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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inbor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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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성인 안토니오(251-356)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자 기꺼이 자신의 모든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많은 사람들도 예수님께로 몰려들었다. 그중 한 젊은 청년도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부를 버리면서까지 예수님을 따를 용기는 없었다. 그는 결국 부와 안락함이 큰 걸림돌이 되어 근심 중에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 젊은이와는 반대로 모든 부와 안락함을 송두리째 버리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신앙의 승리자, 진정한 용기를 보여주었던 한 청년의 삶을 독자들과 함께 만나고자 한다.
출생과 완덕을 향한 첫걸음
이집트 사람인 안토니오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스도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안토니오를 그리스도인답게 키웠다. 나이가 들면서 안토니오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사귀는 것보다 집에서 지내기를 원했다. 교회를 가도 늘 부모와 함께 갔고,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를 업신여기는 일이 없이 잘 순종하였다. 독서를 주의 깊게 하고, 얻은 것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집은 많은 재산으로 풍요로웠지만, 푸짐하고 다양한 음식을 먹겠다고 부모를 귀찮게 굴지 않았고, 맛있는 것만 찾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아무 것도 조르는 일이 없었다.
안토니오가 18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을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부모님의 상을 치른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을 때였다. 안토니오는 예배 중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말씀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안토니오는 즉시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인 비옥하고 훌륭한 땅을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또한 가구도 모두 팔아서 받은 돈의 일부만 누이동생을 위해 남기고,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느 날 교회에 갔다가 안토니오는 다시 한 번 마음에 강한 부딪힘이 일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4). 안토니오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자기 동생에게 남겨두었던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밭에 감추인 진주를 샀던 한 농부처럼 그는 참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자기 동생은 여자 수도단체에 맡겨 그곳에서 교육을 받도록 주선해 놓고, 자신은 집 앞에 수도생활을 위한 훈련장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엄한 훈련으로 몸을 단련시키며 자신에 대해 조심하며 살았다.
초기 수도생활과 영적훈련
그 당시 안토니오가 살던 이웃 마을에는 젊어서부터 독수생활(獨修生活)을 하고 있던 노인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안토니오는 그분을 만나보고 선의의 경쟁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선 마을 근처에 자리잡아 살기 시작했고, 열심히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부지런한 꿀벌처럼 즉시 그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그를 만나보지 않고는 돌아오는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에게서 덕행의 길로 가는데 필요한 노자를 얻어야만 비로소 자기 은둔처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수도생활 초기에는(270년) 자기 은둔처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 오직 그의 소망은 완덕을 향한 열망으로 수도생활에 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손수 일을 하여 자신이 먹을 소량의 빵만 사고, 나머지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실천하며, 끊임없이 쉬지 않고 기도의 향연을 피웠다. 또한 성경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으며, 어느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한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외우기도 하였다. 그의 기억력이 책을 대신할 정도였으니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이 어떠했으리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안토니오는 그가 만났던 수도자들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각 사람한테서 덕행과 고행방법을 배워나갔다. 여러 수도자들을 통해 친절, 기도에 대한 열심함, 인내와 이웃사랑, 철야기도 하는 열정, 영적독서를 위한 부지런함, 항구심(恒久心)이나 단식, 심지어는 맨 땅에 누워 자는 것을 보고 감탄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온유한 성품, 바르게 판단하는 안목을 배웠다. 그리하여 이 모든 덕행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영적훈련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보고 느낀 그는 자신이 독수생활을 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와서 그 모든 이들의 덕행을 마음에 정리하여 그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안토니오는 자기와 같은 수행자들과 겨루던 것이 꼭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수덕(修德)에 있어서 그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점에 있어서 신중을 기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고, 오히려 모든 이들이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나 안토니오와 가까이 지냈던 선의의 경쟁자들은 누구나 다 안토니오를 보고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으며, 어떤 이들은 아들처럼 사랑하고, 또 어떤 이들은 형제처럼 사랑하였다.
끈질긴 마귀의 유혹과 피 흘리는 영적투쟁
선(善)의 적수이며 질투심에 불타는 마귀는 젊은 안토니오의 훌륭한 덕행을 결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그를 해치려고 온갖 간교를 꾸며 나갔다. 마귀는 우선 안토니오에게 자기가 갖고 있던 재산에 대한 생각, 누이동생에 대한 근심, 친척들과의 관계, 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망, 음식에 대한 여러 가지 즐거움, 사는 데에서 오는 기쁨, 그리고 덕을 닦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과 벅찬 노력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게 해서 수덕생활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갖도록 유혹했다. 한 마디로 마귀는 안토니오가 한 훌륭한 선택을 포기하도록 만들려고 그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 그러나 마귀는 안토니오의 굳은 결심에 여지없이 무기력해졌고, 그의 끈질긴 기도와 항구성, 불타는 신앙심을 보고는 번번이 패배의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귀는 단념하지 않고 더욱 강력한 방법으로 안토니오를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마귀는 젊은 안토니오를 밤낮으로 괴롭히고, 육욕으로 충동하였다. 안토니오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가 마귀와 심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귀는 안토니오에게 음란한 생각을 불러 일으켜 주었으나 그는 기도로써 이를 깨끗이 물리쳤다. 마귀는 또 안토니오의 정욕을 자극하였지만, 그는 굳센 믿음과 기도와 단식으로써 육신을 다스렸다. 실패한 마귀는 이번에는 밤에 아리따운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 기어이 안토니오를 유혹에 빠뜨리고자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때 안토니오는 그리스도를 자기 마음에 모시고, 그분에게서만 오는 고결함과 영성(靈性)에 대한 묵상을 하며 마귀가 붙이려는 유혹의 불씨를 단호히 꺼버렸다. 하지만 마귀는 또 다시 육체의 향락이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지옥불과 지옥형벌로 당하는 무서운 고통을 생각하며 유혹을 물리쳤다. 이렇게 해서 그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게 되자, 마귀는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악마는 주님의 도움을 받은 육정을 지닌 젊은이한테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힘을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았다(고전15:10).
