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롬1:16 |
---|---|
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11.9.25 주일설교 |
믿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롬 1:16.
몇 년 전 안식년을 하면서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좋았던 것 중에 하나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와 그것이 일어났던 장소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성경의 역사가 허구가 아니라 실제였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성지순례가 우리에게 주는 큰 유익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조금은 건방진 이야기처럼 들릴는지 몰라도 성지순례를 통하여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 이미 저는 성경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성지순례를 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면에서 성지순례는 저에게 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성지순례가 저에게 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지순례를 통하여 받은 큰 은혜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광야’를 보면서 광야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광야를 보면서 광야라고 하는 히브리어의 의미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가이드를 해 주는 청년으로부터 배웠을 때 참 깊은 은혜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안식년 중에 높은 뜻 숭의교회에 일어났던 대형사고(?) 다시 말해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던 학교로부터 강당을 비워 달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 광야를 보면서 받은 바로 그 은혜였습니다.
광야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 즉 ‘미드바르’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 광야가 무서워지지 않았습니다. 광야는 피할 곳이 아니라 도전해야 할 곳이고 반드시 한 번은 경험해야 할 곳임을 깨닫게 되니 광야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는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였습니다. 학교가 강당을 비워달라고 한 것은 그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방해하고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 보이는 예배당의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예배당을 흔들면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잠시 뒤로 미루고 보이는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들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예배당에 문제가 생겼는데도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계속하려면 길 바닥에서 예배를 드리는 한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용기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게 그 용기가 감사하게도 있었습니다. 그 용기는 바로 성지순례 때 광야를 보면서 받은 은혜로부터 왔습니다. 광야에 대한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에 저는 정말 사랑하는 교인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도 그때 정했었습니다. 정말 5천 명이 넘는 교인과 함께 길바닥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교회 이름을 높은 뜻 광야 교회로 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길바닥 보다 더 좋은 길을 보여주셨고 그것이 교회의 분립으로 나타나 높은 뜻 광야교회는 높은 뜻 광성교회, 높은 뜻 정의교회, 높은 뜻 푸른 교회, 높은 뜻 하늘 교회가 되게 되었고 올해 한 교회를 더 허락해 주셔서 높은 뜻 씨앗이 되어 교회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은 우리가 생각하고 예상했던 것과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크고 아름답게 그리고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불가능하다고 했던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의 사역들이 다 성공적으로 수행되게 되었고 그와 같은 도전과 입증이 계속되어져 저는 우리 교회의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이 교회사에 남을만한,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될만한 근사한 역사가 되리라고 믿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받은 또 하나의 은혜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지순례를 통하여 사도행전의 주인공이었던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돌아 본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하고 교회생활을 하던 안디옥을 갔었습니다. 안디옥으로 가는 길이 참 험했습니다. 높은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길이 잘 닦여져 있고 그 길을 버스로 갔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바울 때에는 그 길을 걸어서 넘어야 했다는 것을 생각하는 순간 그 당시 그 험한 산 길을 걸어서 넘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가를 즉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그 길을 걸어서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험한 산길을 한 번만 넘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넘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도행전 20:24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바울은 정말 복음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 결과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길지도 않는 기간 동안 이루어냅니다.
십자가에 흉악한 죄인처럼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게 한다는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불가능한 일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그것도 성공적으로 전했고, 그래서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며 카타콤에서 그 불편하고 가난한 삶을 자초하며 살게 하였습니다. 결국은 기독교가 이 땅에 굳건히 세워져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기초를 닦는 역사를 담당하였습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바울은, 그의 삶과 그가 이룬 역사는 한마디로 미스테리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뛰어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는 바울이 부럽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그와 같은 상상 할 수 없는 정말 초인적인 힘과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오늘 본문 속에서 찾아 낼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의 능력은 복음으로부터 왔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자면 그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바울이 믿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었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리 만큼 사랑하신다는 것을 바울은 정말 믿었습니다.
그것을 정말 믿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가 다 진리임이 믿어졌습니다. 십자가가 믿어지는 순간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다 자신을 구원하고 축복하시려고 하는 열망을 가지고 기록된 하나님의 애타는 진심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해가 되든 이해가 되지 않든 말씀대로 살 수 있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수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울에게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진리입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원리입니다. 원리는 능력입니다. 식 즉 원리를 알면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더 이상 어렵지 않습니다. 길 즉 원리를 알면 아무리 길이 멀고 어려워도 결국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진리 즉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그 원리를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꼼꼼히 자세히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 말씀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완벽하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간증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 동안 제법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읽은 책보다 쓴 책이 많다고 할 만큼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책 쓰는 일은 중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책을 하나 쓸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을 ‘평생에 복이 된 말씀과 깨달음’으로 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내에게 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복이 바람으로 부는 것 같아’ 정말 저에게는 복이 바람으로 부는 것 같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느끼며 감사하며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제게 평생 복이 된 말씀과 깨달음을 간증하고 싶어서 요즘 그것을 정리 중에 있습니다.
