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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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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편견과 선입견을 버려라
본문: 막6:1- 6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미국에 있는 UCLA라고 하는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가 이제 머지않아 의학 공부를 마치고 바로 현지 병원에 나가서 환자들을 진찰하고 치료하게 될 학생들을 놓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중에 한 사례를 들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매독균에 걸려 있고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이다. 여기서 아이 넷이 태어났는데, 첫째아이는 매독균으로 인해서 장님이 되었고, 둘째 아이는 이미 병들어 죽었고, 셋째아이는 역시 이 부모들의 병 때문에 귀머거리가 되었고, 넷째 아이는 결핵 환자가 되었다. 이런 때에 어머니가 또 임신을 했다. 이런 경우에 그대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합니다.
‘유산시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매독 환자요 어머니가 폐결핵 환자이며, 이미 낳은 아이 넷도 다 그 모양이 되었는데, 이러한 악조건에서 아이를 또 낳아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유산시켜야 됩니다.’ 그러자 교수는 점잖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은 지금 베토벤을 죽였다.’
우리가 아는 악성 베토벤은 바로 그런 환경 가운데서 1770년에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매독 환자요, 어머니는 폐결핵 환자요, 형제들도 다 병들어 그 모양이지마는 그 가운데서 태어나 57년 동안 작곡 활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도 나중에는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마는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불후의 명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무릇 우리 인간이 판단과 사고가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되기 쉬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교수는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환자들을 대할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의학적 지식이 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저렇게 치료하고 수술하고 없애고 할 것이 아닌 것이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겸손하게 신중하게 할 것이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별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별을 따라 가지 않고 그리스도가 왕궁에서 나실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왕궁으로 찾아가 헤롯을 만난 결과 헤롯이 시기심으로..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부터 그 아래 사내아이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마2장) 우리는 말씀만을 보고 따라가야지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사람의 말을 더 믿고 의존하면 동방박사처럼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생각)라는 것은 보고 듣고 경험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것이 내부에서 하나의 틀을 만들어, 다시 새로운 사건에 부딪칠 때 먼저 경험했던 지식이 앞서가서 작용을 하게 되어, 굴절작용을 하므로 편견이 생기게 됩니다. 이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선입견을 깨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배속에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와 요람처럼 떠있기 좋은 알맞은 습도와 그리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탯줄을 통하여 가장 알맞게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그곳에서 오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열 달이 채워지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태아는 거의 혼절하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시 유일한 영양공급원이던 탯줄마저 끊겨버렸습니다. 태아는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이게 웬일일까요.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내가 구축한 그 세상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하며 어둠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의 교만과 편견과 아집인 내 속에서 갇혀서... 내가 진정 의를 위하여 나를 깨치고 죽을 때 영원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자신의 목적, 삶의 가치관, 삶의 스타일, 삶의 모든 방법을 높이 평가하거나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이 부한 사람은 결코 천국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받으려면 그릇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릇 속에 이미 다른 것이 가득 담겨 있으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그릇이 비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속에 자기 주장, 가치관, 철학,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은 새로운 진리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8복중에 첫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습니다. 젊은이는 과분한 차를 몰고 다녔습니다. 술도 마셨습니다. 현란한 불빛 밑에서 춤도 추었습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등산도 가고 낚시도 가고 바닷가로 여행도 다녔습니다. 용돈도 많이 썼고 낭비와 사치가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건전한 모임에서 예쁜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가씨는 착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그 아가씨와 사귀기 위해 할 수 없이 교회당에 나가서 앉아 있기는 했지만 설교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이 너무도 마음에 들고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가장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와 앉아 있을지라도 자기의 생각, 자기의 방법, 자기의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주님의 말씀을 좇아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전에 맛보지 못한 참된 평안과 자유와 기쁨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편견을 다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해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이전에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빌3:7-8) 우리는 이제까지 나의 교만과 편견과 아집인 내 속에 갇혀서 이제까지 구축한 세상의 지식과 경험만을 최고라고 생각하며 어둠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참된 진리를 깨닫고 영원한 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처럼 과거의 잘못된 편견을 배설물처럼 과감히 버려야 하겠습니다.
