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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빛을따라간사람들] 잔느 귀용

영성묵상훈련 황상범 전도서............... 조회 수 4067 추천 수 0 2012.09.07 17: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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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41&page=65 

잔느 귀용 
 
너희 마음판에 나를 봉인으로 새기라

기독교 교회사를 살펴볼 때 잔느 귀용과 같이 높은 신앙의 경지에 도달한 성도는 많지 않다. 왕정과 사회의 부패와 함께 타락했던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잔느 귀용이라는 신앙의 걸출한 위인을 탄생시키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의 생애를 통해서 중세시대의 잠자던 교회의 신앙에 신선한 바람을 불게 하셨고, 이 바람은 퀘이커 교도와 진젠돌프, 모라비안 교도, 웨슬레, 허드슨 테일러, 워치만 니 등 후대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교회 안에 살았고 교회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받은 것은 오해와 비난과 부당한 대우 그리고 음모와 괴롭힘 등이었다.
그녀는 세상과 교회의 권위자들에 의해 십 수년간의 구류와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잔느 귀용이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이 심히 큰 까닭이요 그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용감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고난의 은총에 온전히 반응함으로 그녀는 중세교회 속에서 그리스도를 밝게 비취는 신앙의 등대가 되었던 것이다.

출생과 유년시절

잔느 귀용은 1648년 4월 18일, 프랑스의 루이 14세 때 파리 남쪽의 몽타리그에서 부유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두분 다 재혼한 분들이었고 양쪽 모두 첫 번째 결혼을 통해서 자녀들을 두었다. 잔느 귀용을 핍박하는 데 끝까지 앞장섰던 사람은 바로 그녀의 의붓 오빠인 라 모트 신부였다.
그녀는 임신된 지 7개월만에 태어났기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병약하였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랐다. 어머니는 그녀보다 남동생을 더 사랑하였다. 잔느의 어머니는 종교나 자녀 교육보다는 사교계나 자선 사업에 관심이 더 많았기에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녀원에서 자라야만 했다. 반면 잔느 귀용의 아버지 끌로드 보비에 드 라모트 씨는 매우 독실한 종교인이었고 상당한 인격자여서 지역사회에서 존경받았고, 딸 잔느를 무척 사랑했다.
본래부터 종교적 심성이 남달리 깊었던 잔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수녀원 생활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나마 수녀원생활도 병과 다른 사정에 의해 자주 옮기게 되었는데 이는 대개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그녀는 자주 바뀌는 환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잔느에게 지옥의 꿈을 꾸게 하셨다. 잔느는 지옥에서 받는 형벌의 무시무시함과 자신의 자리도 그곳에 있음을 보고 슬피 울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에게 조금만 더 생명을 연장시켜 주옵소서. 그러면 다시는 주님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어린아이의 부르짖음에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그녀는 자신의 꿈과 죄를 신부님께 고백 드렸다. 그런 후에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순교의 고난을 당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수녀원에 같이 있던 소녀들로 짖굿게 그녀의 순교 열정을 시험하였는데 잔느는 친구들과의 순교자 놀이에서 준비해 놓은 순교시키려는 큰칼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잔느는 이날 이후 자신의 신실치 못함에 오랫동안 울적하였고 자주 앓아 누웠다.
어린 잔느는 예수님께 작은 희생이라도 봉헌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수녀원에 있는 아기예수 봉헌제단 뒤에 몰래 그녀의 아침식사를 숨겨두었다. 끼니를 굶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대단한 희생이었다. 어린 잔느는 스스로 선택하여 음식을 드리면서 고행하기를 원했다.
잔느가 열세살 때 그녀는 수두를 앓아 3주간 격리된 채 혼자 누워 있었다. 그때 잔느는 방 한구석에 있는 성경책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 고독한 잔느에게 위로가 될 만한 것은 성서뿐이었다. 그녀는 밤낮 성서를 읽었다. 그리고 성서의 내용들은 그녀의 마음속에 깊이 박히게 되었다. 훗날 그녀가 쓴 책들의 인용된 수 많은 성서구절은 바로 이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쓰여지게 된 것이다.
잔느에게는 자끄라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남동생을 편애함으로 잔느는 많은 상처를 받았다. 심지어 그녀가 아플때도 남동생이 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어떤 것이라도 그녀에게서 빼앗아 동생에게 주곤하였다.
기세등등한 자끄는 누나인 잔느를 마차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어떤 때는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 또한 어머니의 편애로 인해 남동생의 잘못을 눈감아 주었다. 그녀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고 그녀의 마음도 삐뚤어지게 되었다. 그녀는 점점 심술궂어졌고 거짓말을 하고 화를 잘 내게 되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착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결코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어.”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잔느의 실패를 그녀를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균형 추로 선용하셨다. 그리스도의 의를 세우시기 위하여 인간의 의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작업을 성실히 진행하신 것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며

잔느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고 자랄수록 미모인 어머니를 닮아 갔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잘 치장시켜 데리고 다니기를 좋아했다. 잔느도 치장하고 어머니를 따라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교만과 허영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의 사촌이 베트남으로 선교를 떠나는 길에 그녀의 집에 방문하였다. 사촌이 떠난 후 사촌의 위엄과 그가 말한 이야기들이 그녀의 가슴에 깊숙히 박히게 되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울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신부님을 찾아가 그동안의 행실과 괴로움을 토로하였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삶은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점점 유순하여졌고 생활도 규칙적이게 되었다. 잔느 귀용은 그때의 은혜를 훗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하나님, 제가 주님께 온전히 마음을 드렸을 때는 왜 제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왜 주님께 다시 반항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분명히 주님은 제 마음을 온전히 차지하실 만큼 강하십니다.” 회심이후 잔느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진솔하였다. 알고있는 모든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정직하게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 영역을 정복하실 수 있도록 의지를 온전히 드리기를 기도했다. 물론 온전히 드리지 못한 부분도 약간은 남아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인도해 가시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어떤 분노나 교만이나 지극히 작은 죄까지도 철저히 다루어 나가셨다.
잔느의 기도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주어졌다. 종교적인 의식을 지켜나갔고 기도와 독서를 위해 하루 종일 침묵하기도 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었다. 심지어 식탁보까지 그들의 집에 갖다주었다.
성 프랜시스 살레시오의 책을 통해 영적인 기도가 무엇인지 배웠고 지도 신부에게 그러한 기도를 가르쳐달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도에 갈급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녀는 오랫동안 꾸준히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의 은사를 달라고 간청하였다.
어느 날 샹딸부인의 생애에 대한 책을 읽던 중 “너의 마음 판에 나를 봉인으로 새기라.”는 말씀을 듣고 달구어진 다리미로 예수님의 이름을 가슴에 새긴 샹딸 부인의 행실을 보고 그녀도 사모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종이에 쓴 뒤 바늘로 네 귀퉁이를 살가죽에 꿰매서 붙이고 다녔다. 그 종이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붙어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잔느는 수녀가 되기로 마음에 작정을 하였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그의 결심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개로 친척 중 한 분을 소개받게 되었는데 그는 매우 교양있는 젊은 신사였다. 잔느는 그 신사와 연애를 하게 되었다. 잔느는 그와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기도를 중단해야만 했다. 이것은 사단에게 틈을 허락한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영은 점차 기도의 양분을 섭취하지 못한 채 시들어갔다.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가슴은 냉냉해져만 갔고 과거의 나쁜 습관과 교만과 자기애착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기도는 사탄이 침입할 수 없는 요새입니다. 사탄은 그 요새 주위를 포위하고 공격하며, 소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실하고 굳게 지키는 한 사탄은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연인보다 주님을 훨씬 더 사랑합니다

시련의 결혼생활

결혼식 후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잔느는 그곳이 그녀의 초상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 당시 잔느의 나이는 16세였다. 시댁 식구들의 생활방식은 친정집과 전혀 달랐다. 전에 친정에서는 점잖게 행동하고 말도 예의바르게 해야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시댁에서는 누구도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박하면서 그녀의 결점만 들추어내려 했다. 또한 친정에서는 자유롭게 질문하라고 격려 받았으나 시댁에서는 질문하고 이야기하면 논쟁하려든다고 책망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을 자유도 없었기에 점차 생기를 잃고 바보가 되어갔다.
이러한 시련은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도록 해주었다. 그녀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행하였던 모든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통회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하였고, 적어도 결혼한 후에는 의도적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시 기도를 통한 주님과의 대화를 하기 시작하였고 더 이상 하나님을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에게는 허영심이란 끈질긴 죄의 욕구가 따라다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까지 잔느는 그녀의 허영심의 본질을 꿰뚫을 만큼의 빛 가운데 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표면적인 주님과의 관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포기를 위한 고통

