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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깸

로마서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233 추천 수 0 2012.08.27 23: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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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롬13:11-1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1.7.3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삶과 깸
롬13:11-12

오늘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는 것’과 ‘깨어 있는 것’둘 중에 어느 것이 더 비중이 크겠습니까? 이 물음은 이 설교의 내용이기도 하고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롬 13:11-12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사도는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다”고도 합니다. 이 말에는 기독교의 종말의식을 깔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간을 양적으로 계산하는 대신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의미 있는 사건이 일어나는 때로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사는 것’보다는 ‘깨는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는 뜻이지요. 이런 종말 의식은 필연적으로 생명 이해를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종말 의식이 없는 사람은 생명을 일정 기간 동안 소모해가는 에너지 같은 것으로 이해하겠죠. 그러나 종말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생명은 ‘살기위해서’가 아니라 ‘깨기 위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5:45 이하에서 바울은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을 대조합니다.“첫 사람은 땅에서 났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다”(47절).“우리가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49절). 여기서 두 가지 인간, 두 가지 형상, 두 가지 생명이 대조가 되고 있지요?. 첫 번째는 첫 사람 아담의 생명입니다. 이것을 ‘비오스’(Bios)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생물학적인 생명입니다. 그것은 늘 소모되고 쇠퇴하는 성질이 있어서, 공기나 물이나 음식 등을 통해서 유지되는 생명입니다. 그와같은 조건이 없다면 생명도 끝이 나는 유한성의 생명들이죠.  두 번째는 마지막 아담이 주는 생명입니다. 이것을 조에(Zoe)라고 합니다(고전 15:45). 그것은 인간이 자연적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적 생명입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 자연 세계 전체를 만들어 낸 생명이죠.

기독교의 이러한 독특한 생명관은 삼위일체 이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라 할 때 위(persona)는 가면, 인격이라는 뜻입니다. 즉 세 개의 인격이 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정육면체가 여섯 개의 정사각형인 동시에 하나의 정육면체인 것과 같습니다. 1차원이 선의 세계고 2차원이 면, 도형의 세계라면, 3차원은 입체, 정육면체의 세계입니다. 1차원만 인식하는 존재는 선이 네 개면 그 네 개이지 그게 하나의 사각형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차원만 인식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는 면이 6개면 6개지 그것이 하나의 정육면체가 된다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마가지로 우리도 삼위일체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우며 이런 은유를 통해 상징적으로 이해할 뿐이죠.

어떤 성도가 기도한다고 합시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대상(목표)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 이런 기도를 하게 하신 분(원동력)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즉 자기 속에 계신 하나님(성령)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참된 지식은 하나님이셨다가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옵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지금 옆에서 기도를 돕고 계시며 그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죠. 이처럼 우리가 골방에서 기도할 때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적인 생명 전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좀 더 높은 종류의 영적 생명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고 있는 동시에,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헬라철학이나 윤회를 강조하는 종교에서는, 물방울이 바다에 흡수되듯이, 개인 영혼은 신적 존재에 흡수된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 속에 이끌려 들어가면서도 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보는 유일한 종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막연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죠. 그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그가 죽은 것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작은 공동체를 이룬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들 안에도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인도해 주셨고, 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살펴본 끝에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의 정의에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의 첫째 위를 성부, 둘째 위를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첫째 위가 둘째 위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만든다’고 하지 않고 ‘낳는다’는 한 것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첫째 위가 생산하는 것이 그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성부가 성자보다 먼저 존재했던 것 같은 인상을 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는 선후관계가 없기 때문이죠.

성부와 성자의 관계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관계보다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사랑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기뻐하시고, 성자는 성부를 공경하십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할 때 이미 하나님 안에 적어도 두 인격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거죠. 사랑이란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에게 품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생하면서도 역동적인 사랑의 활동이 하나님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이 활동이 모든 것을 창조해 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역동하며 약동하는 활동, 생명, 일종의 드라마에 가까운 분입니다. 그는 일종의 춤에 가까운 분입니다(내재적 삼위일체).

