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마5:7 |
---|---|
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5.7.29 |
팔복 강해 (13)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속담과 성경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속담이나 경구가 성경 말씀과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예를 들면 가족끼리 화목하고 사랑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한다. 반면에 성경에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고 한다. 또 국회의원들이 선거운동을 하려면 예식장보다는 초상집을 찾아가야 어려울 때 도와주어 더 고마워 하고 또 오래도록 그 사람을 기억해준다. 성경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留心) 하리로다”(전7:2)고 했다.
본문의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도 어디에서 많이 듣던 속담 같지 않은가? 언뜻 보기에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을 하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고 또 이웃에게 선을 베풀면 반드시 복이 되어 돌아 온다는 한국 속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비슷한 뜻인 것 같다. 본문은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는 제자, 즉 앞으로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 올 신자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니까 불신자보다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상식적인 내용은 아니다.
지금 긍휼히 여겨야 하는 주체(主體)는 당연히 신자다. 그런데 신자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다. 따라서 본문을 풀어 써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되나니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긍휼을 끊임 없이 공급 받게 된다”가 된다. 따라서 본문에는 최소 세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첫째는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은 자인데, 신자 본인이 그런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단순히 자기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예수를 믿기로 했고 그래서 십자가 복음에 관한 교리는 많이 배워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 자신의 분명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었다는 확신은 잘 없다. 말하자면 십자가 복음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 복음 속에 들어와 가슴으로는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긍휼함을 입은 신자만이 이웃에게 긍휼함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지금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만이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불신자도 남에게 사랑을 충분히 베풀 수 있지만 이웃에게 긍휼함을 입게 할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은 신자뿐이라는 뜻이다.
셋째는 앞의 두 전제의 필연적인 결론으로 신자가 이웃에게 반드시 나눠주어야 할 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또 일반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긍휼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신자 각자가 가장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는가 아닌가이다. 또 그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긍휼이 일반적인 사랑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남들에게 사랑이 아닌 긍휼을 베풀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를 찾는 두 가지 이유
예수를 모르던 자연인이 하나님을 찾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는 이유는 한 마디로 자신에게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많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도덕적 죄악이든, 현실적인 고난이든, 죽음에 대한 심각한 갈등이든 결국 자기 힘으로는 해결 못할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 해결해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후의 신앙 생활의 모든 과정과 결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비록 사람들이 천차만별이지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는 태도와 관점에선 사실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자기는 약점과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와 자기는 완전히 핸디캡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그것이다. 약점과 핸디캡을 그 정도의 차이만 다르지 결국은 사람이 갖는 단점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이해해선 안 된다.
약점의 쉬운 예로 음치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음치라도 가요 학원에서 꾸준히 교습을 받으면 본인이 충분히 만족하거나 전문가 수준까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나아질 수는 있다. 또 노래 못하는 것 때문에 망년회나 회식 자리에서 조금 창피 당하고 대접을 못 받는 것으로 그치지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만큼 불편한 것은 아니다. 또 사람에 따라 노래는 못하지만 이야기를 재미 있게 잘한다든지 해 그 약점을 보충할만한 다른 장점을 가질 수도 있다.
반면에 핸디캡은 어떤 것인가? 어떤 치명적인 결점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 속에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 TV에서 난장이들의 모임인 LPK(Little People Korea)의 부회장이 휠체어를 타고 나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면서부터 척추에 이상이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척추 수술을 다섯번이나 받는 바람에 골다공증이 생겨 자꾸 호흡이 가빠지며 병세는 더 악화되는데도 더 이상 수술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아무리 운동하고 훈련해도 걷고 뛰거나 계단을 오르고 등산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단순히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전혀 할 수 없다. 이 청년처럼 평생을 휠체어에 앉아 지내면서 나아질 가능성이 전무한 자가 핸디캡이다.
