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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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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5.9.3 http://www.nosuchjesus.com |
팔복강해(1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5:19)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
온갖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지 교회 안에 가끔 희한한 일들이 벌어진다. 예를 들면 평소 때에 항상 온유하며 신실하여 가장 존경을 받던 장로가 어느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스캔들에 휩쓸리는 것이다.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워 딴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거나, 교우한테 빌린 돈을 떼 먹고 잠적했다거나, 그런 분의 자녀가 아버지의 학대에 견디다 못해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다른 교회로 옮겼다든지 하는 일이다.
그런 소식을 접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은 “아니 그렇게 믿음이 좋고 인자하던 분이 어떻게 그럴 수가?”이다. 보통 사람도 어지간해선 범하지 않는 잘못인지라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절로 고개가 갸웃뚱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서 그런가? 돈과 여자와 자식에 이기는 장사는 없어서인가? 장로쯤 되려면 믿음이 어지간해선 안되고 교회 다닌 경력도 대단할 텐데 그 동안 믿음과 생활이 서로 따로 놀았다는 말인가? 믿음이 실제 삶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왜 교회를 다녔는가?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도수장에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자기 생명을 바쳤다. 그래서 신자도 그런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따라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원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내가 정말 예수를 믿었기에 망정이지 이전 같으면 절대 그대로 안 두고 요절을 내었을 것인데”라며 이를 악물고 참는 경우가 많다.
비폭력 무저항 주의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그 속에 복수의 칼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아무리 두들겨 패도 반항은커녕 아무 표정 없이 말 한마디 안하고 끝까지 맞고 있는 자가 사실은 더 무섭다. “안 되는 것은 무조건 되게 하라”는 군대에서조차 그런 사람은 고문관 취급하여 열외로 쳐준다. 비폭력 무저항 주의는 다른 항거 수단이 도저히 없을 때에 동원하는 최후의 수단이자 가장 강력한 무기다. 어쩌면 물리적 폭력은 없어도 폭력 중에 가장 큰 폭력이 될 수 있다.
신자의 화평은 다르다. 무조건 비폭력 무저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남아 있으면 아무리 평화적 방법을 동원했다고 해서 화평이 된 것은 아니다. 문제를 부인, 외면, 타협, 왜곡, 봉합해선 더 추하고 골치 아픈 새로운 문젯거리를 만들 뿐이다. 물리적 힘이 동원된다고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죄가 있음에도 죄가 없는 것처럼 가리는 것이 더 나쁜 것이다.
교회의 가장 존경 받는 장로가 말도 안 되는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은 그 동안 자기 속의 죄성과 탐욕과 상처를 그냥 겉만 봉합해 두고 겉으로 경건한 척 했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곪아터진 것이다. 말하자면 그도 자신의 영적인 모순과 갈등에 대해 스스로 비폭력 무저항 주의로 대처했던 것이다.
부활 후 예수님이 하신 첫 마디?
예수님은 본문에서 ‘화평케 하는’ 자라고 했지 ‘화평 하는’ 자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 말은 항상 정확하지 않아서 언뜻 들어선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 지을 수 없다. ‘화평 하는’은 문법적으로 따지면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다. 쉽게 말해 나는 ‘걷는다’는 자동사다. 걷는다는 동작의 주체는 ‘나’이며 그 동작의 영향이 미치는 대상도 ‘나’다. 마찬가지로 ‘화평 하는’이 자동사일 때는 내 하나 화평하면 그만이라는 뜻이 된다.
“나는 죄 안 짓고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서로 빚진 것 없고 빚질 것도 없으면 된다”는 식으로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 혹시 상대로부터 상처나 손해를 입더라도 예수 믿는 자로서 용서해 주고 없던 일로 친다. 예전 같으면 손해 배상 청구를 하거나 반드시 앙갚음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신자가 된 후 그 정도 된 것만도 대단한 발전이다. 그러나 본문의 ‘화평케’는 우리말 번역도 그렇지만 원어적으로 목적어가 필요한 타동사 용법으로 쓰였다. 그 말은 화평케 할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나아가 구체적으로 화평케 하는 행동이 적극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행동의 영향과 결과도 당연히 목적한 상대에게 미쳐야 한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처럼 실제로 자기가 미워했던 사람에게 남들보다 더 많은 떡이 전해져 그 사람이 들고 있어야 한다. 미운 사람이 떡을 받긴 받되 남들과 적게 혹은 같이 받아서도 안 된다. 심지어 내 손에 남에게 줄 떡이 남아 있어도 안 된다. 단순히 “예수를 믿었으니 내가 참고 말지”로선 얼마나 화평과 거리가 먼지 이제 조금 이해가 되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신자에게 기껏 비폭력 무저항 주의를 가르치려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면 자칫 “예수 믿지 않는 놈들과는 상종도 말고 우리끼리 교회에 모여 박수치고 찬양하자”도 아주 완벽한 비폭력 무저항 주의가 될 수 있다.
누군가 우스개로 예수님이 부활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마디가 “놀~랬~지?” 였다고 한다. 많은 신자들이 갖고 있는 화평이 마치 이 개그 같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을 “너희들이 나를 아무리 죽여도 나는 메시야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살아날 것이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서 네 놈들에게 ‘메롱!’ 하고 놀래켜 줄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한 셈이다.
