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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빛을따라간사람들] 비안네

영성묵상훈련 강태형 목사(은총교회)............... 조회 수 2146 추천 수 0 2012.08.23 14: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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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 

지식보다는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목회자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뛰어난 성덕과 눈물로 한 마을을 변화시켰던 목회자가 있다. 오늘날 뛰어난 학벌과 물질을 앞세우고, 교세로 성공을 가름하는 영적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참된 목회관을 엿볼 수 있다.

거룩한 가정과 기도하는 아이

 

비안네는 프랑스 리용 근처 다르딜리촌에서 출생하였다. 다르딜리는 인구 1천 3백 명이 되는 마을로써 리용에서 약 8km 떨어져 있었다. 부모는 농업을 생업으로 하여 별로 재산이 없었으나 부지런하고 열심한 신자였다. 아버지 마태오 비안네는 힘이 세고 조용하며 성경말씀대로 살기를 힘썼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저녁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기를 강조하였다. 어머니 마리아 브뤼스는 비상한 정신적 재능과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상냥하며 드물게 보이는 교육적 재능을 소유한 분이었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 특히 길손을 받아들이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의 손님 중에는 거지 성자 분도 라브르도 있었다. 훗날 아르스의 사제가 된 비안네는 특히 겸손하게 지내라는 어머니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비안네의 가족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성가정이었다. 요한의 아버지 마태오는 기도하는 일에 매우 열심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하던 일을 멈추고 곧잘 기도를 하셨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무사한 하루가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사랑으로써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 주님은 우리에게 이상한 기적을 흩뿌리는 힘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기적, 즉 사랑의 기적을 계속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를 도구삼아 사랑의 기적을 계속하십시오. 사랑은 배반당해도 믿으며, 더 나아지려 노력하는 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에는 꼭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훌륭한 부모의 넷째 아들이었다. 부모의 가르침과 그들의 선행을 따르는 데는 형제, 자매들 중 누구보다 뛰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빛나는 파란 눈에 갈색 머리, 야위고 창백한 얼굴이었고, 민감한 마음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모든 일에 진지하고 세밀하게 임하는 소년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아이의 사나운 성격을 절제시키느라고 몹시 노력하였다고 한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의 특이한 점은 어렸을 때부터 틈만 나면 기도하는 것이었다.

 

비안네가 네 살이었을 때 갑자기 집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부모들은 아이가 잘못되지나 않았는가 하여 정신없이 찾았는데, 뜻밖에도 아이는 마구간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모들은 아이를 꾸짖었으나 한편으로는 아이의 신심을 발견하고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였다.

어둠과 가난 속에서 피어난 꿈

 

비안네가 다섯 살 때 프랑스에 대혁명이 일어났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민의회는 교회와 수도원들을 탄압하였다. 혁명세력들은 성직자들을 핍박하고 종교적 자유를 박탈하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들은 다른 독실한 신자와 마찬가지로 심히 근심하였다. 특히 사제가 없어 예배와 성찬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여 비통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는 동안 비안네는 열한 살이 되어 첫 고백성사를 하고, 2년 후에 첫 영성체(성찬)를 하였다. 이 때도 종교탄압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비안네는 밤중에 몰래 숨어서 기도해야만 했다. 비안네는 너무 행복해서 방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이 날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799년 11월 9일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나폴레옹은 교회의 자유를 상당 부분 허용하였다. 비안네는 일찍부터 사제가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렇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조달할 길이 없었다. 비안네는 부모에게 자신의 뜻을 말씀드리지 못하고, 매일 양을 치며 농가의 자녀로서 할 일을 다 하였다. 비안네는 적은 수의 양 떼를 돌보았는데, 그가 제일 즐겨 찾는 곳은 새 소리로 가득 찬 깊고 그늘진 골짜기였다. 그는 물씬 풍기는 전원의 흙냄새를 무척 좋아했다. 먼 훗날 그는 자주 이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고요함을 좋아했다. 그는 고요함과 정적 속에서 마치 기도를 호흡하듯 행했다. 그는 자신만의 은밀한 골방, 고목나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습관을 좇아 기도했다. 비안네는 주위의 목동들과도 잘 어울렸는데 그 소년들을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마치 사제처럼 예배드리는 흉내를 내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날로 커갔다.

 

비안네는 17세 되는 때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그 뜻을 말씀 드렸다. 물론 부모님들의 기쁨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여도 공부를 하기에는 경제사정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간 더 집안일을 돌보는데 소일하였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에퀼리 본당의 발레 사제가 그 자신도 가난한 시골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부시켜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805년 19세의 비안네는 발레 사제의 제자로 들어갔다.