따지고 보면 약점이란 평균 수준에 미달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할 때 갖추어야 할 요소로 외모, 건강, 집안, 학벌, 지성, 재산, 인격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각 항목별로 최고 수준의 상태를 10점이라 쳤을 때에 평균 이하인 1-4에 해당하는 것들은 단점이며 6-10점을 받는 것은 장점이다. 약점은 객관적으로 평균이하의 점수를 받은 부분 내지 평균 이상의 점수라도 본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좀더 나아졌으면 소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핸디캡이란 점수로 따지면 아예 0.0001도 줄 수 없다. 사람으로 구실을 하려면 걷고, 보고, 듣는 능력은 구태여 점수로 따질 필요도 없이 누구나 가져야 하는 기본적 자질인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시력을 점수로 따지려면 일단은 조금이라도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마이너스 얼마가 되었든 일단 수치로 측정되면 그것은 약점이다. 그러나 장님의 경우 심지어 마이너스 무한대의 수치로도 표현이 안 된다. 핸디캡이란 남보다 훨씬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그런 자질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전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그 뜻이 우리더러 단순히 너희는 약점과 허물과 죄가 많음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받아라는 것이 아니다. 너의 도덕적, 인격적, 영적인 상태와 존재 전체가 스스로 좋아질 가능성은 아예 제로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너는 처음부터 천성적인 소경이자, 앉은뱅이자, 귀머거리이므로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해도 그 상태가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적인 측면에선 모든 인간이 몇 가지 약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핸디캡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가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여러 면에서 낫지. 나도 몇 가지 약점이 있긴 하지만 얼마든지 고칠 수 있어.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세상의 죄악을 멀리하고 또 이웃에게 온정을 많이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마치 노래 실력이 형편 없었는데 열심히 연습하여 이제 노래방에 가서 창피 당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또 그 향상된 실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 예외 없이 허물만 몇 가지 있는 상태가 아니다. 속에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염려, 짜증, 시기, 질투, 분노, 음란, 사기, 궤휼, 탐욕, 죄악이 줄기차게 솟아 나오는 존재다. 나이 든다고 그 양이 줄거나 또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질적으로 확실히 구별 될 만큼 나아지지도 않는다. 나아가 혹시라도 조금 나아졌다면 그 상태를 계속해서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실력이 없다. 더럽고 추한 것들이 도대체 장소와 시간과 환경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이 튀어 나온다. 그것들이 밖에서 들어간 것도 아니요 외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서도 아닌데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저 생긴다.
간혹 나이 들어 상당히 고상해져 죄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진 것 같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사람의 진정한 내면의 실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탐욕을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아 더 이상 채울 기력을 잃고 쉬고 있는지 아니면 아예 포기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나 사람들이 갑자기 더 깨끗해지고 착해져서 그 사람의 욕심이 죄악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 주는 법도 인간 세상엔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큰 욕심을 갖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덤벼드니 “이 세상은 전부 도둑놈 뿐이고 믿을 놈 아무도 없으니 차라리 내가 손해 보고 말지”라고 푸념하며 체념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전부 도둑놈 소굴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자기 혼자만 도둑이 아니라는 뜻이지 않는가? 그럼 과연 이런 자를 두고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을 때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했다. 그 때에 성경은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 여인을 정죄하려던 사람들이 늙은이로부터 젊은이까지 나이에 상관 없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돌아 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한 여인을 감히 심판할 수 없다고 실토한 셈이므로 따지고 보면 자기들도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인간은 나이, 학식, 교양, 지위 등 모든 외적 조건과는 아무 상관 없이 전부가 죄인일 뿐이다. 그것도 간음죄보다 더한 죄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범한 죄인이다. 단적으로 말해 인간은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 즉 핸디캡의 우리말 의미대로 ‘병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긍휼은 세상에서 인간들끼리 베푸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 만이 베풀 수 있는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사랑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베푸신 아가페 사랑이다. 말하자면 본문에서 예수님은 신자더러 당신이 실현하신 그런 사랑을 남들에게 베풀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현한 사랑을 그 외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신자도 꼭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최대한의 사랑을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세상 사람의 사랑은 서로 약점만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사랑이므로 그 몇 가지 약점만 보완해주고 힘을 덜어주는 사랑이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을 허물이 있긴 하지만 조금만 고치면 쓸만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보지 않고 휠체어 탄 핸디캡으로 보시고 그렇게 대우하셨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당신을 닮아 심히 아름다운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이 덜 충만하거나 힘이 빠진 정도가 된 것이 아니라 아예 빠져 달아난 상태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육간에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던 그 순수한 모습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고 측은해 원 상태로 되돌려 놓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데 바로 그런 절실함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그런 절실함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그분과 자신만의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OOO야! 지금 너의 그 꼬락서니가 그게 뭐니? 너를 겨우 그 모양 그 꼴로 살아라고 세상에 보낸 줄 아느냐? 너는 나를 닮아 얼마든지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어!”라는 음성을 들은 자가 신자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선포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된 자는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뜻이다. 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해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즉각적으로 왜 꼭 예수여야만 하느냐고 반발한다.
