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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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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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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nosuchjesus.com |
팔복강해(1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왜 신앙이 자라지 않는가?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된 신자들의 가장 공통적인 고민은 틀림 없이 “왜 신앙이 그 연륜 만큼 비례해 제대로 자라지 않는가”일 것이다.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그저 안절부절한다. 신자라면 고난이 있든 없든 기도를 매일 꾸준하게 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하다. 성경을 일년에 한 번은 읽어야지라고 매년 결심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그래서 누가 좀 강제로 시켜주기라도 하면 나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많은 목사님들이 신자들의 이런 형편을 잘 알기에 억지로라도 성경 공부나 기도 모임에 참석하도록 독려하고 성실한 신자에게 시상까지 한다. 또 그렇게 하면 정말 신자가 은혜를 체험하고 신앙도 성장해서 본인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제 경우를 솔직히 실토하자면 신자에게 평생 가도록 좀처럼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신자들의 어려운 영적인 사정을 몰라라 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제가 게으르고 성격이 모질지 못한 점도 있지만, 변명이 아니라 성경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4:23) 하나님의 구원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깝다.(시85:9) 하나님은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되 그에게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시다.(시86:5) 하나님은 진심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강요, 허위, 위선, 가식, 조종, 사기 등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에 일절 개입되어선 안 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스스로 생각할 때에 믿음이 좋고 기도를 잘하며 말씀을 깊이 알기를 소원하고 있는가? 여전히 미지근한 상태로 신앙이 물에 물 탄 듯 한가? 매일 단 5분이라도 성경을 읽고 또 그에 맞춰 기도하기를 소원해보지만 빠짐 없이 계속 이어진 적이 있는가?
당나귀가 물을 마시려면?
본문은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신자의 네 번째 복에 관해 말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이런 신앙적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말씀이다. 당나귀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가 당나귀가 성질이 유달리 못되어 먹었거나 주인이 다루는 솜씨가 서툴러서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 갈증이 안 나면 물을 마시지도 찾지도 않기 때문이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자라게 된다. 그런데 신자치고 신앙이 자라기를 소원하지 않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자 하는 갈증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왜 신앙이 자라지 않는가 하면 그 갈증에 대해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증을 단순히 소원하고자 하는 열심의 세기가 최대치에 다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을 조금 마셔봐야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막을 걸어가는 자가 목이 타 들어가듯이 물에 대한 소원이 가장 크진 것이 갈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소원의 강도(强度)를 높이고 또 계속해서 그 소원의 크기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책상 앞에 매일 성경 5장씩 읽어서 일년에 한 번 통독하자, 기도는 최소 30분 이상 하자 식의 구호를 부쳐놓고 지키려 애를 쓴다. 그러나 3일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면 자기 혼자 힘으로 하려다 보니 실패했나 싶어 일종의 강제력을 동원하려고 한다. 부흥회, 찬양, 간증, 은사 집회, 특별 새벽기도 40일 같은 집회를 쫓아 다녀 본다. 그러나 여전히 그 효과는 길어야 2,3일 뿐으로 금방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 간다. 그러니 당연히 목사가 강제로라도 교회에 모아 놓고 가르쳐 주기를 원하고 차라리 매일 교회 가서 사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인 것 같다. 또 목사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고 일부러 그것을 빌미로 해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도록 독려하기도 한다.
갈증이란 일부러 갈증 내려고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노력해서 갈증이 생기는 것은 운동으로 다이어트 할 때 뿐이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신앙을 키우려는 모습이 마치 물을 많이 마셔야 몸에 좋다고 하니까 물을 마시기는 마셔야겠는데 당장 물 마시고 싶은 갈증은 안 나니까 억지로 운동을 해서라도 마시겠다는 꼴이다. 물 마시기 위해 운동하는 바보는 없다. 운동을 하니까 물을 마시고 싶어지는 것이지…
요컨대 갈증이란 소원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증이란 소원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기에 소원이 강해진다고 갈증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최면술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물 마시고 싶다, 물 마시고 싶다 자꾸 되 뇌인다고 갈증이 생기지 않는다. 요컨대 의지력을 동원해 소원을 키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갈증은 오직 본능일 뿐이다. 몸 속의 수분이 부족하면 몸 전체가 자연적, 기계적,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굶으면 굶주리게 되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마르게 되는 법이다.
