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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숨 쉬는 세상 만들기

누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808 추천 수 0 2012.07.30 2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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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19:1-10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2012.4.15주일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좋은 세상 만들기(4) 정의가 숨 쉬는 세상 만들기
눅19:1-10

제가 퀴즈를 낼 터이니 한 번 풀어 보세요.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강하게 불고 있었습니다. 불을 끄기 위해 소방관이 출동하였습니다. 불이 난 집은 불길이 치솟아 올랐고 바람이 세기 때문에 가만히 놓아두면 옆집에 옮겨 붙을 상황입니다. 어느 집부터 먼저 불을 꺼야 할까요? 지금 불이 난 집부터 불길을 잡아야 할까요? 옆집으로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옆집부터 소방 호스를 대고 물을 뿌려야할까요? 답은 돈을 준 집부터 물을 뿌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옳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젠가 한국 리듬체조의 간판으로 활약한 신수지가 자신의 미니홈피에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표현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신수지는 공정치 못한 심판을 보면서 "더러운 ×들아 그딴 식으로 살지 마라. 이렇게 더럽게 굴어서 리듬체조가 발전을 못하는 거다"라는 내용의 격한 글을 올렸습니다. 각종 대회들이 공정치 못하고 뒷거래로 상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조차도 "세상이 불공평해!"라고 말합니다. 우리 국민의 73%가 한국 사회를 보며 "공정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는 공정한가"에 대해서 정부의 여론조사 결과입니다. 가장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20~30대 젊은 층은 말할 것도 없고, 60대 이상에서도 절대다수가 우리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는 지난해 '공정사회'라는 국정지표를 내걸었지만 국민들 절반 이상이 '정부가 공정사회 구현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국민권익위원회가 발표한 '2011년도 수사·조사 및 규제기관 청렴도 측정 결과'를 보면, 공정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검찰과 경찰이 꼴찌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습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횡포와 각종 탈법 편법적인 부의 대물림, 노동시장에서의 차별과 불공정, 장애인 같은 힘없는 소수자에 대한 멸시와 핍박 등 공정 사회로 가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의론의 대가인 미국의 존 롤스는 "진리가 사상 체계의 첫째 미덕인 것처럼, 사회제도에선 정의가 제일의 미덕"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의가 숨 쉬는 사회가 좋은 세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정의로운 사회에 대하여 크게 네 가지 모델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단순한 명령을 어기고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반역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둘째가 가나안 땅입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정의가 숨 쉬는 사회를 만들 것을 하나님은 요구합니다. 그래서 모세 오경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의 법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법을 주시면서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8)”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 때 사용하는 용서가 두 개가 나옵니다. “짜데카”라는 말입니다. 기초정의라고 말합니다. 하루하루 가족 및 사회적인 관계들을 공정하고 공평하며 관대하게 이끌어가는 일상적인 생활을 지칭하는 정의입니다. 또 하나는 “미쉬파트”라는 말입니다. 교정정의라고 말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는 벌을 내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희생자는 보살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단어가 합해진 것이 사회정의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약에 613개의 법령을 주십니다. 특히 신명기 15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4-5)”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영구적인 최하층 계급은 사실상 사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채무 탕감법, 이삭줍기 규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레19:9-10) 단순한 자선이 아니라 상대방의 선행에 기대하지 않고 생계대책 세우게 해 둔 것입니다. 레위인 제사장을 위해 십일조 제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3년 마다 공공 창고에 모아 가난한 이들 돌보게 했습니다(신14:29). 안식년을 만들어 온갖 채무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희년을 만들어 소유권 처음 지파에게 돌아가게 했습니다. 적어도 일행 동한 한 번 새롭게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결국 앗수르에게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남은 자들은 다시 애굽으로 도망갔습니다. 세 번째 정의로운 사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있은 후 오순절 성령이 임함으로 이루어진 오순절 성령 공동체 교회의 모습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실현된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마지막 주어진 정의로운 세상은 계시록에 나오는 예수님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땅에서 완전히 정의로운 사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했던 정의가 숨 쉬는 세상을 우리는 꿈꾸어야 합니다. 오늘 정의롭지 못했던 삭개오가 정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 좋은 세상 만들기 네 번째로 정의가 숨 쉬는 세상 만들기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정의가 숨 쉬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1.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러 오신 예수님과 만남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먼저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정의로운 세상이 되려면 먼저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혼자 살면 정의를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가 바로 정의입니다. 