연약함 안에 숨겨진 겸손의 향기

 

발레 사제는 손수 비안네에게 필요한 학문을 가르쳤다. 그런데 성자와 같은 발레 사제가 가장 힘써서 가르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속죄를 위한 상번제와 고행이었다. 비안네는 열심히 배웠다. 그러나 성적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발레 신부의 지도 하에 있는 어린 학생들이 비안네를 비웃었다. 한 번은 마티아 로라스라는 학생이 나이가 많은 비안네의 라틴어 번역을 도와주게 되었다. 비안네가 번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로라스는 조바심을 내다가, 그만 엉겁결에 비안네의 뺨을 때렸다. 이 때 로라스의 나이는 열두 살, 비안네는 스무 살이었다. 비안네는 나이가 많고 훨씬 힘이 세었지만 본능적인 격렬한 흥분을 눌렀다. 그리고는 열두 살 된 소년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었다. 훗날 로라스는 고백한다. “그날 받은 감동은 제게 어떤 감동보다 컸습니다.” 로라스와 비안네는 누구보다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비안네는 라틴어의 어려움 때문에 공부할 의욕을 잃곤 했다. 그러다가 가끔 스승에게 부탁을 하였다. “제발 저를 부모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발레 사제는 부모님의 희생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혼구원의 사명을 일깨우며 힘을 내도록 권면하였다. 이 무렵 비안네는 에퀼리의 친척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는 국에 버터나 우유를 넣지 않도록 부탁하였다. 비안네는 국이 맛없고 형편이 없을수록 더 만족하였다. 한 번은 에퀼리에서 다르딜리로 가는 도중 신을 신지 못한 불쌍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비안네는 주저 없이 자기의 새 신을 벗어 주고, 맨발로 부모님에게 돌아온 일이 있었다. 비안네는 100Km의 길을 걸어 성 프랜시스 레지스의 묘지를 순례하며 간절히 자신의 신학공부를 위해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가난함과 부족함을 하나님께로 나가는 발판으로 삼았다.

낙심과 좌절을 뛰어넘고

 

한편 나폴레옹 황제는 계속적인 전쟁으로 더 많은 청년들을 징집하게 되었다. 비안네도 1809년 23세의 나이로 징집되었다. 그러나 며칠 못가서 심한 열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에서 회복되자 군부대로 수송되었는데 다시 병이 재발하여 6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였다. 퇴원하자 명령을 받고 혼자서 스페인 경계로 가다가 우연한 기회에 탈영병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안에 이루어졌다. 1810년 나폴레옹 황제가 특사를 내려 동생 프랜시스가 형 대신에 군대에 가게 되었다. 이후 비안네는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귀향한지 얼마 안 되어 모친이 타계하는 큰 슬픔을 겪었다.

 

비안네는 16개월 만에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 왔다. 그 때부터는 사제관으로 들어가 스승을 도우며 배우게 되었다. 그 후 1812년 비안네는 26세의 나이에 벨리오르 소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거기서도 역시 성적이 좋지 않았다. 이해력은 있으나 기억력은 매우 부족하였다. 교사들은 그의 성적이 저조하여 그를 퇴학시키기로 하였으나, 그의 두터운 신앙심과 품행의 단정함은 전학우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재학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 나폴레옹은 모든 소신학교의 문을 닫도록 하였기에 비밀스럽게 공부를 진행하였다. 1812년 12월 나폴레옹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본 후 귀국하였고, 교황 비오 7세는 여전히 연금 상태에 있었다. 소신학교 학년말 성적은 다음과 같았다. 근면: 좋다, 행실: 좋다, 성격: 좋다, 지식: 아주 약하다.

 

1813년 비안네는 리용의 대신학교로 들어갔다. 비안네는 경건생활 가운데 열심히 노력했으나 수업을 라틴 말로 하므로 수업을 들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사제가 되기를 갈망하였으나 현실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 후 교수들이 그에게 학교를 떠나도록 권면하였다. 비안네는 가장 깊은 슬픔에 싸인 채 에퀼리로 돌아와서 스승의 품 안에서 울었다.

