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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호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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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2.6.17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3) 호세아의 하나님
호세아14:1-9; 6:1-3
호세아 선지자는 특이한 삶을 산 선지자입니다. 호세아가 살면서 목회했던 시대는 어느 때인가 성경을 보십시오. 1장 1절 말씀입니다. 북 이스라엘 13대 왕인 여로보암 2세(B.C. 793-753) 때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 출신으로 북쪽에 가서 말씀을 전한 선지자이고 호세아는 북쪽 출신으로 이스라엘에 말씀을 전한 선지자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가장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성장한 때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할 때 남쪽 왕은 누구였습니까? 네 명이 나옵니다. 10대 웃시야왕(B.C. 791-739) 11대 요담, 12대 아하스, 13대 히스기야(B.C.715-687) 때까지입니다. 여로보암 첫해부터 히스기야 마지막까지 살았다면 107살을 산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말씀을 보면 그렇게 오래 살지 않았을 것 같고 여로보암 통치 말기(B.C.755)부터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왕(B.C. 732-722) 때까지 활동한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앗시리아에게 망하기 한해 전인 B.C. 723까지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 때 이스라엘 왕은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왕(19대) 6명이 통치를 했습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6명이나 통치했으니 얼마나 나라가 격변기였는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 왕이 6개월 통치하다 살룸에 의해 살해됩니다. 살룸은 1개월 통치하다 므나헴에 의해 살해됩니다.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라 줄일 정도로 악한 왕 므나헴은 아들 브가히야에게 왕위를 물려주지만 불과 2년 통치하고 그도 베가에게 죽임을 당하고 베가는 호세아에게 암살을 당합니다. 그리고 B.C 722년 나라가 3년 포위되었다가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진짜 왕은 하나님인데 자기가 왕이 되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관계)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일)를 알아야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얼마나 권력 투쟁이 벌어졌습니까? 정치, 사회적으로 권세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음모를 꾸미며, 강도와 살인까지도 일삼았습니다(호4:2, 5:1∼14, 7:3∼7). 여로보암이 죽고 난 다음 거의 이십 년 동안은 왕권찬탈을 위한 피 비린내 나는 쿠데타가 연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호 7:3∼7). 또한 쿠데타에서 승리하여 왕권을 잡은 자들은 그 나라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이웃 나라들과 동맹을 맺거나 조공을 바침으로써 왕권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호 7:11, 8:9, 12:1). 하나님이 대리 통치자로 세웠는데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였고,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며 세속적 이기심과 도덕적 타락에 빠져 들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지적한 것처럼 소수의 권력 있는 정치가들과 경제적 부호들은 서로 긴밀하게 유착한 가운데 불법을 행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재산을 겁탈하고 착취하였습니다(암2:10, 15; 5:7∼9). 법관들도 뇌물을 받음으로 의인을 괴롭히는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부당하게 번 돈으로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을 사들이며, 날마다 술과 노래와 비싼 음식을 동반한 채 향연을 벌이는 향락적인 삶에 빠져있었습니다(암 6:3∼6). 그들은 주위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고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 대해 동정의 마음이 조금도 없는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회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어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과 부정은 극대화되었습니다.
국가적으로 총체적 부패에 빠져 있을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호세아를 불렀습니다. 독특하게 부르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누구와 결혼을 하라고 합니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창녀입니다. 성창입니다. 바알 신을 섬기는 창기입니다. 호세아를 이렇게 결혼시켜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호세아가 만난 하나님, 호세아가 믿는 하나님, 호세아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호세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1.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읽은 말씀 6장 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Let us return to the Lord.)”라고 말씀하십니다. 14장 1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불의함으로 엎드러졌다는 것입니다. 수송아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입술의 열매, 회개가 중요한 때라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보다 힘 있는 나라를 의지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했던 교만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겼던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죄가 무엇입니까? 호세아의 9가지 설교 중 8가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십니까?
그 내용이 4장부터 13장까지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 지식이 없음을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십니다(4:1-5:4; 4:6) 4장 6절을 보십시오. 특히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이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음란한 마음이 가득차 있습니다(5:4). 율법을 읽지 않습니다.
둘째는 교만을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십니다(5:5-6:3) 5장 5절을 보십시오.
셋째는 인애가 없음을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합니다(6:4-7:7)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6장 8-9절을 보십시오. 제사장이 도피성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살인합니다.