그들의 뜻은 “물론 나도 허물과 약점이 많으며 때로는 잘못도 저지르는 죄인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고 또 고쳐 가고 있다. 그런데 왜 꼭 예수가 와서 내 죄를 위해 죽어야 하느냐? 이천년 전 사람과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자기의 잘못은 자기가 고쳐야 하고 정 고치지 못하면 그만큼 자기의 죄 값을 자기가 받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를 죽여 놓고 자 이 예수를 믿으면 용서해 줄게라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런 반발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때에만 타당해 보이는 말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을 심판하고 구원하실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인간을 약점 몇 개를 가진 것이 아니라 휠체어를 탄 완전한 핸디캡으로 보고 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겪는 환난과 범하고 있는 죄악이 인간의 약점 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순과 갈등이나 각 개인이 범하는 죄악과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피조세계가 부패했기에 그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고통과 죄악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귀속된다. 그런데도 스스로 부패된 인간인지라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고 나아가 그런 상태를 개선 시킬 능력도 의사도 없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 거룩하고 신령해지는 일에는 완전히 시체다. 하나님으로선 그런 휠체어에 탄 영적인 병신을 그 죄 값을 물어 모두 죽일 수는 도저히 없지 않는가? 그러니 필연적으로 당신이 직접 그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는 길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방도가 없다.
그럼에도 불신자들은 끝까지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을 외면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하나님 앞에스스로 자기의 허물과 약점을 고쳐서 당당하게 나가겠다고 고개를 빳빳이 처든다.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진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꺼내 놓고 용서를 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세상에서 어떤 선행을 했던 이웃에게 아무리 큰 사랑을 베풀었던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영원한 친구 되시는 예수
얼마 전에 끝난 미국 TV의 인기 시트콤 프렌즈의 주제가 가사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들의 삶이 이런 모습이 되리라 생각도 계획도 하지 않았다. 비록 오늘이, 이번 달이, 올해가 너의 날, 너의 달, 너의 해가 아니라 할지라도 너가 힘들고 어려울 때, 네가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네 곁에 있어 줄게.” 친구 사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그 정의를 정확하게 밝혀 놓았다.
솔직히 우리 모두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에 뭣이 그리 잘났으며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한가? 또 모든 일이 스스로 마음 먹고 계획한 대로 이뤄지는 것이 그렇지 못한 경우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많은가? 나아가 도덕적, 인격적, 종교적으로는 얼마 만큼이나 선한가?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의 뜻대로 살며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에는 어떤 열심과 진정으로 임하고 있는가? 아니 구태여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언제라도 우리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자신은 있는가?
그럼에도 예수를 부인하는 모든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여전히 자신의 몇 가지 안 되는 약점과 허물을 스스로 고치려 들고 또 고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먼저 정말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은 “과연 그렇게 결심한 순간과 그 이후를 비교해 얼마나 나아졌는가?”이다. 처음 고치려고 노력하기 시작할 때에 소원하고 계획했던 그 수준에 도달했다는 확신이 있고 또 평생을 두고 그 일에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만약 진짜로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받지 않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해도 된다. 나아가 기독교의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도 배타적이고 편협하다고 마음 놓고 비방해도 된다.
