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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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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5.8.16 http://www.nosuchjesus.com |
마태복음 강해(43) 팔복강해 (17)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9)
즉흥적인 성경 읽기
하나님은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어(갈4:4) 인류 구원의 십자가 사역을 완성하셨다. 때가 찼다는 것은 예수님이 2000년 전 유대 땅에 나시기 전부터 그 사역이 완벽하게 이뤄지도록 모든 상황과 여건을 미리 조성하셨다는 것이다. 당시의 역사를 성경의 기록과 검토하여 신학을 공부해 보면 그 수도 없이 많은 상황과 사건들이 하나하나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일어났어야 했고 또 필연적으로 서로 연계되어 있어 각각에 하나님의 고유의 뜻이 있음을 발견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런 하나님의 준비 가운데 신약 성경을 헬라어로 기록시키려 했다는 것도 포함된다. 헬라어는 예수님 당시의 지구상의 언어 가운데 그 표현법이 가장 세밀하고 정확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현존하는 언어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라고 평을 받는 독일어의 어미 변화는 200여 개인데 비해 헬라어는 800여 개로 각 어미 변화마다 뜻이 다 다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당신의 궁극적인 인류 구원의 계시를 후대 사람들에게 혼탁하지 않고 정미하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 한국어는 가장 비과학적인 언어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시제, 단수 복수, 관사 등의 구분이 거의 없다. 모든 표현이 그저 두리뭉실하다. 물론 그것대로의 감정 표현이 아주 풍부하다는 장점은 분명히 있다. 노랗다는 표현만 해도 샛노랗다, 누르팅팅하다, 노르끼리하다, 등 도저히 외국어로 번역할 수도 없다. 추측컨대 우리 민족성이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라서 언어에도 그렇게 반영되었는가 보다.
한국 신자의 신앙 생활 하는 모습도 보면 아주 즉흥적 감정적이다. 조금만 힘들어도 40일 특별 새벽기도에 목사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나와 울며불며 하나님께 매어 달린다. 그러다 응답을 받아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렇게 죽기살기로 빌었는지 본인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싹 변한다. 부흥회에서 조금만 은혜 받아도 땅끝까지 복음을 들고 가서 당장에 이 세상을 뒤엎었을 것 같다. 틀림 없이 감정적인 측면에서 신앙 열심과 정성 만큼은 세계에서 최고일 것이다.
그런 신앙 기질이 성경을 보고 이해하는데도 그대로 적용된다. 본문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청결한 마음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거의 대부분의 신자가 더럽고 추한 생각을 죽이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해버린다. 청결한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알아 보려고 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착한 마음을 먹자는 것이다.
그 해석이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석한대로 신앙 생활에 실제로 적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내 마음을 청결한 상태로 유지해야 할 텐데 무엇을 청소해야 하나? 왜 이런 자꾸 쓸데 없고 나쁜 생각이 나지? 이런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 않게 할 좋은 방법은 없나? 대신에 착한 마음만 자꾸 생기도록 해야 할 텐데 기도를 할까, 성경을 볼까?” 이렇게 노력해야 하는데 과연 현실적으로 소기한 대로 성과를 얻겠는가? 말하자면 사람이 이제 두 번 다시는 나쁜 생각을 하지 않고 착한 마음만 먹기로 결심한다고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또 그런 노력을 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 치면 하나님이 보이는가? 만약 착한 마음을 먹고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성경이 잘못되었을 리는 없으니 당연히 그 해석이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지 않는가?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은 럭비공과 같아 천방지축 어디로 튈지 본인 스스로도 모른다. 미국 이민 와서 한국에서 안 해보던 험한 일을 하며 고생하는 마누라가 안쓰러워 잘 대해줘야지 결심했다가도, “누구 아빠는 월 수입이 얼마래”라는 말만 들으면 속이 뒤집어지고 감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쏟아 낸다. 혹시 그런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야지 결심 했다가도 저녁 식사를 제대로 차려 주지 않으면 조금 전에 참았던 그 일까지 덧붙여서 화가 치솟는다.