한 부부가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부는 언제나 손을 꼭 잡고 다녔습니다. 성찬시간에조차 이런 행동이 계속됐습니다. 성찬을 받기 위해 강단 앞으로 나올 때도 손을 잡고 나왔을 뿐 아니라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실 때에도 남편이 떡과 포도주를 부인의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을 보며 민망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 중 아내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목사님이 장례식에 참석해 위로해주었습니다. 그 남편은 그간의 사정을 목사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놀랍게도 이 부부는 둘 다 시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특히 아내의 눈은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찬식에서조차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치의 편견은 6백만의 유대인을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렇게 크진 않더라도 우리 이웃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수많은 편견이 목격됩니다. 크든 작든 주관적으로 이웃을 판단하는 편견은 매우 잔인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장님들만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길을 걸으면서 이 마을의 여섯 사람들이 코끼리를 타고 오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섯 사람들은 코끼리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한 번도 가까이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코끼리를 타고 있던 사람에게 이 거대한 동물을 만져보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들은 마을에 돌아가서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었습니다. 코끼리를 탄 사람은 이를 허락하고 여섯 사람이 각각 다른 부분을 만지게 했습니다. 모든 장님들은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분명히 알기까지 코끼리를 만져보기도 하고 두들겨 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경험을 보고하기 위해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진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코끼리랑 광대하고 두꺼운 벽 같이 생겼습니다.’
‘말도 안 돼.’하고 코끼리의 이빨을 만지고 온 둘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코끼리는 짧고, 둥글고, 매끄럽지만 날카로워요. 나는 코끼리를 벽보다는 창에 비교하겠습니다.‘
코끼리의 귀를 만지고 온 세 번째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것은 벽이나 창하고는 전혀 같지 않습니다. 차라리 두꺼운 털 양탄자 같은 것으로 만든 거대한 이파리 같아요. 그것은 손만 대면 움직입니다.’
‘나는 찬성 못합니다.‘ 하고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 온 네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뱀과 같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 사람이 맞지 않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고 온 사람입니다. ’그것은 나무처럼 둥글고 두텁게 생겼어요.‘
코끼리를 타본 여섯째 사람이 항의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코끼리를 사실대로 설명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코끼리는 확실히 커다란 움직이는 산처럼 생겼습니다.‘ 오늘날도 마을 사람들은 토론을 계속하며 아무도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동물인지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편견은 무식의 소산이며, 차라리 무지가 편견보다는 진실에 가깝습니다.
페르시아에 네 아들을 둔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은 아들들을 불러놓고 한 가지 명령을 했습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들어라. 첫째는 겨울, 둘째는 봄, 셋째는 여름, 넷째는 가을에 정원 뒤편의 망고나무를 관찰하라. 다른 계절에 망고나무를 보아서는 안 된다."네 아들은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1년 후 왕은 네 아들을 불러놓고 물었습니다. "자, 이제부터 너희가 본 망고나무를 내게 설명해다오."