간혹 아직은 자신이 계획했던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단지 게으르거나 노력을 덜 해서 그렇지 앞으로 힘을 더 내면 하나님 앞에도 당당하게 나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신이 100% 생긴 자가 단 한명이라도 나타난다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도 진정으로 바라는 일일 수 있다. 최후의 심판과 구원을 베풀러 이땅에 다시 오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불신자들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또 있다. 온갖 세상의 갈등과 모순으로 인한 환난과 시련이 겹칠 때에, 시험과 유혹에 빠져 죄악 중에 헤맬 때에, 까닭 모를 짜증과 염려와 분노와 눌림이 겹칠 때에, 아무리 세상의 재미와 가치를 추구해도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이 공허할 때에, 그 어느 때라도 자기와 함께 해줄 진정한 친구가 있는가? 그것도 그 모든 경우에 동정심, 이해타산, 자존심, 위신, 체면, 교만, 자랑, 사기, 거짓, 위선, 조종, 등이 단 한치도 개입시키지 않을 그런 친구가 있는가? 이 질문에도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감히 단언컨대 예수를 끝까지 외면해도 된다.
그래도 불신자에게 마지막으로 물어 볼 질문이 하나 더 남았다. 스스로 되돌아 보아도 도망치고 싶은 과거, 아무리 친한 친구 형제 부모 배우자 사이에도 털어 놓고 싶지 않는 실패와 죄악, 남들이 조금이라도 눈치 채면 안 될 자신만의 비밀스런 더럽고 추한 습관, 심지어 자기가 자기를 바라 보아도 자기가 아닌 것 같으며 제발 처다 보기도 싫고 없애 버리고 싶은 흉악함, 잔인함, 음란함, 기만성, 등까지 완전히 까뒤집어 의논하며 도움을 청할 친구가 있는가 말이다.
이미 전적으로 타락된 인간으로선 이 세 가지 질문을 모두 만족 시킬 수는 결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분이 십자가 상에서 그들 모두에게 바로 이 세 가지 질문을 날카롭고도 엄숙하게 던졌기 때문이다. 약점 몇 가지만 고치려는 자들에게 휠체어 탄 나면서부터 병신이라고 하는데 좋아할 리가 누가 있겠는가?
신자는 다르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다. 단순하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예수를 잘 믿었더니 천국으로 보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가 아니다. 자신은 도덕적, 인격적, 영적으로 모두 철저하게 병신이라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여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본 자다. 나아가 평생을 두고 휠체어를 탄 핸디캡이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자다. 그래서 자신을 참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매 순간마다 그 긍휼을 받기를 소원하게 된 자다.
그래서 아직도 자신들이 병신인 줄 모르고 약점만 고치려 드는 다른 병신을 볼 때 너무나 불쌍히 여기는 자다. 상상을 해보라. 휠체어를 타고 뒤에서 누가 밀어주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자꾸 혼자서 걷고, 뛰고, 계단을 오르내리려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넘어지고 또 쓰러지면서 온 몸에 성한 데 하나 없이 피로 범벅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모습을 볼 때에 얼마나 안쓰럽고 당장 휠체어부터 가져와 앉히고 밀어 주고 싶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미 십자가에서 그 병신을 대신해 모든 피를 다 흘리신 예수님의 휠체어를 말이다.
긍휼이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 스스로 돕는 자 하늘이 돕는 것이 아니요. 불쌍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선한 일을 했으니 하나님이 보상한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이며 또 내 이웃도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 그에 걸맞게 반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없이는 우리 모두 도저히 가능성과 소망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다른 사람도 알게 해 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오직 그 긍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에게만 미친다. 그것도 긍휼을 이미 입은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럴 때에 하나님의 긍휼은 기하급수적으로 더 커진다. 당신은 지금 몇 가지 약점을 고치려 노력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휠체어를 타고 있는가? 나아가 예수님만이 당신의 유일한 진정한 친구가 되어 날마다 교제 하고 있는가? 그분이 당신의 휠체어를 가는 곳 마다 뒤에서 밀어 주고 있는가? 아니면 혼자서 걸어보려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속담과 성경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속담이나 경구가 성경 말씀과 비슷하거나 일치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예를 들면 가족끼리 화목하고 사랑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한다. 반면에 성경에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고 한다. 또 국회의원들이 선거운동을 하려면 예식장보다는 초상집을 찾아가야 어려울 때 도와주어 더 고마워 하고 또 오래도록 그 사람을 기억해준다. 성경에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留心) 하리로다”(전7:2)고 했다.