잔느의 결혼생활을 어렵게 한 것은 실상은 그녀의 허영심을 기초한 범죄들이었다. 병중에 있을 때는 인내의 훈련을 받는 듯 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함에 따라 다시 허영심은 고개를 들었다. 매우 드물기는 하였으나 그녀는 사람들에게 예쁜 손을 보이려고 장갑을 벗고 다니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고 나면 집에 돌아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울면서 회개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녀의 허영심을 극복하게 하기 위하여 시어머니와 더불어 그녀를 함부로 대하였던 하녀를 붙여 주셨다. 잔느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였고 순응하기를 원하였기에 머리모양도 평범하게 바꾸었고, 화장도 하지 않았으며, 거울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였다. 독서 또한 적은 양의 영서들로만 제한하여 읽었다. 하녀가 그녀의 머리를 빗기는 동안 그녀는 허영심의 욕망을 포기하고 하녀의 손에 모든 손질을 맡기고 하녀의 영적 향상을 위하여 큰소리로 책을 읽어 주었다. 그러면서 잔느는 전보다 훨씬 허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비해 뽑히지 않는 허영심과 매일 억압된 생활의 교차 속에 그녀는 마침내 큰 병을 얻었다. 이 병은 오래 지속되었고 점점 심해져서 의사도 절망적인 선언을 하였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슬픔 속에 잠겨 있을 때, 유독 그녀의 죽음에 무관심한 것은 오직 그녀 자신뿐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고 죽음이 임박했을 때도 담담하였다. 하나님은 이런 그녀에게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큰 고통을 참아내는 인내심을 얻는 것 외에 세상의 모든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체험하게 하였다. 그후로 그녀는 전보다 더욱 달갑게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단순한 기도로의 부름

오랫동안 쇠약했던 잔느는 점차 건강을 회복하였다. 당시 그녀는 하루 2번 기도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실행하였고 자신을 이겨내기 위하여 부지런히 자신을 성찰하였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집에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녀는 주님을 섬기는 데 부족함이 많았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적 사랑이 물과 기름처럼 섞여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아가씨가 친정집에 오래 머물게 되었는데 잔느는 그 아가씨와의 신앙교제를 통해 단순한 기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아가씨의 지속적이고도 단순한 기도는 그녀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잔느는 끊임없이 묵상하고 소리내어 기도하고 기뻐하고자 애썼으나 그 어떤 노력으로도 진실하신 하나님을 느낄 수 없었다. 실상 그것은 단순함 가운데서만 경험되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잔느를 더욱 단순한 기도로 나아가게 도와준 분은 그녀의 사촌 오빠였다. 그는 잔느에게서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발견하자 잔느를 커다란 사랑으로 품어주었다. 그는 단순하게 기도하는 법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했으나 그녀는 아직까지 그것을 받아들일 단계가 아니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성 프란치스코회에 있는 경건한 한 사람을 친정으로 보내심으로 잔느의 눈을 열어주셨다. 친정아버지의 소개로 만나게 된 이 사제는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잔느의 기도에 대한 어려움을 듣고 난 뒤 말을 꺼냈다. “부인, 그것은 부인께서 안에 있는 것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서 찾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의 말은 잔느가 수 년동안 찾았던 무엇인가를 떠오르게 하였고 발견하게 하였다. 그것은 잔느 자신이 부유한 가운데 영적으로는 빈곤하였고 연일 이어지는 잔치상 가운데 그의 영혼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찾던 주님은 정작 단순한 기도 가운데 임하시는 풍요로우신 주님이었다는 사실이다. 잔느는 자신 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단순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그 사제가 다녀간 뒤 잔느의 삶은 너무나 갑자기 변하여서 다른 사람은 물론 그녀 자신조차도 이를 실감하지 못하였다. 그녀 속에 문제가 되었던 결점이나 거리낌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마치 거대한 불 속에 타 버리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 후로도 그 사제는 잔느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주었다. 이는 그녀를 신앙의 거목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치밀한 배려였던 것이다.

단순한 기도의 소중함

잔느에게 주어졌던 것은 어떤 황홀경이나 환상이 아니라 기도였다. 황홀경은 순수하지 못할 수도 있고 착각이나 마귀의 속임수에 빠질 위험도 있다. 환상 또한 주님과의 참된 연합을 이루게 하지는 못한다. 영혼은 환상에 의지해서는 안되며 그것들의 도움은 받되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은총과 은사를 주신 분이 우리의 목적이어야지 은총과 은사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설령 천사로부터 왔다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가 아니라면 그릇된 판단과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한 우리의 이성을 어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말씀을 소리로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되고 본질적인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받아들인 영혼의 중심에 계시며 우리를 통해 열매를 맺고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그 영혼을 하나님 자신께로 인도하신다. 주님의 능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영혼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여 그 영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 전달된다.
이것은 그녀의 신앙이었고 깨달음이었다. 잔느는 자신의 마음을 은사에 두지 않고 하나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오직 하나님께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하나님은 이것을 무척 기뻐하셨다.

깊어져 가는 사랑의 효력

주님께 대한 단순한 사랑과 기도는 그녀로 하여금 고난을 사모하게 하였고 자신이 누렸던 가장 소중한 쾌락까지도 거부할 수 있는 마음을 주었다. 이제 그녀의 삶은 전에 그토록 좋아했던 육적인 것들을 거절하고 오히려 전에 싫어하고 혐오하던 것들을 취하게 되었다. 매우 까다로웠던 식성도 원만해져 아무 것이나 다 먹었다. 가난한 병자들의 상처나 종기도 치료하고 돌볼 수 있게 되었으며 점차 거리낌이나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게 되어 계속적인 충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갖게 된 것은 예수님께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 그녀는 “연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훨씬 더 열렬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강하게 그녀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외에 다른 것은 거의 생각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에 말씀자체를 심어놓으셨기 때문에 때로는 말씀을 듣거나 묵상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더라도 그 효력은 항상 있었다. 그 효력은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나타났다.
순수한 사랑의 열정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고통도 감수할 용기를 심어주었다. 단순히 고통을 벗어나는 것만 즐거워하는 것은 고통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주님의 고통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성취한다. 이제 그녀의 유일한 기쁨은 그녀의 유일한 사랑,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것이었다. 다른 즐거움은 그녀에게 오히려 고통이 되었고 주님을 잃어버리게 하였다. 그녀에게 임한 하나님의 임재는 명상하는 사고의 힘이나 상상력을 통해서가 아니고 의지 안에서 계속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잔느는 그녀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됨을 최대의 기쁨으로 여겼다. 그녀의 모든 의지가 하나님께 항복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사랑의 불로 그녀의 일치되지 못한 부분을 태워서 정화시켜 주셨다. 그녀는 점점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분의 기쁜 뜻만을 소망하는 거룩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측량할수 없는 지혜의 비밀이여

