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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딤전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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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11.10.9 주일설교 |
경건 연습.
딤전 4: 7-8.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예배당 건축을 해 보았습니다. 연건평 3,400평 정도 되는 건물이었으니 작은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꼭 2년 동안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배당 건축은 힘도 들었지만 힘든 것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낡은 건물을 철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낡은 건물을 안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철거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낡은 건물을 철거하기 못하면 절대로 새로운 건물을 건축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철거를 지켜보면서 인생도 마찬가지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낡고 망가진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새 사람을 덧 입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날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회개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철거 다음에 한 일은 땅을 깊이 파고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이었습니다. 땅을 십여 메터나 파고 15톤 트럭으로 수 천 대 분의 흙을 파냈습니다. 그리고 철근과 컨크리트로 기초를 쌓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기초를 대충, 대충하게 되면 결국 나중에 그 집은 금이 가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건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기초를 든든히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운동도 마찬가지고, 공부도 마찬가지고,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약하면 결국 나중에 크게 발전하거나 성공할 수 없습니다.
기초와 기본의 중요성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큰 문제가 생깁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신앙의 기초와 기본을 튼튼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말씀을 저는 신앙의 기본과 기초를 튼튼히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좀 엉뚱한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교회에 남자보다 여자 교인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혹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 이유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모든 면에서 부드럽고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만함과 딱딱함은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아무래도 좀 교만한 면이 있고 딱딱한 면이 많은데 그것이 신앙생활에 거침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자보다 여자들이 교회에 더 많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좀 부정적인 이유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남자보다 여자들에게 더 매력적인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우리 나라는 남녀 평등이 아닙니다. 옛날에 여자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아직도 자기 이름으로 잘 불리지 않습니다. 누구 딸, 누구 아내,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자들은 사모님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아무리 아내를 사랑하고 좋아해도 누구의 남편이라고 불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여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조직입니다. 교회는 여자들의 이름만 불러주지 않고 여자들에게 직분과 직함을 부여합니다. 권찰, 집사, 권사가 그것입니다. 교회의 꽤 활발한 조직인 여전도회의 경우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총무와 같은 임원이 될 수도 있고 그 역할과 영향력은 교회 안에서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는 여자들에게 사회적인 욕구 충족을 해 주는 흔치 않은 조직입니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 성취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교회를 좋아합니다. 교회에 몰입합니다.
그러나 사실 더 엄밀히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꼭 여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들도 비슷합니다. 예전에 교회가 작고 힘이 없었을 때 교회는 남자들에게 별로 매력 있는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고 부흥하면서부터 교회 안에도 세상 못지않은 권력이 생겨나면서 남자들도 교회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사회적 신분 상승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금만 열심을 내면 그것이 쉽습니다. 특히 교회의 장로직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노회와 총회에서 임원이 된다면 그 영향력은 세상 못지않게 강해지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얻게 되는 사회적 욕구 충족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됩니다.
저는 오래 전 그와 같은 내용을 설교하면서 ‘예수 믿는 딴 재미’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 믿는 재미와 아무 상관도 없는 딴 재미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를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딴 재미에 맛들이다 보니 예수 믿는 기초가 연약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딴 재미에 맛들이다 보니 교회 안에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희박해지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운동을 직업으로 삼았어도 어느 정도는 좇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탁구를 제법 열심히 했습니다. 신학대학 체육대회이기는 하지만 일등도 해 보았습니다. 야구도 제법 잘 했습니다. 물론 아마츄어 게임이었기 때문이지만 거의 게임때마다 홈런을 쳤었습니다. 홈런을 칠 때 베트에 공이 맞는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날아오는 공을 과연 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몇 달 전 둘째 아들하고 동전을 넣고 배팅을 하는 야구 연습장에 가서 배팅을 해 보았습니다. 아직 야구 연습장에서 날아오는 공 정도는 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탁구나 야구를 비롯한 모든 운동은 참 신기한 겁니다. 탁구의 경우 상대방이 스매싱한 공을 맞받아 다시 스매싱을 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상대방의 코트에 떨어트린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투수와 타자 사이의 거리는 생각처럼 멀지 않습니다. 그 짧은 거리에서 시속 백 몇 십 키로로 날아오는 공을 정확히 배트의 중심에 맞추어 그것을 담장 너머로 넘긴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운동선수의 그러한 행동은 하루 아침에 완성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훈련과 연습의 결과입니다. 운동선수들의 운동연습과 훈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거의 극기에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을 받고 있는 태능 국가대표 훈련장의 모습을 텔레비전에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은 운동선수들이 얼마나 고된 훈련을 소화해 내고 있는지를 대개 알고 있습니다.
