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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 낫는 것은 복도 아니다

마태복음 박신 목사............... 조회 수 2373 추천 수 0 2012.08.04 23: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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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5:3-12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2005.4.3 http://www.nosuchjesus.com/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3-12)

왜 예수를 빨리 전해 주지 않았나?

제 후배가 미국 회사를 다니는데 출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다. 오후 2-3시에 나가는 것도 예사고 어떤 때는 평일인데도 출근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회사에서 잘리지 않고 꼬박꼬박 월급이 제 때 나오며 최고급 동네에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컴퓨터 회사에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별로 일이 할당되므로 근무 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지 않은데다 한밤중 조용할 때에 집에서 일하는 것이 능률이 더 오르므로 회사로선 맡은 일만 제 때에 해내면 문제 삼을 이유가 없다.    

상식적으로 정시에 출퇴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지각했거나 결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반 회사 직원이 볼 때에 그는 근무태도가 너무나 나태하고 불량한 회사원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컴퓨터 회사의 내규와 하는 업무의 내용을 모르고는 전혀 잘못된 판단을 할 수 밖에 없다.  

저는 33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가장 절실히 느낀 것 중의 하나는 기독교 진리를 외부에서 너무 잘못 알고 있고 그래서 예수 믿는 신자도 덤으로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신자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종교인이라면 착하게 살면서 남을 도와야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인데 그런 부분에서 기독교인들은 말만 앞서고 행동이 뒷받침 해주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기독교 자체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지레짐작해버린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른 모든 종교처럼 단순히 착하게 살며 이웃에 구제를 베푸는 것이 그 본질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그분과의 일대일 인격적 만남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기독교의 본질은 믿음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예수를 제대로 믿고 나서야 세상에 통용되는 잣대로 기독교 신앙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고 난 후의 제 솔직한 심정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님이 비유한 것처럼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발견한 것과 ‘나’라는 존재 전부와 맞바꾸었으며 그 분께 인생을 완전히 의탁할 수 있었다. 그 후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체험하는 삶은 한 마디로 감격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성령의 외적 은사가 넘쳐 감정적으로 충만하고 영적으로 신령해지는 체험을 항상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때까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속에 꽉 막혀 있었던 것들이 시원하게 뻥 뚫려버렸다는 뜻이다. 이 세상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분께서 그 절대적인 능력으로 나를 알고 붙들고 계시며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내 일생에 대한 완전한 계획을 갖고 인도하고 계시므로 그분만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생기는 자유함이었다. 더 이상 이전의 갈등과 주저와 방황이 없어졌고 마침내 그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심지어 왜 이렇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누가 나에게 진작 일찍 전해 주지 않았는지 원망마저 들었다. 믿고 난 얼마 후부터는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해 이전의 나처럼 복음을 오해 하고 예수님을 욕하는 불신자들에게 이 진리를 제대로 전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물론 불신자를 말로 설득하여 오해를 푼다고 기독교 복음이 쉽게 믿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역사로 마음 문이 열려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 마음 문을 조금이라도 쉽게 열리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진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오해 되는 팔 복      

그런 맥락에서 볼 때에 성경에서 외부로부터 (심지어 대다수의 신자를 포함하여) 가장 오해 받는 부분이 산상수훈이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이 팔복 강화다. 각 구절별로 구체적으로 따지기 전에 우선 전체적으로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 하나만 지적하자면, 신자가 자신의 성품, 인격, 기질 등을 윤리 도덕적으로 고상하게 변화시키면 하나님이 팔복을 주신다고 단순하게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한 뜻도 모르고 마음을 겸손하게 먹고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며 이웃과 화평하게 지내면서 본인은 어떤 피해도 감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뭔가 의롭고 선한 일을 찾아 나서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영적 부담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 노력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며 본문에 그런 뜻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윤리 도덕적인 뜻은 예수님이 팔복을 통해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심령이 ‘가난’하다, ‘온유’하다, ‘청결’하다는 등의 용어의 뜻 자체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나쁜 것을 꾀하지 않고 착한 일만 생각하여 실천하려는 고상한 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 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요컨대 신자들이 단순히 “…하면 복을 줄 것이다”라고 해석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해지려 노력하는 것이 복을 받는 조건, 전제, 통로, 방법 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된 것의 원어적 표현 구조는 서술문이 아니라 감탄문이다. 따라서 좀더 정확히 그 의미를 드러내려면 “복이 있음이여!” 혹은 “복이 많은 자여! 그 이름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러라”고 해야 맞다. 다른 말로 하면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한 것들 그 자체가 이미 아주 좋은 복, 최고의 복을 받아 누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신자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 것을 하나님이 예쁘게 봐주시어 보상으로 더 받게 되는 복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윌리암 바클레이라는 신학자가 사람이 자기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에는 크게 3가지 유형(Type) 내지 단계(Step)가 있다고 분석했다. ‘유형’이라고만 하지 않고 구태여 ‘단계’라고 표현한 이유는 어떤 사람의 경우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3가지를 다 거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하나만 혹은 두 개로 그치는 경우도 많다.  