넷째는 세속화를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십니다(7:8-8:14) 애굽과 혼합되고 앗수르와 혼합됩니다(7:8, 11) 제사장 나라가 되라고 불렀는데 세상에 흡수되고 맙니다.
다섯째로 부패한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십니다(9:1-17; 9:1)
여섯째로 하나님을 버리고 다윗의 집을 배반한 것을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10:1-15; 10:10; 10:5,7)
일곱째로 인본주의적 삶을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십니다(11:1-12:14; 11:6)
여덟째로 우상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길 원하십니다(13:1-16)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의 범죄로 하나님은 징계를 한다는 것입니다.(5:14) 전쟁이 벌어지면 이제까지의 경제적 부도 평안도 다 잃어버립니다. 그의 번영은 전무후무하리 만큼 극에 달했습니다. 물질이 풍부하면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물질의 부요에 따라 나라의 부패도 극에 달하였습니다. 호세아 4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교만하였습니다.(5:5) 그들은 인애(긍휼, 자비)가 없었습니다.(6:4)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았습니다.(7:8) 그들은 성적으로 타락하여 버렸습니다.(9:1)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들의 삶은 우상으로 가득하였습니다.(13: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 물질을 가지고 퇴폐적인 향락에 취합니다. 그뿐입니까? 어렵고 힘든 사람을 외면합니다. 가난할 때는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열심히 기도하다가도 어느 정도 살만하면 이제 세상 향락에 취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끼리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물질 우상을 숭배합니다. 쾌락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인본주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민족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는 그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너희들이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쓸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택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신에 암으로 가득 찼습니다.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방사선 치료나, 항암제로 되지가 않습니다. 너무나 죄악의 덩어리들이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방법으로 쓸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홍수로 불로 청소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살길이 있다면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남북이 분단된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역사에는 세분의 장로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첫 장로 대통령 때 6.25를 만났습니다. 두 번째 장로 대통령 때 IMF 경제 위기를 만났습니다. 세 번째 장로 대통령 때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호세아 시대와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역사를 섭리하고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빅뱅되고 진화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과학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과학이 아닙니다. 증명된 과학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신앙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시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자연 법칙을 만들어 그 법칙을 어기면 추락합니다. 붕괴됩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하나님과 사회법칙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 때 인간을 정상적인 기능을 하게 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 날도 선악과를 따먹어야 살고, 선악과를 따먹어야 지혜롭고 선악과을 따먹어야 왕으로 살며 풍요가 보장될 것처럼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비극을 보십시오. 해방이 되자 당시 세인들의 시선을 받았던 사람은 김구, 여운형, 조만식, 이승만 김일성 다섯이었습니다. 다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조만식, 이승만은 장로였고, 김구 역시 신앙인이었습니다. 김일성도 어머니가 교회에 다녔습니다. 여운형은 전도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대표선수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분열되고 이전투구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6.25라는 최대의 국난을 당하였습니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 교회는 비참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3년여의 전쟁에서 4백60만 여명의 동포가 죽거나 다치고 실종됐으며, 8천 3백여 억 원의 재산피해가 났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아직도 1천만 명이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남한의 경우 기간산업인 섬유공업의 시설 60%이상, 발전. 변전시설의 40% 이상이 파괴돼 버렸습니다. 또 40만 채의 집이 완전히 부서졌으며 학교 1만 5천개, 관공서 1만개, 의료기관 1천여 개 등이 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한의 물적 피해액은 4천 1백억 여원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당시 연간 국민 총생산액의 두 배에 이르는 액수입니다. 북한은 피해액이 구화폐로 4천 2백억 원에 이른다고 공식 발표했었습니다. 이는 49년의 북한 국민생산액의 6배에 이르는 규모입니다. 물적 피해 보다 더 깊은 것은 정신적 피해였습니다. 전쟁이 빚은 적대감은 민족의 정체성마저 흔들어 놓았고 가족 공동체가 무너지고 불신과 이질화가 깊어지면서 운명 공동체적인 민족연대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6.25 때 우리 한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은 60달러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힘있는 자들은 사치와 방탕으로 살아갔습니다. 좌우익의 대립이 심각하였습니다. 