일찍이 흄은 정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자연적 자원의 부족과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분쟁과 갈등, 협상, 조정이 행해지는 첫째 원인은 바로 재화의 희소성이라는 것입니다. 가지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데 모두에게 줄 만한 재화의 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남을 위하는 성질을 갖고 태어났다면 누구도 정의 같은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데 인간은 만족함을 모르고 이익을 추구하고 규제가 없다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정의란 사람들 사이에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변해야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정의로운 사람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교육을 시키면 정의로운 사람이 될까요?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하버드 대학 샌델 교수는 교육을 많이 받으면 더 정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육 수준이 높다고 더 정의롭게 산다는 보장은 없다고 말 합니다.교육보다 인간의 품성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품성이라는 것입니다. 철학과 예술, 역사, 인문학 등을 통해 품성이 높아졌을 때에 정의로운 삶을 살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어떻게 변화됩니까? 오늘 정의롭지 못한 삭개오가 정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보십시오. 삭개오가 어떻게 정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까?
그를 찾아오신 진정으로 정의로우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의롭지 못한 삭개오를 찾아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의 사회를 구현한다고 정의롭지 못한 사람을 숙청하고 처형합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은 정의가 숨 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어느 대통령이 정의사회를 구현한다고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 삼천교육대로 보내었습니다. 자신도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까? 쿠데타에 맞섰던 수경사령관 장태환 장군은 아버지도 자살하였고 아들도 부인도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정의를 무기로 자신의 이익에 맞지 않는 상대를 제거한다고 정의사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도 정의를 구현한다고 예수님을 고발하여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는 건설을 하시는 장로님이 150억을 헌금하여 교회를 잘 지었답니다. 지하 1층에 체육시설을 만들어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였는데 교회에 빚이 있어 회비를 조금씩 받았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강도사가 구청에 신고를 한 것입니다. 정의롭지 못하다고 불의를 행한다고 신고를 하여 몇 천만 원 벌금을 내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장로님이 150억을 헌금했는데 그 돈이 정당한 돈인가 세무조사를 해달라고 세무서에 신고를 하였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여 죽였습니까? 공산주의 사회자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습니까? 오늘날 교회에서도 정의라는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정죄합니까? 예수님은 부정한 세리장인 삭개오를 어떻게 대해 주십니까? 정죄합니까? 심판합니까? 정의의 칼을 휘둘러 단칼에 목을 베었습니까? 얼마든지 예수님을 심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의롭지 못한 그를 일부러 찾아가십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셨습니다(1). 지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입니다. 5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삭개오에게 갑니다. 정의의 사도로 심판하러 갔습니까?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고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삭개오를 찾아갔고 그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사정을 다 아시고 그를 초청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에 간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분명한 의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리고 사람입니다. 당시 가이사랴와 가버나움과 더불어 3대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의 세리장이었습니다. 세금을 거두는 세무 서장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 하에서 월급이 따로 없고 지시된 금액만 징수하면 나머지는 자기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부당하게 착취하여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를 뭐라고 합니까?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순전하다, 정의롭다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를 낳고 순전하고 정의롭게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의 뜻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고 민족의 배신자, 부정축재자가 되어 자기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유대 동족들은 세리들을 매국노와 같이 멸시하고 상종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권력 남용과 부정직한 삶을 살도록 열려있었던 만큼 멸시와 비난을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천민 취급받았습니다. 정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와 왔습니다. 그 때 삭개오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급히 내려왔습니다. 즐거워하였습니다. 영접하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를 인정해주고 정의로운 사회의 구원으로 받아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윤리)은, 그리스도인 됨(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신앙사건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체험, 즉 하나님체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변화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인물들이 정의 사회를 만드는데 쓰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변화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출애굽이라는 변화체험을 합니다. 430년의 노예생활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탈출하는 구체적인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 때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윤리적인 결단 곧 유월절 규범을 지키게 됩니다. 