첫째는 별다른 고민과 갈등을 하지 않고 그저 평온하고 단조롭게 살다가 그 상태로 죽는 경우다. 누구나 살아가는 그런 평범하고도 일상적 생활에 자족(?)하든지 더 이상 다른 좋은 것을 찾지 않거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평생동안 자기 인생에 만족이라고는 도저히 느끼지 못하고 항상 공허하며 정신적 갈등과 번민 속에 지나지만 무엇이 빠졌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무엇인가 빠진 것은 분명한데 그 실체를 몰라 헤매다 모른 채로 생을 마감한다.

셋째는 새로운 삶의 기쁨을 찾아 누리며 사는 자다. 가슴이 뻥 뚫린 듯하며 더 이상 속이 갑갑하게 차 있는 상태가 없어진다. 그래서 새로운 차원의 인생이 열리며 계속해서 그 영역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인생을 마친다.

이 분석에 비유하자면 신자란 세 번째 인생에 해당하며 새로운 차원에 들어가 기쁨의 삶을 누리는 것이 바로 이 팔복이 된다. 즉 팔복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영접하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됨으로써 새롭게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땅에서 현재 누리고 있고 또 누려야 할 지고한 복이다. 죽은 후에 가서 받는 보상이 아니다.  

요컨대 심령이 가난해지길 노력하면 하나님이 귀엽게 보아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번 달 수입을 이천불에서 곱절로 올려주고 몸 아픈 것을 낫게 해 줄게”가 아니다. 또 불신자라도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의로운 일을 많이 하면서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했다면 그 상으로 천국 입장권을 주는 것도 아니다. 팔복은 인격과 품성을 윤리적으로 거룩하거나 완벽한 수준으로 갈고 닦아라고 주신 훈련 교범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씀 그대로 준수하면 호박이 덩굴째 굴러 오듯이 복도 8개나 받을 수 있다는 그런 성질이 아니다.

무엇이 긍휼인가?

차츰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지만 한가지 쉬운 예만 들어보자. 다섯번째의 “긍휼히 여기는 자”라는 의미를 일반적인 상식과 윤리를 기준하면 어떻게 해석이 되는가? 항상 경제적, 사회적, 인격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열등한 자에게 베푸는 것이지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내가 남보다 무엇이라도 가진 것이 더 많아야 상대에 대한 비교 잉여분으로 상대의 부족분을 채워주는 것이다. 어떤 동네에 불이 났는데 구경하던 거지 아버지가 거지 아들에게 “너는 행복한 줄 알아라. 저 사람들처럼 불에 탈 집이 없으니까 저 난리를 안 쳐도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개그에만 통하지 현실에선 성립이 안 된다. 세상에선 거지가 부자에게 긍휼을 베풀 수는 없다.  

아무리 인격이 고상하고 사회적으로 존경 받고 모든 면에서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도 그 영혼 속에 예수가 없으면, 신자는 오히려 그런 사람을 향해 세상에서 가장 큰 긍휼을 품을 수밖에 없다. 비록 신자의 현실적 형편은 잘난 것, 가진 것 하나 없고 인격적으로 존경 받는 자가 아니며 심지어 사기꾼이나 감옥에 들어가 있는 범죄자라 할 지라도 예수를 제대로 아는 자라면 그렇게 된다.