패배를 고백한 불결한 마귀
마귀는 부득부득 이를 갈며 눈에 보이지 않는 유혹의 방법과는 달리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검둥이 아이로 변신하여 안토니오에게 나타났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속여 대개는 그를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너만은 도무지 당할 수가 없구나.” 안토니오가 물었다. “그런 말을 하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그러자 검둥이 아이는 비참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정욕의 올가미를 씌우고 충동질하는 불결의 친구다. 그래서 나를 간음의 악령이라고 한다. 지혜롭게 살려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속이고, 순결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유혹함으로써 욕정을 일으켜 생각을 달리하게 하였다. 바로 나 때문에 예언자가 죄에 떨어지는 사람들을 질책한 것이다(호4:12). 가끔 너를 괴롭힌 것은 나였는데 너는 번번이 나를 쫓아냈다.” 안토니오는 주님께 감사드리고 대담하게 마귀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정말 비열하구나! 너는 영적으로는 더럽고 어린 아이처럼 약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너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으리라.” 마귀는 더 이상 젊은 안토니오를 상대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시27:1-3).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를 떼놓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4:20).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 위해서는 말씀을 지켜 행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서 최후 승리를 얻고자 모든 일에 절제하며, 끊임없이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 나가야 한다(고전9:25, 27). 그러나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영적으로 매우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는 세상과 마귀와 역경을 이겨나가는 능력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하여 경건훈련(영성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막의 성자 안토니오가 피나는 경건훈련을 통하여 참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주의 깊게 살피고, 본받는 가운데 각자 주어진 현실 가운데 최선을 다하는 영성(靈性)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끊임없는 영적 투쟁과 더욱더 깊어가는 수덕생활
마귀에 대한 안토니오의 첫 승리는 그러했지만 사실 그것은 안토니오를 통해서 거둔 주님의 승리였다. “주님은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롬8:3-4). 안토니오는 마귀가 자기에게 졌다는 것을 핑계 삼아 태만해지거나 자만심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그 마귀가 패배하기는 했지만 계속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귀는 안토니오를 덮치기 위해 사자처럼 맴돌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성경을 통해서 원수의 계략이 여러 가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 뿐 아니라 마귀가 육욕으로써 자신을 유혹하지 못한다면, 죄라는 것은 마귀의 친구이니까 다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시 유혹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꾸준하게 수덕생활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어떤 덕을 닦는 데에는 성공할 수 있으나 또 다른 덕행에는 실패할 수도 있기에 안토니오는 점점 더 자기 몸을 매질하여 스스로를 종처럼 다스려 나갔다. 또한 더욱 더 엄한 고행으로써 자신을 단련시켜 나갔다.
이런 안토니오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가 그 일을 어떻게 해낼까 하고 염려하며 지켜보았는데 안토니오는 수월하게 그 일을 해냈다. 또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성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좋은 습성이 되어버렸다. 그가 외부로부터의 어떤 자극을 받으면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쓰곤 하였다.
이따금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새우며 철야기도를 하곤 했는데, 이렇게 자주 기도하는 것을 보고 모두들 감탄했다. 식사는 하루에 한번, 그것도 해가 진 뒤에 하였고, 이틀에 한번 하는 때도 있었으며 어쩌다 나흘에 한번 하는 때도 있었다. 거기에다가 먹는 것은 빵과 소금뿐이었고 마시는 것 역시 물 뿐이었다. 고기나 술 같은 것은 다른 은수자(隱修者)들도 역시 먹지 않았기 때문에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잠자리는 돗자리 하나면 그만이었고, 대개는 맨 땅에 누워 자기가 일쑤였다. 안토니오는 기름 사용은 수덕생활을 열심히 하는 젊은이들에게 몸을 유연하게 하기에 매우 좋다며 사용을 권장했지만, 자신만은 일체 기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12:10)란 말씀을 늘 묵상하였다. 그는 육신의 쾌락이 적으면 그만큼 영혼의 힘이 강해진다고 말하고 신기할 만큼 그 말씀대로 살았다. 영성이 덕행의 경력이나 수덕생활을 해 온 기간으로써 측정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임하는 열성과 결심으로써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살아온 과거는 모두 잊고 그저 하루하루 수덕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처럼 바울 사도의 다음 말씀을 계속 되새기며 진보에만 열성을 기울였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목표를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빌3:13-14). 그는 또 엘리야 선지자의 다음 말씀도 생각하곤 하였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 분 앞에 나는 오늘을 살고 있노라”(왕하 18:15).
여기에서 엘리야가 ‘오늘’이라고 말하면서 지나온 과거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새롭게 일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언제 나타나도 좋을 만큼 마음을 순결하게 하고,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자세를 갖추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 그는 수덕자(修德者)는 언제나 위대한 엘리야의 모범적 행동을 거울삼아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마귀의 잔인한 학대에 맞선 믿음의 용사
이처럼 자신과 싸워 이긴 안토니오는 자기 친구 하나에게 가끔 빵이나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고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묘지로 가서 무덤 하나를 골라 그 안에 혼자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마귀는 오래지 않아 수덕생활이 널리 퍼져 이 광야를 꽉 채우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한 나머지, 안토니오를 그 곳에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마귀는 자기 패거리를 데리고 들어와서, 무작정 안토니오를 두들겨 팼다. 안토니오는 매를 맞고 너무 아파 말도 못하고 땅에 쓰러졌다.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못 견딜 고통 중에 신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로 이를 이길 수가 있었다. 밤이 가고 날이 새자 친구가 빵을 가지고 와 그를 구원한 것이다. 그 때 그 친구가 보니 안토니오는 죽은 사람처럼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 친구는 안토니오를 일으켜 마을 교회에 데려다 눕혔다. 그러자 안토니오의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와서 죽은 사람에게 하듯 삥 둘러앉았다. 한 밤중이 되자 안토니오는 정신을 차려 깨어났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었으나 자기 친구만이 홀로 깨어 있는 것을 보고는, 자기 곁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여, 아무도 깨우지 말고 자기를 다시 무덤에 데려다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귀의 궤계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안토니오
친구의 도움으로 무덤에 다시 돌아오게 된 안토니오는 전과 같이 문을 닫고 혼자 무덤 안에 있었다. 얻어맞은 상처 때문에 서 있기조차 어려워 누워서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 마귀에게 소리쳤다. “나 안토니오는 여기 아직 있다. 이 상처쯤은 괴롭지 않다. 너희들이 내 몸에 더 많은 상처를 낸다 해도 아무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나를 떼놓지 못하리라”(롬8:35). 그리고 나서 다음 시편을 읊조렸다.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은 겁내지 않으리라”(시26:3). 안토니오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이러하자 선을 미워하는 마귀는 그렇게 상처를 입고서도 대담하게 덤벼드는 데에 놀라서 이번에는 자기 부하들을 불러 모아놓고 치를 떨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간음을 범하도록 유혹하기도 하고, 몸에 상처도 내봤지만, 그 자는 잡히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에게 덤벼들지 않았느냐? 자, 그러니 이제는 달리 공격하자!” 나쁜 일을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을 지니는 것이 마귀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다. 그래서 마귀들은 밤중에 온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소란을 피웠다. 그 자그마한 무덤의 문은 거의 부서져 있었기 때문에 짐승과 파충류로 변신한 마귀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무덤 안은 사자, 곰, 표범, 황소, 뱀, 살모사, 전갈, 이리 떼들의 유령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이 짐승들은 제각기 제 나름대로 행동하였다. 사자는 안토니오에게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며 울부짖었고, 황소는 뿔로 들이받으려 했으며, 뱀은 슬금슬금 기어 다니고, 이리 떼도 사나운 표정으로 덤벼들었다. 이처럼 나타난 유령의 맹수들은 모두 소름끼치도록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겹게 지르면서 사납게 공격해왔다.
이러한 소동 때문에 신심이 날카로워진 안토니오는 고통이 점점 더 가중되었지만, 굴하지 않고 깨어 있었다. 몸은 비록 육체적 고통으로 누워 신음하고 있어도, 정신만은 똑바로 차리고서 악마들을 비웃었다. “너희들이 힘이 세다면 너희 중에 누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할텐데 주님이 너희들의 힘을 빼셨으니 하는 수 없이 패거리로 몰려와 나를 무섭게 하는구나. 너희들이 그처럼 야수의 모습을 하고 나한테 온 것은 분명히 너희 모두가 힘이 없다는 증거다.”