신앙 고백을 행동과 생활의 윤리로 발전시킵니다. 하나님 체험을 하게 되면 신앙 고백이 나오고 신앙 고백은 윤리적 결단, 그리고 윤리적 규범의 형성을 낳게 만듭니다. 가짐의 가치에서 됨의 가치, 나눔의 가치, 그리고 섬김의 가치로 인생관이 바뀝니다. 예수님 만나 정의의 사자가 되어 정죄하고 심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정의한 사람을 찾아와 만나주시는 예수님의 정의를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2.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러 오신 예수님의 정의로운 가치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의 장애물, 사람의 장애물, 열등감의 장애물을 뛰어 넘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즐겁게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삭개오처럼 기뻐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냉대합니다. 그런데 유대 사회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에 집에 오신다는 것은 너무나 감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소외된 자를 찾아오시는 예수님께 그는 감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생각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삭개오의 변화체험은 가치구조의 전환으로 나타납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물을 끌어 모으는 일에만 관심을 갖던 그가 이제는 재물을 나누어 주는 일을 위해 스스로 결단한 변화입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한 데서부터 주어진 변화, 곧 죄인으로부터 구원받은 자에로의 변화입니다. 두 번째로는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데에만 관심을 갖던 그가 이제는 토색한 것을 사배로 갚겠다고 결심한 변화입니다. 회개하고 보상에까지 철저하게 관심을 갖는 모습입니다. 기독교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영적 차원의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체험을 한 것을 충분한 변화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생활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성령체험은 번쩍하고 번갯불 치듯 일순간의 체험으로 그치게 되고 맙니다. 신앙의 눈이 열린 후의 진정한 변화는 영적 변화와 함께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생각이 바뀌고 그에 따라 우리들의 생활과 가치관에까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영접한 후 그렇게 귀하게 여겨왔던 재물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들이 가장 귀한 것이라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체험을 통해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분배정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전에는 자기만 알던 사람이 이웃을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을 자신의 삶에 끼어들게 했습니다. 이전에 관심은 재물 소유였습니다. 잘 사는 것, 돈 많이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체험 후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쌓는 것 보다 나누어 주는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정의란 무엇이겠습니까? 로마 시대 울피아누스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을 정의라고 하였습니다. 플라톤은 정의란 지혜, 용기, 절제를 통합하는 4주덕의 으뜸으로서 영혼의 질서와 조화에 관련된 개인적 덕목이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보편적 정의와 특수적 정의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보편적 정의'는 규범에 따르는 합법성을 의미하며 '특수적 정의'는 사회생활의 구체적 규범을 설정하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공정성 혹은 균등성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특수적 정의는 분배적 정의와 시정적 정의로 다시 세분하여 '분배적 정의'는 재화, 명예, 공직 등에 대한 분배의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시정적 정의'는 물품교환, 대여, 고용 등 개인간 거래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교환적 정의와 범죄의 처벌과 범죄에서 유발된 상해를 보상하는 처벌적 정의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현대사회의 정의관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행복의 극대화, 자유존중, 미덕 증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장 많은 구성원에게 최상의 이익을 주는 초치가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각자 선택한 삶을 살아갈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게 정의로운 일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도덕과 미덕을 좇아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할 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된다고 합니다. 이런 이론을 아무리 알아도 자신의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의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의란 문자적인 뜻만 놓고 보면 바르고 옳은 것이지만 도대체 무엇이 바르고 옳은 것이란 말인가에 부딪치게 됩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말할 때 종교적 가정을 배제하고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응보적 정의든, 회복적 정의든, 분배적 정의든 전제가 중요합니다. 응보적 정의는 사법제도와 관련되며 법을 위반하거나 죄를 지었을 때 거기에 맞는 형벌과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입니다. 회복적 정의는 법을 위반한 사람이나 가해자에 대한 단순한 처벌보다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대화와 이해, 회개, 용서, 치유, 화해 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분배적 정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자원(토지, 자본, 일자리, 교육, 건강, 안전, 권력, 명예 등)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배적 정의는 또다시 공로적 정의, 평등적 정의, 필요적 정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공로적 정의는 개인의 기여나 공로, 노력에 따라 받는 것입니다. 평등적 정의는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존엄성, 보편적 인권 등에 따라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이 세상의 자원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필요적 정의는 인간으로서 필요한 필요를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채워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을 아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삭개오처럼 삶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빈곤과 결핍의 그들의 무능력이라고 외면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빈곤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빈곤의 3대 원인은 첫째는 구조적인 원입니다. 