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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5: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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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7.3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첫 열매는 곧 [부활]을 말합니다.
고전 15:20-26
어릴 때 부모님은 옥수수 농사를 지었습니다. 지금의 옥수수는 간식거리거나 사료용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옥수수 농사는 주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식구들은 얼른 옥수수가 익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첫 옥수수를 솥에 찌는 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옥수수를 무쇠 솥에서 꺼내 양푼에 가득 담습니다. 저희 7남매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그것을 지켜봅니다. 얼른 먹고 싶지만 부모님은 그걸 가지고 밭 가장자리로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옥수수 밭 돌무더기에 양푼을 놓고는 이렇게 기도를 올리라고 했습니다. “금년에 거둔 첫 열매이니, 이것 잡수시고 까막까치며 깜부기 좀 막아주세요.” 그렇게 첫 열매를 누군가에게 바친 후에야 우리는 옥수수를 먹을 수 있었지요.
‘첫 열매’(aparche)란,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맨 먼저 드리는 물건입니다. 그 후에야 나머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첫 열매’는 곡식의 열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떤 일을 맨 처음으로 해내어 다른 사람들도 그 일에 결과 또는 과정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 최고봉인 해발 8848m 에베레스트에 가장 먼저 오른 산악인은 에드문드 힐러리라는 분입니다. 1953년 5월29일 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에베레스트에 도전했고 정상을 밟았죠. 그 때 그의 행위는 ‘첫 열매’가 됩니다.
예수께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복왕이라 불린 알렉산더 대왕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도, 죽음만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정복할 수 없어서 늘 불안해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최초의 에베레스트 정복자인 힐러리도 몇 년 전에 88세의 나이로 뉴질랜드에서 사망했습니다. TV를 켜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좋은 음식 이야기, 몸에 좋은 약 이야기, 운동 이야기가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는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복했습니다. 인생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의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우리들도 죽음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지요. 전통적인 교리적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을 선언하고 그저 믿기만 하라고 합니다. 내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활이 어떤 부활인지는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저마다 마음대로 상상하면서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일 많이 상상하는 것은‘영혼의 부활’입니다. 육신은 땅 속에서 미라가 되고, 화장터에서 재로 변하지만 영혼만은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철학이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영육의 이원론이지 기독교의 부활론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이 믿고 말하던 방식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활이란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고, 다만 의미의 부활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부자인 네프류도프는 하녀 카츄샤를 범하고 버리지만, 나중에 그 여인이 자신으로 하여 창녀가 되고 살인범이 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가게 된 것을 알고, 회심하여 자기 재산을 다 농노들에게 나누어주고 카츄사를 따라가서 결혼함으로써 그의 영혼이 부활한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가 똑같은 상황에 처해서 창녀인 소냐의 도움으로 부활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모두가 부활을 ‘회심’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것은 지식인들이 좋아합니다. 나름대로 매력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이런 부활은 의미상으로만 있는 것이고 실제는 없는 것이라는 회의주의를 잉태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누가 누구를 살해해도 영원히 비밀로 묻히면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고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렇게 인생은 지금껏 삶과 죽음의 부조리 속에서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시대 갈릴리에서도 이런 삶의 부조리를 겪는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중에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 예수를 만나서 구원의 기쁨을 맛본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들은 예수와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사는가 싶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그 예수를 가장 잔혹한 반역자에게 본보기로 집행하는 십자가형에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그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예수는 죽어야했는가? 오늘날 우리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나중에 바울을 위시한 신학자들이 해석하고 교회가 고백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 그들은 어떤 의미로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황당하고 가슴 아프기만 했었습니다. 의미는 아주 나중에 겨우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건 당시의 당사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예수가 부활했다”는 외침이 우렁차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내가 예수를 뵈었다”고 말했고, 또 어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였습니다.
로마의 권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죠. 갈릴리 청년 하나쯤 십자가에 못 박아서 민중들을 협박하는 일은 그들이 늘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남은 자들은 대개 겁먹고 도망가거나 부인하거나 변절하여, 더 효과적으로 군중을 진압하고 협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지심으로써, 그들은 의로운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하잘 것 없는 깡패 집단이요, 약소국을 짓밟고 착취하는 불한당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때문에, 그들의 권력은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힘이면 다 되고, 산 놈이 최고라고 하는 논리도 이제는 먹혀들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은 예수가 산 로마를 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을 죽이면 예수가 천리만리 도망갈 줄 알았는데 더 큰 위력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죠.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 교회는 지리멸렬하고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더 큰 세력으로 우후죽순처럼, 진달래처럼 여기저기서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부활하셨다”는 외침이, 예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적진 한복판인 예루살렘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부활 소식입니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과 아울러 부조리함을 폐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과 최후 승리에 대한 묵시적 전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지주의나 그리스철학의 이원론과는 아주 다릅니다. 23,24절이 그걸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23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24 그 다음에는 마지막이 올 것인데,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입니다.