1946년 10월 1,2일 대구 폭동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김일성은 침략 준비를 완료하고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와 지지를 받고 수년 동안 전쟁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때 북한군의 준비 상황을 보면 병력 15만 6천 4백명에 전차 1백 20대, 비행기 1백 68대, 대포 2천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방위 상황을 보면 병력 9만 7천명에 전차가 한대도 없고 비행기 연습기 10대, 대포가 하나도 없으며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무기라는 것은 일본군이 버리고 난38식, 99식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은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점심은 사리원에서 먹고 저녁은 평양서 먹는다.'고 큰소리 했습니다. 한국 군부 내에 공산주의 스파이까지 들어와서 완전히 한국 군부를 흐트려 놓았습니다. 6.25나기 바로 전에 일반 군인들 대다수를 모심기 휴가를 내보냈습니다. 바로 6.25전쟁 직전에 연대장들을 이동시켜 부대 파악도 미쳐 못하였습니다. 6월24일 토요일 날 육군 본부 참모총장 이하 육군 지도부를 밤새도록 파티를 열고 술이 취하여 곤드레만드레가 되어서 6.25 아침 침략전쟁이 벌어지는데도 참모총장이 어디 가있는지 알 수 가 없었고 책임자들을 만나니까 아침에도 술이 취하여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이 때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민족을 향하여 바로 서있지 못했습니다. 1934년 전국 통계에 의하면 우리 한국은 4천 4백 개의 교회에 교인 수 44만 명이었고 1938년 전국 교인 수는 60만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이북이 45만 명입니다. 이남은 15만 명 정도 교인 밖에 없었습니다. 1939년 이후는 일제 탄압에 의해서 교세가 현저히 약화되었습니다. 교계는 신사 참배를 결의하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해방 당시 전국 교세는 2천 교회에 교인 약30만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이북에 1천5백 교회 20여만 성도, 이남 5백 교회 8만 명 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사 참배의 여파로 한국 교회는 해방되자마자 서로 물고 찢고 사분오열이 되어 싸우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6.25를 맞이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기독교인 남한 만 8백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중요 비리 사건에는 꼭 기독교인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황금만능주의, 인본주의가 교회를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못하고 세속화되어 버렸습니다.
경제 부흥을 이루었지만 우리 사회의 정치적 불안감, 국민 서로간의 사상적 대립, 팽배하는 물질주의와 소비지향주의, 향락주의와 도덕불감증 현상, 빈부의 격차, 종교다윈주의, 교회의 형식주의, 그리고 세속화 현상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은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180도로 과거를 청산하고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 돌가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도해야 합니다. 역대하 7장 14절로 15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회개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어주시고 치료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가 잘 풀리지 않습니까? 가정, 사업의 문제가 잘 풀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회개라는 것은 180도 돌아 서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십시오.
6장 1절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해주시고 싸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신 32:39)"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위로해 주시고 감싸주셔서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질병의 상처, 실패의 상처, 마음의 상처, 실수의 상처를 다 치료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 1:18-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2,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6장 2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시고 일으켜 주시니 하나님 앞에서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앞에 살자(Let us live in His sight.)” 이는 여호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섭리와 보호 아래서 살게 되리라는 의미입니다(창 17:18;렘 30:20). 경건한 삶을 강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은혜의 그늘에서 다시 떠나지 말자는 간곡한 눈물의 호소입니다.(창17:18 사53:2 렘30:20)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살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신이 풍요와 다산, 쾌락의 신인 바알 신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 계속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호세아 2장 8을 보세요. 13, 16, 17; 호 9:10에서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11장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호 11:2)” 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호13:1)”
이 바알 종교는 이방 종교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적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샘풀(캐이스)과 모델을 구분하여야 하는데 이방 종교의 모델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바알의 유산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 바알은 각 지역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애굽의 오시리스, 아모리와 아람인의 하닷, 바벨론의 마르둑(담무스), 헬라의 제우스,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몰록(밀곰), 블레세의 다곤 등은 다른 나라들에서 숭배된 바알 신들의 이름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싸워야 할 싸움을 말씀하면서 바알을 섬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끝까지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힙니다.
