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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급한 명령

로마서 김남준 목사............... 조회 수 2613 추천 수 0 2012.08.26 0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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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18 
설교자 : 김남준 목사 
참고 : 2007-06-10 주일설교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화급한 명령 

2007-06-1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1:18)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바른 지식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대립된다는 생각이나 구약시대는 공의의 시대, 신약시대는 사랑의 시대라고 하는 식의 이러한 구분은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진노하시는 성품은 성경에 의해 풍성하게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에게 있어서 이 진노는 하나님되심을 지켜가는 거룩함과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의와 관련되어 있는데, 의라는 것은 거룩함을 침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방어적인 행동이며, 진노는 심판을 동반하게 됩니다.

 

I. 본문해설

 

우리는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가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사도가 무엇을 말하다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자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해서 하늘로 좇아 난다고 경고하고 있는지 문맥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앞 14절에서 사도는 복음의 위대한 능력, 그것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고,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사도로서, 복음의 사역을 위해 부름 받은 전도자로서 모든 사람들, 아직까지도 주님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복음전파와 관련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문맥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진노, 이 둘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의 진노

 

우리는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보기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A. 믿는 자를 향한 진노

 

불신자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형통하게 그냥 내버려두셨다가 한 몫에 청산하시는 경우가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 반드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분노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를 때리고, 치고, 징계하셔서 그로 인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불순종하고 죄 가운데 거할 때 그 삶은 망가진 삶이며 마음의 평안도 그 안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나아와 정직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다시금 새롭게 하심을 힘입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향한 심각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우습게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게 되면, 그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을 향해 두려움과 떨림을 느낍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면 오실수록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고, 나는 그 발아래 엎드려 있는 이 땅에 속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과 두려움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주 앞에 갈 때에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에서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곤궁한 위기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아버지 앞에 매순간 바르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한 가지 한 가지 헤아리고 행여나 무심코 행한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거나 주의 도를 어겼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대충이 아니라 찬찬히 배워가야 하고 온전함에 이르기를 연습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으로도 주님께 불순종하고 무지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거슬리는 일이 없도록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거룩한 소원을 간직한 착한 성도들로 살아가야 함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B. 믿지 않는 자를 향한 진노

 

오늘 우리가 더 관심을 두고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바로 그 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지 마지막 날에 우리를 파멸로 던져 버리고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집어넣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원래의 위치를 잃어버린 모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난 후 우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오늘 내 마음속에 오시고 이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의 아주 작은 일에도 간섭하시고 내가 그것을 위해 기도할 때 내게 손을 내미셔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어려움 속에서 건져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부패한 인간의 성품, 죄악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깊이 넘치고 우리의 죄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깨끗이 씻길 때 우리는 벅차오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소망과 완전한 평강, 그리고 안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는 어두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고, 광야에 홀로 버려져 있어도 외롭지 않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훗날 만나게 될 것이라는 소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분과 만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놀라운 위로와 세상이 알 수 없는 신앙의 비밀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각(知覺)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의 삶이라는 것에 뭔가 부조화로 가득 차 있고 인간세계 속에 찾아오는 이 많은 불행과 슬픔들은 인간 스스로 감당하기에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생의 허무가 있고 인생의 깊은 비극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생이 절망스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생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자기 나름대로 갈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영혼을 향한 허무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예술이나 학문, 향락 등에 자신을 정신없이 매몰시키며 다가오는 공포를 떨쳐버리려고 했습니다. 또한 시시각각 다가오는 영원한 운명을 외면하면서 보이는 물질문명을 건설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인생의 절망으로부터 헤어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 역사의 한 일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얼마든지 당신 앞에 나아오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을 향한 목적과 그 뜻을 깨닫게 되고 인생의 방향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비밀과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고 자기의 배를 신으로 삼고 섬깁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앞으로 올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아니함으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심판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과 생명의 은혜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잠시 후에는 더 끔찍한 진노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최후 심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때 혹은 자기들이 죽어서 그리스도 앞에 가게 될 때 그들은 끔찍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福音)의 기초입니다. 아니 이 자체가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복음이 설 자리란 없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기쁜 소식을 듣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처지가 처참하도록 불행하게 느껴져야지만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복음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 삶이고 그들을 향해 기다리고 있던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끝날에 농담처럼 들었던 그 복음을 거절했던 순간들을 이를 갈며 슬피 울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장난처럼 들었던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웃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여기에 자기의 영혼의 운명이 달렸다고 하는 사실에 아마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심판이 나타날 때에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엄위(嚴威)하심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심판한 것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항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날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았던 악한 삶들이 이런 진노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원한 불 못과 심판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으로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여 주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III. 복음전파의 화급성(火急性)