나아가 본능은 오직 당사자 자신만이 느끼고 채울 수 있지 세 삼자가 개입할 문제도 아니다. 당나귀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는 못하는 이유가 갈증이란 본능을 제 삼자가 당나귀에게 강제적으로 절대 주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신자가 스스로 차라리 교회에서라도 성경공부나 기도 모임을 자꾸 강요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기를 당나귀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 그 자체로도 신앙을 키우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본능적인 갈증이 전제 되지 않고는 입술만 잠간 적셔줄 뿐이다.
거미 줄로 창검을 막아낸 하나님
터어키 갑바도기아 지방에는 석회암 동굴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 지역의 한 작은 동굴에는 이런 설화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의 한 신자가 예수 믿는 것이 발각나 도망을 치고 있었다. 잡히면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야 하므로 필사적으로 내달려 산 꼭대기의 동굴에 숨었다. 로마 군인들은 계속 추적해 쫓아 오고 있어 동굴 구석에 숨어 간절히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도 여전히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는 점차 가까이 들려 왔고 방향도 분명 동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또 다시 군인들을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해주거나, 지쳐서 추적을 포기하고 그만 돌아가게 해 주거나, 산중에서 맹수를 만나거나 계곡에 빠져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 기척은 없었다.
그래서 이젠 꼼짝 없이 잡혀 죽었구나 하고 아예 포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거미가 동굴 입구에 나타나 거미 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젠 속으로 “아니 하나님 군인들 수십 명이 칼과 창을 들고 쫓아 오는데 기껏 거미줄로 동굴 입구를 막을 수 있습니까? 차라리 어디서 커다란 바위를 굴려서 막아 주셔야지요”라는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입구는 거미줄로 다 막히고 군인들도 마침내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 났겠는가? “거미 줄이 이렇게 많이 쳐 있는데 이 안에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 다른 곳으로 가보자”하고는 군인들이 물러 갔다. 이미 거미 줄이 쳐져 있는 곳에 사람이 급히 들어갔다면 군데군데 구멍이 나므로 금방 들킨다. 또 바위로 막혀 있어도 사람이 들어가서 안 쪽에서 막았다는 것은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면에 거미줄이 완벽하게 쳐져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그 동굴에 사람이 출입한 흔적이 없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그 후 이 사람의 남은 일생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교회에서 큰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끝까지 추적을 당해 순교를 당했는지 살아 남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그 이후로는 그가 평생을 두고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도 불안해 하기보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아무리 궁리해도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 벼랑 끝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어서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툭 치기만 해도 천길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를 구원해 주셨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간절히 당신의 도우심을 소원하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음을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생생한 체험을 통해 그에게 확신케 해 주었다.
물에도 종류가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믿음이 좋아지고 영성이 깊어질 것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갈증은 단지 소원의 세기가 강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갈증이 심한 자는 어떤 사람이겠는가? 배를 타고 가다 난파 당해 조각나무에 매달려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며칠을 열대의 바다를 헤맨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주위에 물이 있는가 없는가? 수평선까지 무진장하게 펼쳐져 있는 바다가 다 물로 이뤄져 있다. 온 사방이 물로 둘러 쌓여 있다.
그렇지만 바닷물을 마시면 목은 더 타고 탈수증에 걸려 오히려 죽는다는 것을 안다. 반면에 어쩌다 열대성 소나기라도 만나면 하늘을 향해 입을 하마처럼 있는 대로 다 벌리고 미친 듯이 빗물을 받아 마실 것이다. 단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 것이다. 물은 같은 물이지만 바닷물은 죽음으로 이끄는 독이고 빗물은 활력을 샘솟게 하는 생수이기 때문이다.
갈증이란 본인의 열정과 의지적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방금 운동장 몇 바퀴 달린 사람 앞에 아무리 바닷물을 갖다 놓아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생기지 않는 법이다. 생수의 맛과 영양가를 확신해야 갈증이 생긴다. 신앙 생활에서도 기도 안 했더니 믿음에 힘이 빠지고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과 의로움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제 기도가 가장 잘되는가? 새벽에 전화기 코드를 빼놓고 골방에 들어가 찬송가 테이프 들으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난 후인가?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기도가 잘 되는 것은 틀림 없다. 그러나 너무나 힘든 일이 생기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가 없으며 당장 그 문제로 인해 온갖 고통을 겪고 있다면 새벽 골방이 아니라도 기도는 잘만 된다. 심지어 자신이 기도하려고 마음먹지 않았고 의식도 못해도 입에서 ‘주님, 제발 살려 주세요!’라는 외마디 비명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예수님이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며 기도하지 말라고 했지만 (물론 중언부언의 정확한 의미는 이와 다르지만) 제발 살려 달라, 이 문제를 꼭 해결해 달라, 주님 도와 달라고 몇 시간이고 한 없이 되풀이 할 것이다. 일하면서도 속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실패했던 성경 읽기마저 아무도 강요하거나 보는 사람 없어도 성공한다. 성경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읽는다.