순명

순명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굴복하는 것도 소중하고 복되나 더 복스러운 것은 스스로 원하고 따르는 것이요 이것은 은혜인 것이다. 순명하는 사람은 주어진 환경 즉, 사람이나 사건을 보지 않고 그 가운데 항상 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환경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잔느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그녀의 집안에 천연두가 발생하였다. 어린 딸은 천연두에 걸려 곧 죽을 것처럼 심하게 앓고 있었고 큰아들 역시 천연두를 앓아 흉한 얼굴로 변했다. 주위 사람들은 잔느를 포함한 나머지 집안식구들을 피신하기를 원했으나 잔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피신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큰아들을 애지중지 사랑하는 시어머니가 싫어하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잔느를 설득하려고 할 때 그녀는 시어머니의 싫어함을 말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녀가 시어머니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잔느는 아무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였기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집에 머물렀다. 염려스러운 것은 그녀의 둘째 아들도 천연두에 전염되어 앓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둘째 아들은 천연두로 인하여 죽게되었고 덮친 데 덮친 격으로 잔느 마저도 천연두에 감염이 되어 사경을 헤매이게 되었다.
그러나 잔느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어떤 작은 동요도 내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죽음직전까지 이른 그녀에게 의사조차도 부르러 보내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잔느는 삶과 죽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 그녀 자신을 완전히 맡김으로 순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은혜로 그녀를 붙잡아 주었기에 수혈을 거부하는 시어머니의 말을 의사의 권하는 말보다 따랐다. 이는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에 대한 신뢰와 순명의 자세이었던 것이다. 시어머니의 신뢰하는 의사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늦었기에 여러 번의 수혈도 오히려 해가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천연두라는 질병을 통해 둘째아들의 생명과 큰아들의 곱던 외모가 없어짐과 잔느의 미모를 거두시었다. 그러나 이일로 잔느의 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고 단련하시기 위하여 잠시 우리를 내버려두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에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고 우리를 건지신다. 성경에 말씀대로 죽음의 문턱까지 데려가셨다가 다시 건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응하게 하려하심이다. 이것은 잔느가 자아를 하나님께 포기하고 얻은 신앙의 유익이요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더 깊은 십자가

잔느는 자신을 변호할 때면 언제나 실패했고, 내적이든 외적이든 오히려 새로운 고통만 초래할 뿐이었다.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너무도 매혹되었기에 이 모든 무거운 십자가가 가볍게 느껴졌다. 잠시라도 십자가가 없어질 때는 자신이 십자가를 잘못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의 신실치 못함에 대하여 아파하였다. 잔느는 하나님께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벌주셔서라도 십자가를 거둬 가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 십자가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더욱 큰 무게로 다가왔고 그녀의 갈망은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녀가 하나님께 받은 좋은 교훈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갈망하는 사람의 능력에 맞추어 그에게 맞는 십자가를 주신 다는 것, 또 주시는 모든 환경 속에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없는 상태나 십자가를 갈망하는 부족한 상태가 풍족한 상태보다도 더 유익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풍족할 때는 자기애를 살찌운다. 그러면 우리자신은 결코 죽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자기애는 너무도 간교하고 위험하게 모든 것 속에 숨어있었다.
그녀의 십자가와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속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그녀의 서두르는 태도였다. 잔느는 점차 자신의 조급한 마음과 인내치 못하는 마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뚜렷이 느끼기 시작하였고 그 손길에 자신을 맡기게 되었다.

하나님께 빚지는 기쁨

잔느는 하나님께 빚지는 것을 기뻐하였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비참할 때도 그녀를 만족스럽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를 의지하며 그 비참함을 끝내려 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에서 평생을 견디려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모든 사람이 그녀와 같이 행동할 것을 충고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지혜

잔느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주께서 어두움과 죽음의 영역까지 인도하려고 작정하신 사람들에게는 인도자가 전혀 없는 것같다. 그래서 마치 주께서 파괴하시고자함 같이 보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잔느에게 남아있는 자기애를 없애갔다. 잔느처럼 이 과정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구원하시기 위하여 부른 것이 아니요 파괴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처럼 보인다.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잃게 하기 위해서 부른 것 같아 고통스럽다. 하나님께서는 파괴된 것을 다시 세우길 기뻐하시고 세워진 것을 다시 파괴하길 즐겨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큰 수고와 기술로 세워진 성전을 허무시고 인간의 손으로가 아닌 기적으로 하늘에 영원히 있을 집을 세우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이 지혜에 대하여 잔느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하나님 외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의 비밀이여! 단지 며칠 간 피었다가 사라지는 인간이 그 비밀을 알려고 열중하고 있다니요!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며 누가 하나님의 상담자가 되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죽음으로써만 그리고 자아를 완전히 잃어버림으로써만 알 수 있는 지혜가 아닌지요?"
잔느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로 거의 7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간에 사랑하는 딸과 아들과 아버지 그리고 영적 어머니와 조력자 모두를 잃게 되었다. 마치 느부갓네살 왕처럼 짐승들 사이에서 살도록 버려진 것 같았다. 한탄스런 세월이었지만 하나님의 지혜로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당시 그녀는 공허하고 어둡고 무력한 상태에 있었고 그녀의 기도는 메마르고 아무런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효력이 있고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신다. 그것이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나 바라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선하는 하나님께로 지혜의 안배에 따라 정확한 때에 가장 적당한 것으로 채워주시는 은총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확신한다면 어떠한 고난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에 잇대어 살다

잔느는 우리에게 영원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순전히 의지할 때 모든 것이 놀랍도록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도 그분 안에서 겸손의 근원으로 입증됩니다. 만일 영혼들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하시든 고통스럽게 하시든 그분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충실히 맡긴다면, 순간순간 그분의 손길에 의한 다루심과 섭리에 의한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전혀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것 외에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고, 비록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길과 방법을 그 순간에는 모른다 할지라도 곧 영원한 진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잔느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낮추시고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철저히 깨닫게 하시고 또한 자기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일들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잔느를 오랜 세월 동안 광야훈련을 받게 하셨다. 비록 당시에는 그녀가 알지 못했다 할지라도 잔느는 하나님께 쓰실 만한 그릇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결국 잔느는 이 과정을 통해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볼 땐 실로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한 꿈도 미래도 소망도 목표도 잃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다만 하루하루 그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어떠한 손길이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어떠한 반대세력이 온다할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행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이요 그녀는 단지 '주의 뜻이 이루워지이다'라는 믿음으로 순종할 따름인 것이다. 즉 모든 환경은 다만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진행되는 것뿐이다. 이제 더 이상의 걱정과 두려움은 주안에서 잊혀진 것이다. 이것이 영원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영혼을 낮추는 가장 확실한 길, 겸손의 길

마땅한 사람

사람들은 과부가 된 잔느의 짐이 가벼워졌으리라 생각하였겠지만 실제는 그와는 정반대로 더욱 늘어났다. 전에 잔느에게 무례히 대했던 하녀는 이제 잔느를 의지해야 함으로 온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보다 더욱 격하게 잔느에게 대하였다. 하녀는 잦은 술버릇으로 인해, 심한 알코올 중독증세를 보이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오면 그녀는 잔느가 자신을 멸시하고 절망에 빠뜨렸으며 잔느로 인해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되었다고 소리를 지르곤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곤경에 있는 잔느를 강하게 붙들어 주시어 능히 인내케 하셨다.
잔느가 살고있던 곳에 교리적으로 의심을 받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잔느는 처음에는 그 사람과 친분을 유지하며 그의 회심에 대한 소망까지 품었다. 그러나 후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을 알고 그와의 친분을 끊으려 하자 그는 본격적으로 잔느를 비난하기 사작하였다. 과거에 했던 많은 구제활동에 더이상 참여치 못하는 그녀를 보고 잔느가 행하였던 많은 구제가 자신의 덕분인양 공적을 자신에게로 돌리었고, 잔느를 도시의 스캔들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몰았다. 그는 믿음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할 수 있는대로 잔느를 미워하게끔 하였고,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은 잔느를 미워하였다.
이에 대해 잔느는, 자신에 대해 그 신사가 비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비난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사람들은 자신의 실체를 알면 더욱 자신을 짓밟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잔느는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것도 자신에게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처럼 다른 사람들의 미덕을 칭찬하였고 자신에게서는 아무런 미덕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때로 너무나 초라해진 자신을 벗어버리고도 싶었지만 벗을 길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잠시라도 그녀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자하면 하나님의 강한 빛이 그녀의 양심을 밝게 비추어 그녀로 하여금 죄된 자신을 속이려하는 위선적 행동임을 꾸짖었다.
그녀는 성경의 비유된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 중 세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었다. 비록 그녀 자신은 아무 위로도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였으나 실상 하나님께서 잔느를 세리와 같이 가난한 자로 그녀를 치장하여 주시는 것이었다.