탁구 선수가 상대방이 스매싱한 공을 똑같이 스매싱하여 받아 칠 수 있는 것은 수없는 반복 훈련을 통하여 몸의 근육이 정확히 그 때 해야만 하는 행동과 동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야구도 마찬가지고 모든 운동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운동의 목표는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작업입니다. 정확히 계산해야만 하는 기계적인 행동은 계산하지 않고 무의적으로, 본능적으로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짧은 시간에 수행해 내게하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운동입니다.
그것은 운동뿐만이 아닙니다. 음악도 그렇고 발레도 그렇고 미술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을 의식화 합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 어떤 의식보다 더 정확해 지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훈련과 연습을 소화해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 선수는 올림픽 우승 후 인터뷰에서 ‘연습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고 싶었다.’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사람들은 그런 성공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셰게적인 첼리스트였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는 90세 이후에도 하루 6시간 이상씩을 연습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잘스가 95세가 되었을 때 영국의 BBC가 그에 관한 특집을 만들기 위하여 기자를 보내 카잘스를 인터뷰하였습니다. 기자는 평소에 궁금하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하나 건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이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 연습을 하십니까?”
이 기자에 대한 카잘스의 대답은 정말 유명한 대답입니다. 카잘스는 95세 나이에도,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6시간 이상을 연습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 하!, 나도 그만두고 싶네.
그런데 말이야, 지금도 연습을 하면 할수록 내 실력이 조금씩 나아진단 말이야. 허, 허.”
사람들은 우리를 예수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쟁이’라는 말은 사람을 좀 비하하여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문가’라는 의미입니다. ‘쟁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로 ‘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고 예수쟁이라고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예전처럼 우습게 여기고 비하하려는 생각이 없어진 까닭이기도 하지만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우리들이 ‘쟁이’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예수를 열심히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개가 예수를 믿어도 너희들 만큼을 믿겠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예수를 개처럼 믿는다고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와 같은 비아냥에 대하여 우리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이 예수 믿는 그 자체를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의 우리를 향한 비아냥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비아냥이 아닙니다. 예수쟁이라고 하면서 전혀 예수쟁이답지 않음에 대한 비아냥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받았던 비아냥은 면류관이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예수쟁이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비아냥을 받았지만 세상사람들로부터도 ‘쟁이’ 즉 예수 하나는 정말 제대로 열심히 믿는 ‘꾼’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예수쟁이’이라는 그 아름다운 비아냥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우 의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전혀 무의식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은 기독교인라고 하지만 실제의 삶과 행동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못합니다. 훈련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습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평양에 최권능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온 평양 거리를 다니시면서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하셨던 유명한 분이십니다. 최 목사님이 신사참배의 문제로 경찰에 잡혀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문하는 순경이 매를 때릴 때마다 최 목사님은 ‘예수’, ‘천당’ 하면서 매를 맞으셨습니다.