인간이 결심하지 않아서 또 결심한대로 노력하지 않아서 마음이 엉망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마음 밭에 쓴 뿌리와 엉겅퀴가 무성하게 만발해 있기 때문에 본인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마누라 강요에 못 이겨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따라 나와서 반성했다고 쳥결해지지 않는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헬라 원어 ‘청결(카사로쓰)’은 물리적 과학적 용어다. 영어로 치면 더럽지 않고 깨끗하다는 ‘clean’이 아니라 다른 이물질이 섞이지 않고 오직 한가지 성분으로 되어 순수하다는 ‘pure’의 뜻이다. 순금(pure gold)은 오직 100% 금만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깨끗한 금(clean gold)은 그 성분과 상관 없이 표면의 잡티를 제거하여 깨끗이 닦은 상태다. 마찬가지로 어떤 한 가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이 청결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우리 말로도 차라리 순전(純全)한 마음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따라서 생각이 착한가 나쁜가와 상관 없이 여러 잡생각이 완전히 제거 된 상태다. 두 마음이 되어 있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마음으로만 된 상태가 청결한 마음이다. 말하자면 악한 생각을 제하고 착하게 마음을 먹는다고 하나님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마음은 카멜레온처럼 상황과 사람에 따라 천의 얼굴로 변신이 자유로운데 어떻게 몇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로 줄일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어떤 상태의 한가지 마음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5-8)
두 가지 이상의 마음을 품으면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더럽고 추한 생각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의심이 들어가 두 마음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 한 마음이 되려면 당연히 의심을 제거하고 ‘오직 믿음’만 있는 상태가 되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보려면 시도 때도 없이 속에서 솟구치는 사기, 음란, 거짓, 죄악 된 마음을 죽이기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부터 죽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의심을 하지 않고 오직 믿음만 유지할 수 있는가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신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들면 무조건 큰 죄나 지은 양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이다. 현실적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 초조하고 불안해지면 당장 “예수님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나는 담대하게 주만 바라보지 못할까?”라는 죄책감에 사로 잡히고 어떻게 하든 그 염려하는 것 자체를 중지하려 든다.
그래서 믿음을 키워야지 싶어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목사님 말씀대로 따라 실천하고, 기도도 열심히 해 본다. 기도의 내용도 순수하고 겸손하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 없이 의심한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다시는 의심이 들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전쟁은 제한테 속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잠시 잊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 때문에 제가 두 마음을 품은 것 같습니다. 주위와 환경과 사람만 보는 바람에 의심이 들었습니다. 이제 두 마음을 품지 않도록 저를 도와 주시옵소서.”
또 기도를 끝내고는 정말 전쟁터에 나가듯이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입술은 한 일자로 꽉 다물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아멘!”을 읊조린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의심이 정말 사라지고 온전히 믿어졌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모든 염려를 맡겼으면 기쁨은 몰라도 최소한 평강은 있어야 하는데도 왜 꼭 결사대처럼 죽기 살기로 덤벼야 그 믿음이 유지되는가 말이다.
의심의 반대는 물론 믿음이다. 믿음이 생기면 의심이 없어지고 그 반대로 의심이 사라진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의심 자체를 없애려 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믿음도 스스로 아무리 믿음 자체를 키우려 노력한다고 키워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정말로 믿어져야 믿어지는 것이며 또 진짜로 믿어지면 의심은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자연적으로 없어지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의심이 생길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저 사람을 과연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결정하는가? 반드시 말이나 일을 시켜 보고 믿을지 말지를 판단한다. 말하자면 시험(Test)를 해서 자기가 정해 놓은 기준을 통과하는지 떠 본 후에 믿는다.
그렇다면 신자의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그럼 왜 신자들은 하나님을 시험도 안 해보고 무조건 믿으려 드는가?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려니 불경스러운 것 같은가? 절대 아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저절로 믿어지는 법은 절대 없다. 하나님에게 의심이 드는 것은 죄인 된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시험해 보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하나님을 의심도 하지 않고 무조건 믿거나, 시험해본 결과 하나 없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감히 말하는 것이 오히려 죄다.