비밀스러운 평온함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순간도 잔느로 하여금 사람과 피조물로 인한 생동하는 감각을 느낄수 없게 하셨다. 그녀는 마치 겉사람에 대해 자유한 것과 같게 되었다. 그후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으나 정작 그녀 자신은 이것을 충분히 깨달을 수 없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싫어하시고 자신의 위선으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나 하듯이 외부의 평판도 점점 나빠져만 같다. 자신의 연민에 빠지지는 않았으나 이 문제는 그녀의 마음속에 계속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잔느는 무력감에 빠져 가난한 사람을 도우러 가지도 못했고 교회에 머물지도 못했으며 암송기도도 못하였다. 그녀에게 재혼코자 한 신사들은 많았으나 그녀는 어느 누구와도 재혼하여 고통을 벗고자 하지 않았으며 벗을 수도 없었다. 그녀의 처지는 참으로 애처로웠다. 하나님 외에 어떠한 기쁨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겠는가! 그러나 더욱 가련한 것은 하나님에게서조차도 기쁨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5-6주 동안 극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녀는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고 스프 한 숟가락을 먹고 기절할 정도로 극도로 쇠약해져있었다. 구원의 희망도 찾을 수 없었고 죽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살아갈수록 더욱 죄를 짓는 것이 괴로웠기에 계속 죄를 짓느니 차라리 지옥을 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일반적인 죄에서보다는 행하였던 선한 일과 함께 품었던 악한 생각으로 인한 것들이었다. 잔느는 사람들이 ‘의’라 생각하는 의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 진리로 강하게 받아들여졌다.
사방을 둘러봐도 그녀에게 구원의 빛은 올 기미가 거의 없었다. 그녀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떠한 안전도, 영적건강도 없었기에 잔느는 자신에게 안식하거나 구원을 이룰 선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비밀스런 평온함이 찾아왔다. 그녀가 점점 부서지는 것처럼 보일때 그녀는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져 갔다. 하나님이 자신을 싫어하시는 것이 그토록 크게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녀의 부족은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채워져 갔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하나님께서는 잔느의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에게 높은 평가를 주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잔느에게 있어서도 주위 사람들, 특히 위대한 성도들에게서조차 비난받는 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고 큰 고통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린 것과 그녀가 지은 모든 잘못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꼈다.
그녀는 메마름과 상실감에 익숙해져 있었다. 차라리 그러한 상태가 풍족한 상태보다 더 좋았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 하나님의 은사까지도 내어놓는 영혼의 이끌림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연어가 고향을 찾아 바다를 거쳐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듯이, 잔느는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좁은 길, 메마른 길, 가난의 길을 선택하여 날마다 나아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심어주신 진리, 좁은 길은 걸어가신 그리스도를 아는 선지식이었던 것이다.
좁은 길에는 신비한 묘미가 있어 그 길을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좁은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온전히 거룩하고 완전한 모습이 될 때까지…. 그러나 그 길로 인도받는 이들에게는 고통의 연속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보이는 하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자신들의 모든 감각을 부수시고자 무자비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충격이다. 그래서 갈수록 세밀한 죄가 보여지고, 구원의 십자가조차도 더 이상 은혜의 십자가라기보다는 실제 자신의 허물로 보인다. 예수님의 지신 십자가는 모두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과 말의 결과로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잔느에게 베푸신 은혜와 험악한 길에는 한가지 전반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녀가 오직 주님을 아는 지식, 그 안에서 주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위대함

잔느가 걸었던 길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바로 그 길이다. 어둠의 길이요 영혼을 낮추는 가장 확실한 길, 겸손의 길이다. 예수님과는 비교도 안되었으나 모든 것은 주님의 손에 의해 주장되었다.
부정하고 이기적인 영혼이 불구덩이 속에서 금으로 정화되어 갔다. 전에는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가득 찼었으나 이제는 어린아이처럼 순종하며 다른 아무런 의지도 갖지 않았다. 전에는 사소한 것 때문에 다투었으나 이제는 즉시 항복하였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며, 인도함을 받으며, 즐겁게 부모의 품에 안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아무 것도 기대할 수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느 위대한 사람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은 자유와 힘이 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김으로 인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이같은 어린이다움이 세상의 많은 지혜자들을 당황케하는 바로 그 위대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어린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잔느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선을 행하는 것조차 인위적으로 흉내내지 못하도록 만드셨다. 그녀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어지는 죽음의 길을 순종함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것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달려가 마침내 얻은 보화
 
여전히 계속되는 시련의 터널

잔느는 비참하고 심한 시련을 겪는 동안 아무런 좋은 것을 보지 못하였고 위안도 없었다. 시집살이의 7년의 세월중 마지막 5년동안 그녀를 가장 심하게 괴롭힌 것의 하나는 그녀의 상상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안식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교회에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마치 자신이, 아버지께서 세워놓으셨으나 울타리가 모두 부서진 채 방치된 포도밭처럼 느껴졌고, 교회에 오고가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거리가 되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비참함과 압박에 짓눌린 채 계속 십자가 아래서 자신의 날이 끝날 때만을 생각했고 다시 회복되리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마저 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끔찍하게 느껴졌다. 최소한 하나님을 위해 자신이 무엇인가 하기를 소원하였다. 자신의 굴러떨어진 곳, 이전의 행복한 때를 생각하면서 비록 자신이 부서진 희생물이라 할지라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분을 섬기고 싶었다.
이따금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그때처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상태로 모든 것이 회복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즉시 거절당하고 깊은 심연 속으로 내던져졌다. 자신이 불충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7년이란 세월 속에서 그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선한 양심이 순종하는 훈련의 과정을 걸어갔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 그녀의 마음속의 모든 의도의 불순함을 정결케 하시었다. 잔느가 큰 복을 받았다함은 그녀 자신은 비록 인식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녀는 충실히 선한 양심을 따라 순종하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그녀의 심정은 다음 기도에 잘 반영되었다. “하나님, 저는 영원히 하나님의 시선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멀어진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점점 내 고통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그런 무감각은 저를 최고로 비난하는 최후의 잔인함 같았습니다. 그 냉랭함이 제게는 죽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과 하나님의 고귀한 사랑 안에서 완전히 살기 위해 제가 자아에 대해 죽었으므로 냉랭했던 것은 당연합니다.”

