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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4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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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5.1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믿음’이 ‘삶’을 이끄는 날이 쉬이 이르기를
창45:4-8
여러분은 삶이 ‘믿음’을 끌고 다닙니까? 아니면 믿음이 ‘삶’을 끌고 다닙니까? 다시 말하면, 무슨 판단이나 결정이나 선택을 할 때 ‘삶’을 따라 그리합니까? 아니면 ‘믿음’을 따라 그리합니까? 이 물음을 좀 더 확장하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습니까?’가 되고, 좀 더 확장을 하면 ‘당신은 자유로운 존재입니까? 아니면 어딘가에 매어서 사는 인생입니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자유로운,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점일 것입니다. 짐승들과는 달리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 말은 그것을 먹을 수 있는 가능성 곧 자유가 있다는 뜻이 되지요. 자유는 인간다움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인간의 행복에 가장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사람이 언제 자유를 느끼는가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의 생을 주도할 때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주도적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어린아이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 보채고 저항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눈치를 보게 되고 어릴 때의 주도성을 포기하게 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철이 든 것이나 성숙한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중 고등학생 시절은 입시 때문에 전혀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기 싫어도 무조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스스로 하는 게 잘 되지 않으니까 학원에 가서 강제로라도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군대에 가면 주도성은 최고로 억압이 되고요. 그저 시키는 대로 복종하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사회에 나오면 20대 중반이 되는데 어릴 때 주도적이고 기가 살아 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얌전한 모습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야 남자다워졌다느니, 의젓하다느니 하면서 칭찬을 해줍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유교의 영향이 강해서 주도적인 것을 매우 억압하고 있습니다. 뭔가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그것을 체면과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무엇을 먹고 싶어도 그냥 먹으면 안 되고 두 번 이상 권하면 먹으라고 하고 그것을 사양지심이라 해서 미덕으로 여깁니다.
여자들의 경우 삼종지의(三從之義)라고 하는 것도 그저 아버지, 남편, 아들을 따르는 것이니 자기가 주도하는 생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가는 것도 남편이 결정합니다. 남편이 가면 따라가고 안 가면 자기도 안 가는 것입니다. 늘 숨어서 살고 생을 주도하지 못합니다. 흔히 주도성을 잃은 이들의 변명을 들어보면, ‘가정이 화목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은 자유에서 오는 것이고 그것은 생을 주도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전거를 처음 배웠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뒤에서 잡아주고 있던 사람이, “이젠 혼자 잘 가네” 했을 때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나 혼자 페달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황홀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처음 운전을 배울 때도 그렇습니다. 사고날까봐 겁이 나긴 했지만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이 무지무지하게 기쁩니다. 운전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사람들의 본성이 주도적임을 말해주는 거예요.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고 자기가 선택할 수 있고 운전할 수 있을 때 사람은 행복을 느끼는 거죠.
주도하는 삶은 외고집이나 방종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행동은 스스로 결정해서 하는 것이지, 남이 시켜서 하거나, 여건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는 매사에 핑계를 대는 사람에게서 피곤함을 느낍니다. 핑계를 댄다는 것은 삶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책임(責任)이라는 말을 보면, 꾸짖을 ‘책’ 자에 맡길 ‘임’ 이죠. 꾸짖을 게 있으면 나에게 하라고 하면서 나서는 것입니다. 그게 ‘책임’입니다. 자기 행위의 결과를 남에게 돌리지 않는 겁니다. 영어의 ‘responsibility’라는 말도 ‘response’와 ‘ability’의 결합입니다. 즉 벌어진 일에 대해서 피하지 않고 반응하는 능력이라는 것이죠. 그게 능력입니다. 주도적이 되는 능력, 그게 책임입니다.