왜 이들이 바알 신을 섬겼겠습니까? 목축을 하던 사람들이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농사짓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는 망치게 됩니다. 그런데 바알이 비를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알 신화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최고의 신을 엘 신라고 생각했는데 엘 신의 아들이 바알입니다. 비와 폭풍과 번개의 신으로서 생명과 풍요 그리고 포도주와 기름의 주관자입니다. 최고의 신 엘의 아들들 가운데 하늘과 땅을 지배할 통치권을 위한 주도권 쟁탈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전쟁은 바알과 바다의 신 얌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이 대결에서 바알이 승리하여 바다는 더 이상 육지를 범람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전쟁은 뫁신과의 전쟁입니다. 지하세계(스올)와 죽음, 질병과 가뭄과 혼돈을 지배하는 신입니다. 이 전쟁에서 뫁신이 이깁니다. 그러자 지상은 건기와 죽음이 왔다는 것입니다. 바알이 죽자 바알의 누이동생이고 아내인 아낫신이 지하세계에 처들어가 뫁을 죽입니다. 성욕의 여신으로 풍요와 사랑 질투의 신입니다. 바알의 시체를 찾아 소생시켰는데 그 때 부부 관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낫은 그들의 신전에 들어가 거룩한 결혼을 거행한 후 신혼생활에 들어가게 되고, 이때부터 우기가 시작되어 비가 내리고 만물은 소생하고 질서는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를 내리게 하려면 이들이 부부관계를 가져야 하고 이것을 유도하기 위해 신전에 신정 창기가 있고 창남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비를 위해 성의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바알이 성의 축제를 하감하여 신들이 마법적으로 자극을 받아 더욱 강한 성교에 돌입하게 되고 그 결과 지상에 내리는 비의 양도 더욱 풍성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 동원되는 매개체가 곧 성창(거룩한 매춘부) 또는 미동(sacred prostitutes,민 25:3; 왕하 23:7; 호 4:4, 11-14; 사 57:3-13)입니다. 바알 신전에는 전속 남
제사장과 여사제가 있었으나 대축제 기간에 수많은 바알 신도와 관계하기에는 남년 사제들의 수가 모라자게 되므로 조수들로서 성창과 미동이 동원되었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풍요를 위해서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황금만능주의입니다. 돈이면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현재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자는 바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풍요를 보장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2장 8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십니다. 누가 그 땅에 살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것입니까? 2장 14,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살려 주시고 일으켜 주셨습니까? 6장 2절을 보십시오. 누가 회복시켜 주십니까? 누가 풍요를 보장해 주십니까? 14장 4절 이하를 보십시오. 누가 뭐라해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아야 함을 말합니다. 요나가 아무리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했으나 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아무도 몰래 자기 혼자 즐긴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고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죄를 지적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사정, 고난, 필요, 억울함도 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역을 하며 고생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남자는 다 죽였습니다. 감독들을 세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였고 비돔 성과 라암셋 성을 짓게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출 3:7)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 3:8)"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여 억울함을 당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몰랐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침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삼상 2:21)"
그래서 한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1)"
우리 하나님이 우리 성도님들의 남모르는 고통과 수고 다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 앞에 사는 것이 회복의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민족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문필가인 헨리 소로우는 사람이 국가에 봉사하는 방법은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육체로서 봉사하는 일인데 농장이나 공장에서 생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요, 둘째는 두뇌로서 종사하는 자들인데 교육, 기술, 지식으로 사회 각 분야에서 종사하는 지성인들이요, 셋째는 양심으로 봉사하는 자들인데 순교자나 각 층에서 역사의식을 가지고 조국을 위하여 헌신하는 소수의 사람들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민족을 살리는 길입니다.
