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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와 하나님의 현존

사무엘하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372 추천 수 0 2012.08.07 23: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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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삼하6: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7.15 http://dabia.net/xe/601120 

jys.jpg 정용섭 목사

 

법궤와 하나님의 현존

사무엘하 6:1-11, 성령강림절후 7째 주일, 2012년 7월15일

 

법궤 이야기

교회생활을 어느 정도 한 분들은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것은 증거궤(출 25:22), 언약궤(렘 3:1), 이스라엘 신의 궤(삼상 5:7)로도 불립니다. 보통 법궤라고 합니다. 법궤는 가로 130센티, 세로 79센티, 깊이 79센티 크기의 나무 상자인데,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저의 집에 있는 책상과 크기가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법궤 안에 세 가지 거룩한 물건을 넣어놓았습니다. 십계명을 새긴 돌판, 아론의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 물건은 각각 고대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증거들입니다. 십계명 돌판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증거이고, 아론의 지팡이는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에게 주어진 영적 카리스마에 대한 증거이고, 만나 항아리는 고난의 행군과 비슷했던 광야시절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지켜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법궤는 하나님에 버금갈 정도로 거룩한 기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법궤를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에 두었습니다. 지금은 법궤가 없습니다. 기원전 6세기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불에 탔을지도 모릅니다.

법궤의 역사는 율법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 용도도 단순히 종교적인 데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법궤가 등장했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를 맨 제사장들을 먼저 강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러자 강물이 멈췄다고 합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도 법궤를 맨 제사장들로 하여금 성 주위를 돌았습니다. 그러나 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전쟁을 할 때도 간혹 법궤를 앞세웠습니다. 그 이야기는 삼상 4:1절에 자세하게나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실로에 있던 법궤(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법궤의 힘을 빌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싶어 했겠지요. 그러나 전쟁에 졌고, 법궤까지 빼앗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자신들의 다곤 신전에 옮겨놓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곤 신전을 찾아간 블레셋 사람들 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다곤 상이 넘어져 법궤 앞에 뒹굴었습니다. 다시 세워놓았지만 그 다음 아침에 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번에는 다곤 상이 파손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지역 사람들에게 악한 피부병이 덮쳤고, 사람들이 죽기까지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이스라엘 사람들에 돌려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마지막 장면을 삼상 7: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그 뒤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법궤를 빼앗긴 블레셋과의 전쟁은 제사장 엘리 시대에 일어난 것입니다. 엘리는 죽었고, 그 뒤를 이은 사무엘도 죽었습니다. 첫 왕인 사울도 죽었고, 그의 아들인 요나단도 죽었습니다. 명실상부한 다윗 시대가 왔습니다. 다윗은 정치적으로 단단한 토대를 구축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을 다윗 성으로 삼았습니다. 다윗 왕조의 토대를 세우는 대미는 법궤를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종교적인 정당성까지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가지러 ‘바알레유다’로 갔습니다. 혼자 간 게 아니라 부하 삼만 명을 비롯해서 문무백관과 왕족을 모두 데리고 갔습니다. 간단히 법궤를 가져오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몇 십 명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심정으로 법궤 운송에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본문은 그 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삼하 6:2) 다윗 일행은 궤를 실을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궤가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갔습니다. 아비나다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레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 사람들이 여러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연주했습니다. 삼만 명의 행렬이었으니, 그 광경이 장관이었을 겁니다. 왕의 행차보다 더 장엄하지 않았겠습니까.

 

웃사의 죽음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다윗도 속으로 흐뭇했을 겁니다. 그런데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었습니다. 왕의 행렬을 보러 나온 동네사람들 중에 소를 흥분하게 만든 사람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수레를 모는 웃사와 야효가 너무 긴장해서 뭔가 실수했을 수도 있습니다.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는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수레에 실린 법궤가 떨어져 박살날 수도 있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서 웃사는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이건 수레를 모는 책임자로서 자연스러운 행동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말합니다. 진노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삼하 6:7).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거국적인 축제가 졸지에 장례식으로 변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법궤 가져오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자칫 하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래서 법궤를 일단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는 일을 시도했습니다. 이번에는 일을 좀더 신중하게 진행했습니다. 법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물로 드렸습니다. 삼보일배와 비슷한 영적 태도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법궤를 다윗 성에 안치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뒤에 모든 백성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보도합니다.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법궤 이송에 관한 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다윗 왕조의 정당성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믿음도 돋보입니다. 유종의 미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에게 뭔가 꺼림칙한 대목이 남습니다. 수레를 몰던 웃사는 왜 죽은 것일까요? 법궤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손을 댄 것이 그렇게 죽을 정도로 큰 잘못인가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웃사를 치셨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이해하기가 더더욱 어렵습니다. 거룩한 기구에 손을 대면 안 된다면 규칙이 있었다 하더라도 웃사는 나쁜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하나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5장에도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신들의 땅을 팔아서 일부를 숨긴 채 나머지만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행 5:3) 그 즉시 아나니아는 죽었습니다. 곧 삽비라도 베드로 앞에 나타나서 똑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만약 이런 일로 모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야 한다면 지금 우리 중에 살아있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성서기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이며, 또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현존

웃사에게 일어난 일을 다시 보십시오.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당을 건축하면서도 사고로 죽을 수 있습니다. 웃사는 평소에 지병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왕 앞에서 수레를 모는 일에 부담을 느껴 돌연사를 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는 수레에 깔려 압사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웃사가 법궤 운송 중에 죽은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성서기자는 그것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해석했습니다. 옳은 해석일까요? 그것은 보기에 따라서 다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대 유대인들이 법궤를 하나님의 현존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즉 하나님이 존엄 앞에서 사람은 최대한의 외경을 보여야 합니다. 일종의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거기서만 사람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현존이 부정당하는 경우에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웃사 이야기는 고대 유대인들이 오늘의 관점에서 볼 때 약간 서툰 방식으로 하나님의 현존 경험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의 서툰 방식은 여기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릇은 투박해도 그 안에 든 음식은 최고급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최고급 그릇을 갖고 있지만 그 안에 든 음식은 형편없습니다. 페스트후드만 먹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도 미비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서로를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이 무시됩니다. 모든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처리될 수 있을 것으로 간주됩니다. 생명과 역사의 신비가 오늘 우리의 삶에서 실종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영성이 그분의 현존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웃사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죽음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현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재가 곧 죽음입니다. 이런 말에 실감이 가지 않는 분들도 계신가요? 우선 여러분들에게 생명감이 충만하게 느껴지는지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귀하게 여겨지는지를 보십시오. 꽃 한 송이, 나락 한 알, 구름 한 점, 숨 한 모금으로 기쁨을 느끼는지 보십시오. 아니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어리석은 변론, 다툼, 경쟁, 자기연민과 자기성취욕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후자에 속해 있다면 겉으로 살아있다 하나 실제로는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존 경험,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경험, 그분에 대한 외경이 없으면 그 어떤 것을 소유해도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 삶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OECD국가 중에서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타나토스(죽음 충동) 심리기재가 먹구름처럼 뒤덮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이 부정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았듯이 고대 유대인들은 법궤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런 법궤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현존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존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궁극의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생명을 얻기 원하십니까?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경구처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실제로 아는 것만큼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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