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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세상의 평화

에배소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016 추천 수 0 2012.08.07 23: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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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2:11-1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2년 7월22일 http://dabia.net/xe/601989 

jys.jpg 정용섭 목사

 

예수는 세상의 평화

엡 2:11-18, 성령강림절후 제8주, 2012년 7월22일

 

할례자와 무할례자

간혹 초기 기독교로 돌아가자는 말을 듣습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본받을만한 특징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행 2:43-47절에 따르면 사도들을 통해서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고, 교우들끼리 물건을 통용하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온 백성에게 칭송받았다고 합니다. 부러워할만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안에는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갈등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단 논쟁에 가까운 격한 다툼도 있었습니다.

가장 큰 다툼은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할례자와 무할례자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엡 2:11절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여기서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는 에베소교회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에 있습니다. 지금의 터키인데, 지중해에 면해있는 서쪽 도시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이 중심이 된 교회입니다. 이방인(異邦人)이라는 단어는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만, 성서에서는 유대인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이전에는 이것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서로 다르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만 믿었고, 이방인들은 각각 다른 종교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기독교 안에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이 서로 달랐습니다. 이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겼습니다.

갈등의 단초가 바로 할례 문제였습니다. 할례는 고대 유대인들의 종교적 의식입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방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이 이상해보이지만, 유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조치입니다. 그들이 볼 때 할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할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거꾸로 이방 기독교인들은 할례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것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문제로 교회가 두 쪽이 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가리켜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하고, 그런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저주를 내린다는 것은 아무리 당시의 관용적인 표현이었다고 해도 이 문제를 바울이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갈등과 충돌은 당시만이 아니라 요즘도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보십시오. 지금의 기독교는 크게 세 종파로 나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동방 정교회, 개신교가 그것입니다. 모두 사도신경이나 니케나 신조를 함께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지만 각자의 주장이 다릅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갈라졌다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종교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합니다. 남한의 개신교는 그 다툼이 지나쳐서 백 몇 십 개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여당과 야당이, 보수와 진보가 어떻게 다투고 있는지 아실 겁니다. 가장 진보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던 통합진보당은 지난 총선 이후로 당권파와 혁신파가 서로 원수처럼 싸웠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도 우리는 늘 다툽니다. 노골적으로 다투기도 하지만 속으로 다툴 때가 더 많습니다. 부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다툽니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처럼 늘 할례파와 무할례파로 나뉘어 다투며 삽니다.

 

율법의 폐기

할례 문제는 기본적으로 율법 문제입니다. 성서에서 율법은 유대인들의 종교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율법은 삶의 원칙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십계명을 비롯한 삶의 원칙이 있고, 바벨론에는 하므라비 법적이라는 삶의 원칙이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헌법도 큰 틀에서는 율법입니다. 헌법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원칙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원칙만 옳다고 주장하면 결국 다툼이,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이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원수 되게 하는 담이었습니다. 그 담이 있는 한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남북한 사이에 눈에 보이는 휴전선이라는 담이 있는 한 서로 일치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각기 옳다고 주장하면서 사는데, 그것이 결국은 둘 갈라놓는 담이 되고 맙니다. 이런 데서는 끝없는 변론과 분쟁이 일어날 뿐입니다. 영원히 해결될 수 없습니다. 힘으로 상대방을 조용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마음으로 승복시키지는 못합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었다고 증언합니다.(엡 2:14) 이런 증언이 생생하게 느껴지시나요? 육체로 허물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율법의 결과입니다. 율법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율법의 진수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율법의 수호기관이라 할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을 받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예수님을 넘겨받는 빌라도는 로마법에 따라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선고했습니다. 산헤드린의 종교법과 로마의 실정법은 모두 율법입니다. 유대교는 자신들의 종교법인 율법을 모든 삶의 원칙으로 주장했고, 로마는 실정법인 율법을 모든 삶의 원칙으로 주장했습니다. 종교법과 실정법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만약 이것으로 모든 게 끝장났다면 율법이 여전히 진리의 척도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그것에 의해서 지배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 유대의 종교재판과 로마의 정치재판은 불의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율법주의가 끝났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기자는 15절에서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라고 표현했습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율법의 폐기처분입니다. 율법의 힘은 십자가처형까지만 해당됩니다. 금요일의 폭력이며 비극입니다. 그 뒤로 주일새벽까지 세상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율법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어둠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일 만에 예수님은 율법의 족쇄를 끊으셨습니다. 율법이 더 이상 인간의 운명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폐기, 율법의 해체가 무슨 뜻인지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여전히 율법이 활기를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율법은 삶의 원칙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종교 원칙들이 있었습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로마인들에게는 실정법이 있었습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그런 법에 의해서 지배를 당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소비자본주의도 일종의 율법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사람이 연봉으로 평가됩니다. 연봉을 높게 받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그것 때문에 긴장하고, 서로 동료들끼리 척지고, 비열한 수단을 강구하고, 부도덕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체합니다. 세상의 평가기준을 부정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참된 삶의 해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의 쓸데없는 다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다섯 사람이 타고 있는 우주선이 우주를 여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소 공급기가 고장 났습니다. 지구로 돌아갈 때까지 남아있는 산소는 겨우 두 사람분입니다. 방법은 무엇일까요? 젊은 사람이 우선적으로 살아남아야 할까요? 늙은 사람일까요? 가위바위보를 해야 할까요? 서로 힘자랑을 해야 할까요? 서로 다투고 있는 순간에 지구에서 보낸 구조선이 도착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우주선에서 산소 마시는 우선순위 다툼은 모두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보내신 구조선과 같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척도로 서로 옥신각신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다툼의 근본 원인이 사라졌습니다.

 

팍스 크리스티

그래서 에베소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평화’라고 말합니다(14절). 우리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반복해서 이 평화를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새 사람’으로 지어서 평화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화평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에이레네입니다. 17절에서 두 번 언급된 평안이라는 단어도 에이레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평화를 샴롬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람들과의 인사를 샬롬으로 합니다. 근동 사람들은 평화를 갈구했습니다. 이는 거꾸로 그들이 평화롭게 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을 받았으니, 그럴만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당시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제국도 평화를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정치 이데올로기는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거짓입니다. 겉으로는 평화라는 말로 치장했지만 실제로는 폭력적이었습니다. 로마의 정치, 경제, 문화를 받아들이는 나라와는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나라나 세력을 향해서는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로마의 지방장관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팍스 로마나는 오늘도 여전히 기세가 등등합니다. 모든 것을 힘의 논리로 밀어붙입니다. 교회도 큰 교회가 절대선입니다. 이들의 평화는 거짓입니다.

유대인들의 종교권력과 로마인들의 정치권력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기독교는 팍스 크리스티, 즉 그리스도의 평화를 외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이런 외침을 외면했을 겁니다.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들에게 하찮게 보였습니다. 세계를 들썩거릴 정도의 힘을 가진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가련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선지자에 불과했습니다. 평화는 로마의 칼에서 나온다고 확신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평화는 조롱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바울은 그 상황을 고전 1:23절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교회는 실제로 예수의 평화를 전하고 있을까요? 교회가 팍스 로마나에 저항하고 있을까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열이 근본적으로 극복되고 참된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고 있을까요?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가 세상의 평화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소비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분쟁과 경쟁에 맞서야 합니다.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가 세상의 평화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남한교회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놓인 담을 허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 예수가 세상의 평화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들어온다면 성령께서 그 길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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