3, 여호와의 사랑을 아는 일에 힘을 기우리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6장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일에 힘을 기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let us know the Lord !)”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아는 것은 단지 지식적인 앎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와 함께 삶으로 알자는 것입니다. 힘써라는 말은 온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열심히 좇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신 30:2,3).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여호와를 아는데 있습니다. 경제, 정치, 사회 과학의 지식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데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왜 망한다는 것입니까? 4장 6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여호와를 알지 못한 까닭이 무엇입니까?(호5:4)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호 5:4)
음란한 마음이 마음을 지배합니다. 이 음란은 영적으로는 우상숭배가 되지만 육적으로는 실제적인 음란입니다. 당시 음란한 마음의 실태를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통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고멜은 “끝,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전 창기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4:13-14). 이런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대려다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첫 아들을 낳습니다. 이스르엘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흩으셨다는 말입니다. 둘째 딸을 낳습니다. 6절 보십시오. 로후하마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셋째 아들을 낳습니다. 9절 보십시오. 로암미입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호세아로 보면 누구의 씨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같이 사는 것입니다. 2장 2절을 보십시오. 음란을 제거하라고 말씀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런데도 또 도망갑니다. 마약과 같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음란문화를 보십시오. 오늘 이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제가 오늘 주보에 써 놓았는데 여성 가족부는 2007년 실시한 성매매 실태조사에서 우리나라 성매매 경제 규모를 약 14조 952억 원으로 추산했습니다. 같은 해 국가예산(239조원)의 6%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전국의 성매매 업소는 4만 6247곳이며, 이곳에서 일하는 성매매 여성은 26만 9707명으로 조사됐습니다. 또 성매매를 한 남성은 연인원 9395만 명에 달했습니다. 성인 남성을 2000만 명으로 볼 때, 수학적으로 계산할 때 성인 남성 1명이 일 년에 5번 가까이 성매매를 했다는 것입니다. 성매매가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수치가 이보다 훨씬 높을 것이라고 합니다. 남성권익 단체인 남성연대는 지난해 12월 전국 성매매 여성이 189만 명이란 추정치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자발적으로 성을 파는 여성들이 현실에서 넘쳐나고 있다는 것도 문제"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영상을 통해 안방 깊숙이까지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사로잡아가고 있습니다. 너무나 강렬하여 풍성한 감정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진정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동물성만 남게 만들어 버립니다. 정서의 황폐화를 만들어 사탄이 지배해 버립니다. 우리 민족이 예수 믿는 사람이 거의 1/4이 되는 데 왜 이렇습니까? 수많은 정치지도자고 있고 경제, 교육, 문화 각 분야의 신앙인들이 있는데 왜 이 모습입니까? 남 탓하지 말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른 것처럼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 섞이지 않는 백성으로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가인이 문제가 아닙니다. 셋의 후예가 문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이 땅이 보존되기를 원합니다. 의인 다섯을 찾는 것입니다. 구별된 삶을 사는 노아를 찾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의인 다섯이 없어 망하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악한 문화가 지배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십시오. 1장 11절을 보세요.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호 1:11)” 한 우두머리는 일차적으로 스룹바벨을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구체적으로 3장 1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30세겔을 주고 사와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생각이 나지 않아요.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을 취하는 것이 불법적이라면 하나님께서 음란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장가든다는 것 그 자체가 불법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죄를 용납할 수 없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음란한 이스라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이 구체적으로 십자가에서 나타나셨습니다. 호세아 아들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입니다(1:11, 2:15, 3:5)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해야 하고 비극적인 자녀의 이름을 짓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겠지만 그는 그런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실로 냉혹한 아픔의 사랑이었지 따뜻한 즐거움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결혼이야 말로 그에게 주어진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를 지고 주의 뜻을 이루어야 할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가정은 율법의 눈이나 비신앙인의 눈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신약적 복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주까지 하고 도망간 베드로 예수님을 찾아가 사랑해 주십니다. 간음하고 살인까지 한 다윗을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첩을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아브라함 하나님이 처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고 도망간 야곱 하나님을 그를 12조상의 아버지로 삼았습니다. 도덕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모스처럼 정의를 생각하면 모순입니다. 그러나 윤리를 뛰어 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힘써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호세아의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예수와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처절하게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십니까?
1장 10절 이하를 보십시오(1:10-2:1; 2:2-7) 호세아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될 나라를 계시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르엘(하나님께서 흩으시다)을 이스라엘(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다)로 만들어 주십니다. 로후하마(긍휼 사랑을 못받다)를 루하마로 바꾸어 주십니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를 암미로 바꾸어 주십니다. 무엇을 통해 그렇게 합니까? 1장 11절을 보십시오. 한 우두머리입니다. 스룹바벨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메시아인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14장 4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날에 어떻게 됩니까?
관계가 회복됩니다. 풍성한 은혜가 임하십니다. 우리의 반역을 고쳐주십니다. 소성(7)시켜 주십니다. 번성하게 해 주십니다(5-7). 일시적인 번성이 아니라 뿌리가 박히고(5) 많은 사람이 그 그늘 아래 돌아오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 여러분과 저가, 우리 민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 앞에 살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써 알기를 원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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