간혹 성경에 대해 공부해본 적이 전혀 없어 어떻게 읽을 줄 몰라도 주위 형편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손에 집히는 대로 펼쳐 놓고 첫눈에 들어오는 구절이라도 열심히 읽는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마치 운수 맞춰보듯이 아무렇게나 펼치고 눈에 뜨인 첫 구절을 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식으로 읽은 말씀에서도 위로를 받는다. 마치 그 말씀이 완전히 자기의 현재 처지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며 간절히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응답도 된다. 기도자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절실함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자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는 하나님 쪽에서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권능의 빛을 비추어 더욱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오게끔 만드는 섭리다. 신자가 실수하고 잘못하더라도 그 실수와 잘못을 통해서도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더러 기도하고 말씀 보는 권능과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좋은지를 자꾸 깨닫게끔 만드는 것이다.
갈증이 결단보다 앞선다.
말기암 환자의 경우 한국의 모 재벌 회장이 치료했다던 미국 텍사스의 세계 최고 암센터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설령 불신자라도 최후의 수단으로 기도원에 올라 간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되고 그래서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틀림 없이 자신의 나머지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내 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결단을 먼저 했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서 나를 알고 계시며, 세상의 어떤 것도 정작 인간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 만이 구원의 산성이요, 피난처요, 바위임을 확신한 것이 시간적으로 먼저 있었겠는가? 당연히 후자다. 말하자면 암으로 인한 치유에 대한 소원, 즉 ‘갈증’이 가장 먼저 오고 다음에 기적적인 치유, 즉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후에,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헌신, 즉 의지적 ‘결단’은 항상 맨 마지막에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는 이 순서를 거꾸로 하려한다. 의지적 결단을 먼저 하여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소원하는 갈증이 가득 차리라 기대한다. 신자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자신의 인격, 영육간의 전 인생에 조금씩 채워져 나중에는 그런 은혜가 없으면 아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자연적이고도 본능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갈증이 없이는 은혜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더러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말하자면 기도란 자기 영혼에 하나님의 생기를 매 순간순간 공급 받고자 하는 일종의 숨쉬기 운동이다. 신자가 자신의 능력에 힘겨운 크고도 급한 일만 잠시 전문적인 해결사인 하나님에게 의뢰해 임시 처방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다.
신자들은 흔히 “교회를 십년을 다닌 집사인데도 아직 술 담배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 못했다, 성경을 한번도 통독하지 못했다, 여전히 대표 기도 때마다 벌벌 떤다, 이러니 언제 내 신앙이 자라지?”라고 말한다.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자기 스스로는 믿음을 키우려는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의로운 신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오직 인간적이고도 종교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다. 그러나 신앙이 좋다는 것을 무엇과 동일시 하고 있는가 하면 오직 얼마나 기도를 청산유수처럼 잘하고 말씀을 열심히 보느냐 이다. 나아가 교회 십년 다니면 반드시 집사가 되어야 하고 또 집사로서의 자격 요건과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 술 담배를 끊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 잘하고 성경구절 줄줄 외우고 술 담배 안 하는 것으로 마치 신앙 좋은 자격증이나 훈장인양 치장하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진짜 중요한 것은 있으나 없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자신의 생애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가에 대한 인식은 없다.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신앙이 특별히 고매한 사상이나 심오한 교리를 습득하고 훈련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쉽고도 간단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다. 그 갈증이 강하면 강할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고 약하면 약할수록 신앙은 약한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전능하심, 선하심, 인자하심, 도우심, 인도하심, 위로하심, 생명 주심, 죄를 씻으심, 영원으로 이끄심 등 그분이 당신의 자녀에게 베풀 수 있는 모든 은혜를 하나 빠짐 없이 차지하겠다는 열망이 신앙이다. 망망대해 한 복판에서 표류하는 자가 빗물을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하듯이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고 자신도 전혀 절제할 수 없는 갈급함으로 이미 가득 차 있다. 구태여 그것을 만들려고 힘들여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 신앙이란 바로 그런 갈증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기도하고 말씀 보게 된다.
신자가 강제로라도 성경보고 기도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단지 신자의 의무로 생각하거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그래도 이왕이면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 둘 중의 하나다. 갈증이 생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말해 기도와 성경이 신자의 심심풀이 땅콩 수준으로까지 전락했다. 기도하는 재미를 체험한 사람은 반드시 기도하고 말씀 보는 재미를 체험한 사람도 당연히 말씀을 본다.