그리고는 더욱 대담하게 또 말했다. “너희들이 뭔가 할 수 있고, 또 나를 대항할 능력이 있다면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공격해 봐라. 너희가 그럴 힘이 없다면 왜 공연히 수선만 피우느냐? 주님께 대한 나의 신앙은 우리의 보증이고 우리의 바위 성벽이니라.”
이렇게 여러 번 시도한 끝에 마귀들은 결국 안토니오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 농락당한 줄 알고, 안토니오를 향해 치를 떨며 분개했다. 그의 믿음의 투지는 마귀의 궤계를 용맹하게 물리치고, 주님 안에서 승리의 깃발을 꼽았다.
사막의 성채 안에서의 주님과의 깊은 밀회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적싸움을 멈추지 않는 안토니오의 끈질김에 감동하셨다. 그러자 열려 있는 지붕사이로 한 줄기의 빛이 안토니오에게 강하게 내려 비쳤다. 악마들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방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상처의 아픔도 가시었다. 주님께서 안토니오를 찾아오신 순간이었다. 안토니오는 주님께 말씀을 드렸다.
“주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고통 받고 있는 저에게 왜 진작 나타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안토니오의 귀에 이런 말이 들려왔다. “안토니오야, 나는 줄곧 너와 함께 있었다. 나는 네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견뎌냈고 싸움에 지지 않았으니, 앞으로 나는 너의 도움이 되어 주겠고, 어디서나 유명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 이 말씀을 듣고 안토니오는 일어나 힘차게 기도하였다. 그는 크나큰 위로를 받았고, 자기 몸에 마귀와 싸우기 전보다 더 많은 힘이 넘치고 있음을 느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5살이었다.
간교한 마귀의 유혹
안토니오는 영성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길 더욱 큰 열심을 가지고 혼자 산을 향하여 떠났다. 이러한 안토니오의 열성을 보고 악마는 안토니오를 미혹시키고자 가는 길에 커다란 은쟁반 하나를 보기 좋게 던져 놓았다. 안토니오는 마귀의 장난인 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막 길에 이런 은반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이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도 아니고, 이리로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도 없는데, 은쟁반이 이렇게 큰 것으로 보아, 누군가 이것을 떨어뜨린 것이라면 지나는 행인이 보았을 것이고, 이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이곳은 사막이니까 곧 돌아와서 찾아갔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이것은 마귀의 장난이 분명하다. 마귀야, 이렇게 한다고 내 결심이 흔들릴 줄 아느냐? 네 은과 함께 네가 망할지어다(행8:20).” 그러자 은쟁반은 연기와도 같이 사라졌다.
계속 길을 가다가 안토니오는 가짜가 아닌 진짜 금이 길에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안토니오는 그렇게 많은 금이 깔려 있는 것을 보고는 불 곁을 지나듯 지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금이 보이지 않는 먼 곳까지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결심을 더욱 굳힌 안토니오는 산을 향해 날아가듯 올라갔다. 강 건너에 텅 비어있는 견고한 성채 하나?발견하였다. 거기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벌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안토니오는 이곳을 거처로 정하고 살기 시작했다. 벌레들은 누가 쫓아내기라도 한 듯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안토니오는 들어오는 입구를 모두 꼭 막아버렸다. 빵은 여섯 달 동안 먹을 만큼만 가지고 왔다. 성채 안에 샘물이 있어서 밖에 나가는 일도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이렇게 안토니오는 그 성채에서 독수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 일 년에 두 번만 위로부터 먹을 빵을 내려 받았을 뿐이었다.
끊이지 않는 은수자들의 발길
안토니오는 친한 친구들이 찾아와도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문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곤 했는데, 그들은 한 패거리들이 날뛰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를 들었고, 처절하게 고함치는 소리도 들었다.
“우리 소굴에서 나가라! 이 사막에서 뭘 하겠다는 거냐? 넌 우리의 음모와 술책을 배겨내지 못할 것이다.”
밖에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누군가가 사다리를 놓고 들어가 안토니오와 싸우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성채의 깨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마귀라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이 사실을 안 방문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안토니오를 불렀다. 그는 마귀들에게보다 방문객들에게 신경을 더 썼다. 문 앞으로 다가가서 그들에게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안토니오는 홀로 남아 있었다. 마귀들은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였으나 안토니오를 해칠 수가 없었다. 그가 그들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를 벗 삼아 주니 마귀들은 약해지고, 안토니오의 열성은 점점 더 커갔다. 과거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이 가끔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오면, 밖에서 안토니오가 시편을 읊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시68:1,2).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시118:12).
안토니오는 성 안에만 틀어박혀 20년 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수덕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여러 사람이 그의 생활을 본받으려 했고, 끝내는 친구들이 와서 그 문을 부수기까지 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안토니오는 신비에 싸인 성전에서 그 신비를 깨친 사람처럼, 또는 하나님의 입김으로 영감을 받은 사람처럼,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이 때 그 곳에 온 사람들은 그를 만나보고 모두 감탄을 하였다. 그는 20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순결했던 안토니오는 고통 때문에 마음이 찌들거나 쾌락 때문에 부푸는 일도 없었다. 그에게는 즐거움도 슬픔도 없었고, 사람들이 많이 오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그 숱한 사람들이 인사를 해도 우쭐해하지도 않았고,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성을 잃는 일도 없이 자연 그대로 지냈다.
주께서는 안토니오 때문에 신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낫게 해 주시고, 마귀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에게서 그 마귀들을 쫓아주셨다. 안토니오는 하나님께 받은 은총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서로 화목하지 않은 사람들을 화해시켜 주었다. 그는 늘 세상의 사물은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내세의 행복을 생각하라고 권하면서 수덕생활을 하는 것이 좋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산에는 수도원이 많이 세워졌고, 사막은 은수자들과 자신의 재산을 모두 버리고 하늘나라에 등록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안토니오는 수도자들에게 힘을 주었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모든 수도자들의 아버지와 같았다.
네 믿음이 어디 있느냐
주님은 말씀하셨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게 됨을 믿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믿음에도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입술만 가지고 주여, 주여 하는 그런 믿음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7:21).
모세도 하나님을 믿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부분 하나님을 믿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위로 모세만 올라오고 나머지 백성들은 산에 접근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의 차이 즉 영성의 차이다. 주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마19:22).