주도적이 못되고 늘 의존적인 사람은 성공도 여건 탓으로 돌립니다. 어릴 때 부모를 잘못 만나서 선생님을 잘못 만나서 …… 그때 체제와 사회 제도가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70-80년대에 사회과학 붐이 일면서 다들 사람들을 빈곤하게 만드는 사회 체제에 눈을 뜨게 되었고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불을 댕겼습니다. 그런 인식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모든 핑계를 사회체제로 돌리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체제가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은 자기 삶에 대해서 책임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절대로 체제가 개인을 행복하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주도적인 인생을 산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이복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이집트로 팔려가서 보디발 장군의 집에 하인이 됩니다. 의존적인 사람 같으면 형들을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면서 세월을 보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든 남에게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기회를 찾고 생을 주도해 갑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에게 아주 신임을 받게 되어 집안일과 재산을 모두 맡아 관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디발의 부인이 그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뻗습니다. 그가 미남이므로 자꾸만 그에게 침실로 가자고 끌고 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기회요, 노예에게는 출세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못 이기는 척하고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생의 진정한 주인이었습니다. 아무리 주인마님의 압력이 있어도, 달콤한 유혹이라고 하여도, 그런 외적인 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행복은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샘처럼 내부에서 외부로 솟아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절대로 유혹이 자기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주인마님 때문에 억지로 할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부인에게 넘어갔다면 잠시는 부인의 사랑을 받았을지 모르나 이용당하고 나서는 버림받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도적이어서 절대로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면서도 신세 한탄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자 간수장이 그를 좋게 보아서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죠. 이렇게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남을 탓하거나 핑계 대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지키고 여건을 변화시키고 주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이 요셉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우린 그가 그저 바로 왕의 꿈을 잘 해몽주어서 운이 좋아서 총리가 된 줄 알지만, 그것보다는 이런 주도적이고 적극적이고 누구에게도 핑계 대지 않는 그의 성품에서 이미 총리가 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생을 주도하고 책임적으로 사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그의 신앙에 있습니다. 요셉의 신앙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에게도 늘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지요(창 26:24, 28; 28:15, 20; 31:3).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잘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켜주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신앙의 맥이 요셉에게 그대로 이어지며 특히 요셉이 고난당할 때마다 그 고비마다 이 말씀이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에게 팔려갔을 때 주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39:2), 그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갔을 때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39: 21, 23). 마침내 그가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을 때 바로는 요셉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41:38). 바로 이 결정적인 선언 이후에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로 발탁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서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해야 하나요? 제3자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요셉의 삶을 해석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가 언제나 마음의 중심에 신앙을 갖고서 흔들림 없이 살기 때문에, 어떤 시련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적극적으로, 희망을 가지고 살므로, 그의 그런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는 것이고 그것을 그런 식으로 서술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반복되는 말은 요셉이 그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사는 신앙인이라는 말이 되지요.
오늘 읽은 본문은 더욱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나중에 그를 팔아넘긴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감정에 치우치고 여건에 좌우되는 사람이라면 그가 취할 행동은 뻔합니다. 이제야말로 그 옛날에 당한 일을 시원하게 갚아줄 기회가 온 것이고, 이제 총리가 되었으니 그 형들은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의존적인 사람이고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그는 자기의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시원하게 복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수의 감정보다도 총리로서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요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대원칙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이 중심이 확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창 45:5-8).
이 얼마나 멋진 말이며, 신앙인다운 말인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팔아넘긴 형들을 이렇게 너그럽게 용서하면서, 그건 형들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라고 해석을 해 버리죠.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저를 이집트 온 나라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창 45:8-9).
그리고 이어지는 말들(8-9절)은 언뜻 보기에 자화자찬의 말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바로의 아버지’ ‘최고의 어른’ ‘온 땅의 통치자’ ‘온 나라의 주권자’ 등으로 부르고 있으니까요. 이는 ‘주님’과 같은 칭호에 해당합니다. 어찌 보면 신성모독으로 걸릴 수도 있을 법한 용어들을 쓰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요셉의 부하 관리인은 요셉의 지시로 자루에 보물을 집어넣었는데 하나님이 넣었다고 말합니다. “댁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댁들의 조상을 돌보신 그 하나님이 그 자루에 보물을 넣어 주신 것입니다”(창 43:23).
