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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8: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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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7.1 주일설교 http://dabia.net/xe/599147 |
정용섭 목사
헌금의 본질과 원리
고린도후서 8:7-15, 성령강림절후 5째 주일, 2012년 7월1일
초기 기독교의 상호부조
요즘 유럽의 경제 상황이 상당히 나쁘다고 합니다. 스페인도 그렇지만 그리스가 특히 심합니다. 그리스 때문에 EU가 뿌리째 흔들릴 정도입니다. 지난 그리스 총선은 EU를 탈퇴해서 자기들의 돈인 드라크마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핵심 의제가 될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별 볼 없지만 고대 그리스의 국력은 대단했습니다. 정치, 군사, 예술, 건축, 문학, 철학, 심지어 스포츠에서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리스는 지중해 북쪽에 자리한 반도입니다. 지형이 재미있게 생겼습니다. 가운데가 개미허리와 같은 지협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협의 오른쪽에 아테네가 있고, 왼쪽에 고린도가 있습니다. 그리스 북쪽과 남쪽의 왕래는 그 지협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돈도 모이게 되고, 예술과 오락도 발전하게 됩니다. 고린도에는 지금도 아폴로 신전의 기둥들이 남아 있습니다. 2천 년 전 유럽의 최고도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바울의 주요 활동 무대는 그리스입니다. 중요한 거점 도시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에 세운 교회를 향해서 바울이 쓴 편지의 일부입니다. 그 내용은 교회끼리의 상호부조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유대교의 박해를 받아서 예수를 믿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흩어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대대적인 모금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시작은 마게도냐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마게도냐는 그리스의 북쪽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대표적으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빌립보서와 데살로니가서가 바로 그 지역에 보낸 바울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고후 8:1절 이하에서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서 벌인 모금운동을 설명했습니다.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은 최선을 다 해서 돕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2절에 따르면 환난을 당하면서도 이런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닿는 정도가 아니라 힘에 넘치도록 돈을 모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아가야, 마게도냐 지역의 여러 교회에서 모은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려고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이런 일은 쉽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을 돌아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는 모교회입니다. 고린도와 마게도냐 교회는 지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 기독교이고, 그리스 지역의 교회는 이방 기독교입니다.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는 토라와 할례 문제로 인해서 늘 충돌했습니다.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는다는 건 모든 충돌과 긴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영성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헌금의 본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는 일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헌금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7절) 앞에서 마게도냐 교회의 일을 설명할 때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1절). 4절과 6절에서도 비슷한 뜻으로 은혜를 언급했습니다. 기독교인이 툭 하면 은혜라는 말을 하기 때문에 이 말이 상투적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런 위험성에 빠지지 않으려면 은혜를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상호부조, 구제, 또는 연보나 헌금이 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일까요?
상호부조를 포함한 일체의 헌금 행위는 일단 재정적으로 손해가 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경제적인 가치로만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재정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 헌금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헌금 문제로 인해서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헌금이 왜곡되기도 합니다. 한국교회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십일조를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며, 십일조를 하면 창고가 넘치도록 복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십일조가 신앙의 척도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한편으로는 두려움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기복적인 생각으로 십일조 헌금을 합니다. 헌금의 본질로부터 멀어도 한참이나 멀리 나간 생각들입니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비신학적인 제도가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이유는 그런 억압적인 방식이 아니면 헌금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헌금이 은혜라는 말은 은혜에 의하지 않은 헌금은 무의미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헌금을 드린다거나 체면 때문에 헌금을 드린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사고를 당하면 헌금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헌금을 잘 해도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나 권사의 직분을 받을 때 일종의 헌금을 강요받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관행처럼 일어납니다. 이런 일은 성직 매매입니다. 그런 헌금은 은혜가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헌금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전업으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지불되어야 할 돈도 필요하고, 그 외에 교회 운영이나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을 위해서 헌금의 본질이 훼손되면 안 됩니다. 헌금은 은혜 사건입니다. 은혜로부터만 헌금이 가능하며, 그럴 때만 헌금이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9절에서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틴 루터의 번역에 따라 보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였지만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고, 예수님의 가난을 통해서 우리가 부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런 구절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과 똑같은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 일체가 곧 가난하게 되신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부활의 약속을 받은 사람보다 더 큰 부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이 실질적으로 느껴지시나요? 아니면 단순한 교리에 불과하지 실제의 삶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성서기자들은 추상적이거나 허황된 것을 경험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의 가장 궁극적인 리얼리티(reality)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물질적인 빈부와 상관없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깨우치고 그 사실과 일치되었습니다. 헌금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동네 아이들이 딱지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딱지를 많이 딴 아이도 있고, 잃은 아이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 중에서 어떤 아이는 딱지치기가 끝나서 집에 돌아가면 훨씬 좋은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는 늘 부자입니다. 기독교인은 딱지치기와 같은 이 세상에서 부활의 세계를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세계로 들어갈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데서 참된 헌금이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단순히 휴머니즘의 발로도 아니고 체면치례도 아니고 의무감도 아니고, 거룩한 은혜 사건입니다. 이것이 헌금의 본질입니다.
헌금의 원리
헌금의 본질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헌금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헌금을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인식과 믿음만이 아니라 의지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 의지와 결단을 요청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벌써 일 년 전부터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모금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진행이 지지부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1절에서 그 일을 끝마치라고 권면합니다. 일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모금 문제로 인해 논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고린도교회 자체에도 돈 들어갈 일이 많다거나, 도와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렇게 하면 결국 자신들이 재정적으로 힘들어진다는 논란들이 있었겠지요. 마치 북한을 돕는 일에 대해서 서로 생각이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을 전제하고 12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가진 것에서 얼마를 바치든지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공동번역)
바울은 이어서 아주 실제적인 관점에서 헌금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행위는 고린도교회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균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지금 상대적으로 넉넉한 고린도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훗날 고린도 교회가 어려워졌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출 16:18절을 인용해서 설명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이야기입니다. 매일 아침에 광야에 나가서 식구 숫자만큼의 만나를 가져와야 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조금 많게 가져오기도 하고 적게 가져오기도 했지만 하루가 지난 다음에는 남은 것도 없고 모자란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세계 50위 권 안에 드는 교회 중에서 30개 내외가 한국에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정비례할 정도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체 교회 중에서 자립하지 못하는 교회가 30% 이상이나 됩니다. 교회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극에 달했습니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말할 때 핵심은 재정의 운용에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사의 사례비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균등의 원리를 적용하면 됩니다. 1만 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나 30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나 크게 차이나지 않는 사례비를 받을 수 있다면 교회의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은 차별 없이 사례비를 받습니다. 이런 제도가 개신교회에도 가능할까요? 부자교회는 무슨 생각으로 가난한 교회를 나 몰라라 하는 걸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바울이 제시하는 헌금의 본질과 원리는 경쟁만능의 신자유주의 이념과 충돌합니다. 이 충돌 사이에서 오늘 기독교인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다리를 타고 빨리 올라간 뒤에 다음 사람이 올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차라고 요구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자가 되었으니 부의 분배를 통한 균등한 삶을 추구하라고 요구합니다. 무엇이 개인과 사회를 살리는 길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바울의 가르침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여러분이 은혜 안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헌금을 한다면 그 액수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겁니다. 헌금은 여러분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를 균등하게 하는 거룩한 경제윤리입니다. 한 평생의 삶을 돌아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헌금에 참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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