 

성경은 우리에게 교회가 힘을 쏟아서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복음 전파에 헌신해야 할 것을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디모데서에서 우리에게 권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남기고 가신 말씀도 너희는 온 천하에 가서 이 복음을 전파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다음에 즉시 사도들이 하기 시작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구원의 이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아무 때나 맘먹으면 할 수 있고, 하다가 말면 할 수 없고, 하는데 까지 하다가 그만두고 집어치우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교회에 위탁된 이 복음은 화급함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자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를 만난 다음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땅과 집과 전답을 다 팔아서 사도들의 발아래 갖다 두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무엇 때문에 땅을 팔고 집을 팔며 재산을 정리해서 사도들의 발아래 갖다 두고 공동생활을 하였습니까? 그들은 단지 은혜를 받았고, 너무나 기뻤기 때문에만 재산을 정리해서 사도들 발 앞에 갖다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인가 커다란 사명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깨달을 수도 없었고 인식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사실을 한꺼번에 인식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압도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빨리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보다 더 중차대한 일을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온전히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이 발 앞에 갖다 두게 만들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렇게 복음 전파에 대해서 화급성을 느끼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듣자마자 즉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살아온 이스라엘에 백성들 위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를 온통 뒤바꿔 놓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몰랐을 뿐이지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A. 경건치 않음과 불의

 

첫 번째로 우리들이 복음의 화급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경건치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는 자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창조한 이 모든 세상의 사람들을 향하여 기대하고 계신 바는 당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아가는 것은 단지 종교적으로 살아간다라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정결하고, 의롭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지식의 빛이 있습니다. 구원이 먼저요, 그 다음에는 지식이 있고, 그 다음에 경건입니다. 예배도 지식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지식이 없는 경건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정확한 빛이 있고, 진리가 있고, 지식이 있고, 그리고 경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건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불의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지만, 자신이 너무 더럽고 불결하며 경건한 삶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경건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경건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좋은’ 그리고 ‘두려움’입니다. 경건이라는 말 자체가 좋은 두려움이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경건의 기초 그 자체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거룩하심을 침범했을 때 우리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는 누구도 경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을 자기 친구처럼 생각하고 하나님하고 장난치면서 놀 수 있을 것 같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경박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경건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없이는 경건할 수 없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건 없이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의하다라는 말은 희랍어로 ‘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으니까 이웃을 향한 의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 증거는 교회 안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불의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으니까 경건치 않음이 됐고 그렇게 경건치 않으니 의가 없는 것이고 그것이 불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고 경건치 않는 삶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B. 복음전파의 근거

 

복음에 대한 성경의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복음 전파가 화급을 다투는 일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지금 사람들이 하나님의 끔찍한 진노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의 손으로 창조한 그 인간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에 대해 적의를 품고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 반드시 형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지극히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당신의 성품을 닮은 세상이 되기를 너무나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이런 것들을 원하시고 계시지만 인간들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 거룩한 요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이 화급을 다투며 복음을 전했던 이유도 복음을 전하면 이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며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를 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복음은 화급을 다투는 복음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복음은 불행한 자들만을 위한 복음이 될 것이고 가난한 자들만을 위한 복음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재미없는 사람들, 세상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이 소외된 사람들만을 위한 복음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을 떠서 왕이나 귀족들이나 권세를 가진 자나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자나 천한 노예나 자유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든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이미 진노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완전한 심판은 지연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그것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노하시는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그 진노하시는 그 하나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의 위대한 능력과 영광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을 찬송할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위대한 권능으로 이 세상을 파멸하고 인간들을 심판하신다면 인간은 그 앞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마치 날아다니는 모기를 손바닥으로 쳐서 잡는 것이나 기어가는 개미를 발로 밟는 것이나 날아다니는 하루살이를 파리채로 쳐서 떨어뜨려 문질러 버리는 것과 같이 그렇게 아무런 항거도 할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는 것이 인간의 상태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복음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IV. 이 시대의 복음전파

 