본문의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도 어디에서 많이 듣던 속담 같지 않은가? 언뜻 보기에는 스스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을 하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고 또 이웃에게 선을 베풀면 반드시 복이 되어 돌아 온다는 한국 속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와 비슷한 뜻인 것 같다. 본문은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는 제자, 즉 앞으로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 올 신자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니까 불신자보다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상식적인 내용은 아니다.
지금 긍휼히 여겨야 하는 주체(主體)는 당연히 신자다. 그런데 신자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다. 따라서 본문을 풀어 써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복되나니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긍휼을 끊임 없이 공급 받게 된다”가 된다. 따라서 본문에는 최소 세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셈이다.
첫째는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은 자인데, 신자 본인이 그런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단순히 자기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예수를 믿기로 했고 그래서 십자가 복음에 관한 교리는 많이 배워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인 자신의 분명한 개인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었다는 확신은 잘 없다. 말하자면 십자가 복음을 머리로는 알지만 그 복음 속에 들어와 가슴으로는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긍휼함을 입은 신자만이 이웃에게 긍휼함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지금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만이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불신자도 남에게 사랑을 충분히 베풀 수 있지만 이웃에게 긍휼함을 입게 할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입은 신자뿐이라는 뜻이다.
셋째는 앞의 두 전제의 필연적인 결론으로 신자가 이웃에게 반드시 나눠주어야 할 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은 또 일반적인 사랑과 하나님의 긍휼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신자 각자가 가장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은 과연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는가 아닌가이다. 또 그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긍휼이 일반적인 사랑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남들에게 사랑이 아닌 긍휼을 베풀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를 찾는 두 가지 이유
예수를 모르던 자연인이 하나님을 찾고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는 이유는 한 마디로 자신에게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많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도덕적 죄악이든, 현실적인 고난이든, 죽음에 대한 심각한 갈등이든 결국 자기 힘으로는 해결 못할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 해결해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후의 신앙 생활의 모든 과정과 결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비록 사람들이 천차만별이지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는 태도와 관점에선 사실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자기는 약점과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와 자기는 완전히 핸디캡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그것이다. 약점과 핸디캡을 그 정도의 차이만 다르지 결국은 사람이 갖는 단점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이해해선 안 된다.
약점의 쉬운 예로 음치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음치라도 가요 학원에서 꾸준히 교습을 받으면 본인이 충분히 만족하거나 전문가 수준까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나아질 수는 있다. 또 노래 못하는 것 때문에 망년회나 회식 자리에서 조금 창피 당하고 대접을 못 받는 것으로 그치지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만큼 불편한 것은 아니다. 또 사람에 따라 노래는 못하지만 이야기를 재미 있게 잘한다든지 해 그 약점을 보충할만한 다른 장점을 가질 수도 있다.
반면에 핸디캡은 어떤 것인가? 어떤 치명적인 결점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 속에 지내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 TV에서 난장이들의 모임인 LPK(Little People Korea)의 부회장이 휠체어를 타고 나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나면서부터 척추에 이상이 있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척추 수술을 다섯번이나 받는 바람에 골다공증이 생겨 자꾸 호흡이 가빠지며 병세는 더 악화되는데도 더 이상 수술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아무리 운동하고 훈련해도 걷고 뛰거나 계단을 오르고 등산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단순히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전혀 할 수 없다. 이 청년처럼 평생을 휠체어에 앉아 지내면서 나아질 가능성이 전무한 자가 핸디캡이다.