오늘 날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하나님보다 세상과 돈, 명예, 권세, 쾌락을 더 사랑하는 껍데기 신앙인이 얼마나 많은가? 인생의 참된 가치관을 발견하지 못하고 믿음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착각하는 신자들은 없는가? 우리는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과연 나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가?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인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은 무엇인가? 안토니오는 왜 그토록 세상을 등지고 처절하리만큼 자기와의 싸움을 싸웠는가? 아브라함이 귀하고 귀한 독자 이삭까지도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제물로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아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노라”(창22:12).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렸노라”(딤후1:15). 그러나 믿음에 관하여 파선하는 사람들도 있다(딤전1:19). 죄악이 홍수를 이루고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안토니오처럼 마귀와 세상과 역경, 그리고 자기와 싸워 이기는 훈련, 즉 영성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참 믿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대판 바리새인적인 삶을 버리고 진정 주님을 사랑하며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본받는 성도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하라
영적 수련은 짧고 승리는 영원하다
하루는 상당수의 수도자들이 안토니오를 찾아와 영적 이야기를 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만으로도 우리 자신을 교화(敎化)시키기에 충분하지만, 우리가 서로 신앙으로 격려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서로에게 힘을 주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내 아들인 너희들은 너희가 아는 것을 너희 아버지인 나에게 이야기하고, 나는 경험으로써 알게 된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준다. 인생은 영생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씌어있지 않은가? 우리가 수도생활로 80년 아니 100년을 보낸다 하더라도 득세하는 것은 100년이 아니라 영원히 세세에 이를 것이다. 지상에서 싸워 이긴 우리는 지상의 유산이 아닌 천상의 유산을 받을 것이고, 썩어질 이 육신을 벗어버리고 나면 썩지 않을 또 다른 육신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아들들아, 지치지도 말고 시간이 너무 길다거나 무슨 큰일을 했다고 생각하지도 말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세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무슨 굉장한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말자. 이 땅이 하늘에 비해 아주 작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땅을 다 차지하였다가 그것을 다시 다 버렸다 하더라도 천국을 얻기에는 마땅치 않을 것이다. 은화 백 개를 얻을 수 있다면 그 하나쯤은 가볍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 세상의 주인이 그 세상을 버린다면 별것 아닌 것을 버리고도 백배로 받을 것이다. 온 땅을 다 버렸어도 천국을 얻기에 부당한데 하물며 돈 몇 푼을 버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매일 죽음을 대비하며 살자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좋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가 매일 죽을 것처럼 산다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날마다 우리는 일어나면서 저녁때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저녁에 잘 때면 아침까지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우리의 생명은 확실하지 않고 날마다 주의 안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생각하면서 산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을 것이다. 지상에 재물을 모으는 일도 없을 것이고, 도리어 날마다 죽기를 고대하며, 우리는 가난하면서도 어떠한 일에서도 누구나 너그럽게 용서해 줄 것이다. 이성에 대한 음욕이나 그 밖에 불순한 쾌락을 완전히 억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심판 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맞서 싸운다면 제풀에 꺾여 마침내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지옥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에 대한 생각을 하면 달콤한 쾌락의 욕정을 물리칠 것이고, 넘어지기 쉬운 영혼을 단단히 붙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다보지 말아야 한다(창 19:26). 주께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눅 9:62).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생각을 바꿔서 세상 쾌락에 다시 빠진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 덕이 있다
덕행에 대한 말을 듣고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덕이라는 말만 듣고 놀랄 것 없다. 덕이란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몸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덕은 우리 안에 있고 원하기만 한다면 아주 쉬운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글공부를 하기 위해 여행을 하고 바다를 건너가지만, 우리는 천국에 가기 위해 여행할 필요가 없고, 덕을 닦기 위해 바다를 건너갈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덕이란, 우리의 착한 마음 안에 있고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영혼이 자기 본성에 맞는 지혜만 가지고 있다면 덕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덕이란 아름답고 곧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그대로를 지니고 있을 때 덕은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격려하며 한 말이 있다.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수 24:23). 세례 요한도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하라”(마 3:3)고 하였다.
영혼이 곧다는 것은 창조된 자연 그대로의 지혜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혜가 빗나가고, 자연에 어긋날 때 그것을 영혼의 악습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이런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창조된 그대로를 간직한다면 우리는 덕 안에 있을 수 있지만, 악한 일을 생각하면 악인으로 판결 받을 것이다. 무언가를 우리 몸 밖에서 찾아야 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덕이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단지 불순한 생각을 멀리하고 주께서 친히 만드신 그대로의 작품을 발견해내시도록 우리의 영혼을 잘 간직하자.
우리들의 원수인 악령들과 술책
우리는 분노에 사로잡히거나 어떤 욕망에 지배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우리에게는 아주 무섭고 온갖 수단을 다 가지고 있는 원수 마귀가 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들은 바로 이 악령들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악령들의 무리는 헤아릴 수 없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악령들 사이에도 계급이 많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즉 우리에게 늘 써먹고 있는 악령들의 속임수가 어떠한 것이라는 것만 알려 주겠다.
우리는 우선 악령들이 처음부터 악령으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악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령들도 처음에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천상 지혜를 잃고 지상에 추방되어 거짓으로 순진한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그들의 유혹에 대한 경험을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를 돕는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런 경험을 나도 더러 해보았기 때문에 내 자녀들에게처럼 그대들에게도 말하는 것이다.
악령들은 성도들이, 특히 수도자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영적진보를 이루는 것을 보면, 우선 그들을 공격하고, 또 유혹하고 그들이 가는 길에 올가미를 걸어 놓는다. 이 올가미란 바로 나쁜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령의 이런 암시를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주께 대한 믿음으로 악령들을 재빨리 쓰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령들이 이렇게 쓰러졌다고 해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속임수와 간교한 지혜를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당연하고 불순한 쾌락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악령들은 다른 방법으로 공격을 한다. 환상을 꾸미고, 공포심을 일으키며, 자기 모습을 바꾸어 여자, 짐승, 뱀, 괴물, 군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환상 따위는 결코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순간순간 깨어 기도하며 주님을 간절히 의지할 때 그 따위 환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즉시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령들은 뻔뻔스럽고 아주 미련스럽기 때문에 패하면 패할수록 즉시 다른 방법을 다시 시도한다.
말세지말에 마귀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 가운데 방황하며 고통을 당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우리는 사막의 성자 안토니오와 같은 영성의 대가를 통해 귀한 교훈을 얻고 자신이 먼저 바로 설 뿐 아니라 방황하는 많은 이웃들을 바른 길, 영적인 승리의 길로 인도해내는 밝은 빛의 사역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존귀하신 뜻이며 거룩한 소명이다.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패배당한 악령이 다른 계획을 시도함
악령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영적진보를 이루고 있는 성도를 보면, 우선 그들을 공격하고, 또 유혹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길에 올가미를 걸어 놓는다. 이 올가미가 바로 나쁜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령의 이런 암시를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주께 대한 믿음으로 악령들을 재빨리 쓰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령들이 쓰러졌다고 해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속임수와 간교한 술책을 들고 나오기 때문이다. 당연하고 불순한 쾌락으로는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악령들은 다른 방법으로 공격한다. 환상을 꾸미고, 공포심을 일으키며, 자기 모습을 바꾸어 여자, 짐승, 뱀, 괴물, 군대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환상 따위는 결코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신앙으로 무장하고 주님을 의지할 때 그런 환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즉시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령들은 뻔뻔스럽고 아주 미련스럽기 때문에 패하면 패할수록 즉시 다른 방법을 다시 시도한다. 예언을 하고, 앞날의 일을 알아맞히는 척한다. 나쁜 생각으로는 속일 수 없는 사람들을 위압하려고 지붕에 닿을 만큼 커다란 괴물로 보이거나 굉장한 거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게 해도 믿음과 소망으로 굳혀진 영혼을 보면, 그때는 가서 자기네 두목을 데려온다.