기독교에서 죄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원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 하고, 당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 죄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더러 무조건 당신을 믿으라고 한 적이 없다. 자유의지를 주어서 기쁨으로 자원하는 자만 당신께 나오라고 했다.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척하며 나오는 것과 의심이 드니까 확실한 믿을 거리를 달라고 솔직히 요구하는 것 중에 하나님은 어느 쪽을 기뻐하시겠는가?
시험(Test)의 세 종류
나아가 하나님 스스로 신자더러 당신을 시험해 보라고 오히려 권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자기 백성들 앞에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5)라고 하시면서 축복과 저주의 두 갈래 길을 보이셨다. 계명을 지키는 길로 가면 복을 받고 그 반대로 가면 화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둘 중 어느 길로 갈지는 신자의 책임과 선택에 맡겨졌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뜻이다. 또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선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아예 구체적으로 보장하셨다.(말3:10)
그런데 간혹 십일조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받은 것에서 감사하는 뜻으로 나중에 내는 것인데 미리 내고서 복을 더 주는가 안 주는가 시험해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의아해 하는 분이 있다. 물론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의 성격은 신자가 갖고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고백이며 또 그 감사의 표시로 사후에 내는 것이 원칙이다. 헌금을 자기 힘에 부치도록 내 놓고 그에 비례해서 복을 더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시험해 보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말로 시험(試驗)이라고 할 때 세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어떤 새로운 이론을 정립한 학자가 실험한 결과로 그 이론을 뒷받침 하는 것이다. 시험이기 보다는 ‘증명’에 가깝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 불변의 진리이므로 따로 증명이나 구태여 변호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이 맞을 것이라고 가정해서 실험으로 증명해 보여야만 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하나님이지 않겠는가?
둘째로 흔히 이 구절을 오해하듯이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면 복을 부어주시겠다고 했으니 그 복을 받아 내고자 십일조를 바치는 경우다.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으면 그 돈 액수만큼의 과자가 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단순히 기계로 보고 그 기계를 ‘조종’하려는 것과 다름 없다.
마지막으로 첫째와 같이 실험이 따르지만 조금 다른 뜻의 시험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한 진리임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아직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적이 전혀 없어 그대로 따라 해 분명히 ‘체험’해 보려는 것이다. 첫째 실험은 증명용 실험이라면 이것은 체험용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신자더러 당신을 시험해 보라는 뜻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내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겠다고 해서 두 번째 시험처럼 다음 달 월급이 갑자기 두세 배로 늘어나게 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선뜻 내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달 수입이 3천불인데 그 중 300불이면 최소 한달간 식구들 식비는 충분히 되는데 그냥 내자니 너무 아까운 것이다. 수입의 1/10이 빠져 나가면 9/10로 어떻게 살아 나갈까 걱정인데다, 그것을 꼬박꼬박 모아 몫 돈을 만들면 다른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차피 갖고 있으면 써버릴 것인데도 마치 생돈 1/10이 나가는 것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겠다고 하시면서 어떻게 풀어 설명했는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말3:11-12)
벌레가 생겨 열매가 썩거나, 서리나 우박이 내려 익기 전에 떨어지는 일을 막아 주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마다 과실이 주렁주렁 열려 과수원이 아름다워지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지 과수원을 갑자기 몇 배로 늘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갑자기 병이나 사고로 예정에 없던 비용이 나가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는 것이다. 