 

그러나 발레 사제는 제자의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1814년 나폴레옹은 퇴위하였고 사제가 모자라는 어려운 교회의 현실 가운데 쿨롱 부주교는 발레 사제의 간곡한 건의를 받아들였다. 라틴어가 아닌 불어로 비안네를 테스트한 후 비안네에게 사제의 길을 특별히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비안네는 1815년 6월 부제품을 받았고, 1815년 8월 13일 29살의 비안네는 드디어 사제가 되었다. 

온전한 신뢰와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사제가 된 비안네는 그의 은사인 발레 사제의 부제(보좌 신부)가 되었다. 비안네와 발레 사제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비안네 부제의 첫 참회자가 발레 사제였다는 사실이다. 발레 사제는 이미 나이가 많아 때때로 병석에 눕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엄격한 고행생활을 계속하였다. 비안네는 스승과 더불어 무엇이든지 하고 스승으로부터 무엇이든지 배우려 하였으며, 스승은 제자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두 거룩한 사제의 아름다운 공동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즉 그가 부임한지 겨우 2,3개월 후 스승 발레 사제가 소천하였기 때문이었다. 5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이제는 신앙의 아버지인 발레 사제의 향년 66세 최후를 지켜보게 된 것은 비안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비안네에게 있어서 발레 사제는 스승이자 큰 은인이었다.

방탕과 타락에 젖은 아르스를 깨우다

 

몇 달 후 비안네는 인구 230명밖에 되지 않는 가난하고 작은 마을 아르스의 주임신부로 임명되었다. 아르스는 에퀼리에서 30km 떨어진 작은 촌인데 주민들은 신자이면서도 대부분 냉담하여 교회에 나오지 않고, 주일에도 예사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며 세상쾌락만을 좇았다. 젊은 비안네 사제는 이러한 본당 형편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낙심치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비안네 사제는 사제관에 있던 값비싼 의자들, 식탁, 두 개의 침대, 이불, 매트리스 등 아르스 성의 여 주인으로부터 빌린 것은 성으로 되돌려 보내었다. 그리고는 발레 사제가 유산으로 남겨 준 나무 침대와 서적들과 몇 가지의 헌 옷들 외에는 소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토대로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아르스 마을 사람들은 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습관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그의 친절과 자애심, 그의 빛 된 행실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게 되었다. 점차 그들은 열심한 신자가 되어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기까지 비안네 사제의 기도와 많은 희생이 따랐다.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며 아르스 마을을 위해 부르짖었다. 그는 아르스의 죄악을 자신의 죄로 여기며 철저한 회개의 눈물을 쏟았다.

 

그는 자주 금식하며 식은 감자만으로 식사를 하였다. 딱딱한 침대에 수단 한 벌, 그 나머지는 교회의 장식을 하든가 빈민을 위해 사용하였다. 비안네 사제도 소싯적에는 과일을 좋아하고 따뜻하게 잘 구운 빵을 좋아했다. 한 번은 빵을 굽고 있는 솥 앞에서 말하기를, “한 번쯤은 이 식도락을 나에게 허락해야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어야 합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주방을 맡은 클라우디아 르나르는 한 움큼의 풀을 먹고 있는 비안네를 뜻밖에 사제관 정원에서 만나게 되었다. “아이고, 신부님! 풀을 먹고 계십니까?” “예, 나의 르나르 어머니! 나를 시험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사제의 동역자들과 친구들은 가끔 권고하면서, 오랜 세월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때마다 비안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아주 좋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아주 강인해요. 나는 무엇이든 조금씩이라도 먹었고, 2시간쯤 잠을 잔 후에 다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말에게 아무 거나 먹도록 준 다음 일을 시켜 보십시오.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일을 할 것입니다. 말이 눕는 일은 거의 없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아직 넉넉하지 않았다. 비안네는 더 무서운 고행을 택했다. 저녁엔 방에 올라간 다음 채찍을 손에 들고 몸을 때렸다. 이 채찍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도구이고, 비안네가 몇 개의 고리를 더해 완성한 것이다. 비안네는 이 고행을 항상 되풀이 하고 죽을 때까지 연습하였다. 아르스 사제의 방에서 순례자들은 지금도 벽에 있는 갈색의 얼룩을 볼 수 있다. 비안네 사제가 벽에 기대면서 피 묻은 손자국을 벽에 남긴 것이다. 그의 엄격한 극기생활은 모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되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어 채찍에 맞아 깊게 패이셨던 주님의 등과 갈보리를 그는 늘 깊이 묵상하며 본받고자 했다. 사도바울처럼 자신을 쳐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러나 비안네 사제의 열정과 희생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반항심과 적대행위들도 만만찮았다. 사제가 너무