사람의 인격, 지위, 신분, 수입, 교양의 높고 낮음을 떠나 영혼이 메마른가 충만한가가 긍휼을 베푸는 기준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의 긍휼이 영적으로 신령하고 품성이 고상하고 거룩해졌다는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여전히 내가 가진 잉여분으로 상대의 부족분을 채워주는 세상의 긍휼과 그 의미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신자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 사람 속에는 우리가 발견한 예수 안에서 새 삶이 가지는 기쁨, 평강, 자유, 위로, 능력이 있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신자는 자기가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날마다 새롭게 공급 받는 것으로 그들에게 나눠준다. 그런데 사실은 생명과 능력 자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원천(源泉)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는 것 뿐이다. 알기 쉽게 말해 먹을 것이 무진장 쌓인 창고를 발견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는 셈이다. 신자도 거지요 불신자도 거지이긴 마찬가지인데 단지 창고를 발견한 거지와 발견하지 못한 거지의 차이만 있다. 바클레이의 표현대로 하면 불신자는 두 번째 타입이요 신자는 세 번째 타입일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속에 있지 않으면 얼마나 무미건조하며 황량한 삶인지 이전에 똑 같이 겪어 보았기에 신자로선 그들의 처지가 더 안타깝고 애가 탄다.      

따라서 이 긍휼은 신자의 인격이 도덕적으로 순화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며 또 그렇게 해야만 복을 받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불신자에게 전도를 많이 하면 하늘의 면류관이 따로 거창하게 예비되어 있음을 믿기에 그것을 상상하고 기대하는 그런 기쁨과도 본질적으로 다르다. 예수를 모르는 자를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메어지며 눈물이 글썽이고 그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상대의 공허하고 허무한 심정이 나에게 옮겨와 자신의 옛날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그 영혼을 끌어 안고 나아가 눈물로 기도하게 된다.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알량한 자존심과 지식으로 세상에서 헛된 것을 추구하며 발버둥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다. 그래서 어떤 때는 돈 벌고 병이 나아 그 곤경에서 벗어나느니 차라리 그 사람이 곤경에 처하게 되더라도 정말 하나님을 먼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물론 당장의 그 사람의 어려운 현실적 형편 때문에 가슴은 메어진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신이 신자가 된 이후 십자가 안에서 발견하고 누리는 기쁨과 평강이 현실적 형통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되므로 저들도 동일하게 그것들을 누리고 또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간구하게 된다. 이것이 신자가 가지는 긍휼의 참 뜻이다.

진정한 복의 의미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팔복 강화에서 신자가 누리는 새 삶의 기쁨에는 단계가 있고 갈수록 아주 더 큰 기쁨이 기다린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다. 팔복에 대해 신자가 자칫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나는 화평케 하는 재주는 없지만 온유하고 긍휼한 마음은 있다, 혹은 나는 성격이 괄괄해 온유하지는 않지만 화끈하게 남들을 화해시키는 은사는 있다는 식으로 하나씩 별개로 떼어 생각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겸손한 것인지 게으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복을 여덟 가지나 주셨는데 그 중에 한 두개만 누려도 황송한 것 아닌가 정도로 이해하고 만다.

그러나 팔복을 자세히 살펴 보면 예수님이 신자로서 누려야 할 삶을 의도적으로 순서에 따라 배열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간단하게만 살펴 보아도 첫째 복 심령이 가난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내면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둘째 복인 애통해 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내부든 외부든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다 점진적으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화평케 하는 식으로 단계를 높여 나가다가 마지막 여덟번째는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리에까지 가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자란 예수님을 발견한 자다. 지금 본문도 바로 제자들을 포함하여 그런 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이다. 신자답게 살면 얼마나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지 단계별로 가르쳤다. 요즘 식으로 치면 영적 성장에 관한 세미나를 주최하신 셈이다. 산상 수훈 전체가 바로 천국에 관한 주제이며 그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는 필수 코스로 이 팔복 세미나를 시작한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팔복은 감탄문 형식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런 분위기와 뉴앙스로 말씀하신 것이다. “다들 모였구나. 너희들 앞으로의 일생에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고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아느냐? 첫째로 이런 일… 둘째로는 저런 일… 그래서 무려 여덟 가지나 세상 사람은 도저히 누릴래야 누릴 수 없는 그런 지복(至福-최고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단 말이야! 너희들이야말로 정말로 항상 흥분과 감격에 찬 인생이 될 수 있어! 너무 기대되고 설레지 않니?”  

