선교사가 선교 순회 도중 급성 폐렴에 감염되었답니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광주에서 목포 선교병원에 전보를 쳐 또 다른 의사를 광주로 오게 했답니다. 그 때 포사이트 선교사는 전보를 받고 1909년 4월 4일 목포를 떠나 광주를 향해 조랑말을 타고 떠났답니다. 그런데 광주 가까이 다다랐을 때 길 가에서 한 여자를 발견했답니다. 당시 사람취급받지 못하는 길거리에 방치된 한센병 환자였답니다. 손과 발은 짓물렀고 퉁퉁 부어 상처투성이었고, 걸친 누더기 옷은 피와 고름으로 얼룩져 있었답니다. 이런 때 우리 성도님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위독한 동료선교사를 치료하러 가는 길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포사이트 선교사는 죽어가는 환자를 그냥 놔두고 갈 수 없었습니다. 길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 그녀를 감싸 안아 자신의 조랑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로 들어갔습니다. 도착해보니 오웬 목사는 이미 운명한 상태였답니다. 포사이트는 광주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윌슨을 찾아가 그 여자에 대한 치료와 거처를 부탁했으나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고심 끝에 광주 동남쪽에 있던 벽돌 굽던 가마터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그녀를 옮겨두고 침구와 옷가지를 주어 거처하게 했답니다. 이 일이 한국에 본격적인 한센병 치료 시설과 병원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포사이트가 한센병 환자를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센병 환자들이 하나 둘씩 광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애양원'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으로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을 괴한이 납치하여 귀를 잘랐고 풍토병에 감염되어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이 정도가 되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미국에 귀국한 중 와병 중에도 7년간 미국 각지에서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과 한센병 환우들을 위한 모금운동을 펼치다가 귀를 잘린 후유증과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1918년 5월 9일 45세의 나이로 천국에 가게 되었답니다. 1926년 광주에서 여수로 한센병원이 옮겨질 당시 환자들은 광주에서 여수까지 상여를 매듯 포사이트 기념비를 어깨에 메고, 보름 동안이나 밤길을 걸어서 옮겼다는 얘기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까? 좋은 사람이 되십시오. 좋은 이웃이 되십시오. 좋은 이웃이 되고 싶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실제적인 행동화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책임감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여건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힘주시면 넉넉히 좋은 이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데 쓰임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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