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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796 추천 수 0 2012.08.27 23: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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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5:31-40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1.5.29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마 25:31-40

‘천국은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이 지어낸 동화다’라고 한 호킹 박사의 말 때문에 말들이 많습니다. 천국이 없으면 종말도 없을 테고, 종말이 없으면 심판도 없을 테니 기독교의 근간이 무너지는 이야기입니다. 호킹 박사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호킹 박사의 말이 맞느냐 아니냐 하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 속에 잘못 이해되고 있는 ‘심판’과 ‘구원’에 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이웃나라 일본에 큰 재앙이 덮쳤습니다. 그러자 어느 목사가 설교에서 말하길, 일본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렇게 개인의 도덕적인 죄에 대한 응징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최후의 심판>이라고 하는 오늘의 본문에서 심판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적 죄를 응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도 없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심판은 오직 어떤 사람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좌우될 뿐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습니다.‘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힘없고 가진 것 없고 소외된 사람들이죠. 그들은 다른 곳에서는‘작은 사람들’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작은 사람들’의 최상급입니다.

마18:6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 깊숙이 잠기는 편이 낫다.”

시쳇말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팬다.”는 말이 있습니다. 심한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더 심합니다. 소가 돌리는 연자 맷돌을 본 사람은 그게 얼마나 큰 돌덩어리인지 알 것입니다. 그냥 물에 빠져라 해도 독설인데, 그 큰 연자 맷돌을 달고 빠지라니, 이보다 더 심한 독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은 작은 사람 하나를 소중하게 여긴 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약한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들 간에 제사에 바친 고기를 먹으면 되느냐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은 음식일 뿐 문제가 안 된다고 했지만 어떤‘약한 신도’들은 그 음식이 걸림돌이 되어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경우에는 형제를 걸려 넘어지지(죄짓지) 않게 하기 위해 평생 고기를 안 먹겠다고 한 것입니다. 약한 성도들은 대개 배우지 못하거나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18장의 잃은 양의 비유도 작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18:10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이와 같이,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작은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기 쉬운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대개 못 배우고 못 가지고 옷도 잘 못 입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그들의 천사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천사들이 늘 아버지의 얼굴을 뵙고 있으니, 우리가 작은 사람들을 업신여기면 즉시 천사가 아버지에게 보고한다는 뉘앙스입니다. 잃은 양 비유는 사실은 이 작은 사람들을 찾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끝에서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막9: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보다,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사람 대신에 어린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어린아이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으니 가장 약한 사람의 대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하나님과 일치시키는 것은 잠언이나 유대문헌에도 나옵니다.

잠19:17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주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주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나의 아이들아, 너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면, 나는 너희가 마치 내게 먹을 것을 준 것처럼 여길 것이다”(신 15:9에 관한 미드라쉬적 해석)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최후의 심판에서의 선언과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내용만 비교하면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먹을 것,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는 것은 유대문헌에도 나오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는 것만이 마태복음에만 독특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잠언이나 유대교 문헌은 교훈적이지만, 최후의 심판에서는 종말적이라는 것입니다. 교훈적이라는 것은 내가 이런 선행을 하면 복을 받을 것임을 전제하는 겁니다. 하지만 종말적인 경우에는 그런 반대급부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이 심판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장 큰 특징도 그것입니다. 심판 때에 의인이나 의롭지 않은 사람이나 하나같이 그 심판 선언에 대해서 펄쩍 뛰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우리가 언제...?”이 말이 그들이 쉬지 않고 하는 말입니다. 그게 상 받을 일이라는 사실도, 그게 심판받을 일이라는 것을 전혀 예측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사람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께서 현존하신다는 파격적인 사고는 우리에게서 매우 감상적인 우화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추운 겨울날 거지에게 옷을 벗어주었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화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또는 자매가 있는데 평범해 보이는 이웃집 남자에게 언니는 쌀쌀맞게 대하고 동생은 친절하게 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재벌2세였다는 식의 연속극들이 있습니다. 평소에 누구에게나 잘 해주면 복을 받게 된다는... 마치 흥부가 한낱 미물인 제비에게 잘 해 주었더니 나중에 복을 받는다는 식의 우화에 기초를 두고 있는 거죠.