마귀들은 허풍쟁이고 약하다
마귀들은 허풍을 떤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 속임수를 무서워하거나 그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된다. 그들은 거짓말을 일삼으며 진실을 말하는 일이 절대 없다. 멋지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는 그들이지만 구세주로 말미암아 낚시에 걸려든 용처럼 될 것이다. 그 두목과 마귀들은 우리 성도들이 짓밟을 수 있는 뱀과 전갈과 같다. 그들의 장난이 아무리 심하여도 우리가 수덕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들의 음모는 그리스도의 은총 때문에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교활한 마귀들은 언제든지 무엇으로나 변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도 시편을 외우는 체하고, 성경말씀을 인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책을 읽으면 그 즉시로 앵무새처럼 우리가 읽은 것을 되풀이 한다. 잘 때는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깨우며, 또 자주 그렇게 해서 잠?잘 수 없게 만든다. 수도자 차림을 하고 열심한 사람인 양 말하며, 겉모양으로 우리를 속이고, 그들이 방황하게 만든 사람들을 저희 멋대로 아무 데나 끌고 간다. 그들이 기도하라고 부탁을 해도,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권해도, 우리와 똑같이 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탓하며 비난한다 해도, 그것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마귀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신심이나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순진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수덕생활이 아무 소용없다고 설득시키기 위한 것이다. 또한 수도생활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알아 싫증을 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결국에는 그 생활을 포기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유혹하려고 진실을 말하더라도 침묵 시킬 것
마귀의 음모와 생각은 생명에 이르는 길을 뒤집어 놓는다. 그들이 진실을 말했을 때에라도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주께서는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선과 악을 혼동하지 않게 하시고, 또 진리를 말하는 것 같을 때에라도 그 말을 듣는 버릇을 절대로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과 자유가 있는데도 자기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끊임없이 엉뚱한 것만 생각해내는 마귀한테서 어떤 것이라도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 때문에 마귀가 성경말씀을 말할 때에라도 주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셨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시50:16).
마귀들은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고 어떠한 짓이라도 하고 말하며, 야단스럽게 나타나 흉내를 내고 소란을 피운다. 그들은 떠들어 대면서 미친 듯이 낄낄 웃고 휘파람 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에게 눈을 돌리지 않으면 마지막에는 기가 죽은 것처럼 슬피 한탄한다.
무능한 마귀들
주께서 세상에 오시자 원수는 패하고 힘이 약해졌다.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마귀들은 폭군과도 같이 패한 후에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저 말로라도 허풍을 떨고 있다. 만일 그대들 각자가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면 마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것이다. 마귀들은 문을 닫아도 들어올 수 있고 그들과 그 두목인 악마는 허공중에 어디에나 있다. 그들은 악의에 차 있고 언제나 해를 끼칠 수 있으니 주님께서도 이렇게 언급하신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8:44). 마귀들이 그렇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고 또 살아가고 있으니, 마귀들이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장소는 어디에나 있으며 친구처럼 생각해서 관대하게 봐 주지도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악질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이든 할 수만 있었다면 주저 없이 언제나 생각하고 있던 악을 특히 수도자들에게 행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영적으로 진보할 때 기가 죽는다. 그들에게 힘이 있었다면 떼 지어 오지도 않을 것이고, 속임수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며 다른 동물들로 변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일 힘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자신의 힘을 즉시 보였을 것이다. 앗수르 사람들을 쳐부수기 위해 파견된 한 천사는 군대나 괴상한 외모, 또는 북이나 나팔 같은 것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천사 혼자의 힘으로 한꺼번에 십팔만 오천 명을 죽였다(왕하19:35). 반면에 마귀들은 허세로써 무섭게 보이려고 애쓸 뿐이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욥에게 해를 끼칠 수가 있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마귀는 멸시해도 좋고 도무지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혹시 마귀가 무서운 대상으로 여겨진다면 그들은 수덕생활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올바른 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 이것이 바로 마귀와 싸우는데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마귀들은 은수자들의 단식, 철야, 기도, 친절, 고요, 금전과 허영에 대한 멸시, 겸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 자선, 착한 마음씨, 그리고 특히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을 아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마귀들은 우리 발에 짓밟히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주신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9).
세상의 정욕과 타협하지 말자
마귀들은 저희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도둑처럼 남의 집에 들어가 본 것들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예언이라기보다 억측을 한다. 사람들도 경험과 습관으로 어느 정도의 예언을 말한다. 경험과 습관의 예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한다고 할 수 없다. 마귀를 통해 아는 것은 덕도 영적 유익도 되지 못한다.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일을 모른다 해서 심판받지는 않을 것이고, 배워서 알았다고 해서 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심판 받을 것이다. 즉, 신앙을 잘 간직하였는가?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는가?
성경은 말씀하신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잠4:7). 영적 지혜는 곧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점에서 분별력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미혹에 빠져 방황하는 시대, 즉 말세지말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들의 눈과 귀가 어두운 상태에 빠진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보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일2:15).
오늘 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종들과 백성들이 세상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호4:6-11). 세상의 정욕과 타협하여 예수님을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이며, 예수님을 미워하는 자이다. 이들의 결국은 사망이다(잠8:36).
영적전쟁을 선포하자
은사보다 마음의 순결과 순종의 삶을 추구하자
우리는 특별한 은사를 받기 위해 애쓰거나 고생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미래를 예언하기 위한 목적이 된다든가 수덕생활의 대가로 특별한 은사를 갈망해서는 안 된다. 다만 순간순간 마귀를 이길 수 있게 도와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절대적으로 은사가 필요하다면 우선 마음을 순결하게 하자. 우리의 심령이 순결해지고 하나님 뜻에 순응하게 되는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큰 통찰력과 함께 각종 은사를 주시게 될 것이고, 우리는 그로 인해 더욱 하나님의 사역을 빛된 방법으로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마귀들이 우리에게 와서 앞일을 예고하거나, 자신이 천사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이 우리들의 수덕생활을 칭찬하고 진복자(眞福者)라고 선언하더라도 쉽게 믿거나 받아들이지 말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면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질 수 있다. 성화된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이 뛰어나다. 그들은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영적 분별력은 조용히 또 천천히 생기고, 그렇게 되면 기쁨과 환희와 용기가 영혼 안으로 스며든다. 우리의 기쁨이시며 능력 되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이 때 영혼이 품는 생각은 어지럽거나 소란스럽지 않으며, 위로부터 비췸을 받은 영혼은 천사들의 발현도 볼 수 있게 된다. 이후에 천국에서 얻을 보화에 대한 갈망으로 영혼은 넋을 잃고 오로지 그 보화에만 마음을 일치시키게 된다. 우리가 약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천사를 보고 무서워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주신다.