그런데 지금 이 감격의 메시지를 듣고 있는 청중들이 누구였는가? 4장 마지막 부분의 설명대로 평생의 고질병이나 불치병을 고침 받은 허다한 무리들이다. 말하자면 방금 암이나 중풍병에서 해방되어 평생에서 최고로 신이 나있는 자들에게, “너희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진짜 최고의 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나를 인하여 욕 먹고 핍박 받고 거짓 속임을 당하는 것이야. 그 진정한 복의 시작은 심령이 가난해지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어. 그래서 천국을 보고 소유하는 복을 누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역으로 말해 암이나 중풍병이 나은 것은 복이 시작된 것도 아니요 천국을 소유한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설명이 진정으로 영혼에 와 닿아 은혜가 되며 절로 아멘이 나오는가? 아니면 최소한도 이해라도 되는가?  

예수님은 ‘당신으로 인하여’ 욕을 먹고 박해와 상처를 받고 모함과 위협에 빠질 때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11,12절)고 하셨다. 지금 신자 개인의 욕심이나 죄 때문에 받는 핍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 예수 믿는 자답게 살기 때문에 받는 핍박과 환난이다. 예수를 모르는 자를 위해 전도하고 밤새 기도하여 듣는 욕이라면 하늘에서 상이 크다고 했다.

그러나 참 신자는 하늘의 상을 예상할 필요가 없다. 정말 미혹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사람이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을 누려본 자는 어떤 비방과 모함을 받더라도 담대하게 그 핍박을 당한다. 나아가 핍박을 피하거나 타협하므로써 자기 속에 있는 참 기쁨이 상실되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 한다. 현실적으로는 힘들고 고달플 수 있다. 예수 믿는 신자를 흔히 거머리 같다고 하는데 사단에게 붙들려 있는 영혼을 어떤 욕을 먹더라도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행복만큼 이 땅에 따로 없음을 잘 안다. 보상과 칭찬 하나 안 받더라도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된 그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그 복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비방을 받더라도 저절로 거머리가 되기를 자원하는 것이다.  

당신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지금 당신은 이 여덟 단계 중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아니 신앙의 목표를 진정으로 이 팔복을 누리고 싶은 것으로 삼고 있는가? 솔직히 따져 기독교 신자 중 백이면 구십 이상이 아직 심령이 가난해지는 단계도 졸업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나는 성격이 온유하고 인격적으로도 크게 하자가 없어. 나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야. 남에게 해코지 한 적도 없고 오히려 당하고 손해만 보고 있어”라는 불신자시절의 넋두리를 여전히 핑계 삼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핑계는 예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비겁하고도 소심하게 착한 척할 때 습관적으로 내뱉는 변명에 불과하다. 신자에게는 진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나아가 십자가에 달려 우리 대신 죽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주님 앞에서는 너무나 교만하고 방자한 말이라 감히 해선 안 되는 말이며 십자가 복음의 참 뜻인지 아직 모른다는 증거다. 법 없이 살면서 남에게 큰 잘못 없이 살았다는 것은 세상에선 통할지 몰라도 주님 안에서는 그만큼 스스로 게을렀고 악한 종이라는 것을 실토하는 말도 없다. 신자가 아직도 도덕적인 측면에서 남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만 자랑한다면 십자가의 권능과 은혜 앞에 한 번도 진심으로 항복한 적이 없다는 표시다. 인간의 의는 누더기와 같고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이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의 은혜 없이는 휴지 조각이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일 뿐이다.

신자가 상대적 의를 자랑하는 것은 긍휼의 측면에서도 자기의 잉여분으로 남에게 적선해 준 적은 있지만 남을 위해 특별히 그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애끓는 심정으로 눈물을 뿌려가며 주님 앞에 기도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자신의 자기 됨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총을 통해서만 이뤄졌음을 제대로 안다면 그런 헛소리는 절대 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처럼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처절한 고백이 절로 나온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의 직원 자격은 소프트웨어를 얼마나 잘 만들어내느냐에 달렸다. 회사의 목적에 충실하고 있는 한 그 회사의 특성상 지각한다고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잘 모르고 있는 외부로부터 오해 받고 욕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신자 스스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의미를 제대로 알아 그 신앙의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했다. 영혼 구원이라고 예수 믿어 죽으면 천국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는 순간부터 그  즉시로 선악간의 절대적 기준이자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 그 분의 사랑과 은총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서 사귐이 있으며 그 분의 인도와 보호 속에서 그분의 뜻대로 일생을 살아 나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팔복에 규정된 바른 관계를 이어나가 그 지극한 복을 인생의 단계별로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팔복의 첫 구절을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자 복이 있나니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가 된다. 신자는 지금 서 있는 이땅과 바로 이 순간에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다. 설령 세상에선 모함 받고 욕을 얻어 먹고 핍박 받는 자리에 있을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밟고 있는 땅이라면 이미 그것은 복 받은 땅이다. 그래서 신자가 이 땅에서 사방으로 밟아 나가는 땅은 그 모두를 예수님이 신자의 것으로 바꾸어준다.