따지고 보면 약점이란 평균 수준에 미달한 것에 불과하다. 사람이 사회 생활을 할 때 갖추어야 할 요소로 외모, 건강, 집안, 학벌, 지성, 재산, 인격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각 항목별로 최고 수준의 상태를 10점이라 쳤을 때에 평균 이하인 1-4에 해당하는 것들은 단점이며 6-10점을 받는 것은 장점이다. 약점은 객관적으로 평균이하의 점수를 받은 부분 내지 평균 이상의 점수라도 본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좀더 나아졌으면 소원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핸디캡이란 점수로 따지면 아예 0.0001도 줄 수 없다. 사람으로 구실을 하려면 걷고, 보고, 듣는 능력은 구태여 점수로 따질 필요도 없이 누구나 가져야 하는 기본적 자질인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쉬운 예로 시력을 점수로 따지려면 일단은 조금이라도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마이너스 얼마가 되었든 일단 수치로 측정되면 그것은 약점이다. 그러나 장님의 경우 심지어 마이너스 무한대의 수치로도 표현이 안 된다. 핸디캡이란 남보다 훨씬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그런 자질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처음으로 전한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그 뜻이 우리더러 단순히 너희는 약점과 허물과 죄가 많음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받아라는 것이 아니다. 너의 도덕적, 인격적, 영적인 상태와 존재 전체가 스스로 좋아질 가능성은 아예 제로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너는 처음부터 천성적인 소경이자, 앉은뱅이자, 귀머거리이므로 아무리 노력하고 연습해도 그 상태가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영적인 측면에선 모든 인간이 몇 가지 약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핸디캡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가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여러 면에서 낫지. 나도 몇 가지 약점이 있긴 하지만 얼마든지 고칠 수 있어.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세상의 죄악을 멀리하고 또 이웃에게 온정을 많이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마치 노래 실력이 형편 없었는데 열심히 연습하여 이제 노래방에 가서 창피 당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고 또 그 향상된 실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하나 예외 없이 허물만 몇 가지 있는 상태가 아니다. 속에서부터 시도 때도 없이 염려, 짜증, 시기, 질투, 분노, 음란, 사기, 궤휼, 탐욕, 죄악이 줄기차게 솟아 나오는 존재다. 나이 든다고 그 양이 줄거나 또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질적으로 확실히 구별 될 만큼 나아지지도 않는다. 나아가 혹시라도 조금 나아졌다면 그 상태를 계속해서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실력이 없다. 더럽고 추한 것들이 도대체 장소와 시간과 환경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이 튀어 나온다. 그것들이 밖에서 들어간 것도 아니요 외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서도 아닌데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저 생긴다.
간혹 나이 들어 상당히 고상해져 죄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진 것 같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사람의 진정한 내면의 실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탐욕을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아 더 이상 채울 기력을 잃고 쉬고 있는지 아니면 아예 포기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이나 사람들이 갑자기 더 깨끗해지고 착해져서 그 사람의 욕심이 죄악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 주는 법도 인간 세상엔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큰 욕심을 갖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덤벼드니 “이 세상은 전부 도둑놈 뿐이고 믿을 놈 아무도 없으니 차라리 내가 손해 보고 말지”라고 푸념하며 체념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전부 도둑놈 소굴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자기 혼자만 도둑이 아니라는 뜻이지 않는가? 그럼 과연 이런 자를 두고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잡아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을 때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했다. 그 때에 성경은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 여인을 정죄하려던 사람들이 늙은이로부터 젊은이까지 나이에 상관 없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돌아 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한 여인을 감히 심판할 수 없다고 실토한 셈이므로 따지고 보면 자기들도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인간은 나이, 학식, 교양, 지위 등 모든 외적 조건과는 아무 상관 없이 전부가 죄인일 뿐이다. 그것도 간음죄보다 더한 죄 즉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범한 죄인이다. 단적으로 말해 인간은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 즉 핸디캡의 우리말 의미대로 ‘병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긍휼은 세상에서 인간들끼리 베푸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 만이 베풀 수 있는 무조건적이며 영원한 사랑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베푸신 아가페 사랑이다. 말하자면 본문에서 예수님은 신자더러 당신이 실현하신 그런 사랑을 남들에게 베풀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현한 사랑을 그 외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신자도 꼭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최대한의 사랑을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세상 사람의 사랑은 서로 약점만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사랑이므로 그 몇 가지 약점만 보완해주고 힘을 덜어주는 사랑이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을 허물이 있긴 하지만 조금만 고치면 쓸만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보지 않고 휠체어 탄 핸디캡으로 보시고 그렇게 대우하셨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당신을 닮아 심히 아름다운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이 덜 충만하거나 힘이 빠진 정도가 된 것이 아니라 아예 빠져 달아난 상태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육간에 완전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던 그 순수한 모습은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그런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고 측은해 원 상태로 되돌려 놓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는데 바로 그런 절실함이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그런 절실함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그분과 자신만의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OOO야! 지금 너의 그 꼬락서니가 그게 뭐니? 너를 겨우 그 모양 그 꼴로 살아라고 세상에 보낸 줄 아느냐? 너는 나를 닮아 얼마든지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어!”라는 음성을 들은 자가 신자인 것이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선포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된 자는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뜻이다. 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해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즉각적으로 왜 꼭 예수여야만 하느냐고 반발한다.