하나님에게 중독된 신자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갖는다는 것을 가장 잘 비유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 있다. 좀 이상한 단어이긴 하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정확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바로 ‘중독(中毒-addiction)’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란 하나님에게 중독된 자라는 뜻이다. 마약 중독자가 히로뽕 주사 맞듯이 그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베풀어 놓으신 보혈의 주사를 맞은 자가 신자이며 그 보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에게는 바로 마약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마약에 중독되는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주는 것보다 마약이 주는 쾌감이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한번 맛보면 도저히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더 찾고 더 자주 찾게 된다. 그 강도도 자연히 높아지며 아예 체질적으로 자연스럽고도 기계적으로 마약에 반응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심지어 세상적으로 자신의 인생이 몽땅 망하더라도 그것만 찾게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를 믿기로 노력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마약에 취하듯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면서도 나의 죄를 사하시고 새 생명을 허락하셨고 당신만의 거룩하고 영원한 계획으로 인도하셔서 지금도 그 과정을 향해 하나하나 이뤄나가시는 은혜를 맛보고 있는 자다. 죄악과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반하며 심지어 저주까지 하고 있었던 나를 그분이 먼저 찾아 오셔서 당신의 아들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 주셨다.
본문은 신자가 누리는 네 번째 복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에 대해 중독 증세를 나타내며 항상 갈증을 유지하는 신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힘들고 고달픈 시련과 환난이 닥치더라도, 아무리 사람과 죄악과 사단이 신자의 가는 길에 시험하고 유혹하고 훼방할지라도, 그래서 심지어 기가 막힌 사망의 웅덩이를 지나가게 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찾아와 주시고 건져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을 찾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신자를 외면하고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이보다 더 큰 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말하는 이 네 번째 복 앞에 어떤 복이 있었는가? 온유의 복이다. 그 복은 무엇을 뜻했는가? 언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기에 더 이상 염려 불안하지 않고 그 믿음에 흔들림이 없게 된 자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이미 양껏 맛본 자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말래야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나귀에게 물을 먹이려면 물가로 끌고 가는 것이 절대 급선무가 아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창 동안 일부러 물을 안 주는 것이다. 그리고 물가로 끌고 가보라. 아마 끌 필요도 없이 물 냄새만 맡고도 혼자 먼저 뛰어가 고개를 물 속 깊이 처박을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감당 못할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 너무 힘들어 하는 자 있는가? 그 시련을 끝까지 믿음으로 참아 내고 또 기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급선무가 아니다. 먼저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시련도 하나님이 신자를 향한 영원하고도 완전한 계획 가운데 하나임을 확신해야 한다. 말하자면 당나귀에게 그 주인이 일부러 물을 안 주고 있듯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당신을 향한 갈증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그 다음 스케쥴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물가로 끌고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물을 신자의 고난 가운데 이미 마련해 놓고 계신다. 영원한 생수라고 해서 신자에게 더 이상 환난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기에 그 사랑에 중독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만들어 주신다. 따라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란 한 번 먹고는 두 번 다시는 갈증이 안 생기는 물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말해 영원토록 하나님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 차게 해 주시는 생수라는 뜻이다. 그래야만 영원토록 오직 그분이 주시는 생수만을 찾고 또 마시게 될 터이니 말이다.
당신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주사를 제대로 맞은 적이 있는가?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중독이 되어 자꾸만 그 사랑에 대한 갈증이 생기고 있는가? 그렇다면 실질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따로 더 키울 필요도 사실 없다. 기도하고 말씀 보려 억지로 노력할 필요도 없다. 저절로 무릎 꿇게 되고 말씀에 갈급하도록 이미 그 존재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자의 체질도 연약하고 게을러 그렇지 못할 가능성도 많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이미 우리 속에 내주해 있는 성령님이 눌려서 탄식을 하기 때문에 다시 그 사랑을 갈급하게 되고 기도하고 말씀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증 외에 신앙을 자라게 할 방도는 전혀 없다. 갈증은 의지적 소원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자는 반드시 갈증이 생기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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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6)
왜 신앙이 자라지 않는가?