 

엄격하다고 비난하고, 술집 주인들, 춤을 추는 청년들, 자유사상가들, 국가의 철학자들이 비안네 사제를 비난했다. 회개생활을 게을리 하던 신자들이 부정적으로 말하였다. 자녀들에게 자유를 너무 허락했다고 책망 받은 부모들이 비난했다. 험담, 거짓말, 추한 유언비어가 유행했다. 비안네 사제가 친히 말했다. “내가 아르스로 왔을 때 무슨 고통을 여기에서 당할지를 미리 알았다면 곧 죽었을 것입니다.” 비안네 사제는 조롱과 경고로 가득 찬 익명의 편지를 받기도 하였다.

 

한 번은 젊은 여자가 아기를 팔에 안고 사제관 앞에 나타나서 비안네 사제가 이 아기의 아버지라고 크게 외쳤다. 하지만 비안네 사제의 반응은 참으로 초자연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비안네 사제는 이 모욕 앞에서 화를 내지도 않고 온화하게 대했다. 비안네는 제일 무서운 비난과 제일 지긋지긋한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안네 사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항변도 없이 고통을 당했다. 정말 고통을 즐기기조차 했다.

주린 양떼를 찾아 나선 가시밭길

 

비안네의 특별한 관심은 병자 방문이었다. 비안네는 아무리 거리가 멀거나 시간이 많이 걸려도 곧 갔다. 한 번은 너무도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갔다. 병자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비안네는 침대에 눕혀져서 죽을 사람의 고백을 들었다. 모든 것을 끝마친 후에는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비안네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은 동료 사제들이 좋은 바지를 주면서 성의를 생각해서 반드시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새 옷을 입은 비안네는 추운 날씨에 교회로 돌아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가난한 사람을 만났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비안네는 숲 속으로 들어가 바지를 손에 들고 다시 나타났다. 며칠 뒤에 그들의 선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사제들에게 “당신들은 그 바지를 나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나는 그 바지를 길가에서 만난 가난한 사람에게 영원히 빌려 주었습니다.”

 

비안네 사제는 ‘프로비당스’(섭리)를 운영하였는데 버림받은 소녀들과 교회학교 소녀들을 위한 기숙학교였다. 비안네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소유를 다 처분하여 아래층에는 수업을 위한 큰 홀과 이층에는 두 개의 작은 방이 있는 집을 구하여 사역을 시작하였다. 비안네는 기숙학교를 이름 그대로 하나님 은혜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겼다. 기숙학교의 교사들과 주변의 인물들은 순간순간 막막한 환경 가운데 처할 때가 많았는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적인 도우심을 체험하였다. 나중에는 비안네 사제처럼 온전히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의탁하는 믿음으로 변화되었다.

 

어느 날 밀가루와 곡식도 물건을 살 돈도 한 푼 없어서 비안네 사제조차 고민했다. 비안네는 순간 이제는 고아 소녀들을 위한 사업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안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 때문에 고아들을 통하여 자기를 벌하신다고 생각했다. 비안네는 지붕 밑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다락방의 바닥에는 곡식알들이 흩어져 있었다. 비안네는 그것을 한데 모으고 간절히 고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리고 조금 후 교사 중 한 자매에게 곡식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하여 문을 조금 밀치자 곡식들이 벌어진 문틈으로 흘러내렸다. 그녀를 따라 비안네가 다시 다락방으로 올라갔을 때 놀랍게도 다락방 가득히 곡식이 쌓여 있었다. 비안네는 감격하며 고아 소녀들에게 뛰어가 그들에게 말했다. “나의 가난한 자녀들아 나는 섭리를 불신했다. 나는 너희들을 내보내려고 하였는데 사랑하는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벌을 이렇게 주셨다.”

 

또 한 번은 집안에 밀가루가 없었다. 준비된 식량은 다 떨어졌고, 동네에는 빵 제조업자도 없었다. 그런데 24명의 식구들이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사들은 비안네 사제에게 보고 하였다. 비안네는 조용히 대답했다. “조금 남아 있는 밀가루 속에 누룩을 넣고 반죽 통을 닫으시오. 그리고 내일까지 아무 일도 없는 체하세요.” 요한나 마리아는 후일 이야기 했다. “나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이튿날 반죽을 이길 때에 내 손 밑에 반죽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데, 물을 계속 부어도 자꾸 모자랐어요. 물을 주면 줄수록 반죽이 늘어나고 굳어졌습니다. 어느 새 반죽 통은 철철 넘치게 불어나 있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에게 일어났던 기적이 아르스의 작은 마을에도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와 믿음은 기적을 낳는다. 또한 믿음은 십자가를 동반한 희생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죽기까지 충성한 참 목자요, 하나님의 사람 비안네