오늘날 우리들이 복음의 전파에 대해서 화급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각성에 대해서 눈뜨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 안에서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이 복음밖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으며 이 복음을 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실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에 정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운명에 대해서 성경은 정직하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받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영혼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들은 단지 약간 불행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영혼들의 상태에 대해서 이 세상 신이 그들을 어둡게 하며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성령께서 계시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어두움의 세력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피붙이요, 우리의 형제, 우리의 자매라 할지라도 그들이 교회에 나와서 오랜 시간 동안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졌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그들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그러한 구원을 받지 못하면, 회심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들도 동일하게 지금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고, 이후로 그들의 유업은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밖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바로 성경의 정직한 증언이고, 복음의 정직한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전파의 모든 화급성을 여기에서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면서 희석되어 버리고, 참된 복음의 맛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잃어버린 채 가냘픈 껍데기만 사람들에게서 사람들에게로 전해지고, 마지막에는 그 형식과 내용이 죄인을 회개시키고 구원하기에는 아무 내용도 없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출발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런 끔찍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그들 위에 하나님의 심판이 머물러 있다고 하는 이 심각함에서 떠나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 먼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처참한 운명에 대해 가르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죄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파멸에 이르게 할 만큼 끔찍한 것인지를 실감나게 만들어 주는 그 일에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도 기쁘지 않은 것은 구원을 받을 필요조차 못 느끼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을 마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의 선택사항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없어도 되지만 선택으로 하나쯤 가져도 괜찮은 것 그런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많은 전도 방법 속에서 우리는 현실적인 고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도 들을까 말까인데, 주님의 심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전할 때 사람들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겠는가, 황당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치 먹는 사람들도 모르게 사탕으로 껍질을 씌어서 살짝 집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복음전파의 목표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하게 전해 주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난 자신의 영혼의 상태와 인생의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깨닫도록 만들어 주고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 정확히 알게 함으로 자신의 선택을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부여된 가장 커다란 임무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복음 자체의 권위였습니다. 누가 그분보다 복음에 대해서 잘 말할 수 있겠으며 누가 그분보다 더 큰 권능으로 자신이 복음인 사실을 증거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을 사람을 믿게 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나면 사람들은 뚜렷하게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자신이 허물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붙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과 그렇게 믿는 사람을 배척하고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사람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을 나뉘어 놓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때마다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복음을 환영하고 그 복음 때문에 커다란 소망과 구원의 위로를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피난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상이라 배척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고 매도했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복음이 정직하게 전해질 때 자기가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에 더 빨리 복음이라는 피난처로 피해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런 정직한 선포를 들을 때 견딜 수 없어 하면서 그 복음 자체를 거부하고 전하는 사람들을 박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방법으로는 이 복음의 질 자체를 변증시키지 않고는 모든 사람들의 입맛에 맞고 달콤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복음이 꼴깍하고 입으로 넘어 들어가서 구원받게 되는 그런 방법이 만약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셨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사도가 복음을 미련한 도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들에게 십자가가 거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날개 아래로 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부터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헬라인에게나 유대인에게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나 부한 자나 가난한 자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때 믿고 싶으면 믿고, 믿고 싶지 않으면 믿지 말라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있지만 그러한 자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며 고치시는 그 근거도 하나님 당신에게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믿지 않는 자들의 완악함을 녹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야 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제법 그리스도의 복음을 많이 전파해서 꽤 여러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들었던 사람이라면 우리는 만약에 우리가 애쓰고 수고한 모든 순간들 위에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시고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났더라면 우리의 정성을 다한 헌신을 통해 지금 우리들이 거두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열매를 거두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이라는 거룩한 후회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나의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나를 붙드시고 내 말을 사용하셔서 저 듣는 사람의 마음 가운데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고 그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으심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알게 하는 성령의 증거 하시는 역사가 우리의 복음전파에 항상 동행해주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V. 맺는 말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신 이 복음의 심각성을 깨닫고, 오늘 사도가 로마인들을 향해 쓰고 있는 이 마음에 동참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복음을 순수하게 간직하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출발은 우리가 복음을 알기 전까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진노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 위에 머물러 있다고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 그 복음 앞에 정직하게 반응하게 하시며 그 영혼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복음을 전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복음을 전할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부부, 질서와 사랑”(엡5:22-24)을 듣고 실천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믿는 자와 믿지 않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말해봅시다.
3.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누어봅시다.
4. 복음에 대한 성경의 출발은 무엇이며 우리가 복음전파에 대해 화급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복음 전파의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말해봅시다. 그리고 복음이 정직하게 전해질 때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은 무엇이며 신자는 이 복음을 어떤 마음으로 전해야하는지 나누어봅시다. 200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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