부패한 정부와 억압적인 경제 질서 때문입니다. 둘째는 재난입니다. 태풍, 사고, 질병, 화재 등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는 도덕적 해이입니다. 게으름 자기 통제력의 부족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신앙인은 가치관이 변합니다. 가장 현격한 변화가 이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 소외된 사람, 불의한 제도로 압박받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치관이 바뀐 사람들이 좋은 세상 정의가 숨 쉬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최고의 부자로 이름을 날렸다는 록펠러를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가난의 한 때문에 미국 석유 90%를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노동자를 심하게 착취하고 끝없이 욕심을 채우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등으로 의사는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진정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 체험을 한 것입니다. 죽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 기도하는 중에 더 파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석유 부자가 되었고 질병에서 치유 받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라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예수님 만나 완전히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백만평이 넘는 12개 대학을 건립하였습니다. 그가 세운 대학 중에 시카코 대학은 지금까지 노벨상 52명을 배출한 명문대학입니다. 그가 일평생 4928개의 교회를 지어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어느 곳에도 자기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돈이기 때문에 대학 교회 어디에도 내가 돈을 내어 지은 대학이나 교회라고 쓰지 말라고 당부하였답니다. 그는 나중에는 십일조만 관리하는 직원 40명을 별도로 두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하도 이상하여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다른 사업가들은 돈을 빌려서라도 투자해도 안 되는 데 선생님은 십분의 일을 헌금하고도 어떻게 잘 됩니까? 그 때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겨우 보는 것이 3-4년 밖에 보지 못하지만 자신은 30-40년을 내다보고 투자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3천 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습니다.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는 "상속은 자식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망치게 하는 것이다. 저 세상으로 돈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하고 가치관이 바뀐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정의로운 세상으로 바뀝니다. 세계적인 인재를 기르는 하버드 대학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만나 가치관이 바뀐 하버드 목사가 1639년 자신의 책 400여권과 작은 유산을 기증함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얼마나 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3.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러 오신 예수님처럼 실제적으로 현장에서 정의로운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실제적으로 모든 사람이 더럽게 여기고 상종하지 않는 삭개오 집에 찾아가 유합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비난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젯거리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합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찾아가십니다. 의지할 데 없는 과부의 아들을 찾아가 살리십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부도덕한 여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인종차별을 받는 사마리아인을 찾아가셨습니다. 죽지 못하여 살아가는 한센씨병 환자를 찾아가 치유시켜주었습니다. 민족의 배반자라고 낙인찍힌 세리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는 로마 점령군의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 지배에 동조하고 협력하는 소수의 특권층이 있었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한 농어민이거나 소상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집권층의 일원이 되거나 동조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들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의 사회 비리, 권리 침해, 수탈 행위, 학정을 고발하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억압받으며 불우한 이들을 가까이하고 변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궁궐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사는 자들과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하는 폭군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이웃 사랑으로 정의를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삭개오는 이런 예수님을 만나 감격하고 가치관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처럼 실행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으면 네 배를 갚겠다고 합니다. 사회정의를 실현하겠다고 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도적질한 것을 고백하면 그 원주인에게 불법적으로 취한 그 액수에 1/5을 보상(민5:7)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도적질한 것이 탄로 나고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출22:1,4)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면서도 4배로 갚겠다는 삭개오의 행동은 율법에 개의치 않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를 철저히 뉘우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 내 재산을 남에게 주겠다고 유언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것은 그 만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만난 자는 그를 영접하고, 그를 영접하는 자는 과거의 청산과 새로운 출발, 곧 생의 변화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윤리적 결단은 물질의 재분배라는 나눔의 가치를 실천하게 합니다. 진정한 정의는 자발적인 나눔의 실천입니다.