 

비안네 사제가 프로비당스 사역을 시작하여 시골의 타락한 소녀들과 작은 고아 소녀들을 선도하기 시작했을 무렵 마귀의 공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안네는 용감한 남자 두 명에게 사제관에 와서 자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눈이 많이 온 어떤 겨울 밤 자정쯤에 세 차례 강하게 문을 치는 소리가 났다. 비안네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 등불을 손에 들고 마당에 내려갔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거기엔 아무도 없었고, 눈 위에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귀는 자정 무렵에 나타나 소동을 일으켰다. “비안네! 비안네! 감자 먹는 놈! 우리는 너를 잡을 것이다. 우리가 너를 우리 손에 들고 있지. 우리 손에 말이야!” 마귀는 오랫동안 부르짖고 욕하고, 행진하는 군대의 소리를 내고, 마룻바닥에 못 박는 소리를 내고, 대패질, 톱질 소리도 내었다. 이튿날 아침에 온 천장이 구멍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멀쩡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날 더 많은 죄인들, 더 큰 죄인이 올 때에는 마귀의 역사가 더욱 심하게 나타났다.

영혼을 치료하는 위로자

 

비안네 사제의 경건한 삶은 곧 근방에, 나중에는 유럽 여러 나라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고백성사를 보기 위하여 국외에서도 몰려 왔다. 그들 중에는 신앙적으로 낙심한 자, 마음의 고민으로 위로가 필요한 자, 오랫동안 냉담신앙으로 방탕하게 살아온 자 등 무수히 많았지만, 거룩한 사제를 만난 후부터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하루 종일 성당 광장에서 춤을 추며 노래하는 노파가 있었다. 그녀의 아들이 그 어머니를 아르스로 데리고 왔다. 사람들이 그 노파에게 성수를 주었더니 그녀가 곧 교회의 벽을 깨물기 시작했다. 비안네 사제가 입에서 피가 흐르는 부인을 위해 기도했는데 40년 이상 고통당하던 그 여자는 순간적으로 아주 조용해졌다. 그 여자는 해방되었고 그리고 다시는 발작을 하지 않게 되었다. 비안네 사제는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아 사람들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어려워서 말 못하는 것까지 들여다보며 질문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많은 신자들이 더욱 그를 따르게 되어 그는 매일 장시간 고백성사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40년부터 아르스와 리용 사이엔 매일 역마차의 왕래가 늘어났다. 후일 이것이 발전하여 해마다 아르스에 왔던 순례자들의 숫자는 10만에서 12만 명에 달했다. 비안네 사제는 어떤 날은 16시간, 17시간씩 고백성사를 주어야 했다. 그 지방의 기후는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추웠다. 이러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비안네 사제에게 성사를 보고자 하는 신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은 2, 3일 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하였다.

지극한 겸손과 아름다운 덕행

 

비안네 사제는 이런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면서도 그의 엄한 고신극기의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시련도 닥쳐왔다. 그 중에 레이몽 보좌 사제를 통해 받은 시련이 있었다. 레이몽 사제는 불쌍한 이들에게 마음이 너무 약하고 성품이 너무 순한 비안네의 후견인의 사명을 받았다고 판단하였다. 겸손을 모르는 새 보좌 사제는 한계를 몰랐다. 그의 생각에는 참다운 아르스의 본당 사제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르스 본당 사무실에는 보좌 사제의 손으로 사인을 한 서류가 남아 있는데, 레이몽 본당 사제로 사인되어 있다. 권위적이고 독재적이었던 레이몽 사제는 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타리나 라사늬는 이 당시 비안네의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안네는 자기와는 성격이 상반되는 사람에 대하여 얼마간 자기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을 더욱 화나게 하는 것임을 알았을 때, 그의 의견을 따르고, 자기의 계획을 미리 알려 주었다. 그의 의견을 물어 보고, 될 수 있는 대로 그의 뜻을 이루도록 그를 도와주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1847년 어느 날 레이몽 사제는 사제관에서 살림을 살기로 결심을 했다. 비안네의 방을 무조건 차지하고, 비안네는 아랫방 하나면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다행히 이 계획을 본당 신자들이 알고 항의를 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레이몽의 태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지도하고 싶어했다. 그는 사소한 일로 본당 사제를 책망하고 나무랐다. 본당 사제의 계획성 없는 운영 방침에 그는 분격했다. 몇 년이 지나가도 레이몽 사제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온 본당 신자는 레이몽 사제가 아르스에서 떠나도록 온갖 힘을 썼다. 아타나시오 수사는 주교에게 레이몽 사제를 탄핵하는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멸시와 천대의 당사자인 비안네 사제는 레이몽 사제에게 관용하였고, 거의 모든 것에 레이몽 사제의 뜻을 따랐다.