네 아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불에 타고 남은 폐허 같습니다. 잎이 푸르고 싱그럽습니다. 꽃은 장미처럼 아름답습니다. 주렁주렁 열린 열매가 탐스럽습니다." 왕은 네 아들의 손을 잡고 교훈을 주었습니다.‘너희들의 대답은 모두 옳다. 망고나무는 계절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모습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선 안 된다. 이것이 너희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성급한 결론은 편견을 낳습니다. 편견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어느 한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화합을 깨트립니다. 한 가지 잘못으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학교공부를 못한다고 그 사람이 모자라고 실패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박찬호, 박세리 선수를 보세요. 그 사람들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못했지만 얼마나 성공했습니까?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자다가 결국 아들 함의 후손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일 한가지로 우리가 노아를 알콜중독자라고 말해야 합니까? 다윗이 부하장군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윗을 '간음쟁이'라고 평가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을 '거짓말장이'라고 해야 합니까? 또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베드로를 '비겁쟁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 전체를 평가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편견입니다. 대개 사이비종교들이 성경 어떤 한 두 구절을 너무 고집하다가 이단이 되고 거짓종교가 되었습니다.(약3:14, 요일2:21) 예를 들면 구원파는 로마서의 말씀인 믿음만을 강조하여 '우리는 이미 구원 얻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등등의 이단 사설을 주장합니다. 안식일교는 구약의 율법 중 하나인 토요일 안식만을 주장하고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다 거짓이라고 주장합니다. 성경말씀은 모두 진리입니다. 로마서도 구약도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한 면만을 보고 그것만을 주장하면 큰일납니다. 한쪽만 치우치면 병신입니다. 머리만 크면 과분수입니다. 한쪽 다리만 커지면 걷기 힘듭니다. 가슴만 키워도 안되고, 지, 정, 의 (知情意)를 고루 갖추어야합니다.
어떤 물체든 단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물과 물건은 입체로 형성되어 있고 내부와 외부가 있습니다. 사회 현상도 마찬가지이며 인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흔히 일면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외형만을 보고서 판단하기 십상입니다. 우리가 특정한 존재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에 있어서 어느 일면만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을 편견이라 합니다. 편견 또는 선입관에 사로잡히면 사리를 분별할 수 없으며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없습니다. S. 존슨은 ‘편견에 사로잡히면 항상 약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편견만큼 무서운 질병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소외시켜 사회를 혼란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편견은 무지의 소산이며 경솔한 행위의 원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조언과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명심보감에도 "한 편의 말만 들으면 친한 사이가 멀어지기 쉽다"고 하여 편견에 치우치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는 성경 말씀에서 보듯이 모든 사람의 겉과 외모만 보지 말고 속을 통찰해야 합니다. 눈앞에 상황만 보지 말고 앞으로 미치는 파장을 예측해 보아야 합니다. 세밀한 관찰과 주의 깊은 사려를 통해서만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H. D. 도로우는 ‘편견을 버린다는 것은 언제라도 결코 늦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인생의 거울로 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그가 말하는 것을 종합적으로 경청할 수 있어야 하며,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판단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편견이라고 판단되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과감하게 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일한 편견을 두 번 갖지 않아야 합니다. 본질을 보고 다양하게 생각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태도를 길러야만 편견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간청으로 그 도시에서 이틀 동안 함께 유하셨습니다(요4:40).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의 정서로는 유대인 랍비가 개 취급 받는 사마리아인들과 며칠을 함께 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파격적인 처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좁은 편견을 넘어섭니다. 인종차별, 이기주의, 편협한 교파주의, 분파주의, 개교회주의 심지어 민족주의 속에 숨어있는 자만에 찬 우월감과 자신의 절대화는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편견에 찬 삶에 도전하셨고 잘못된 인간의 벽을 몸소 깨뜨려 멸시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배타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지방색이 강한 한국사람들은 마음의 폭을 넓혀 서로 수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로버트 리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 그는 수도 워싱턴의 한 교회를 방문하여 성찬식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한 흑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이를 본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리 장군은 ‘십자가 아래서는 모든 땅이 평평한 것이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편견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편견이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공평무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종과, 사회 계급과 성별에 관계없이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위로부터 난 지혜에 따라 살고 있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편견이란 모든 사실을 다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의 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싫어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사 예수님을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따뜻한 햇살처럼 편견의 안개를 거두어줍니다. 당신은 매일 평평한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십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니의 오디션에 새로운 심사 시스템이 도입되었는데, 이름 하여 "장막 오디션"이었습니다. 