그들의 뜻은 “물론 나도 허물과 약점이 많으며 때로는 잘못도 저지르는 죄인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얼마든지 고칠 수 있고 또 고쳐 가고 있다. 그런데 왜 꼭 예수가 와서 내 죄를 위해 죽어야 하느냐? 이천년 전 사람과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자기의 잘못은 자기가 고쳐야 하고 정 고치지 못하면 그만큼 자기의 죄 값을 자기가 받아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그런데 예수를 죽여 놓고 자 이 예수를 믿으면 용서해 줄게라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런 반발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때에만 타당해 보이는 말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을 심판하고 구원하실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인간을 약점 몇 개를 가진 것이 아니라 휠체어를 탄 완전한 핸디캡으로 보고 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겪는 환난과 범하고 있는 죄악이 인간의 약점 때문이 아니라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순과 갈등이나 각 개인이 범하는 죄악과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피조세계가 부패했기에 그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의 고통과 죄악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귀속된다. 그런데도 스스로 부패된 인간인지라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고 나아가 그런 상태를 개선 시킬 능력도 의사도 없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아 거룩하고 신령해지는 일에는 완전히 시체다. 하나님으로선 그런 휠체어에 탄 영적인 병신을 그 죄 값을 물어 모두 죽일 수는 도저히 없지 않는가? 그러니 필연적으로 당신이 직접 그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는 길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방도가 없다.
그럼에도 불신자들은 끝까지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을 외면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하나님 앞에스스로 자기의 허물과 약점을 고쳐서 당당하게 나가겠다고 고개를 빳빳이 처든다.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진정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꺼내 놓고 용서를 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세상에서 어떤 선행을 했던 이웃에게 아무리 큰 사랑을 베풀었던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영원한 친구 되시는 예수
얼마 전에 끝난 미국 TV의 인기 시트콤 프렌즈의 주제가 가사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 나온다. “우리들의 삶이 이런 모습이 되리라 생각도 계획도 하지 않았다. 비록 오늘이, 이번 달이, 올해가 너의 날, 너의 달, 너의 해가 아니라 할지라도 너가 힘들고 어려울 때, 네가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네 곁에 있어 줄게.” 친구 사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그 정의를 정확하게 밝혀 놓았다.
솔직히 우리 모두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볼 때에 뭣이 그리 잘났으며 똑똑하면 얼마나 똑똑한가? 또 모든 일이 스스로 마음 먹고 계획한 대로 이뤄지는 것이 그렇지 못한 경우와 비교해 어느 쪽이 더 많은가? 나아가 도덕적, 인격적, 종교적으로는 얼마 만큼이나 선한가?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의 뜻대로 살며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에는 어떤 열심과 진정으로 임하고 있는가? 아니 구태여 세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언제라도 우리 모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 자신은 있는가?
그럼에도 예수를 부인하는 모든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여전히 자신의 몇 가지 안 되는 약점과 허물을 스스로 고치려 들고 또 고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먼저 정말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은 “과연 그렇게 결심한 순간과 그 이후를 비교해 얼마나 나아졌는가?”이다. 처음 고치려고 노력하기 시작할 때에 소원하고 계획했던 그 수준에 도달했다는 확신이 있고 또 평생을 두고 그 일에 실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만약 진짜로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하나님의 긍휼은 받지 않고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해도 된다. 나아가 기독교의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도 배타적이고 편협하다고 마음 놓고 비방해도 된다.