예수를 믿은 지 오래된 신자들의 가장 공통적인 고민은 틀림 없이 “왜 신앙이 그 연륜 만큼 비례해 제대로 자라지 않는가”일 것이다.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그저 안절부절한다. 신자라면 고난이 있든 없든 기도를 매일 꾸준하게 해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하다. 성경을 일년에 한 번은 읽어야지라고 매년 결심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그래서 누가 좀 강제로 시켜주기라도 하면 나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많은 목사님들이 신자들의 이런 형편을 잘 알기에 억지로라도 성경 공부나 기도 모임에 참석하도록 독려하고 성실한 신자에게 시상까지 한다. 또 그렇게 하면 정말 신자가 은혜를 체험하고 신앙도 성장해서 본인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제 경우를 솔직히 실토하자면 신자에게 평생 가도록 좀처럼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신자들의 어려운 영적인 사정을 몰라라 하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께 받아야 할 축복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제가 게으르고 성격이 모질지 못한 점도 있지만, 변명이 아니라 성경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요4:23) 하나님의 구원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깝다.(시85:9) 하나님은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되 그에게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시다.(시86:5) 하나님은 진심으로 자원하여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강요, 허위, 위선, 가식, 조종, 사기 등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에 일절 개입되어선 안 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스스로 생각할 때에 믿음이 좋고 기도를 잘하며 말씀을 깊이 알기를 소원하고 있는가? 여전히 미지근한 상태로 신앙이 물에 물 탄 듯 한가? 매일 단 5분이라도 성경을 읽고 또 그에 맞춰 기도하기를 소원해보지만 빠짐 없이 계속 이어진 적이 있는가?
당나귀가 물을 마시려면?
본문은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신자의 네 번째 복에 관해 말하고 있다. 바로 우리의 이런 신앙적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말씀이다. 당나귀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고 한다. 그 이유가 당나귀가 성질이 유달리 못되어 먹었거나 주인이 다루는 솜씨가 서툴러서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 갈증이 안 나면 물을 마시지도 찾지도 않기 때문이다.
신자도 마찬가지다.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자라게 된다. 그런데 신자치고 신앙이 자라기를 소원하지 않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자 하는 갈증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왜 신앙이 자라지 않는가 하면 그 갈증에 대해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증을 단순히 소원하고자 하는 열심의 세기가 최대치에 다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을 조금 마셔봐야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사막을 걸어가는 자가 목이 타 들어가듯이 물에 대한 소원이 가장 크진 것이 갈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소원의 강도(强度)를 높이고 또 계속해서 그 소원의 크기가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책상 앞에 매일 성경 5장씩 읽어서 일년에 한 번 통독하자, 기도는 최소 30분 이상 하자 식의 구호를 부쳐놓고 지키려 애를 쓴다. 그러나 3일도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만다.
그러면 자기 혼자 힘으로 하려다 보니 실패했나 싶어 일종의 강제력을 동원하려고 한다. 부흥회, 찬양, 간증, 은사 집회, 특별 새벽기도 40일 같은 집회를 쫓아 다녀 본다. 그러나 여전히 그 효과는 길어야 2,3일 뿐으로 금방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 간다. 그러니 당연히 목사가 강제로라도 교회에 모아 놓고 가르쳐 주기를 원하고 차라리 매일 교회 가서 사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인 것 같다. 또 목사도 그런 사정을 알고 있고 일부러 그것을 빌미로 해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도록 독려하기도 한다.
갈증이란 일부러 갈증 내려고 노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노력해서 갈증이 생기는 것은 운동으로 다이어트 할 때 뿐이다. 말하자면 신자들이 신앙을 키우려는 모습이 마치 물을 많이 마셔야 몸에 좋다고 하니까 물을 마시기는 마셔야겠는데 당장 물 마시고 싶은 갈증은 안 나니까 억지로 운동을 해서라도 마시겠다는 꼴이다. 물 마시기 위해 운동하는 바보는 없다. 운동을 하니까 물을 마시고 싶어지는 것이지…
요컨대 갈증이란 소원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갈증이란 소원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기에 소원이 강해진다고 갈증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최면술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물 마시고 싶다, 물 마시고 싶다 자꾸 되 뇌인다고 갈증이 생기지 않는다. 요컨대 의지력을 동원해 소원을 키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갈증은 오직 본능일 뿐이다. 몸 속의 수분이 부족하면 몸 전체가 자연적, 기계적,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굶으면 굶주리게 되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마르게 되는 법이다.
나아가 본능은 오직 당사자 자신만이 느끼고 채울 수 있지 세 삼자가 개입할 문제도 아니다. 당나귀를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는 못하는 이유가 갈증이란 본능을 제 삼자가 당나귀에게 강제적으로 절대 주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신자가 스스로 차라리 교회에서라도 성경공부나 기도 모임을 자꾸 강요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기를 당나귀보다도 못한 존재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 그 자체로도 신앙을 키우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본능적인 갈증이 전제 되지 않고는 입술만 잠간 적셔줄 뿐이다.