믿음의 동반자

잔느의 믿음의 시련을 잘 이해한 분은 라 콩브 신부님이었다. 그는 잔느의 경험과 비슷한 경험을 하여 그 당시의 자신의 마음을 설명해 주었다. 그 후 신부님은 꿈을 통해 하늘에서내려온 듯한 어떤 여인이 잔느에게 제네바로 가라는 명을 내리는 것을 꾸게 되었고, 이를 잔느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신부님은 잔느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음성을 듣게 되었는데 “너희 둘은 같은 장소에 거하게 되리라”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다. 이는 이 둘이 비록 떨어져는 있으나 내적인 같은 경험을 통하여 십자가에 자아가 못박히므로 주님 안의 참 안식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라 콩브 신부님의 편지를 받은 후 잔느는 자신 안에 생명이 회복됨을 느꼈다. 그때까지는 마치 죽은 자가 살아 일어나기는 했어도 아직 수의를 벗지 못한 상태와 같았었다. 그런데 바로 편지를 받은 그날, 완전한 생명 안에서 전적으로 자유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무거운 짐 아래 짓눌리기 전 상태와 같이 본성을 완전히 벗고 되살아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하나님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장엄함과 순결함으로 다시 오신 것이다.
그녀는 이때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안에서 그 동안 제가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이제 제가 소유하게 된 평안은 완전히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것이기에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전에 즐겼던 모든 것은 다만 하나님의 은사인 평안이었지만 이제는 평안의 하나님을 받았고 소유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는 성경의 말씀이 잔느에게 응한 것이다. 범사에 선한 양심을 따라, 성령의 인도함을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얻게 된 예수님의 의요, 하나님의 뜻과 양심이 충돌이 없으므로 얻게 된 평강이요, 이로인해 찾아오는 영원한 희락인 것이다.
잔느는 과거의 비참함을 기억할때 어디선가 옛 본성이 자리를 차지하려 할까봐 여전히 두렵기는 했으나, 자신의 옛 본성이 고개를 쳐들려 할 때 자신을 지키고 있는 영이 그것을 내쫓아 버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새로운 상태는 그녀 자신으로 인함이 아닌 것을 알았기에 교만할 수 없었다. 또한 그동안의 경험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게 해주었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잔느는 한동안 이 복된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했지만,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변치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아니하였다. 잔느는 고통을 통해 한가지 얻은 판단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만일 어떤 선한 것을 판단하고자 한다면 선한 것 자체보다는 그 앞에 있었던 고통에 의해서 판단해야 하고, 행복 역시 행복을 느끼기 전에 겪었던 슬픔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바울의 증거는 잔느에게 위로가 되는 진리였다. 단 하루 동안의 행복은 수년 동안 고통받은 것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자신이 누리는 행복은 비록 동터 오는 새벽녘에 불과했지만 그 동안 겪은 모든 것을 다 지불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 회복되었고 그 기쁨은 전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베르토트라는 신부님과의 대화 중에 자신의 상태의 많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였을 때, 신부님은 무엇때문인지 “아니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잔느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신부님의 대답은 그녀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있다면 어떠한 상태든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마다 그녀 안에서는 천상의 복들이 점점 증가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전에와 달리 아무리 선한 일을 하여도 자아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게 되었다. 자아 중심적인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면 그 즉시 떨쳐 버렸다. 마치 영혼 속에 미리 차단하는 장치가 있는 것처럼 되었다. 그녀의 상상력은 안정이 되었고 청결한 생각과 순전한 마음에 그녀 자신도 놀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기에 잔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신교가 많은 제네바를 향하여 끌리도록 하셨다. 그러나 결코 이 인도하심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는 은밀히 진행하시므로 마귀의 공격을 받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 안에서 침묵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는 것과 함께 수행할 수 있는 방법도 주실 것이므로 만족스러웠다. 잔느는 성령님께서 어디로 이끄시든지 따라갈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여기에 잔느의 큰 증거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할지라도 다만 기뻐할 수 있고 영원히 마음의 자유와 평강을 누리는 것이며 그 누구의 것도 부럽지 않은 것이다. 그 무엇보다 보배로운 주님 자체가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주시기 위해 잠깐 허락하신 다양한 은사에 마음을 빼앗겨 더 이상 나아가지도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경우가 있다.
참된 안식 자체이신 하나님께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길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다. 길이란 계속가야 한다. 도중에 멈춰 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부름의 목적은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옛자아가 완전히 죽는데까지 이르는 그것이다. 거기가 길의 끝이며 잔느는 십자가를 통해 이 길을 꾸준히 걸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도로 부름 받은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잃고 새로이 발견되기까지 안주하지 않고 부지런히 달려가야 한다.
잔느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완전한 평안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마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준비하고, 더 이상 슬픔이 없는 새예루살렘처럼 느껴졌다. 하나님의 의지가 그녀의 영혼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매일 공급하시는 것으로만 양분을 취하였다. 자신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평안하였다. 이런 상태는 지속되었고 점점 더 견고해졌다. 특별히 원하는 것이 없었고 무엇이든지 만족하였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누군가 자신에게 물어올 때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그녀는 스스로 놀랐다.


측량할수 없는 지혜의 비밀이여

가시에 찔린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잔느는 제네바에 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분명한 뜻을 알았다. 그러나 뉴 가톨릭공동체에 속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보여 주신바가 없었기에 그들과의 계약에 주저하였다. 잔느는 제네바를 위해 쓰도록 계획된 돈이 엉뚱하게 뉴 가톨릭공동체에 쓰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또 다른 한편 돈을 내려놓지 못하는 본성에서 나온 의아심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녀는 계약체결을 위한 공증인이 계약서를 다 읽기도 전에 사인을 함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을 따라 양심을 쫓아 행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뉴 가톨릭공동체의 수녀님도 들어와 계약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잔느의 제네바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감추심이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결된 이 일은 전의 생활방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것은 시작 단계에 불과 하였다. 점차 더욱 완전한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이 기다리고 있었다. 잔느는 뉴 가톨릭공동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직접 제네바로 가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은혜, 즉 상처를 치료하는 약을 만드는 법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거하며 지금까지 살아 온것처럼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영혼을 얻기를 소망하였다.

가시에 둘린 심장

잔느는 딸과 도울 두명의 하녀만을 데리고 제네바로 떠났다. 배안에서 딸은 골풀을 가지고 십자가를 만들며 놀았는데 삼백명의 선객중 오직 잔느의 주위에만 십자가를 늘어놓았다.
잔느는 그대로 두었다. 그녀자신이 십자가를 맞이하러 가는 중이었기에 딸아이를 통해 십자가를 얻기위해 십자가를 뿌린다는 확신이 들었다. 딸의 행동에 의미심장함을 느낀 동행수녀는 자신에게도 십자가를 달라했으나 딸은 이 모든 것이 엄마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또 물에 떠있는 꽃을 주워 관을 만든뒤 잔느의  머리에 씌워주며 말했다. “십자가 후에 엄마는 이렇게 관을 쓰게 될 거예요!” 잔느 그 모든 것에 감탄하며 자신을 기꺼이 희생제물로써 하나님께 드렸다.
실제로 잔느를 향한 주님의 계획은 제네바를 통해 무슨 일을 주시거나 염려를 주시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제네바! 그곳을 바라볼때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방법으로 그 도시가 회복할 것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주님안에서 기꺼이 고통받는 한 영혼을 통해 예수님의 귀한 생명의 진리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전달되고 그것을 받은 이들의 영혼이 소생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다시 공급되는 방법으로 수많은 영혼이 소생하는 것 그것이 주님의 계획이요 주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잔느가 파리를 떠나기 얼마전의 일이었다.
평소 하나님께 충실했던 특별한 친구가 있었는데 잔느에 관한 비젼을 보게 되어 잔느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잔느의 심장에 가시가 둘러져 있는 모습이었고 그 가운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같았으며 심장을 찢을 것 같은 가시가 오히려 심장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잔느는 그 환상의 뜻을 잘알고 있었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잔느는 파리에 있는 동안 갖고 있었던 돈 전부를 뉴 가톨릭공동체에 내놓았다. 단 한푼도 남겨 놓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난하게 된 것이 그녀를 기쁘게 하였다. 잔느에게는 속옷 살만한 돈도 없었기에 금고도 지갑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을 불신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웠기에 집에서 떠날때 약간의 속옷만 가져나왔다.
그녀를 박해하는 사람들은 잔느가 거액의 돈을 신중하지 못하게 라 콩브신부의 친구들에게 썼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에게는 잔느의 가난마저도 잘못된 것이었다.


산자의 하나님

잔느의 무리는 1681년 말달레나 성녀 축일 전야에 제네바 안시에 도착하였다. 제네바의 주교는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무덤 앞에서 미사를 거행하였다. 잔느는 매년 해왔듯이 그곳에서 구세주와의 영적 결혼 서약을 새롭게 갱신하였다. 그곳에서 잔느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성인과의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혼은 주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과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바로 이 교제는 성도의 연합을 가능케 하는데 연합의 깊이와 정도는 성도들이 얼마나 주님을 닮았는가에 비례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해 성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성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잔느는 병약해지는 딸의 문제로 라 콩브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도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성인과의 만남과 같은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라 콩브신부의 마음을 활짝 열리게 하셨으며 신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자비와 여러가지 놀라운 것들에 대해 잔느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들으며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라 콩브신부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특히 신부가 신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교만한 것은 아닌가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잔느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라 콩브신부를 그러한 상태의 믿음이 되게 하시고자 자신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혜가 신부에게서 넘쳐 잔느에게로 밀려왔고 그녀는 곧 두려움에서 회복되었다.
잔느는 라 콩브신부가 하나님의 주신 은사나 깊은 학식으로 스스로 높이지 않고 오히려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은혜를 받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하나 됨은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숙히 다가가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해주고 평안 속에서 자신을 세워 주시는 것이었다. 라 콩브신부는 끝으로 잔느와 뉴 가톨릭공동체의 생활방식이 어울리지 않음을 이야기하였고 하나님의 섭리로 다른 곳으로 인도될 것과 그 장소를 보여주시기까지 머물러 있기를 권유하였다. 잔느는 이 권유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천국 건축돌