심사 위원들이 지원자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장막을 가려 놓고 심사하는 제도로, 아무 편견 없이 순전히 음악 실력만 평가하기 위해 도입된 방법이었습니다. 그 시스템 도입 직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지원자가 너무 뛰어난 실력을 보였는데, 막이 올라가고 보니 일본인이었던 것입니다. 장막 오디션은 남녀 성별의 편견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전까지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연주자는 100퍼센트 남자였습니다. 여자는 남자만큼 연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힘이 약하고, 폐가 튼튼하지 못하며, 손도 작고, 특정 악기를 다룰 수 있는 탄력도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 뉴욕 메트로폴리탄에 오디션 시스템이 도입된 첫해에 선발된 네 명의 바이올리니스트 모두가 여자였습니다. 1980년 독일 뮌헨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오디션도 장막 오디션이었는데, 트롬본 부문에서 만장일치로 뽑힌 지원자가 아비 코난트라는 여성이어서 모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평생 장막 오디션의 마인드로 살아야 합니다. 눈을 감고 그 사람의 실력의 소리, 인격의 소리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외모나 나이, 학벌과 집안 배경은 뒷전에 제쳐 두고 말입니다.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편견에 빠집니다. 편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에는 결코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편견의 눈을 깨지 않으면 하나님이 보내신 최고의 순간을 놓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성경 요한복음 7장에는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 후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수군거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예수라는 분의 행한 것보다 더 많겠는가?’ 그런 수군거림을 듣고 기득권에 위협을 느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하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이 예수님에게 가보니까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소리쳤습니다. ‘이분이 참으로 메시야다.’ 그러자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들이 별 반박거리가 없으니까 지역성을 부각시켜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 지역에서 나오겠는가?’(요 7:41) 그런 장면을 보면서 하인들이 예수님을 잡지 않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인들에게 ‘왜 예수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추궁했습니다. 그러자 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가서 보니 그분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분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소리쳤습니다. "너희들도 미혹되었느냐? 그 사람은 이단이야!" 그 바리새인들의 말의 듣고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사람의 행한 것과 그 말한 것을 가지고 냉철하게 판단합시다!’ 무조건 사람을 거부하지 말고 그 사람됨과 언행을 보고 판단하자는 말이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니고데모의 바른 소리에 나머지 바리새인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톡톡히 창피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에게 창피를 당했으니 무슨 반박하는 말을 해야겠는데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굴절된 지역감정을 이용해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하게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요한복음 7장 5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니고데모! 당신도 갈릴리 출신이오? 생각해 보시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해요! 당신이 갈릴리 출신이니까 갈릴리 사람인 예수를 변호하는 겁니까?’
성경에는 니고데모가 어디 출신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갈릴리 출신이기에 예수님을 변호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니고데모는 다만 정의와 양심의 소리를 따라 말한 것인데, 그 말에 대응할 말이 없으니까 ‘너도 갈릴리 출신이냐’고 편견을 앞세운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역적 편견을 고취시킴으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역으로 선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어느 지역은 어떻다’라고 하면서 편견을 고취하여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하려는 모습이 종종 발견됩니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실수하는 점이 바로 이런 태도입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일반화를 통한 자기 변호'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다 늑대야! 여자는 다 여우야!’라는 식의 말들도 일반화의 전형적인 말들입니다. 20세의 한 처녀가 남자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모든 남자는 다 늑대'라고 말할 권리가 있을까요? 인생 20에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나 보았다고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해야 할까요? 이런 일반화의 편견에는 동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양심을 혼란스럽게 하고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도로 바리새인들이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실질적으로 갈릴리 지역에서 선지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요나, 나훔, 호세야,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등 이스라엘 역사상 유명한 선지자들이 갈릴리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얼마나 근거 없는 편견입니까? 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편견 때문에 메시야를 거부하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편견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진정 바르고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화에 의한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는 성숙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 성숙한 자세를 가지고 진리 가운데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내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죽음과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도 거절하는 나를 참으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고 받으셨으니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항상 복음을 전하며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우리가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진리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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