거미 줄로 창검을 막아낸 하나님
터어키 갑바도기아 지방에는 석회암 동굴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 지역의 한 작은 동굴에는 이런 설화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초대 교회 당시의 한 신자가 예수 믿는 것이 발각나 도망을 치고 있었다. 잡히면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야 하므로 필사적으로 내달려 산 꼭대기의 동굴에 숨었다. 로마 군인들은 계속 추적해 쫓아 오고 있어 동굴 구석에 숨어 간절히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도 여전히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는 점차 가까이 들려 왔고 방향도 분명 동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속으로 또 다시 군인들을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해주거나, 지쳐서 추적을 포기하고 그만 돌아가게 해 주거나, 산중에서 맹수를 만나거나 계곡에 빠져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 기척은 없었다.
그래서 이젠 꼼짝 없이 잡혀 죽었구나 하고 아예 포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거미가 동굴 입구에 나타나 거미 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젠 속으로 “아니 하나님 군인들 수십 명이 칼과 창을 들고 쫓아 오는데 기껏 거미줄로 동굴 입구를 막을 수 있습니까? 차라리 어디서 커다란 바위를 굴려서 막아 주셔야지요”라는 불평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덧 입구는 거미줄로 다 막히고 군인들도 마침내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 났겠는가? “거미 줄이 이렇게 많이 쳐 있는데 이 안에는 사람이 있을 리 없지. 다른 곳으로 가보자”하고는 군인들이 물러 갔다. 이미 거미 줄이 쳐져 있는 곳에 사람이 급히 들어갔다면 군데군데 구멍이 나므로 금방 들킨다. 또 바위로 막혀 있어도 사람이 들어가서 안 쪽에서 막았다는 것은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반면에 거미줄이 완벽하게 쳐져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그 동굴에 사람이 출입한 흔적이 없다는 뜻이 되지 않는가?
그 후 이 사람의 남은 일생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교회에서 큰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끝까지 추적을 당해 순교를 당했는지 살아 남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한가지 사실은 그 이후로는 그가 평생을 두고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도 불안해 하기보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아무리 궁리해도 도저히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 벼랑 끝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어서 어린아이가 손가락으로 툭 치기만 해도 천길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그를 구원해 주셨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간절히 당신의 도우심을 소원하는 자를 절대 외면하지 않음을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가는 생생한 체험을 통해 그에게 확신케 해 주었다.
물에도 종류가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믿음이 좋아지고 영성이 깊어질 것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갈증은 단지 소원의 세기가 강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세상에서 가장 갈증이 심한 자는 어떤 사람이겠는가? 배를 타고 가다 난파 당해 조각나무에 매달려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며칠을 열대의 바다를 헤맨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 주위에 물이 있는가 없는가? 수평선까지 무진장하게 펼쳐져 있는 바다가 다 물로 이뤄져 있다. 온 사방이 물로 둘러 쌓여 있다.
그렇지만 바닷물을 마시면 목은 더 타고 탈수증에 걸려 오히려 죽는다는 것을 안다. 반면에 어쩌다 열대성 소나기라도 만나면 하늘을 향해 입을 하마처럼 있는 대로 다 벌리고 미친 듯이 빗물을 받아 마실 것이다. 단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 것이다. 물은 같은 물이지만 바닷물은 죽음으로 이끄는 독이고 빗물은 활력을 샘솟게 하는 생수이기 때문이다.
갈증이란 본인의 열정과 의지적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방금 운동장 몇 바퀴 달린 사람 앞에 아무리 바닷물을 갖다 놓아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생기지 않는 법이다. 생수의 맛과 영양가를 확신해야 갈증이 생긴다. 신앙 생활에서도 기도 안 했더니 믿음에 힘이 빠지고 말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과 의로움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언제 기도가 가장 잘되는가? 새벽에 전화기 코드를 빼놓고 골방에 들어가 찬송가 테이프 들으며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난 후인가?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기도가 잘 되는 것은 틀림 없다. 그러나 너무나 힘든 일이 생기고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가 없으며 당장 그 문제로 인해 온갖 고통을 겪고 있다면 새벽 골방이 아니라도 기도는 잘만 된다. 심지어 자신이 기도하려고 마음먹지 않았고 의식도 못해도 입에서 ‘주님, 제발 살려 주세요!’라는 외마디 비명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예수님이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며 기도하지 말라고 했지만 (물론 중언부언의 정확한 의미는 이와 다르지만) 제발 살려 달라, 이 문제를 꼭 해결해 달라, 주님 도와 달라고 몇 시간이고 한 없이 되풀이 할 것이다. 일하면서도 속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실패했던 성경 읽기마저 아무도 강요하거나 보는 사람 없어도 성공한다. 성경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읽는다.