이것은 그만큼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는 확신에 찬 삶을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그 확신이 있고 자신의 삶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주도성은 바로 이런 확신과 자부심에서 나온다 할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지요? 요셉이 그런 자신감을 보일수록 그들은 요셉이 어느 때라도 앙갚음을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습니다. 마침내는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하면서 형들을 용서하라는 야곱의 유언을 전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파는 겁니다.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죠? 형들이 책임 있는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다면 이 정황에서 “아우야 잘못했다. 용서해 다오.” 이래야 하지만, 기껏 한다는 말이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비겁하죠.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항상 이렇게 비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50:19-20).
여기에서 요셉의 신앙과 낙관주의가 잘 나타납니다. 자유정신 말입니다. 아무리 자부심이 대단하다 해도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성공은 성공이고 주권은 주권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인간의 나쁜 행동마저도 선하게 바꾸셔서 수많은 생명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고 있지요. 이것은 신앙의 낙관주의 즉, 자유정신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셉이 가장 주도적인 생을 살 게 된 비결입니다. 자기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생을 주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얻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복종이 없이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쉽게 속이 상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너무 쉽게 이성을 잃습니다. 기껏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집에 가서 주식 값 떨어진 것 알고는 속이 상하고, 집값 떨어진 것 보고는 술을 마십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는다고 우울하고, 상사에게 한 마디 들었다고,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고, 앞날이 암울하다고, 입시에 떨어졌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 아무리 들어도 끝이 없는 그런 수많은 이유를 대면서, 쉽게 상처받고 쉽게 흔들립니다. 돈은 안전하게 금고에 보관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는 안전장치가 너무나 허술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외부 여건 때문에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슬프고 술을 마시고 불행하다고 하면서, 자기 연민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실은 전혀 불쌍한 사람도 가엾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해서,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원칙이 없어서,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이리 저리 흔들리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존재입니다.
주도적인 신앙인은 요셉처럼 많은 시련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런 여건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목표가 그의 중심에 있어서 방향을 잃지 않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밝히기 위해 논쟁도 하고 때로 투표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북쪽인지 알기 위해 다수결로 하거나 투표를 하지 않습니다. 나침반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조차 나침반으로 사는 게 아니라 투표로 자기 인생을 살아갑니다. 마음에 저울질을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묻습니다. 나침반을 갖고 살지 않고 늘 투표로 사는 한 그는 하나님이 중심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 삶의 목표가 되고 중심이 되는 사람이 아니죠. 그러나 요셉과 같은 사람은 다릅니다.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외부 조건에 의해 결정하거나, 논쟁이나 투표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나침반 같이 확실한 하나님의 대원칙을 따라서 굳건하게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도적인 삶을 살 있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이게 ‘잘 믿는’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부활이 있는 삶입니다. 나침반을 지닌 주도적인 존재로서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발적으로 자유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요셉과 같은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입니다. ‘부활’은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사망에서’ 자유해진 사건이 부활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자유로운 존재로 도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그런 삶의 숙제를 남겨 두고 있는 것입니다.
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어떤 외적인 여건에 의해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중한 자아가 다치는 일 없이 요셉처럼 승리하길 바라시죠? 그러나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인생을 변론이나 투표, 다른 사람의 권면이나 감정, 분위기나 체면에 의지해서 살지 말고 그리스도라는 나침반을 가지고 살 때라야만 가능합니다. 그게 자기 주도적으로 요셉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때는 ‘삶이’ 믿음을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믿음’이 삶을 밀고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부활의 사람들이 사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믿는바가 여러분의 삶을 주도하는 날이 쉬이 이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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