악령들의 침입과 발현은 어지럽다. 죄인들이 소란을 피울 때처럼 시끄럽고 야단법석을 떨며 고함을 치면서 나타난다. 악령들의 발현은 영혼의 공포, 불안, 무질서한 생각, 슬픔, 사람들에 대한 미움, 무기력, 비애, 악한 욕망, 덕행과 좋은 습관의 무너짐 등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영적 체험의 초기에 순간적인 무서움이 즉시 사라지지 않고, 그 무서움이 기쁨, 열성, 신뢰심, 마음의 위안과 편안함 그리고 영혼의 힘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생기지 않는다면 즉시 용기를 내어 기도해야 한다. 영혼의 기쁨과 평안은 나타나신 이의 거룩함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주님을 뵙고 기뻐했고, 어머니 태중의 세례 요한은 성모 마리아의 방문 때에 기뻐 뛰놀았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나타났을 때 마음 밖에서 불안과 소란, 속세의 화려함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두려움들이 생겨나면 그것은 틀림없이 마귀에게서 온 것임을 알 것이다.
마귀를 대항하기 위한 주님의 말씀
우리의 영혼이 계속 무서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원수가 눈앞에 있다는 표시이다. 마귀는 천사처럼 두려움을 없애주지 못한다. 오히려 누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마귀는 더 겁을 주려고 한다. 이것이 마귀에게 속은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신(神)들을 만들게 된 경위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은 마귀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 주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고, 같은 말씀으로 우리 입을 통해서 마귀들을 나무라시고 쫓아내시기 원하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있다고 해서 자만한다든지, 병자를 낫게 하는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오만해져서는 안 된다. 또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은 칭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멸시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각자가 어떤 수덕생활을 하는지 지켜보고서 본받든가 자신을 바로 잡든가 해야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덕행과 생활의 증거이지만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구세주의 은사이다. 은사 때문에 자만하여져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
안토니오의 개인적 경험
마귀들은 안토니오를 향하여 숱하게 진복자(眞福者)라고 고함쳤지만, 안토니오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쳤다. 그들은 나일강이 범람한다고 슬픈 소리로 예고했지만, 안토니오는 그것이 너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윽박질렀다. 어떤 때는 그들이 무장한 군인 차림으로 와서 안토니오를 둘러서서 협박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말과 맹수, 그리고 뱀으로 나타나 안토니오의 집에 꽉 차 있기도 했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다음의 시편을 읊조리곤 하였다.“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20:7). 이렇게 기도하니까 그들은 주님이 두려워 도망쳐버렸다. 또 어떤 때는 캄캄한 곳을 환하게 비추며 다가와서 “안토니오, 우리들은 너를 밝게 비춰주려고 왔다.”고 말할 때 내가 눈을 감고 기도하면, 마귀들의 빛은 어느 새 사라지곤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이 성경 말씀을 말하며 다가왔을 때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시38:13)”라고 하였다. 그들은 가끔 안토니오의 방을 흔들어대기도 했지만, 안토니오는 태연하게 기도하곤 하였다. 그들은 안토니오에게 되돌아와서 소란을 떨고, 휘파람을 불며 춤도 추었다. 기도하면서 혼자 시편을 외우고 누워 있으면 그들은 제풀에 기가 죽어 탄식하며 울곤 하였다. 그래도 안토니오는 그들의 무엄하고 허황된 짓들을 좌절시키며, 그들에게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곤 하였다.
한 번은 꽤 권세가 있는 마귀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힘이요 안배니,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기에 안토니오는 그에게 아주 세게 입김을 불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실제로 얻어맞는 것 같더니 하는 수 없이 그 마귀는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얼마 후 그 사기꾼은 안토니오가 마침 단식을 하고 있을 때 빵을 가지고 오는 수도자로 가장하고 와서 말하였다. “어서 이 빵을 먹고 그렇게 엄청난 단식을 그만둬. 너도 사람인데 그러다가는 아주 몸이 쇠약해지겠다” 하였다. 안토니오는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벌떡 일어나 기도하였다. 그는 견딜 수 없었던지 안토니오를 떠나 사라져버렸다. 사막에서는 안토니오를 유혹하기 위해 금덩어리로 나타나 안토니오가 그것을 가지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만지거나 쳐다보기만이라도 하게 하려고 애썼다. 그 때마다 안토니오는 그를 대항하여 시편을 외웠고, 그렇게 하면 그는 즉시 사라지곤 하였다.
오늘날 마귀는 무엇을 노리는가
마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도록 유혹한다. 특별히 월드컵의 열기와 같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사람들의 마음과 뜻과 성품이 하나님을 떠나 헛된 것들을 향하도록 강하게 역사한다. 축구와 같은 사물에 대한 애정에 깊이 빠지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나라 백성들은 “붉은 악마”를 마치 “애국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호칭”이나 되는 듯이 착각하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붉은 유니폼을 입고 온 국민이 모두 ‘붉은 악마가 되자’라고 소리치며 열광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붉은 악마는 악령세계의 최고통치자인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를 지칭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백성들 중 상당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열정적인 찬양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상숭배를 하다가 결국 망하지 않았는가?
말세지말을 당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이 더욱 영적 분별력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잘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선과 악을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니느웨 백성들처럼 굵은 베옷을 입고 철저히 회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노아의 홍수의 때와 같고 소돔성의 멸망의 때와 같은 이 시대에 우리는 영적인 전쟁, 즉 순간순간 세상과 마귀와 역경과 싸워 이기는 삶을 힘씀으로써 다시 오실 주님을 철저히 대망하는 충성된 일군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할 것이다.
사막 깊숙한 곳으로 가거라
더 깊은 사막으로
안토니오는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어수선해지고, 자기 이상이나 생각대로 은둔처에서 지내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주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하신 일로 오만해지거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대상이 될까 두려웠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안토니오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테바이드 높은 산에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안토니오는 형제들이 갖다 준 빵을 가지고 강가에 앉아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말씀이 있었다.
“안토니오야, 어디로 가려 하느냐?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안토니오는 늘 그런 말을 들어왔기 때문에 별로 당황하지도 않았다.
“모두 저를 은수자로 살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귀찮게 할 뿐 아니라 내 힘에 부치는 일만 해달라고 해서 테바이드 산에 가려고 합니다.”
그러자 다시 하늘에서 이런 말씀이 들려왔다.
“네가 생각한 대로 정말 테바이드로 간다면 짐승들 틈에서 더 많은, 아니 지금보다 몇 배의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진정 네가 은수자가 되기를 자원하거든, 그 때 비로소 사막 깊숙한 곳으로 가거라.”
안토니오는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사막 깊숙한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곳으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하늘의 말소리는 안토니오에게 그 쪽으로 향하는 사라센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안토니오는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만나 사막으로 같이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나님의 안배가 있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안토니오의 청을 들어 주었다. 그들과 함께 꼬박 사흘을 걸어 드디어 아주 높은 산에까지 도달했다. 산 밑에는 맑고 달며 신선한 물이 흐르고 있었고, 좀더 먼 곳에는 몇 그루의 종려나무가 우뚝 솟아 있는 들판이 가로 놓여 있었다.