잔느는 기도하기 위해서 규칙적으로 자정에 깨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10:7)라는 말씀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리고 난뒤 전에 경험한 적이 있었던 순수하고 마음을 꿰뚫는 강력한 은혜의 교제가 뒤따라왔다. 잔느의 영혼은 새 생명안에서 이미 영원하겠지만이 새로운 생명은 바로 직전의 생명과는 분명히 달랐다. 새벽이 와서 해가 중천에 떠 광명에 이를 때까지 점점 밝아지는 것과 같았다. 생명은 죽음 자체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더 이상 두 번째 죽음의 해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달콤한 대화 속에서 새벽 4시까지 이어졌고 그 다음날도 그러하였다. 다음날 라 콩브신부는 기도한 후에 하나님께서 어떤 위대한 건축을 계획하고 계신데, 잔느가 그 건축물의 돌이라는 강한 확신이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건축물인지는 신부도 잔느 자신도 알지 못했다.
다만 잔느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신부의 말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이 자신을 하늘 새 예루살렘의 돌 하나로 사용하신다면 그 돌은 윤을 내어서는 아니되고 오직 하나님의 다루시는 망치로 다음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잔느는 하나님께 돌 같은 굳건함과 굴복의 정신과 묵묵함 그리고 주님의 손 아래서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
잔느는 딸의 환경이 딸 아이에게 적당치 않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딸의 불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음식은 너무 달라 아이는 잘 먹지 못하여 점점 야위어갔다. 잔느는 자신이 딸을 파괴하는 자처럼 느꼈다. 아들을 희생하러가는 아브라함의 심정과 죽어가는 이스마엘을 지켜보는 하갈의 심정과 같았다. 교육 환경 뿐만 아니라 딸아이의 생명까지 위험스럽게 보였고 모든 것이 암흑처럼 느껴졌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위로를 주지 않으시며 희생제물을 드리라고 하셨다. 밤은 그녀에게 슬픔의 배출구와 같은 시간이었다. 먼 타국에 와서 딸아이를 죽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라는 불안과 슬퍼할 가족들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질 원망이 눈앞에 아른 하였다. 특히나 하나님께서 주신 딸아이의 특별한 은사들은 더욱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잔느가 모든 아픔을 하나님께 맡기고 딸아이를 수녀회에 맡긴채 제네바로 다시 향하였다. 그후 모든 환경은 급속히 변하여 딸을 맡은 수녀회에서 딸에 맞는 음식들이 나오게 되었고 딸은 급속히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 모두는 아직도 그녀안에 있는 인간적인 애착을 정화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영혼의 폭포수

잔느는 당시 신앙인들로서는 극소수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바로 이 점이 그녀의 어려움이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대화의 거리라면 호응을 얻을 수 있겠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전혀 생소한 것이라는데 그녀의 경험을 나누기에 큰 장애물이었다.
잔느는 그녀의 경험을 영혼의 폭포수로 비유하였다. 이 내용은 저서 ‘영혼의 폭포수’에 잘 나와있다. 하늘로서 내린 비는 모여 물이 되고 도랑물이 되었다가 점차 불어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의 끝에는 벼랑이 있어 추락한 뒤 물은 바다와 접하게 되고 그 물은 바다의 일부즉, 바다가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우리의 영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께 창조된 영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살고 있기에 자신을 붙들고 자신을 창조한 이를 향하여 자신의 거룩한 근원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당신 자신과 하나가 되도록 특별히 창조하신 까닭이다. 이것은 인간이 만물보다 뛰어나고 천사와도 다른 점이다. 창조된 영은 하나님과 연합하려는 강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더욱이 빠른 속도로 하나님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사실 성령과 우리의 영은 구분하기 어려운데 이는 수많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잔느는 이 성령의 인도 즉, 영의 인도에 순종하여 자기를 날마다 부인하고 좁은 길을 선택한 자가 종국에 얻을 거룩한 죽음을 경험하였다. 이 죽음은 자아로부터 벗어나 거룩한 대상에게로 영이 넘겨지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녀의 영혼은 명확하게 분리가 되어 무엇이 영이고 무엇이 혼인지 알게 되었다. 어떤 성도는 죽을 때 자아에 대해 정결해지게 되는데 그것은 육체의 지배를 받는 생활이 만연되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세상에 대한 미련이 끊어지는 실제적인 분리가 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합일

잔느는 당시 프랑스로부터 친족들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그들의 명분은 귀용가의 재산을 자녀들에게 주고 그녀에게는 연금만을 남긴다는 조건이었다. 덧붙여 병약하였던 자녀들이 죽을 경우 재산은 모두 친척들에게 넘긴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잔느는 계약서를 파악하지 않은채 사인을 하였다. 그리스도를 닮아 재산을 포기하고 가난하게 됨이 기뻤던 것이었다. 이 모든 시련의 상황을 그녀는 가벼이 흘려 보내지 않았다.
한순간 한순간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고 결단함으로써 영의 소원을 이루는 고귀한 천국사업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잔느의 경험은 분명한 것이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없어지기 전과 후의 상태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러기에 잔느는 이 경험을 다른 그리스도안의 지체들에게 알리기를 원했다. 자신만 알고있기엔 그 은혜가 너무나도 컸던 것이다.
잔느는 생각에 있어서나 욕망에 있어서도 모든 것에 투명하고 솔직하였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박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었다. 사고력과 감각자체도 놀랍게 정화되었고 섬세하여졌다. 전에는 끊임없이 상상력이 괴롭혀 왔지만 더 이상 괴롭히기 엔 그녀 자신이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오게 된 것이다. 자신의 취향에 대해서 완전히 죽어버린 의지는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만으로 그분을 향하게 되었다. 이 의지는 어떤 것에도 제한을 받지 않고 그 자체로 단순하고 평범하게 그리고 날마다 무한히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 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이 무렵 잔느의 기도 역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게 행하여졌다. 전에는 기도하고자 하여도 주변에서 기도를 못하게 한다던가 주의 일로 인해 분주하게 되면 기도할 수 없었다.
이 점은 그녀 자신을 힘들게 하였다. 그러나 영혼의 추락 즉, 하나님의 엄히 다루심을 통해 그녀는 이제 기도생활에 있어서도 거듭나게 되어 그녀의 영혼은 독특한 기도의 방식으로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동행하였다.
하나님의 사람 에녹과 프랜시스, 로렌스 형제와 및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드렸던 기도였다. 또한 기도의 내용은 단순하고 지극히 간결하여서 신랑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항상 그 분 안에서 안식과 평안과 기쁨이었던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이 비로소 완전히 실행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자고 있으나 나의 심장은 깨어 있도다.’ 잠조차 그녀의 기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잔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 인도 아래서 하나님과 사랑의 합일의 상태에 있었기에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그녀는 크게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선지자들을 통해 증거되었던 하나님 안에서의 참 희락이기에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하늘의 보화인 것이었다. 그녀가 잃은 것은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그녀가 얻은 것은 잃은 것에 비교할 수 없었다.
잔느는 재산과 자녀들을 포기하고 제네바를 거쳐 제스에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여행길에 말에서 떨어져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줄로 알았으나 그녀는 다시 일어나 다른 말을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의 도움이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심하게 다쳤고 광대뼈와 두개의 이가 부러지는 고난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끊임없는 핍박

이 무렵 사람들 사이에 잔느의 이야기가 오르게 되었으며 당시 존경받고 명성있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편지해 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일부는 잔느에게 후원을 약속하였다. 또한 프랑스 파리 사람들은 그녀가 한 일들을 책으로 출판할 것을 제의해왔으나 무산되었다. 이와 같은 호의는 후에 다변스러운 사람들의 심성덕분에 그녀가 받게 되는 이상한 유죄선고의 구실거리가 되게 되었다.
잔느를 평소 시기하였던 제스의 신부는 잔느를 따르던 매우 아름다운 소녀에게 더 이상 잔느를 따르지 말 것과 자신에게 피정을 받을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 소녀는 오히려 잔느의 충고를 더욱 따랐으며 라 콩브 신부에게 피정을 받은 뒤 하나님께로 한층 더 깊이 나아가게 되었다. 이후 소녀는 그 신부를 조심하고 경계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제스의 그 신부는 매우 분노하였는데 이것이 후에 라 콩브 신부와 잔느가 당하게 될 핍박의 근원이 되었다.
그 성직자는 제네바의 주교를 찾아가 뉴 가톨릭 공동체에 잔느를 묶어두려는 계획을 하였다. 이는 잔느의 연금을 노리고 한 일이었다.
그러나 잔느는 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뉴 가톨릭 공동체의 생활방식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함을 솔직하게 나누었다.
잔느는 모든 면에서 올바르기를 원했으나 실권자 앞에서 신용을 얻고자 하는 수녀원장은 겉으로는 잔느를 위하는 척하였으나 뒤에서는 그 성직자와 합세하여 라 콩브 신부와 잔느에게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였다. 주교 또한 실권자였던 그 성직자에게 조종되어 라 콩브 신부를 통해 잔느를 수도원장으로 삼아 그녀의 연금으로 뉴 가톨릭 공동체의 건물을 지을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에 양심을 따라 신부의 자격뿐만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 옳은 길을 택하고자 하는 라 콩브 신부의 의견에 핍박은 본격적으로 거세어져만 갔다.