간혹 성경에 대해 공부해본 적이 전혀 없어 어떻게 읽을 줄 몰라도 주위 형편이 급박하게 돌아가면 손에 집히는 대로 펼쳐 놓고 첫눈에 들어오는 구절이라도 열심히 읽는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마치 운수 맞춰보듯이 아무렇게나 펼치고 눈에 뜨인 첫 구절을 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식으로 읽은 말씀에서도 위로를 받는다. 마치 그 말씀이 완전히 자기의 현재 처지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며 간절히 현재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응답도 된다. 기도자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절실함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자의 머리카락까지 헤아리시는 하나님 쪽에서 그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권능의 빛을 비추어 더욱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오게끔 만드는 섭리다. 신자가 실수하고 잘못하더라도 그 실수와 잘못을 통해서도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더러 기도하고 말씀 보는 권능과 은혜가 얼마나 풍성하고 좋은지를 자꾸 깨닫게끔 만드는 것이다.
갈증이 결단보다 앞선다.
말기암 환자의 경우 한국의 모 재벌 회장이 치료했다던 미국 텍사스의 세계 최고 암센터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설령 불신자라도 최후의 수단으로 기도원에 올라 간다. 그래서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게 되고 그래서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틀림 없이 자신의 나머지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내 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결단을 먼저 했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살아서 나를 알고 계시며, 세상의 어떤 것도 정작 인간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 만이 구원의 산성이요, 피난처요, 바위임을 확신한 것이 시간적으로 먼저 있었겠는가? 당연히 후자다. 말하자면 암으로 인한 치유에 대한 소원, 즉 ‘갈증’이 가장 먼저 오고 다음에 기적적인 치유, 즉 하나님의 ‘은혜’를 맛 본 후에, 일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헌신, 즉 의지적 ‘결단’은 항상 맨 마지막에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는 이 순서를 거꾸로 하려한다. 의지적 결단을 먼저 하여 신앙 생활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을 소원하는 갈증이 가득 차리라 기대한다. 신자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이 자신의 인격, 영육간의 전 인생에 조금씩 채워져 나중에는 그런 은혜가 없으면 아예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자연적이고도 본능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갈증이 없이는 은혜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더러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항상 기뻐하라고 한다. 말하자면 기도란 자기 영혼에 하나님의 생기를 매 순간순간 공급 받고자 하는 일종의 숨쉬기 운동이다. 신자가 자신의 능력에 힘겨운 크고도 급한 일만 잠시 전문적인 해결사인 하나님에게 의뢰해 임시 처방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다.
신자들은 흔히 “교회를 십년을 다닌 집사인데도 아직 술 담배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 못했다, 성경을 한번도 통독하지 못했다, 여전히 대표 기도 때마다 벌벌 떤다, 이러니 언제 내 신앙이 자라지?”라고 말한다.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자기 스스로는 믿음을 키우려는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의로운 신자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오직 인간적이고도 종교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다. 그러나 신앙이 좋다는 것을 무엇과 동일시 하고 있는가 하면 오직 얼마나 기도를 청산유수처럼 잘하고 말씀을 열심히 보느냐 이다. 나아가 교회 십년 다니면 반드시 집사가 되어야 하고 또 집사로서의 자격 요건과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 술 담배를 끊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도 잘하고 성경구절 줄줄 외우고 술 담배 안 하는 것으로 마치 신앙 좋은 자격증이나 훈장인양 치장하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진짜 중요한 것은 있으나 없으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자신의 생애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가에 대한 인식은 없다. 하나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신앙이 특별히 고매한 사상이나 심오한 교리를 습득하고 훈련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쉽고도 간단하게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다. 그 갈증이 강하면 강할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고 약하면 약할수록 신앙은 약한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전능하심, 선하심, 인자하심, 도우심, 인도하심, 위로하심, 생명 주심, 죄를 씻으심, 영원으로 이끄심 등 그분이 당신의 자녀에게 베풀 수 있는 모든 은혜를 하나 빠짐 없이 차지하겠다는 열망이 신앙이다. 망망대해 한 복판에서 표류하는 자가 빗물을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하듯이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고 자신도 전혀 절제할 수 없는 갈급함으로 이미 가득 차 있다. 구태여 그것을 만들려고 힘들여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 신앙이란 바로 그런 갈증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기도하고 말씀 보게 된다.