은연중에 오늘 우리들은 이 최후의 심판 이야기도 그런 우화적, 감상적인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남는 것은 도덕적 교훈뿐입니다. 흥부놀부 이야기와 비슷해진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긴장도 없고 나의 실존을 뒤흔드는 도전도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그런 도덕 교훈이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하는 예측불허의 심판,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 발휘되는 심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제니 저제니 하고 그 날짜를 아는 양 하는 것도 틀린 것이요, 이렇게 하면 상을 받고 저렇게 하면 개털벙거지를 받는다는 따위의 이야기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예측불허로 다가서는 심판은 나의 도덕이나 상식도 나의 실존이나 신앙도 업적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심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마7:21-23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여기서 온갖 종교적 고백이나 행위 또는 이적까지도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못된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구원은 보장될 수 있는 저금이 아닙니다. 종말적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구원의 관건이 되는데, 그것은 인자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들이 그런 의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도 하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어떤 보상을 받거나 천국 가기 위해서,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이유에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들이 불쌍해서, 마음이 움직여서, 아무런 대가나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작은 사람들을 먹이고 마시게 하고 입히고 영접하고 감옥을 찾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종말적 삶이요 주 앞에서 상을 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한 가장 왜곡된 상은 심판을 염라대왕 앞에서 지옥행이나 천국행 판결을 받는 장면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교의 협박성 가르침인지는 몰라도 최후의 심판이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회심곡>이라는 노래를 보세요. 온통 염라대왕 앞에서 시부모 시동생들한테 한 대로 심판을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도덕적 업적을 평가하는 것이요, 정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자의 최후의 심판은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도덕적 업적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접근입니다. 자기가 의인인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하고 최고의 칭찬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떠도는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업신여김 받고 소외되어 있던 사람, 그래서 자기는 운 없고 재수 없고 저주 받은 생이라고 여기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입니다. 인자가 자기 자신들 그들과 동일시하는 현실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크나큰 은혜의 선물입니다. 분명 그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의인인 줄도 모르고 의롭게 사는 그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심판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것을 다 갚고도 남는, 하나님의 정의요 구원입니다. 그것은 아무런 값없이 은혜로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중앙역>이라는 영화는 진정한 사랑과 화해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괴팍하고 자기만 아는 노처녀 도라는 오늘도 리오 데 자네이루 중앙역 한구석에 삐그덕거리는 책상을 놓고 손님을 기다립니다. 한때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지만 지금은 가난하고 글 모르는 사람들의 편지를 대신 써주며 연명하고 있습니다. 주절주절 읊어대는 사람들의 청승이 신물 난다는 듯 휘갈겨 쓴 도라의 편지들. 순박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그리움이 담긴 그것들을 도라는 우체통이 아닌 쓰레기통으로 보내 버립니다.

어느 날 한 모자가 찾아와 아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다음날 어머니 아나는 갑자기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고아가 되어버린 아들 조슈에는 중앙역 주위를 맴돕니다. 도라는 갈 곳 없는 조슈에를 입양기관을 사칭하는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TV를 장만합니다. 그러나 TV를 보며 뿌듯해하던 마음은 어느새 죄책감으로 바뀌고, 날이 밝자마자 도라는 필사적으로 조슈에를 구해냅니다. 무작정 조슈에와 함께 리오를 도망쳐 나온 도라는 미안한 마음에 조슈에의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조슈에는 자신을 팔아넘긴 도라가 사기꾼 같아 거부감을 보입니다. 도라도 조슈에가 점점 짐처럼 부담스럽습니다.

이 영화는 이른바 로드 무비입니다. 거친 바람 부는 사막, 끝없이 뻗은 길 위로 두 사람이 가면서, 어느 샌가 미움이 믿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도라는 자신의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평생 미워하며 살아왔습니다. 조슈에의 아버지도 아마 술주정꾼에 무정한 사람일 거라고 상상을 합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세상 끝에서 그들이 발견한 건‘아버지’가 아니라, 자신도 알지 못했던 자신의 참모습이었습니다. 조슈에는 끝내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지만 이복형들을 만나면서 형들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되고 그들을 통해서 아버지가 아나와 조슈에를 그리워하고 찾으려고 했음을 알게 됩니다. 도라는 조슈에를 통해서 오랫동안 잊어 온 자신의 따뜻한 본성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오랫동안 미워해 온 자기 아버지와도 화해하게 됩니다.

도라는 우연히 맡게 된 조슈에가 짐 같고 애물단지 같았지만, 한 가닥 인정 때문에 차마 그 아이를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도라는 어쩌면 난생 처음으로 그 불쌍한 아이를 위하여 모험도 하고 시간도 돈도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통하여 도움을 받은 사람은 조슈에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슈에를 통하여 도라가 비로소 인간이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의 본문과도 서로 통하는 데가 있죠? 세상 사람들은 종교나 위대한 현인이 사람들을 구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기 쉽지만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지독히도 속만 썩이는 애물단지 같은 사람들이 자기를 구원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그런 위대한 사람이나, 설교나, 기적이 일어나는 멋진 집회가 아니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 하나에게 잘 대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업신여기거나 무시해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 우리를 구원하는 작은 예수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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