산악 내부에 있는 은둔처
하나님의 안배로 찾게 된 이 장소를 안토니오는 지극히 좋아했다. 우선 자기 동료들에게 받은 빵이 있어서 완전히 혼자서 이 산에 머물러 살 수 있었다. 사라센 사람들도 안토니오의 열성에 탄복하여 이 곳에 올 때마다 일부러 그를 찾아 기쁜 마음으로 빵이나 대추야자 열매를 갖다 주곤 하였다. 그의 형제들도 그의 거처를 알아내고는 저희 아버지를 잃지 않으려는 자녀들처럼 그에게 식량을 보내도록 주선하였다. 그는 자기 때문에 수고하는 이들의 피곤함과 고통, 번거로움을 염려하여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농사 도구와 밀을 부탁하였다. 그것을 얻은 안토니오는 산 둘레를 잘 살펴 적당한 곳을 찾아서 밭을 갈고 밀을 심고 물을 주었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자 안토니오는 자기가 먹을 빵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서 누구한테도 폐를 끼치지 않게 되었다. 얼마 후에는 야채를 가꾸어 자기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대접함으로써 멀고 험한 길을 찾아오느라 겪은 피로를 풀어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사막의 야생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와서 가끔 그가 파종하고 가꾼 것을 축내기도 하였다. 안토니오는 그 동물 한 마리를 살짝 잡아 안고는 다른 동물들에게 말했다.
“나는 너희 중에 누구도 괴롭히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나를 괴롭히지? 자 그만 가거라. 주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다시는 이 곳에 오지 말아라.”
동물들은 그 때부터 안토니오의 명령을 알아차린 듯 다시는 오지 않았다.
마귀의 공격
안토니오는 거듭 기도와 수덕생활에 열중하면서 이 깊숙한 산 속에 혼자 살고 있었다. 그를 도우려고 온 형제들은 한 달에 한 번 씩 찾아올 것과 그 때마다 올리브유와 야채, 기름을 가져올 것을 약속하면서 이를 받아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이미 노인이 된 때문이었다.
그가 산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을 견디어냈던가! 그의 방문객들은 여러 가지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것과 무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고, 한밤중에도 야생 짐승들이 산에 득실거리는 것을 보았고, 안토니오가 이 원수들과 맞서 싸우며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중에도 그는 오히려 방문객들을 안심시키고 자기는 무릎을 꿇고 주님께 기도하며 이 악령들과 싸우고 있었다. 혼자 그런 사막에 살고 있으면서도 맹렬히 공격해 오는 마귀들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숱한 짐승과 파충류들이 우글거리는데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안토니오는 오직 주님만을 간절히 의지하였다. 그의 정신은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아 오히려 마귀들이 도망치고 사나운 짐승들은 안토니오와 사이좋게 지냈다.
마귀는 안토니오를 노리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 위로를 받은 안토니오는 마귀의 숱한 속임수와 계략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안토니오 성인이 밤을 새워 기도하면 마귀는 그에게 사나운 짐승들을 보냈고, 사막에 사는 이리와 표범들은 안토니오에게 입을 벌리고 곧 잡아먹을 것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그렇지만 안토니오는 그것이 마귀의 짓인 줄 알고 그들 모두에게 호통을 쳤다.
“너희들이 나를 해칠 힘을 위로부터 받았거든 나를 잡아먹어도 좋다. 그러나 마귀한테서 왔다면 꾸물거리지 말고 썩 물러들 가거라.”
짐승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채찍으로 얻어맞고 달아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기도로 물이 솟아남
한 번은 수도자들이 안토니오에게 산에서 내려와 얼마동안 자기네들을 돌봐달라고 간청하였다. 안토니오는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한 마리의 낙타에 그들이 먹을 빵과 물을 싣고 함께 떠났다. 그들 일행이 떠나는 길은 수도원이 있는 산 밑을 제외하고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이었다. 그런데다가 길을 가는 도중에 물이 떨어져 일행은 극도의 갈증으로 허덕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근처에는 물이 있을 만한 곳도 없었고, 게다가 이미 탈진되었기 때문에 타고 가던 낙타도 버려두고 그들은 모두가 쓰러진 채 있었다.
늙은 안토니오는 그들 일행이 이런 위험한 지경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면서, 현장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가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가 기도한 자리에 샘물을 솟게 하셔서 모두들 그 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하도록 해주었다. 그들은 마음껏 물을 마시고, 물주머니를 채우고 난 다음, 다시 낙타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그들은 금방 낙타를 찾을 수 있었다. 목에 매인 끈이 돌부리에 걸려 낙타는 먼 길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낙타를 끌어다가 물을 먹이고는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였다. 안토니오가 수도원 밖에 도착하자 그를 영적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수도자들은 모두 나와서 그를 크게 환영하였다. 안토니오는 자기 경험에서 얻은 일들을 그들에게 일일이 다 들려주었다. 그러므로 수도원 안은 기쁨이 충만하고, 진보에 대한 갈망, 상호간의 신뢰심에서 오는 위안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안토니오 자신도 수도자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는 무척 기뻐하였으며, 또 평생을 동정으로 살면서 다른 동정녀들의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 자기 누이도 만나게 되어 매우 기뻤다.
방문객들에게 주는 영적 권고
며칠 후 안토니오는 산으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 많은 방문객과 병자들이 찾아왔다.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수도자들을 언제나 격려하며 이렇게 타이르곤 하였다.
“주님을 믿고 사랑할 것, 나쁜 생각과 육신의 쾌락을 멀리할 것, 잠언서에 씌어져 있듯 배부르게 먹어서 씩씩거리지 말 것, 허영을 피할 것, 끊임없이 기도할 것, 잠들기 전과 아침에 일어나서 시편을 읊을 것, 성자들의 열성을 본받아 언제나 계명을 잘 지키려고 조심하는 수도자가 될 것 등이다.”
안토니오는 수도자들에게 「죄를 짓지 않을 확실한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 각자가 자기 행동과 마음의 움직임을 서로에게 알게 하려는 것처럼 잘 살펴서 글로 쓰는 일이다. 남에게 알려질까봐 두려워지면 확실히 우리는 죄를 짓거나 마음에 나쁜 생각을 품지 않게 될 것이다. 죄를 지을 때 알려져도 좋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구며 죄를 지었을 때 거짓말하기 싫어할 사람이 누구겠는가? 증인이 있는 앞에서 간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 쓴다면 알려지는 것이 창피해서라도 나쁜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동료 수도자들의 시선 못지않게 글도 역시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글로 쓰여진 것에서도 낯이 뜨거워지지 않도록 나쁜 생각을 삼가자. 이렇게 우리를 단련시키면 우리는 육신을 종으로 다스리고, 원수의 간계를 부셔버릴 수 있을 것이다.”
황량한 사막에 피어오른 겸손의 향취
시공을 초월한 순결한 영혼
두 수도자가 안토니오를 보러 갔다. 길을 가는 도중에 그만 물이 다 떨어져서 한 사람은 이미 죽고, 나머지 한 사람도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는 이미 탈진하여 꼼짝없이 죽음만을 기다렸다. 그때 저 멀리 산 속에 앉아 있던 안토니오가 수도자들을 불렀다. “물 한 동이를 갖고 이집트로 가는 길을 서둘러 가보시오. 두 수도자가 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이미 죽었고, 다른 한 사람도 죽음 직전에 있다오. 당신들이 급히 가지 않으면 곧 그는 죽을 것입니다. 방금 기도하는 가운데 그같은 계시를 받았어요.”