고문하는 순경이 하도 기가 막혀서 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 천당’을 하느냐? 이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이 또한 명언이셨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튀어 나오니 듣기 싫으면 때리지 말아라.’ 정말 명언 중의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음악가나 운동선수라고 하여도 연습과 훈련 없이 유명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로 첼로도 못하고 탁구도 못치고 야구도 못하는 무능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운동이나 음악이나 모든 일에 자질이라고 하는 면이 있고 그것을 무시할 수 없지만 자질만 믿고 훈련과 연습을 게을리 한 사람은 절대로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들입니다. 몸의 영적인 근육이 전혀 말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그런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런 자신을 훈련을 통하여, 연습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근육이 말씀을 기억하여 사탄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공격해 오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식대로 반응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내는 해마다 매실을 담습니다. 매실을 깨끗이 씻어서 설탕에 재어 놓습니다. 처음에는 매실과 설탕이 따로, 따로 이지만 나중에는 매실과 설탕이 하나가 되어 매실청이 됩니다. 매실은 열매 그 자체로서 별로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탕에 재어지고, 설탕이 배어지고, 숙성되면 참 좋은 향과 맛을 내는 열매가 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재어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과 생각과 삶 속에,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재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근육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사탄이 시험하고 공격할 때마다 예수님처럼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하며 말씀으로 사탄을 오히려 공격해야만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여주십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나기를 바라고 계시고(고후 2:15), 하나님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 같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후 3:3)
그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여야만 합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고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면 얻는 유익이 많습니다. 세계적인 골프 선수는 한 경기에서 우승해서 얻는 상금이 최소한 몇 억 원이 넘고 큰 시합이 경우에는 우승상금이 100억 원을 넘습니다.
메이저리그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받는 연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가 잘 아는 축구의 박지성 선수만 해도 연봉이 아니라 주급이 억대가 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지옥과 같은 연습과 훈련을 감내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프로골프 선수들이나 야구 선수 그리고 축구선수들이 받는 상금과 연봉을 약간의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면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유익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경건의 연습은 정말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육체의 연습은 그것이 아무리 커도 금세에 그치지만 경건의 연습은 금세와 내세에 모두 큰 유익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믿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다. 연습하고 훈련하십시다. 꾼이 되십시다. 쟁이가 되십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약속해 주신 육체의 연습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상급도 그저 약간의 유익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큰 유익을 축복으로 받아 금세와 내세를 통털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딤전 4: 7-8.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예배당 건축을 해 보았습니다. 연건평 3,400평 정도 되는 건물이었으니 작은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꼭 2년 동안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예배당 건축은 힘도 들었지만 힘든 것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새로운 건물을 건축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낡은 건물을 철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낡은 건물을 안전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철거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낡은 건물을 철거하기 못하면 절대로 새로운 건물을 건축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철거를 지켜보면서 인생도 마찬가지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낡고 망가진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새 사람을 덧 입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날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회개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철거 다음에 한 일은 땅을 깊이 파고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이었습니다. 땅을 십여 메터나 파고 15톤 트럭으로 수 천 대 분의 흙을 파냈습니다. 그리고 철근과 컨크리트로 기초를 쌓았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기초를 대충, 대충하게 되면 결국 나중에 그 집은 금이 가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건축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기초를 든든히 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운동도 마찬가지고, 공부도 마찬가지고,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약하면 결국 나중에 크게 발전하거나 성공할 수 없습니다.
기초와 기본의 중요성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큰 문제가 생깁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도 신앙의 기초와 기본을 튼튼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말씀을 저는 신앙의 기본과 기초를 튼튼히 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좀 엉뚱한 이야기로 오늘 설교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교회에 남자보다 여자 교인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혹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그 이유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모든 면에서 부드럽고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교만함과 딱딱함은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아무래도 좀 교만한 면이 있고 딱딱한 면이 많은데 그것이 신앙생활에 거침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자보다 여자들이 교회에 더 많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좀 부정적인 이유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남자보다 여자들에게 더 매력적인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우리 나라는 남녀 평등이 아닙니다. 옛날에 여자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아직도 자기 이름으로 잘 불리지 않습니다. 누구 딸, 누구 아내, 누구 엄마로 불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자들은 사모님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아무리 아내를 사랑하고 좋아해도 누구의 남편이라고 불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여자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조직입니다. 교회는 여자들의 이름만 불러주지 않고 여자들에게 직분과 직함을 부여합니다. 권찰, 집사, 권사가 그것입니다. 교회의 꽤 활발한 조직인 여전도회의 경우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총무와 같은 임원이 될 수도 있고 그 역할과 영향력은 교회 안에서 만만치 않습니다. 교회는 여자들에게 사회적인 욕구 충족을 해 주는 흔치 않은 조직입니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 성취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교회를 좋아합니다. 교회에 몰입합니다.