닐 엘리엇(Neil Elliott)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예수의 죽음은 “피조물을 얽어매고 있는 모든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해방 전쟁’의 시작”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를 예고하며, 권력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십자가형을 당한 그리스도의 부활이다”고 말 합니다.
바울의 묵시문학적 비전은 정치적 차원만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을 극복하는 더욱 깊은 삶의 차원을 갖습니다.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 입니다”(26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권세에 굴종하고, 로마 황제만이 최고로 알고, 힘 있는 자가 약한 사람들을 강제로 내리 누르고 지배하고 식민 통치하고 세금을 걷어가고 그러는 것이 통치와 권세요, 그것만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권력과 권세와 통치를 폐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권세, 새로운 인간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21-22절)
두 가지 인간형이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아담은 범죄한 사람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가 나타났다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장 부조리한 그 십자가가 승리의 상징이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가장 무력하게 못 박힌, 거리낌이요 어리석음인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승리가 되고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었습니다. 그 신비는 믿는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죄가 더 이상 나를 얽어매지 못하고 죄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세가 더 이상 무섭지 않고 죽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늘 죽을까봐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고, 죽기가 무서워 권력자들에게 굴종하고, 죽는 사람만 억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심으로써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고 자신 있게 외치게 되었습니다.
첫 열매가 처음 드리는 제물이며, 그것 때문에 나머지를 쓸 수 있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일들은 오늘 우리에 의해서 계속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본래적 의미가 다시 산다가 아니라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갈릴리 사람들이 일어나서 예수 부활하셨다고 외친 것이며, 끝난 줄 알았던 예수의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라는 허무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승리한 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오늘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이 일으킴을 받는 현실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시체가 살아난 몸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시체 가운데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살아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이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이유 없는 고난이 많습니다. 부조리함도 많습니다. 그 고난을 견디면서 절망에 빠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다가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 증언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부조리한 십자가를 지셨지만 부활하셔서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 소망이 되셨다고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축하하는 잔치를 조촐하게라도 열면서 주님이 이룩하신 나눔 공동체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그저 밥 한 끼 먹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계속해서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려면 무덤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의 무덤은 비었고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나눔 공동체가 있는 곳에 계십니다. 바울이 어디 귀신으로 나타난 예수를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단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를 직접 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고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우리 성암교회를 통해 ‘내가 주님을 만났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누군가의 ‘첫 열매’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정복하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님으로부터 와서 주님께로 돌아갈 믿음을 갖고 삽니다. 부조리한 일을 당하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반드시 우리가 부활하고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허무주의에 빠지지만, 그리스도를 첫 열매로 간직하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사자 밥이 되고 고난당한 사람들이 운이 없어서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살아나는 묵시문학적 부활의 비전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 그 다음은 죽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변화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어도 반드시 부활하고 살아도 반드시 변화를 받아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다스리며, 그때에 부활하고 죽은 자들의 억울한 사정이 신원되는 날이 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영원할 것 같은 모든 통치와 권세와 권력을 폐하시고, 최고의 심판관이 되셔서 수고한 이에게 면류관을 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파노라마 같은 죽음의 극복과 부활의 신비를 한 그림으로 해 마다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맥추절’입니다.
보세요! 겨우내 얼어붙어서 생명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대지로부터, 봄이 되어 땅을 갈고 씨앗을 뿌려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싹터 자라 열매 맺는 것을 볼 때, 그 열매들을 다시 거둬들여 나의 양식으로 삼을 때, 우리는 거기서 어떤 기독교적인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단순한 육체의 양식을 위한 소출에 대한 탄성과, 감동, 그리고 고마움뿐입니까? 그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예수를 모르는 이방 사람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토의 대지가 우리에게 내 보이는 그 첫 열매를 보면서 ‘죽음과 부활’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읽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 소유욕의 물질적인 고백과 표현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맥추절은 거개의 교회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이 먹고 살 수 있는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제가 어릴 때 옥수수 양푼을 들고 밭 가장자리에 가서 뭔지 모를 대상에게 빌던 그런 ‘욕망을 위한 감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뭡니까? 오늘 우리가 하는 맥추 감사는, 소출과 소득이라는 유물론에 연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장차 나의 부활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내 인생이 끝나지 않음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런 부활의 확신과 고백이 우리들의 삶에 지속됨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일들을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고, 그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감격과 은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맥추감사 제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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