그들은 즉시 길을 떠나 죽은 수도자를 찾아 장례를 지내고, 다른 수도자에게는 물을 마시게 하여 회생시킨 다음, 노인 안토니오에게 데려 왔다. 그런데 그를 데려 온 거리는 하루를 꼬박 걸어야 하는 먼 길이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왜 한 사람의 수도자가 죽기 전에 그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죽음을 결정하고 선언하는 것은 안토니오가 할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은 죽게 놓아두시고, 또 한 사람은 위험한 상태에 있음을 알려 주어 목숨을 구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가 감탄해 마지않을 일은 안토니오가 산속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언제나 깨어 있었다는 점과 주께서 그에게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해 주셨다는 점이다.
또 한번은 안토니오가 산 속에 앉아서 눈을 들어 공중을 쳐다보니 어떤 한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또 다른 사람들은 이를 크게 기뻐하면서 그를 마중하는 것을 보았다. 황홀해진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무척 궁금하였다. 그러자 가까이에서 난데없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그는 이 말소리의 주인공이 누군가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니트리아의 수도자 아문의 영혼이 하는 말이었다. 니트리아에서 안토니오가 있는 산까지는 걸어서 14일이나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이 노인의 동료들은 그가 그토록 넋을 잃고 있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들에게 아문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아문은 그들도 잘 아는 사람으로 그들에게 자주 들렀었고, 기적도 여러 번 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적도 있었다. 한번은 아문과 테오도로가 리코강을 건너게 되었다. 아문은 서로가 보이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서 건너가자고 했다. 테오도로는 옷을 벗고 헤엄쳐서 부지런히 강을 건너왔다. 그런데 아문이 자기보다 먼저 와 있는 것과 몸이 물에 젖지도 않은 것을 보고 어떻게 강을 건너 왔느냐고 물었다. 아문은 묵묵부답이었다. 테오도로는 발을 붙잡고 대답하기 전에는 절대로 발을 놓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물 위를 걷지도 않고 저 쪽에서 그냥 날아왔다고 털어놓는 것이었다.
안토니오에게서 아문의 죽음을 알게 된 수도자들은 그 날짜를 기록해 놓았다. 30일 후 니트리아에 사는 수도자들이 와서 노인 안토니오가 말한 그 날 그 시간에 아문이 실제로 죽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14일이나 걸리는 거리에서 그 죽음을 알고, 죽은 영혼이 하늘에 올라가는 것을 본 안토니오, 그 영혼의 순결함을 알고 모두가 감탄하였다.
탈혼 중에 본 신비한 체험들
어느 날 안토니오는 식사할 때쯤인 9시 경에 기도를 하려고 서 있었다. 갑자기 그는 자신이 황홀경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놀라운 일이었다. 서 있던 그가 낯모를 사람들에게 들려서 허공을 가로질러 가는 것처럼 자신이 자기 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침통하고 잔인한 표정의 또 다른 사람들이 공중에 서서 그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보았다. 안토니오를 인도하는 사람들은 그를 옹호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가 출생한 후로부터 오늘날까지의 모든 죄의 대가를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안토니오를 인도하던 자들은 이 말에 반대하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주께서는 안토니오가 출생한 후에 범한 죄를 모두 사해 주셨다. 그러니 너희들에게는 그가 수도자가 되어서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후로부터 지은 죄에 대해서만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할 수 있다.” 반대자들은 안토니오를 고소하였으나 아무런 증명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은 자유롭게 되었고, 아무런 방해가 없게 되었다. 그 때 안토니오는 다시 탈혼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자신을 보았다. 그는 식사도 잊고, 남은 낮 시간과 밤을 탄식과 기도로써 보냈다. 그는 공중을 건너기 위해서 얼마만한 투쟁과 노고를 겪어야 하는지에 놀랐다. 공중에 출몰하는 것들의 수령(악령세계의 최고 통치자, 즉 사단)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
안토니오는 방문객 몇 사람들과 죽은 다음 영혼의 통로와 거처에 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다. 그 이튿날 밤 어떤 사람이 위로부터 내려와 그를 불렀다. “안토니오야, 일어나 여기를 쳐다보아라.” 그는 즉시 순종하여 나가서 눈을 들어보았다. 무려 키가 구름에까지 닿는 한 험상궂은 거인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그 거인 주변에는 날개가 달린 것같이 보이는 것들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거인은 손을 뻗쳐 더러는 못 올라가도록 막았다. 또 더러는 그 위를 지나 아무 걱정 없이 날면서 높은 데로 인도되고 있었다. 거인은 높은 데로 인도되는 사람들을 보고는 이를 갈고, 거인이 손을 대서 밑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잠시 후 안토니오에게 “네가 본 것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라”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그것은 영혼의 통로라는 것과 서 있는 거인은 원수 마귀임을 깨달았다. 안토니오는 더욱 수덕생활에 분투하였다. 그가 이런 일을 자진해서 먼저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기도를 오래하며 자기가 본 것에 탄복하고 있는 것을 동료들이 눈치 채고 귀찮은 정도로 그 이유를 캐물었다. 그들의 바람에 의해 자녀들에게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준 것이었다.
겸손의 빛을 남기고 간 위대한 스승
안토니오는 그토록 유명한 존재였지만 그는 모든 성직자가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그들에게 머리 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어쩌다 성직자들이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하면 교육상 필요한 것은 말하였지만, 기도에 대해서는 자기가 도리어 성직자들에게 배우기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가끔 동료들에게 질문을 하여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였다. 그들에게서 유익한 점을 배우는 것을 은혜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이단과 교회 분리에 대하여는 단호한 마음으로 배격하였다. 그는 주교들의 청으로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아리우스 이단자들을 논박하기도 하였다. 안토니오의 명성은 황제들에게까지 들어갔다. 여러 황제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안토니오에게 친서를 보내며 회답해 주기를 청하였다. 안토니오는 황제들의 편지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황제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므로 그들에게 영적유익을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답장을 써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찾아온 것은 지금이 마지막이다. 이승에서 우리가 서로 다시 만난다면 참으로 이상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왔다. 내 나이 백 다섯 살이 되어가고 있다. 이 말을 들은 수도자들은 울면서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외국에 갔다가 귀국하는 사람처럼 기뻐하였다. 그들에게 일하는데 게으르지 말고, 수도생활을 굳건히 하며, 곧 죽을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살라고 격려하였다. 또 늘 그가 말했듯이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성인이 되기 위해 앞을 다투라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부도덕한 아리우스 이단들과 멜레시아 이단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안토니오는 거처로 돌아가 15년간이나 함께 지낸 두 제자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는 기쁨에 찬 얼굴로 누워 있다가 얼마 후 소천 하였다. 제자들은 장사를 지낸 후 스승의 유언을 따라 누구도 보지 못하게 땅 속에 묻었다. 그 장소는 두 사람 밖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뿌리고 간 겸손의 향취는 널리 널리 널리 지금도 퍼져나가고 있다.
강태형 목사(은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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