그러나 사실 더 엄밀히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꼭 여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들도 비슷합니다. 예전에 교회가 작고 힘이 없었을 때 교회는 남자들에게 별로 매력 있는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커지고 부흥하면서부터 교회 안에도 세상 못지않은 권력이 생겨나면서 남자들도 교회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에서의 사회적 신분 상승은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조금만 열심을 내면 그것이 쉽습니다. 특히 교회의 장로직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그리고 노회와 총회에서 임원이 된다면 그 영향력은 세상 못지않게 강해지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얻게 되는 사회적 욕구 충족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게 됩니다.
저는 오래 전 그와 같은 내용을 설교하면서 ‘예수 믿는 딴 재미’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교회 안에 예수 믿는 재미와 아무 상관도 없는 딴 재미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를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딴 재미에 맛들이다 보니 예수 믿는 기초가 연약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딴 재미에 맛들이다 보니 교회 안에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희박해지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운동을 직업으로 삼았어도 어느 정도는 좇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탁구를 제법 열심히 했습니다. 신학대학 체육대회이기는 하지만 일등도 해 보았습니다. 야구도 제법 잘 했습니다. 물론 아마츄어 게임이었기 때문이지만 거의 게임때마다 홈런을 쳤었습니다. 홈런을 칠 때 베트에 공이 맞는 감각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날아오는 공을 과연 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몇 달 전 둘째 아들하고 동전을 넣고 배팅을 하는 야구 연습장에 가서 배팅을 해 보았습니다. 아직 야구 연습장에서 날아오는 공 정도는 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탁구나 야구를 비롯한 모든 운동은 참 신기한 겁니다. 탁구의 경우 상대방이 스매싱한 공을 맞받아 다시 스매싱을 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상대방의 코트에 떨어트린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야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투수와 타자 사이의 거리는 생각처럼 멀지 않습니다. 그 짧은 거리에서 시속 백 몇 십 키로로 날아오는 공을 정확히 배트의 중심에 맞추어 그것을 담장 너머로 넘긴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운동선수의 그러한 행동은 하루 아침에 완성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훈련과 연습의 결과입니다. 운동선수들의 운동연습과 훈련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거의 극기에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을 받고 있는 태능 국가대표 훈련장의 모습을 텔레비전에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들은 운동선수들이 얼마나 고된 훈련을 소화해 내고 있는지를 대개 알고 있습니다.
탁구 선수가 상대방이 스매싱한 공을 똑같이 스매싱하여 받아 칠 수 있는 것은 수없는 반복 훈련을 통하여 몸의 근육이 정확히 그 때 해야만 하는 행동과 동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야구도 마찬가지고 모든 운동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운동의 목표는 무의식을 의식화 하는 작업입니다. 정확히 계산해야만 하는 기계적인 행동은 계산하지 않고 무의적으로, 본능적으로 그것도 상상할 수 없는 짧은 시간에 수행해 내게하는 작업입니다. 그것이 운동입니다.
그것은 운동뿐만이 아닙니다. 음악도 그렇고 발레도 그렇고 미술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을 의식화 합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 어떤 의식보다 더 정확해 지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훈련과 연습을 소화해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 선수는 올림픽 우승 후 인터뷰에서 ‘연습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고 싶었다.’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사람들은 그런 성공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셰게적인 첼리스트였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는 90세 이후에도 하루 6시간 이상씩을 연습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카잘스가 95세가 되었을 때 영국의 BBC가 그에 관한 특집을 만들기 위하여 기자를 보내 카잘스를 인터뷰하였습니다. 기자는 평소에 궁금하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하나 건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이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 연습을 하십니까?”
이 기자에 대한 카잘스의 대답은 정말 유명한 대답입니다. 카잘스는 95세 나이에도,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6시간 이상을 연습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 하!, 나도 그만두고 싶네.
그런데 말이야, 지금도 연습을 하면 할수록 내 실력이 조금씩 나아진단 말이야. 허, 허.”