간혹 아직은 자신이 계획했던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단지 게으르거나 노력을 덜 해서 그렇지 앞으로 힘을 더 내면 하나님 앞에도 당당하게 나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죽기 직전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신이 100% 생긴 자가 단 한명이라도 나타난다면,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도 진정으로 바라는 일일 수 있다. 최후의 심판과 구원을 베풀러 이땅에 다시 오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불신자들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또 있다. 온갖 세상의 갈등과 모순으로 인한 환난과 시련이 겹칠 때에, 시험과 유혹에 빠져 죄악 중에 헤맬 때에, 까닭 모를 짜증과 염려와 분노와 눌림이 겹칠 때에, 아무리 세상의 재미와 가치를 추구해도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것 같이 공허할 때에, 그 어느 때라도 자기와 함께 해줄 진정한 친구가 있는가? 그것도 그 모든 경우에 동정심, 이해타산, 자존심, 위신, 체면, 교만, 자랑, 사기, 거짓, 위선, 조종, 등이 단 한치도 개입시키지 않을 그런 친구가 있는가? 이 질문에도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감히 단언컨대 예수를 끝까지 외면해도 된다.
그래도 불신자에게 마지막으로 물어 볼 질문이 하나 더 남았다. 스스로 되돌아 보아도 도망치고 싶은 과거, 아무리 친한 친구 형제 부모 배우자 사이에도 털어 놓고 싶지 않는 실패와 죄악, 남들이 조금이라도 눈치 채면 안 될 자신만의 비밀스런 더럽고 추한 습관, 심지어 자기가 자기를 바라 보아도 자기가 아닌 것 같으며 제발 처다 보기도 싫고 없애 버리고 싶은 흉악함, 잔인함, 음란함, 기만성, 등까지 완전히 까뒤집어 의논하며 도움을 청할 친구가 있는가 말이다.
이미 전적으로 타락된 인간으로선 이 세 가지 질문을 모두 만족 시킬 수는 결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분이 십자가 상에서 그들 모두에게 바로 이 세 가지 질문을 날카롭고도 엄숙하게 던졌기 때문이다. 약점 몇 가지만 고치려는 자들에게 휠체어 탄 나면서부터 병신이라고 하는데 좋아할 리가 누가 있겠는가?
신자는 다르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다. 단순하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예수를 잘 믿었더니 천국으로 보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자가 아니다. 자신은 도덕적, 인격적, 영적으로 모두 철저하게 병신이라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여 하나님의 긍휼만 바라본 자다. 나아가 평생을 두고 휠체어를 탄 핸디캡이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자다. 그래서 자신을 참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매 순간마다 그 긍휼을 받기를 소원하게 된 자다.
그래서 아직도 자신들이 병신인 줄 모르고 약점만 고치려 드는 다른 병신을 볼 때 너무나 불쌍히 여기는 자다. 상상을 해보라. 휠체어를 타고 뒤에서 누가 밀어주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자가 자꾸 혼자서 걷고, 뛰고, 계단을 오르내리려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넘어지고 또 쓰러지면서 온 몸에 성한 데 하나 없이 피로 범벅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모습을 볼 때에 얼마나 안쓰럽고 당장 휠체어부터 가져와 앉히고 밀어 주고 싶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이미 십자가에서 그 병신을 대신해 모든 피를 다 흘리신 예수님의 휠체어를 말이다.
긍휼이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 스스로 돕는 자 하늘이 돕는 것이 아니요. 불쌍한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선한 일을 했으니 하나님이 보상한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이며 또 내 이웃도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 그에 걸맞게 반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없이는 우리 모두 도저히 가능성과 소망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다른 사람도 알게 해 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오직 그 긍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에게만 미친다. 그것도 긍휼을 이미 입은 사람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럴 때에 하나님의 긍휼은 기하급수적으로 더 커진다. 당신은 지금 몇 가지 약점을 고치려 노력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휠체어를 타고 있는가? 나아가 예수님만이 당신의 유일한 진정한 친구가 되어 날마다 교제 하고 있는가? 그분이 당신의 휠체어를 가는 곳 마다 뒤에서 밀어 주고 있는가? 아니면 혼자서 걸어보려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가?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