약자에게 도움을 주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원조입니다. 신체적 물질적 경제적 필요 직접 채워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와주는 것입니다. 노숙자 임시 숙소를 만들어 주고, 궁핍한 자의 의복과 음식을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최소 비용으로 병 고쳐 주는 것입니다. 위탁 아동과 노인, 장애인을 돌보는 것입니다. 가정 폭력에 대하여 무료 법률 상담을 해 주는 것입니다.
둘째는 개발입니다. 개인이나 가족 또는 공동체 전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여 원조에 의존하는데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후원하는 일입니다. 구약에 나온 부채 탕감, 이삭줍기, 희년과 같은 제도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일자리 창출, 직업 훈련, 취업 정보, 재정자문 등과 같은 것입니다.
셋째는 사회 개혁입니다. 의존적 성향을 불러일으키거나 악화시키는 환경과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같으면 어떻게 하면 뿌리 뽑을 것인가를 생각하여 경찰을 배치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린이를 대상 노동 착취를 금하는 법을 만들고, 방과 후 학교를 만들고, 장학 재단 등과 같은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힘을 가진 자 쪽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 역점을 둔 사법체계를 바꾸는 것입니다(레19:15) 과도한 이자를 물리는 대부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출22:25-27) 불공정하게 낮은 임금을 체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레22:13)
릇은 담긴 내용물에 따라 이름이 바뀝니다.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것은 삼천교육대로 보내는 사람 같은 사람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8세기 말 유럽 사회는 노예무역과 아동노동, 대중의 빈곤과 상류층의 타락 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추고 노예무역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노예무역을 폐지한다면 무역은 순식간에 망하고 말 것이라고 할 때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체험하고 가치관이 바뀐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사명감을 갖고 일어나 이 제도를 폐기 시키고 양심과 정의감이 살아 있는 나라 영국을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반대를 헤치고 “노예무역 폐지”라는 사명을 붙들고 투쟁한 지 20년 만에 노예무역 폐지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무려 150번의 의회 논쟁을 통하여 노예제도가 영국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을 쥐고 타락한 생활을 하던 160센티미터의 작은 체구를 가진 월버포스는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에서 종교의 부흥과 진보』라는 책을 공부하면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다. 상류층 인사가 모이는 다섯 개 클럽에서 탈퇴하고 도박과 춤을 끊었으며, 당시 타락 일로로 흘러갔던 연극 극장에 가는 것도 중단했습니다. 그의 정치 활동의 목표는 바뀌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근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내 인생이 새로워지면 내가 사는 사회가 정의가 숨 쉬는 사회가 됩니다.

좋은 세상은 정의로운 세상입니다. 정의가 숨 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러 오신 예수님과 만남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정 구세주로 믿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러 오신 예수님의 정의로운 가치관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가치관의 바뀜으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시러 오신 예수님처럼 실제적으로 정의로운 윤리적 결단을 내려 실천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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