이 삼위 하나님의 생명이 보여주는 춤, 드라마, 또는 양식 전체는 우리 각자의 생명 속에 재현되어야 하는 거죠(경륜적 삼위일체). 우리 각 사람은 그 삼위일체 양식 속에 들어가야 하고 그 사랑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외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따뜻해지려면 불 가까이 가야 하듯이 말입니다. 몸을 적시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하며,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 존재의 중심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능력과 아름다움의 거대한 분수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물보라에 젖을 것이고, 다가가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메마른 상태에 머물 것입니다.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겐 조에, 즉 영적인 생명이 없습니다. 비오스, 즉 얼마 못 가서 소모되어 사라질 생물학적 생명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만든 생명이 아니라 낳은 생명,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생명을 우리가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에 동참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그가 성부를 사랑하시듯 성부를 사랑할 것이며,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가진 이 생명을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상태는 낙관적이 아닙니다. 지금 이 두 종류의 생명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실제적인 적대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 생명은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남들이 다 자기만 위해주고 높여주기를 바랍니다. 다른 생명들을 이용하며 전 우주를 착취하려 듭니다. 특히 이 생명은 혼자만 있고 싶어 합니다. 즉, 자기보다 더 좋거나 강하거나 높은 것,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기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피하려 합니다. 이 생명은 영적인 세계의 빛과 공기를 두려워합니다. 자연적 생명은 영적 생명에게 일단 붙잡히면 이 모든 자기중심성과 아집이 끝장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하나님 안에 있는 둘째 위격인 성자가 몸소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진짜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전 우주를 창조했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원한 존재가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아기가 되셨고, 그보다 먼저는 한 여성의 몸 안에서 태아가 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모든 사람이 원래 갖추었어야 할 모습을 실제로 갖춘 한 인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창조된 생명이, 태어난 생명으로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변화된 한 인간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적 인간은 그 분 안에서 신의 아들 속으로 완전히 들어 올려 졌습니다. 인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곤경은 자연적 생명이‘죽는다’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번번이 자신의 인간적 욕망을 죽이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삶’을 버리고 ‘깸’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난, 가족들의 오해, 가까운 친구의 배신, 치안대의 야유와 학대, 고문과 처형을 몸소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 있는 인성은 신의 아들 됨과 연합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이렇게 죽임을 당한 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만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도 같이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진정한 인간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 전체에 끼친 효력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 창조된 존재에서 태어난 존재로 변화되는 일, 일시적인 생물학적 생명에서 시간을 초월한 영적 생명으로 바뀌는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인류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물론 우리 각 사람은 그 구원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하죠. 그러나 우리 스스로 도저히 할 수 없는 부분, 정말 어려운 일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우리 힘으로 영적인 생명을 향해 올라가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생명은 이미 인류에게 내려왔습니다. 그 생명으로 충만히 차 있는 분,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신 분에게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만 하면, 그가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예수를 만나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니고데모입니다(요 3:3). 오늘 본문 14절에서는 이것을 달리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과 영어성경))을 보면, 이 말은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뜻입니다. 옷은 그것을 입은 사람의 신분을 말해 주는 것이죠. 옷은 사람을 가장하게 해 주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그리스도를 흉내내라”“그리스도로 가장하라”는 뜻도 됩니다.

주기도문 첫 문장“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 행세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분장을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가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두려움과 소원, 욕심, 질투, 자만 등 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모아 놓은 꾸러미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로 분장한다는 것이 어떤 점에서 대단히 파렴치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건 좋은 의미의 가장입니다. 친밀감을 보여야 할 사람에게 친밀감이 생기지 않을 때, 최선의 방책은, 마치 자기가 실제보다 더 친절한 사람인 양 친밀한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얼마 후 전보다 큰 친밀감이 정말 생겨납니다. 어떤 소질을 기르려면 그 소질이 벌써 생긴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아이들은 군인놀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어른 행세를 합니다. 그러면서 단련도 되고 이해력도 높아져서 실제로 어른이 되면 그 일을 잘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아기가 말을 배우기 전에도 마치 말할 줄 아는 아기를 대하듯이 함으로써 말을 가르칩니다.

제복도 가장을 하게 해 줍니다. 육사 생도는 제복을 입으며 그 제복에 어울리게 행동하고 훈련합니다. 그러다 보면 실제로 자세가 반듯하고 정신도 단련된 사람이 됩니다. 멀쩡하던 신사들이 예비군 훈련에 참가하여 군복을 입게 되면 갑자기 길에 방뇨를 하는 등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사람은 어떤 옷을 입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가 비뚤어지게 나면 치아 보정기를 하고 다녀야 합니다. 우선은 보기 싫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틀에 맞게 이가 고르게 자리 잡지요. 이렇게 이가 틀에 의해 교정을 받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에 의해 교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제복에 맞추어 나를 꺾어야 합니다. 이것이“그리스도를 입으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은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의 마음을 아는 여자가 그를 사랑하여 키스를 할 때 그는 야수의 탈을 벗고 멋진 왕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을 때 야수의 탈을 벗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다른 말로“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갈 4:19). 또는“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빌 2:5).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자신에게 허용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겠죠? 본문 12절에서 바울은“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자”고 한다. 오늘날 말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입지 못한 사람들, 말로는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잘 다니고 직분도 맡고 있으면서도 뒤로는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헛된 짓들을 거의 다 따라서 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입지 않고 세상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 세상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비오스의 생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노력으로는 안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종의 인간, 즉 조에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액자에 걸어두거나, 가끔 보고 참조하거나, 훌륭한 스승님으로 모셔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속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내 마음이 되셔야 합니다. 성령을 그저 짐작으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충만하게 받고 은사를 받고 내가 변화되도록 받아야 합니다. 나는 비록 악하고 부족한 비오스의 생명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복을 입어서, 그 보정기 틀에 나를 교정해서, 비오스의 생명을 죽이고 조에의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서, 영원한 생명을 풍성하게 누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게’중요한 게 아니라 ‘깨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더러 ‘비오스’의 생명이 아니라 ‘조에’의 생명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는데 관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깨는데 집중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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