이 팔복은 여덟 가지 각기 다른 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돌아 오는 보상으로서의 복은 사실은 오직 하나 ‘천국’뿐이다. 그럼에도 여덟 가지로 구분한 이유는 신자가 된 후 신자의 영적인 상태가 그런 단계별로 자라가기 때문이다. 신자가 받을 천국의 복은 말 그대로 오직 하나 “하나님과 사귀며 동행하여 그 분의 통치를 받는 복”뿐이다. 이땅에서부터 하나님이 왕이시고 신자는 그 백성이 되는 것이다. 천국의 복은 물론 하나지만 그 복은 장소, 시간, 여건, 사람, 사건 마다 일일이 다르고 새로워진다. 또 하나님과 더 깊이 교제하고 더 완전하게 순종할수록 복의 깊이, 넓이, 높이는 커진다. 그래서 예수로 인해 핍박 받는 자리에까지 기쁨으로 나아갈 때에 그 복은 최고 절정이 된다.

다시 한번 솔직히 우리 모두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자문해보자. 정말 예수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핍박 받는 것이 예수께 기도해서 암이나 중풍병 나은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임을 확신하는가? 세상과는 다른 기쁨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체험해 보았는가 아니 알기라도 하는가? 예수님이 당시에 팔복을 너무나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감탄해가며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는가? 그 기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조금치라도 헤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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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9 사무엘하 법궤와 하나님의 현존 삼하6:1-11  정용섭 목사  2012-08-07 3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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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77 시편 예수님, 나의 목자 시23:1-3  조용기 목사  2012-08-06 2553
7176 고린도전 고난을 온전케 하는 부활 고전15:12-20  조용기 목사  2012-08-06 2138
7175 마가복음 권능의 조건 막6:1-13  정용섭 목사  2012-08-07 2162
7174 데살로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살전5:16-18  조용기 목사  2012-08-06 2999
7173 에배소서 주님의 뜻 엡2:1-22  최장환 목사  2012-08-08 5930
7172 시편 아름다운 모습 시22:1-21  최장환 목사  2012-08-08 5002
7171 고린도후 헌금의 본질과 원리 고후8:7-15  정용섭 목사  2012-08-07 2389
7170 에배소서 지혜로운 사람 엡5:15-17  한태완 목사  2012-08-07 3310
7169 열왕기상 마음이 낙심될 때 왕상19:1∼8  조용기 목사  2012-08-06 3433
7168 이사야 경청하고 귀를 기울이라 사34:1  한태완 목사  2012-08-05 2878
7167 요한계시 버가모교회 계2:12-17  강종수 목사  2012-08-05 2541
» 마태복음 암이 낫는 것은 복도 아니다 마5:3-12  박신 목사  2012-08-04 2373
7165 마태복음 인간은 과연 간사한가? 마5:1-3  박신 목사  2012-08-04 2053
7164 마태복음 순종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 마26:39  박신 목사  2012-08-04 2461
7163 마태복음 복음의 화룡점정(畵龍點睛) 마26:39  박신 목사  2012-08-04 1991
7162 마태복음 순종하지 못하는 첫째 이유 마26:39  박신 목사  2012-08-04 2516
7161 마태복음 정작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마26:39  박신 목사  2012-08-03 2106
7160 마태복음 다시 일곱 귀신이 들지 않으려면? 마12:43-45  박신 목사  2012-08-03 3268
7159 마태복음 평생에 한 번은 꼭 들어야 할 말 마12:38-42  박신 목사  2012-08-03 2565
7158 마태복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뜻은? 마6:33  박신 목사  2012-08-03 5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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