열매에 황충이 먹고 수확기가 되기 전에 비바람이 치는 것도 다 하나님 당신의 주관 아래 있는 일임을 알아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10/10을 갖고도 부족하게 살았는데 생활 형편을 줄인 것도 아닌데 1/10을 내고 9/10로도 쓰고 남는다는 것을 반드시 직접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물질이 너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네 삶의 온전한 주인임을 절감할 것이라는 뜻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너희를 위하는” 길이라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이 종교적 열심과 성의를 더 보이라고 독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과 돈에 무릎 꿇지 않고 사는 인생이 훨씬 더 복될 뿐 아니라 실제로도 풍성한 기쁨과 열매가 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치사하게 돈으로 시험하라고 하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신자더러 치사하게 십일조 같은 돈 문제로 당신을 시험해 보라고 하셨을까? 뭔가 더 고상한 것을 걸어 보라고 할 수 있었지 않겠는가? 예를 들어 산상수훈대로 살면 하늘 문을 열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겠다고 하셨으면 신자가 자연적으로 더 거룩해지니 하나님으로선 일거양득(?)이 아니었겠는가 말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하나님의 인도와 간섭에 대해 인간이 가장 잘 알아 듣고 눈이 번쩍 뜨이도록 정신을 차리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돈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오죽하면 돈 문제를, 그것도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를 통해서 들고 나오셨겠는가? 하나님은 구약시대 내내 자기 백성들이 제대로 율법대로 사는지 지켜보시다가 도저히 더 이상 참다 못해 마지막으로 돈을 걸고서라도 정신 차려 바른 길로 가게 하자는 뜻이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하나님의 징벌이 끊이지 않았던가? 하나님이 그들 앞에 펼쳐 놓은 두 길 중에 축복의 길을 외면하고 저주의 길로만 갔기 때문이다. 그래 놓고도 그저 조금 힘든 일만 생기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택해 놓고 복을 안 주시는가? 하나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쉴새 없이 불평했다. 유대인들은 희생 제사를 바치면 자동 판매기처럼 당연히 복이 따라 올 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는 제사장 나라로서 나의 은혜와 사랑을 열방에 증거하고 그 뜻대로 거룩하게 사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구나. 너희 과수원에 황충을 금하고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자가 누구인지 잊은 채 오직 창고에 쌓을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구나. 좋다! 그렇다면 정말 너희가 원하는 대로 창고에 넘치도록 쌓아줄 테니까 다른 것은 안 해도 좋으니 최소한 온전한 십일조라도 바쳐 보아라. 그래서 과연 너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라”고 제안한 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의 임무를 등한히 해도, 율법을 안 지켜 거룩하게 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신자의 삶을 주관하는 것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 만이라도 제대로 깨닫게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돈에 굴복하지 않고 살기만 해도 다른 것 다 놔두고 그것 하나만을 보고서라도 복을 부어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선 참고 또 참아 최대한 양보한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신자에게 제발 순수한 믿음만이라도 보여 달라고 하고는 400년간을 아무 말씀 없이 침묵하셨지만 사실 침묵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400년 간을 더 기다려 준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가슴을 치고 한탄을 하면서도 그랬다. 하나님의 이런 기가 막히고 애끓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이 마지막 약속조차 세상 어느 민족도 체험하지 못한 큰 은혜를 받은 당신의 백성들마저 틀림 없이 지키지 않을 것을 다 알고 계셨다. 그래서 400년의 기다림이 수포로 돌아가자 인간쪽의 어떤 자격이나 공로와 상관 없이 단지 믿음만을 보시고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참으로 오묘하지 않는가? 또 얼마나 무궁한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가? 인간에게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당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만 있다면 구원 뿐 아니라 현실적 복도 부어주시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런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바로 너희가 가장 아쉬워하고 그저 불안해 하는 돈 문제를 걸고서라도 당신을 시험해 보라고까지 하면서 말이다. 비유컨대 하나님으로선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최후의 카드마저 보여준 셈이다. 그럼에도 소위 믿음이 있다는 자들조차 1/10조라면 온갖 핑계를 대면서 망설이고 심지어 더 이상 그 약속은 유효하지 않다고까지 주장한다. 제 복을 제가 차 엎어 버리는 격이다. 다른 어떤 약속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바로 눈 앞에 더 가까이 펼쳐져 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청결한 마음이란 하나님 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사는 온전한 믿음이다. 돈, 세상, 사람, 사단, 사망, 그 어느 것도 신자 된 신분을 흔들지 못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에 다른 불순물이 섞이지 않게 100% 순수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해보라.