사람들은 우리를 예수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쟁이’라는 말은 사람을 좀 비하하여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문가’라는 의미입니다. ‘쟁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로 ‘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고 예수쟁이라고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예전처럼 우습게 여기고 비하하려는 생각이 없어진 까닭이기도 하지만 세상 사람들 보기에도 우리들이 ‘쟁이’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예수를 열심히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개가 예수를 믿어도 너희들 만큼을 믿겠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예수를 개처럼 믿는다고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와 같은 비아냥에 대하여 우리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이 예수 믿는 그 자체를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 사람들의 우리를 향한 비아냥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비아냥이 아닙니다. 예수쟁이라고 하면서 전혀 예수쟁이답지 않음에 대한 비아냥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받았던 비아냥은 면류관이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예수쟁이였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비아냥을 받았지만 세상사람들로부터도 ‘쟁이’ 즉 예수 하나는 정말 제대로 열심히 믿는 ‘꾼’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예수쟁이’이라는 그 아름다운 비아냥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우 의식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전혀 무의식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전혀 기독교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말은 기독교인라고 하지만 실제의 삶과 행동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못합니다. 훈련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연습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평양에 최권능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온 평양 거리를 다니시면서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하셨던 유명한 분이십니다. 최 목사님이 신사참배의 문제로 경찰에 잡혀 고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고문하는 순경이 매를 때릴 때마다 최 목사님은 ‘예수’, ‘천당’ 하면서 매를 맞으셨습니다.
고문하는 순경이 하도 기가 막혀서 최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 천당’을 하느냐? 이에 대한 목사님의 대답이 또한 명언이셨습니다.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튀어 나오니 듣기 싫으면 때리지 말아라.’ 정말 명언 중의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음악가나 운동선수라고 하여도 연습과 훈련 없이 유명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마찬가지로 첼로도 못하고 탁구도 못치고 야구도 못하는 무능자들이었습니다. 물론 운동이나 음악이나 모든 일에 자질이라고 하는 면이 있고 그것을 무시할 수 없지만 자질만 믿고 훈련과 연습을 게을리 한 사람은 절대로 대가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죄인들입니다. 몸의 영적인 근육이 전혀 말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그런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런 자신을 훈련을 통하여, 연습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 나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근육이 말씀을 기억하여 사탄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공격해 오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식대로 반응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내는 해마다 매실을 담습니다. 매실을 깨끗이 씻어서 설탕에 재어 놓습니다. 처음에는 매실과 설탕이 따로, 따로 이지만 나중에는 매실과 설탕이 하나가 되어 매실청이 됩니다. 매실은 열매 그 자체로서 별로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먹을 수 없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설탕에 재어지고, 설탕이 배어지고, 숙성되면 참 좋은 향과 맛을 내는 열매가 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재어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과 생각과 삶 속에,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 재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근육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사탄이 시험하고 공격할 때마다 예수님처럼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하며 말씀으로 사탄을 오히려 공격해야만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여주십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나기를 바라고 계시고(고후 2:15), 하나님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편지 같아지기를 원하십니다. (고후 3:3)
그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여야만 합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하여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고 세계적인 운동선수가 되면 얻는 유익이 많습니다. 세계적인 골프 선수는 한 경기에서 우승해서 얻는 상금이 최소한 몇 억 원이 넘고 큰 시합이 경우에는 우승상금이 100억 원을 넘습니다.
메이저리그의 프로야구 선수들이 받는 연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가 잘 아는 축구의 박지성 선수만 해도 연봉이 아니라 주급이 억대가 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지옥과 같은 연습과 훈련을 감내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프로골프 선수들이나 야구 선수 그리고 축구선수들이 받는 상금과 연봉을 약간의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면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유익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경건의 연습은 정말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육체의 연습은 그것이 아무리 커도 금세에 그치지만 경건의 연습은 금세와 내세에 모두 큰 유익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믿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다. 연습하고 훈련하십시다. 꾼이 되십시다. 쟁이가 되십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약속해 주신 육체의 연습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상급도 그저 약간의 유익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큰 유익을 축복으로 받아 금세와 내세를 통털어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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