겸손의 골짜기

우리는 자신이 신앙의 최정상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더라도 막상 시련이 닥쳐오면 여지없이 무너지기 쉬운 존재이다. 이것을 통해 커다란 겸손이 따르지 않는 한 성화(聖化)란 중요한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모든 것에 대하여 죽는 것이야말로 무한한 복인 것이다. 잔느 귀용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아무리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얼마나 불완전하고 자기 자아로 가득 차 있는지요!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는 문은 얼마나 곧은지요! 우리처럼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그 문을 통과해야 하고, 그것은 곧 자아의 죽음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을 통과할 때 얼마나 높고 광대한 영역에 이르게 되는지요!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시18:9). 그가 그 곳에 인도된 것은 바로 겸허와 낮아짐을 통해서였습니다.”

견고한 상태

잔느는 당시 주교와 성직자, 친족 그리고 같이 생활한 수녀회에서까지 냉대와 미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말 가운데 대부분은 거짓이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왜 그렇게 미워해야 하는지 이유도 충분히 알지 못했고, 잔느 귀용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는 가운데 거하던 우르슬라 수녀회에서 첫번째 사순절을 보내며 전에 눈과 코사이에 있었던 종양이 다시 재발하여 머리가 심히 부었다. 여기에 딸아이 마저 천연두로 앓아 죽을 지경이 되었고 병은 회복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딸아이를 돌보는 이마저 누워버렸다. 암담한 현실과 고통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잔느는 안전하였고 기뻤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기에 그녀의 영혼은 침착하였고 평온한 거주지에서 계속 안식하고 있었다.

“중대한 단 한 분, 제 사랑의 대상이시여! 우리가 주님께 드렸던 그 보잘것없는 섬김과 경의에 대해서 변화무쌍한 이 세상 것을 뛰어넘는 이 견고한 상태, 이것보다 더 큰 보상이 또 있을까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고통이 닥쳐올 때 감각은 마치 꾀부리는 무단 결석자처럼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영혼 앞에는 모든 고난이 날아듭니다.”
변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은 결코 넘어지지 않거나 쇠약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상태로, 변동과 변화가 가득 찼던 과거의 상태에 비하면 변하지 않는 상태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던가 발에 묻는 먼지같은 외적인 더러움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더러움은 점차 씻겨질 것이다. 비록 불순물이 섞여 있는 금이라 할지라도 정련의 과정을 지나게 되면 깨끗한 금이 되고 윤을 내게 되는 것이다. 당시 잔느의 상태는 윤을 내는 상태였던 것이다.

인도와 충실

하나님의 인도는 그분을 신뢰하는 영혼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이요 요구인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드리는 신뢰를 따라 친히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요 적절한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과 뜻을 따르는 자를 사랑하시며 보호하시고 감추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영혼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은 충실의 문제이다. 바로 그 순간 충실하게 자신을 부인하지 못한 까닭이다. 일반적인 의지는 포기했다 하더라도 그 순간 자기를 전적으로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나는 한 그들은 계속 넘어질 것이다. 다만 그 명령으로 돌이켰을 때 모든 것이 제대로 진행될 것이다. 잔느는 어느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명령에서 벗어나지 않을 만큼 충실하면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였고, 그 사실은 대낮과 같이 환하고 분명하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정해 놓으신 자리로 돌이키기 전까지는 고통은 계속되는 것이다.

삶 가운데 있는 많은 고통들은 영혼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질서에 만족하지 않는 데서 온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족한 줄 모르고 갖지 못한 것을 원하므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는 다시 고통과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들어간 영혼은 낙원에 있게 되는데 이 낙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겠는가? 영광에 있어서는 각기 다르다 할지라도 모든 영혼들의 무한한 만족은 하나님의 명령과 질서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만족해하고, 풍족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불행해 하는 까닭은 무엇이겠는가?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이 소유한 것,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에 흡족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잔느는 만족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한다. “모든 영혼들은 다소간에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이 강하고 뜨거운 자기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원하고, 어떤 이들은 이웃이 구원받기를 목말라 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영광 중에 보기를 열망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뛰어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안식하는 사람은 이 모든 좋은 갈망이 없다 할지라도 끊임없이 더욱 만족해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더욱 영광이 됩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2:17).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쫓아내실 때 하신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의 효력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던 바로 그 순간에 있는 것이다. 성전을 드나드시던 때에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직 내 때가 오지 않았다.” 오직 그때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에 충실하신 성자 예수님의 본이 되는 모습일 것이다.

다시 건강을 얻은 잔느는 라 콩브 신부에게 가서 피정을 받게 되는데 마음속에 글을 쓰고 싶은 것을 참다가 그것이 병이 된다. 이를 알게된 신부 역시 원하던 바라 글을 쓸 것을 권하게 되는데 이때 나온 글이 ‘영혼의 폭포수’다. 믿음의 내적인 길을 폭포수와 시냇물과 강에 비유한 내용이다. 

말씀으로 명령하고 순종하는 분

하나님께서는 잔느의 친언니와 함께 온 하녀 한 명을 잔느에게 맡기셨다. 이는 못 박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고통 없이 영혼을 잔느에게 맡기시는 법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 하녀에게 베푸신 은혜는 매우 독특하였다. 그녀는, 그녀가 있는 지역에서 상당히 평판이 좋아 성녀로 통할 정도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잔느에게로 이끄시었다.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서의 거룩함과 자아의 잃어버림으로 얻어지는 거룩함의 차이를 깨닫게 해 주셨다. 이를 통해 그녀는 잔느에게 깊은 신뢰심을 갖게 되었다.
한번은 하녀가 심하게 앓아 눕자 잔느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간호하였다. 그러다가 그녀의 마음을 향해 치유기도를 하도록 명령 기도를 하였다. 그 즉시 명령대로 그녀의 몸은 치유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잔느는 말씀으로 명령하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말씀으로 명하시고 말씀에 순종하시는 분은 똑같이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 하녀는 자주 앓았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잔느는 그녀에게 ‘일어나라, 그리고 다시는 아프지 말아라!’ 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일어났고 건강하게 되었다. 많은 수녀들은 놀랐지만 깨닫지는 못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잔느는 이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잔느가 ‘나으라’ 혹은 ‘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우라’고 말할 때 그들이 동의하면 말씀이 효력이 되고 치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나는 치료되겠지, 그분이 원하실 때까지 치료되지 않을 거야”라고 구실을 내세워 의심하거나 “나는 치료될 수 없어. 나아지지도 않을 거야”라고 거부하면 말씀은 효력이 없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치유능력은 무생물에게까지 미칠만큼 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아무리 작은 거부라도 있으면 동의 받지 못한 말씀은 그 효력을 완전히 멈추고 마는 것이다.

어린아이같은 단순함

잔느는 왕의 수석 비서관과 누이인 프뤼나이(Prunai) 후작 부인의 초청을 받은 후 튀렝(Turin)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 큰 십자가였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큰 아들이 찾아왔다. 후견인들이 그녀와는 상관없이 모든 부동산을 팔고 물품들을 처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때 잔느는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잔느의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했던 프뤼나이는 잔느가 비난당하는 것을 보고 매우 냉정해졌다. 후작 부인의 눈에는 잔느의 어린이같은 단순함이 무척이나 무능하고 바보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잔느는 하나님의 손에만 붙들려 움직이는 어린아이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면 연약한 그녀에게는 그 일을 행할 분명한 힘이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실 때는 그녀는 어떠한 능력도 주어지지 않았기에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었다.
후작 부인의 냉담한 반응은 잔느를 통해 보여주신 예언의 성취로 인해 해소되었고, 하나님께서 잔느 안에 거하심을 본 뒤에는 깊이 잔느를 사랑하게 되었다. 프뤼나이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실제보다 훨씬 성숙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동안 자신의 상태를 점검할 아무런 시험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작 부인은 곧 잔느가 증거한 진리를 체험하였다.