 

푸레 사제는 비안네 사제가 자기의 보좌 사제에 대해 칭찬으로 가득 찬 편지를 자신에게 보낸 사실을 증거 하였다. 이 무렵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편지를 비안네가 주교에게 보냈다. “저로서는 레이몽 사제만 원합니다. 레이몽 사제님이 떠나시게 된다면 저는 그 분이 떠나는 이튿날로 저의 친척들에게 시켜 은퇴했다고 주교님께 연락하겠습니다. 이 모든 불평을 하는 자는 마귀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주교님께선 우리 두 사람을 현재 그대로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158cm의 작은 키에 야윈 비안네 사제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지만, 매일 솔직하고 영감 있는 설교를 하며 수많은 순례자들을 위해 헌신하면서 충실히 자기 의무를 이행하였다. 그의 빛 된 삶은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의 사역으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열정을 되찾게 되었고, 불신자들도 많이 회개하였다. 그를 조소하던 자들도 그의 성덕에 감동되어 바른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서게 되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가 이렇게 부단한 고행과 헌신의 삶을 힘쓰기를 40년 간, 1859년 7월 29일 금요일 73세의 고령의 비안네 사제는 그 날도 17시간이나 고백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다가 “나는 이제 그만이다.”라고 말하였다. 밤1시에 일어나 성당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다시는 회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고해 사제에게 연락해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 부른 수사가 들어오자 다시 말하였다. “이것이 나의 가련한 끝입니다.” 의사를 부르겠다고 하자 “소용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밖에서는 본당 사제가 오늘 내려 올 수 없다는 소문이 퍼졌다. 순례자들은 날벼락을 맞은 듯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떤 자들은 울고, 어떤 자들은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하였다. 비안네는 의사의 치료를 아무 항의 없이 받았다. 사제들, 친구들, 충실한 부인들, 순례자들까지도 그의 침대 옆에 모였다. 주교가 아르스의 사제의 건강상태가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왔다. 그는 크게 기도 하면서 길 양쪽에 무릎을 꿇은 무리 가운데로 지나 왔다. 그가 환자 위에 상체를 굽힐 때에 비안네의 눈물이 그의 고상을 적셨다. 본당 신자들과 순례자들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는 가슴이 아팠던 것이다. 아르스의 신자들이 8월의 끓는 열기를 식히려고 지붕으로 올라가 쉼 없이 벽과 기와에 물을 끼얹었다. 그는 마지막 성사를 받았다. “사랑하올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십니까?”하고 그는 말하였다. “제가 주님께로 갈 수 없게 되니까 주님이 제게로 오시는군요.”라면서 그는 성체를 모셨다. 그리고 비안네는 눈물을 흘렸다. “왜 우십니까?”하고 누군가 물었다.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정말로 섭섭한 일이니까요.” 그 후 그는 침묵을 지켰다. 침대 옆에서 밤을 새는 어떤 수녀가 비안네의 얼굴에 앉은 파리를 좇으려고 하자 그가 말렸다. “나와 이 가난한 파리들을 함께 놓아주십시오.”

 

1859년 8월 4일 목요일 밤 2시,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는 잠을 자듯 조용히 자기의 영혼을 하나님께 돌려 드렸다. 그는 41년 5개월 동안 부임하였던 아르스 본당, 오직 한 교회의 사제였다. 그를 존경하는 신자들의 열성은 그의 소천 후 더욱 뜨거워졌다. 비안네 사제는 모든 사제들의 귀감이 되는 참 목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100년 전 평양대부흥운동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우리 한국 교회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기를 소원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비안네 사제처럼 빛 된 삶을 추구하며 진정 회개함으로 거듭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가장 귀히 쓰임 받는 이 나라와 민족, 그리고 위대한 한국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강태형 목사(은총교회)


댓글 '1'

양희철

2012.11.18 15:07:34

감사합니다. 좋은 분을 소개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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