제가 간증하고 싶은 평생 복이 된 말씀 중에 하나는 말라기 3장 10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십일조에 대한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저는 제법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 하기 전까지 저희는 20대 초등학교 교사 봉급의 1/3 정도의 돈으로 살림을 했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부자가 되었습니다. 목사인데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에서 열매나눔재단을 세우고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 헌금을 할 때 10억 원을 드리겠다고 약정했었습니다. 5년 안에 내겠다고 약속을 했었습니다. 그 5년이 올해입니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겨주신 집을 팔아 용인에 사 두었던 땅을 팔아서 낼 작정이었습니다. 그것을 팔면 몇 억 원 정도의 양도소득세를 내야 할 것이지만 세금과 약속한 헌금을 내도 몇 억 원 정도는 내가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최근 내가 챙기려고 하는 몇 억 원의 돈을 포기하면 양도소득세 몇 억 원까지도 다 교회와 하나님이 쓰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아쉬웠지만 마지막 조금 남기려고 했던 것을 포기했습니다. 올해 안에 그것을 다 넘기려고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도 드린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제가 늙어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을만큼의 여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과 제가 남길 것을 계산해 보니 저로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그것을 계산하다가 재미있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도적질 하여 모은 재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면 상식적으로 제가 모을 수 없는 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가 도적질을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그 돈을 열심히 모으려고 해서 모은 돈이 아니라 제법 열심히 썼는데도 불구하고 모여진 돈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도 잠간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매달 천 만 원 정도의 헌금과 구제와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삶 속에서 엘리야의 기름병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제법 열심히 하나님을 위하여 비우는데도 불구하고 병은 늘 언제나 가득차 있는 신비를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라기 3장 10절 이하의 말씀이 좋습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말씀이 저에게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땅에 쌓을 곳이 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정말 메뚜기에게 먹힌 적이 없습니다. 정말 기한 전에 떨어진 포도열매가 없습니다. 정말 저희 땅이 아름다워짐으로 사람들이 복받았다고 인정할만한 복을 받았습니다.
사실 말라기 간증은 제가 받은 복중에 가장 작은 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말라기 3장의 말씀을 통해서도 믿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사실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찬송가 340장 (새찬송가 542장)의 가사를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1절 가사가 너무 너무 좋습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아멘>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반복하다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욕심이 생깁니다. 그것은 딴 욕심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욕심입니다.
저는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라는 가사가 너무 너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제 마음이 꼭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음 중에 바울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제가 욕심내고 싶은 더 큰 믿음은 바울의 믿음입니다. 바울의 믿음은 머리와 입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믿음은 그의 삶에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믿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을 믿었습니다. 사랑을 믿으면 반드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복음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삶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로 믿은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아닌 믿음에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믿음은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했음으로 그의 온 삶을 하나님께 올인했습니다. 첫 손녀가 태어났을 때 제 손녀는 계룡대에 살았습니다. 제 손녀를 보고 오려면 차가 막히지 않아도 왕복 6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손녀를 보고 오려면 최소한 7시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첫 손녀 민희가 태어난 달 저는 한 달에 여섯 번을 다녀왔습니다. 상식적으로 저는 그런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상식이 손녀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정주채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향상교회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전 집회를 하고 점심을 먹은 후 쉬었다가 저녁 집회를 하는 일정이었습니다. 오전 집회를 마치고 점심을 사양하고 계룡대로 차를 몰았습니다. 50분 손녀 민희를 안아보고 아슬아슬하게 저녁 집회에 도착하여 집회를 하였습니다. 점심과 저녁은 모두 차 안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 정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내니 한 달에 여섯 번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여정을 보며 하나님과 열애에 빠진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의 믿음은 믿음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열애에 빠짐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연애하다가 하나님을 위하여 기쁘게 죽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사랑이 되니 그 믿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최고가 되었습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남은 여생 나를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관제처럼 쏟아 붓다가 탈진하여 행복하게 순교하듯 하나님께 돌아가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함께 그런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 가십시다. 그 믿음으로 살다가 그 믿음위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능력으로 새로운 사도행전의 역사를 쓰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