영적분별에 관하여

잔느가 튀렝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녀는 매일 매일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을 느꼈고, 영혼들의 상태를 잘 알 수 있는 분별력을 갖게 되었다. 잔느가 다른 영혼들의 상태에 대해 라 콩브 신부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편지를 쓰면, 신부는 그 영혼들이 잔느가 생각하는 것보다 영적으로 높이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의 견해가 다르자 신부는 그녀를 교만하다 생각하였고 화를 내었다. 그러나 잔느는 불평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에 기쁘게 순종하였지만 그녀가 가진 확신만은 확고하였기에, 신부는 의아해하면서 그녀가 받는 은혜마저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잔느의 영적분별도 자신의 원대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이 말하라 하면 말하였고 하지 말라 하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적분별에 따른 고통과 십자가를 피할 수 없었다.
신부가 튀렝에 있을 때, 하나님의 종으로서 뛰어난 감각을 지닌 어떤 미망인이 신부에게 와서 고해성사를 하였다. 미망인은 자신의 영적상태의 뛰어난 점을 이야기했다. 신부는 그 여인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잔느에게 이야기했다. 그 받은 바 은혜가 잔느에게는 죽음으로만 역사하는 은혜와 상당히 다름을 이야기하였다.
잔느도 처음은 거룩한 영혼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였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잔느에게 최고의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잔느에게 그 영혼의 상태를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그 영혼은 새로운 느낌으로 가득 찬, 사랑의 감정과 약간의 침묵이 섞인 헌신의 초보 단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신부에게 알렸을 때, 신부는 처음에는 진리임을 발견했으나, 자신의 옛 생각을 통해 다시 잔느의 교만과 판단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잔느는 다만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자신을 내려놓았기에 무엇이든지 똑같이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부는 그녀의 영적 상태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아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잔느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다시 쌓이게 되었다. 잔느는 하나님의 은혜로 단 한순간에 그녀의 영적 상태를 분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잔느의 영 분별은 상식적인 방법이나 외적인 정보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물인 내적인 원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영적인 빛과 열심에 있어서 어느 정도 성장했으나 그것이 아직 인격화되지 않은 영혼들은 종종 자신들이 영 분별함을 소유했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호감과 반감에서 비롯된 것들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류의 본성적인 호감과 반감들을 잔느 안에서 모두 파괴하셨다. 그랬기에 그녀는 아주 순수하게 하나님 한 분만을 의뢰하였고,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일들을 경험하고 분별하게 된 것이었다.

중보의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더욱 정결케 하고 성장케 하시는데 잔느를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어느 날 꿈 속에서, 주님께서는 잔느에게 맡기셨던 하녀를 정결케하고 자아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겠다고 하셨다. 라 콩브 신부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잔느는 기꺼이 그 하녀를 위해서도 고통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하녀는 신부가 그랬던 것보다 훨씬 강하게 하나님께 저항하였고 자기애의 힘 아래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그 만큼 그녀는 자신에게서 정결케 되어갔다.
잔느는 인간의 부패한 자아는 십자가에서 처리될 때에만 사단이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실을 그 하녀도 깨달아 가기 시작하였다. 그 하녀가 내적으로 정결케 되어짐에 따라 잔느의 고통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그녀의 상태가 변화될 것을 알려주었고, 실제로 변화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영혼들로 인해 생기는 내적 고통에 비하면 외부의 핍박은 아무리 심할 지라도 큰 것이 아니다.

사도의 직분

잔느는 그르노블(Grenoble)에 있을 때 딸아이를 수녀원에 두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점령하시도록 맡겼다. 잔느는 전혀 외출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께 헌신된 신앙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상태에 알맞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할 수 있는 은사를 잔느에게 주셨다. 잔느는 이것이 사도직인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영혼의 상태를 아주 쉽게 분별하였고, 영혼들은 그들의 필요로 하는 것들을 그녀를 통해서 얻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이 소문이 퍼져 잔느는 만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아침 여섯시부터 밤 여덟시까지 주님에 대해서만 말하게 되었다. 수도자, 성직자, 평신도, 하녀, 부인, 미망인 등 사방에서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다. 잔느는 어떤 연구나 묵상할 시간이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모든 이의 필요를 적절하게 채워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그들은 간단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깊은 은혜가 그들의 내면에 부어짐을 느꼈다.
많은 이들 가운데는 특별히 잔느의 흠을 잡으러 온 이들도 있었다. 잔느는 이들을 미리부터 알 수는 없었으나, 그들 앞에서 잔느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였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말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렇게 말도 못하는 부인을 만나러 오다니. 오는 사람들이 한심스럽군.” 그들이 떠난 후 한 사람이 와서 잔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 것과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렸다. 그러나 잔느는 이미 더 확실한 도움을 받고 있음을 증거했다. 잔느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느꼈다. 또한 사도직이란 성령님의 순수함 속에서 다른 영혼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가장 잔인한 핍박 가운데 노출시키는 것임을 깨달았다.
친구 중 한 부인이 찾아와 잔느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나 잔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하는 말을 잘 관찰하여 보세요. 부인은 지금의 축복하는 그 입술을 통해서 머지않아 저주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잔느는 다음의 말을 마음에 새기었다. “우리의 이웃을 위해 우리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교수대에서 희생시키는 것이다. 지금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축복하는 사람들조차도 잠시 후에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사도직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개인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고 사도로서의 은혜도, 십자가도 없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사람들과 사뭇 다르다. 사도직을 감당하는 이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위하여 고난받기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잔느의 영성을 통해 다시한번 우리에게 빛을 비추소서

연합 속에서 흐르는 은혜

잔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여러 신실한 영혼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줄 수 있게 되었다. 이 거룩한 연합 안에서 잔느의 말은 다른 영혼들에게 놀라운 효력을 발하였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까지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하심에 달려 있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단 한마디 말도 건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어떤이들에게는 마치 홍수와 같이 은혜가 흘러 넘쳐 나갔다. 이처럼 순수한 사랑은 헛된 흥미거리로서 허락되지 않았다. 잔느는 그런 사람들에게 답변하는 것이 소용없었다. 하나님께서 대답할 말을 주시지 않았다. 또한 자아의 죽음을 통해서 인도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위로를 추구하는 영혼들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들이 순수하게 필요로 하는 것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잔느는 어떠한 상태에서든지 계속 하나님만을 의지하였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지 기꺼이 순종했으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적이 없었다. 자신을 무로 돌리고 아무 관심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뜻은 아무리 엄격한 것일지라도 그녀에게 생명이요 기쁨이었다.

핍박의 결정적인 원인

그르노블을 떠나 마르세이유에 오는 길에 배가 바위에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모두들 두려워하였으나 잔느는 오히려 더욱 평안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자연스런 공포의 감정을 그녀는 별로 느끼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평안했던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잔느에게는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았기 때문에 기꺼이 죽을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그녀의 삶으로 인해 많은 경건한 사람들과 존귀한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 무렵 기도에 관한 책자가 인쇄가 되어 영적생명의 길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읽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그녀의 남은 생애를 감옥과 유배로 점철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잔느를 가장 싫어한 이들은 성직자들이었다. 지도 신부인 자신보다 잔느의 영적인 도움을 따라가는 이들을 향해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잔느를 향한 시기와 질투는 정죄뿐만 아니라 일부 도시를 선동하게 끔 하였다. 잔느는 마르세이유에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잔느가 당한 핍박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과 사뭇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세이유의 주교는 책의 내용을 검토한 후 아주 좋게 여겼으며, 잔느가 당한 모욕에 유감을 표시하여 주었다. *


댓글 '1'

양희철

2012.11.21 13:10:33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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