신자가 강제로라도 성경보고 기도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단지 신자의 의무로 생각하거나,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그래도 이왕이면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 둘 중의 하나다. 갈증이 생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말해 기도와 성경이 신자의 심심풀이 땅콩 수준으로까지 전락했다. 기도하는 재미를 체험한 사람은 반드시 기도하고 말씀 보는 재미를 체험한 사람도 당연히 말씀을 본다.
하나님에게 중독된 신자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갖는다는 것을 가장 잘 비유할 수 있는 단어가 하나 있다. 좀 이상한 단어이긴 하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정확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바로 ‘중독(中毒-addiction)’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란 하나님에게 중독된 자라는 뜻이다. 마약 중독자가 히로뽕 주사 맞듯이 그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베풀어 놓으신 보혈의 주사를 맞은 자가 신자이며 그 보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에게는 바로 마약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마약에 중독되는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주는 것보다 마약이 주는 쾌감이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더 크기 때문이다. 한번 맛보면 도저히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더 찾고 더 자주 찾게 된다. 그 강도도 자연히 높아지며 아예 체질적으로 자연스럽고도 기계적으로 마약에 반응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심지어 세상적으로 자신의 인생이 몽땅 망하더라도 그것만 찾게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이 기독교라는 종교의 교리를 믿기로 노력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마약에 취하듯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면서도 나의 죄를 사하시고 새 생명을 허락하셨고 당신만의 거룩하고 영원한 계획으로 인도하셔서 지금도 그 과정을 향해 하나하나 이뤄나가시는 은혜를 맛보고 있는 자다. 죄악과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반하며 심지어 저주까지 하고 있었던 나를 그분이 먼저 찾아 오셔서 당신의 아들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 주셨다.
본문은 신자가 누리는 네 번째 복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에 대해 중독 증세를 나타내며 항상 갈증을 유지하는 신자는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힘들고 고달픈 시련과 환난이 닥치더라도, 아무리 사람과 죄악과 사단이 신자의 가는 길에 시험하고 유혹하고 훼방할지라도, 그래서 심지어 기가 막힌 사망의 웅덩이를 지나가게 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찾아와 주시고 건져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을 찾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신자를 외면하고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이보다 더 큰 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말하는 이 네 번째 복 앞에 어떤 복이 있었는가? 온유의 복이다. 그 복은 무엇을 뜻했는가? 언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기에 더 이상 염려 불안하지 않고 그 믿음에 흔들림이 없게 된 자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이미 양껏 맛본 자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말래야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나귀에게 물을 먹이려면 물가로 끌고 가는 것이 절대 급선무가 아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창 동안 일부러 물을 안 주는 것이다. 그리고 물가로 끌고 가보라. 아마 끌 필요도 없이 물 냄새만 맡고도 혼자 먼저 뛰어가 고개를 물 속 깊이 처박을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감당 못할 시련과 환난 가운데서 너무 힘들어 하는 자 있는가? 그 시련을 끝까지 믿음으로 참아 내고 또 기도로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급선무가 아니다. 먼저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시련도 하나님이 신자를 향한 영원하고도 완전한 계획 가운데 하나임을 확신해야 한다. 말하자면 당나귀에게 그 주인이 일부러 물을 안 주고 있듯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당신을 향한 갈증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그 다음 스케쥴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물가로 끌고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물을 신자의 고난 가운데 이미 마련해 놓고 계신다. 영원한 생수라고 해서 신자에게 더 이상 환난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 없기에 그 사랑에 중독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만들어 주신다. 따라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란 한 번 먹고는 두 번 다시는 갈증이 안 생기는 물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말해 영원토록 하나님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 차게 해 주시는 생수라는 뜻이다. 그래야만 영원토록 오직 그분이 주시는 생수만을 찾고 또 마시게 될 터이니 말이다.
당신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주사를 제대로 맞은 적이 있는가?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사랑에 중독이 되어 자꾸만 그 사랑에 대한 갈증이 생기고 있는가? 그렇다면 실질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따로 더 키울 필요도 사실 없다. 기도하고 말씀 보려 억지로 노력할 필요도 없다. 저절로 무릎 꿇게 되고 말씀에 갈급하도록 이미 그 존재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자의 체질도 연약하고 게을러 그렇지 못할 가능성도 많다. 그러나 그런 때에는 이미 우리 속에 내주해 있는 성령님이 눌려서 탄식을 하기 때문에 다시 그 사랑을 갈급하게 되고 기도하고 말씀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증 외에 신앙을 자라게 할 방도는 전혀 없다. 갈증은 의지적 소원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자는 반드시 갈증이 생기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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