미국의 D.L. 무디 목사는 성경 구절 중간중간에 항상 메모를 적어 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뜻을 풀어 설명하거나 주석을 옮겨 적어 놓은 것이 아니라 영어 알파벳 T와 P 두 글자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궁금해서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T 는 Tested(시험해 보았다), P는 Proved(증명되었다)의 약자라고 했다. 어떤 글에는 T만 있었는데 아직 시험 중이라는 뜻이었고 완전히 입증이 되어 믿어지면 P를 덧붙여 넣곤 했다.
믿음에 있어선 날 때부터 신령한 영적 천재란 없는 법이다. 무디는 알다시피 구두 수선공 출신으로 신학교 근처도 가보지 못했지만 부흥 전도사로 지금의 빌리 그래함보다 전세계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보다 훨씬 믿음이 좋았던 그도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씩 직접 생활에 적용해서 시험해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만큼만 그 믿음이 자랐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고 자라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해 오직 한 마음이 되지 않아서다. 오직 한 마음이 되지 않는 이유는 또 확실하게 안 믿어지니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약속대로 시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시험을 해 볼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하나님이 아주 명시적으로 약속해 놓으신 십일조라는 것이다.
Test 했더니 Prove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만나 보았다는 뜻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을 복이다. 역으로 따지자면 하나님을 보지 못한 이유가 성경 공부를 덜 했거나, 착하게 살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시험해보지 않은 이유는 의심이 들지 않아서다. 그리고 의심이란 단순히 신앙이 흔들린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한 마음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두리뭉실하게 물에 물 탄 듯, 혹은 맹목적으로, 아니면 조건을 걸고 거래 하듯이 하나님을 두 마음 이상을 가지고 믿고 있다는 뜻이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 약간 양심에 찔리는 것들을 형식적으로 반성하고 다음 주는 착하게 살고 말씀과 기도에 더 열심을 내어야지라고 결심하고 가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다. 십일조 내었으니 하나님 복 주시겠지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거기다 목사 말하는 대로 무조건 아멘해선 평생 가도 하나님을 못 본다.
각자의 영혼의 성전 문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 닫고 있거나 하나님 쪽에서 먼저 닫고 싶어 하는지 잘 살펴 보아야 한다. 왜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두 마음이 되었는지 심각하게 갈등하고 고민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하나님께 의심 나는 부분이 있으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실제로 시험해 보아야 한다. 정말 하나님 당신을 보여 달라고 울부짖어야 한다. 정말 하나님만이 나의 인생의 주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심지어 돈 문제를 걸고서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완전히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으로 아무 의심 없이 믿어지기 전까지 자꾸 시험해야 한다.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에게 어떻게 야단쳤는가?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더우라고 해서 화끈하게 찬양하고 울면서 기도하라는 것도 아니요, 차라고 해서 제자 훈련 전 코스를 개근해서 성경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아니다. “그래도 안 믿는 것보다 어떤 종교라도 믿는 것이 낫겠지.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준다니까 믿어보지.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 주시겠지”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믿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정말 ‘아바(아빠) 아버지’라고 세상의 어떤 것 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부를 수 있는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고 심지어 내 생명을 걸고서라도 하나님만 붙들 수 있는가? 그분이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슬픈 일이나 기쁜 일 모두를 주관하고 계시며 결국에는 당신의 영광으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을 믿는가? 그래서 어떤 환난과 시련 중에 자신의 고통을 당장 끝내는 것보다 장래에 드러낼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더 소원하는가? 아니 다 제쳐 두고 단 한가지라도 확신하는 것이 있는가? 돈에 쪼들릴 때에 돈이 나를 살고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그럴 권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돈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도무지 이런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끝까지 의심하고 그 의심한 것의 결말을 분명히 볼 때까지 무엇이든 시험해 보라. 단 자기 당면한 현실 문제만 해결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 당신의 실체를 보고 싶은 소망으로 시험하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직접 체험하는 길 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은 절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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