그래서 신자도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나는 신자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다. 나는 절대로 복을 받는다. 나중에는 형통하여 너희들 코를 납작하게 해 줄 것이다. 그 동안에 내가 기도하며 찬양하여 얻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너희들이 결코 뺐지 못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속으로 골백번 다짐한 후 불신자들 앞에선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으로 끝까지 참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화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였다. 저들에게 화평이 있지 나에게만 화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나에게 화평이 없어도 저들에게는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나의 화평은 저들을 용서하고 화평케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자를 먼저 택하여 거룩하게 만들고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케 한 것이다. 만약 신자에게만 화평을 주려면 따로 뽑아서 훈련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
샬롬의 행복
본문에서 화평이라 번역된 헬라 원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로 쳐서 ‘샬롬’에 해당한다. 서로 간에 화평과 번영이 넘쳐 완전한 행복에 이르러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서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단지 갈등이나 분쟁이 없이 덤덤하고 아무 별 탈 없이 지내는 상태가 아니다. 둘 다 만족하여 행복해 하기는커녕 둘 사이에 담만 안 쌓았다 뿐이지 용서하고 화해한 수준까지 가지 않고도 단지 비폭력 무저항이니까 화평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자신이 화평할 수 있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에 앞서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 쪽에 무게 중심이 실려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화평이 아니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그 분께 복을 받아도 의미가 없다. 또 그 받은 복도 실제로 하나님께 온 것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나 자기 노력의 결과일 수 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이 예수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그 분이 하신 일을 반드시 우리도 그대로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져야 한다.
본문에서도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단순히 신자라는 일컬음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당시 로마 귀족 사회에선 자기 몸에서 난 아들이라고 전부 다 아들로 취급하지 않았다. 가정교사를 부쳐 엄격하게 교육 시킨 후 여러 가지로 테스트하여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자만 아들로 칭함을 받았다. 대신에 아들이 된 자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받아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똑 같은 권위를 가지고 집안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본문에도 당시의 그런 의미가 은유적으로 포함 되어 있다.
신자는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 앞에 서서 그분이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하는 자다. 쉽게 말해 실제 그 아들이었던 예수님과 똑 같이 행해야 한다. 화평케 하는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십자가에 죽고 죄인을 대신 살리셨다. 화평케 할 대상인 상대가 살아야 한다. 기가 펄펄 나도록 살아야 한다. 그래서 상대가 샬롬이 될 때에 나도 샬롬이 되며 두 사람이 동시에 샬롬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요10:10)이라고 했지 않는가? 돈만 바라는 삯군 목자는 이리가 오면 도망가지만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더라도 양을 살리셨다. 마찬가지로 신자도 그와 똑 같이 해야 한다.
성경이 신자더러 그 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바로 잘 자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는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을 도덕적, 종교적으로 닮으라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신자 혼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이를 만큼 참는 것으로 그쳐서도 안 된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 “다른 뾰족한 수도 없는데다 장로 체면에 참고 말지”는 아니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 “그 놈에게 도대체 사랑을 베풀 만한 구석이 없고, 남에게 줄 사랑도 내게 남아 있지 않으니, 제발 부딪혀 괜히 서로 피곤하지 않도록 가능한 피해야지”라는 뜻과 같다.
신자가 진정으로 화평케 하는 자가 되었는지 아주 쉽게 점검해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고 있는가 알 수 있는 너무나 간단한 방법이다.. “지금 진정으로 화평케 할 대상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 혹시 “나는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주위에서 나를 두고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할 정도라 누구랑 원수지거나, 돈 떼먹었거나, 서로 상처 주고 받은 자 없어 용서하고 화해해야 할 대상이 딱히 없는데…”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럼 성경적 화평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 놓지 않았다는 증거다.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이웃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생명을 살려내야 하는 일이다. 거창하게 아프리카 빈민국이나 회교권의 우상 숭배 민족에게 까지 갈 것 없다. 매일 만나 찌지고 볶으며 사는 아내, 남편, 자녀들, 시부모와 이웃과 직장 동료와 교회 성도들 모두가 화평케 할 대상이다.
신자는 그가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님과 똑 같이 행동하고 말하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찔림을 주고 영향을 끼쳐서 새생명으로 인도되는 변화를 일으켜 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과 만날 때마다 서로 완전히 행복해지는 경지에까지 가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듯이, 신자 개인의 선호도, 호불호(好不好)에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그 상대의 생명이 살아나도록 해주어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바로 그 샬롬을 모든 이와 함께 나누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복의 근원이 되어 있는가?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다. 예수님을 닮아야 하듯이 그도 또한 신자가 보고 배워서 닮아야 할 대상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그의 영적인 후손인 모든 신자도 당연히 복의 근원이 되라고 하나님의 불림을 받은 자다.
그럼 복의 근원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3절 후반부에 너를 ‘인하여’ 복을 주되 다른 민족이 복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 사용 된 ‘인하여’는 원어적으로 ‘통과하여(through)’라는 뜻이다. 따라서 복의 근원은 복이 발생하는 ‘원천(源泉), 복이 머무는 정거장, 복을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단지 복이 통과하는 파이프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는 복의 발상지 자체는 하나님이지만 그를 통하지 않고 다른 경로로는 복을 받을 길이 없으니 분명히 그는 복의 근원이 된다. 불신자에 대한 신자의 입장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브라함이나 오늘 날의 신자나 단지 복이 지나가는 파이프일 뿐이다.
그래서 신자란 하나님께 받은 복을 남에게 그대로 전해 주어서 화평케 하는 자다. 만약 신자가 화평케 하지 못한다면 복의 파이프가 막혔다는 뜻이 되며 반대로 화평케 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막힌 파이프를 뚫어야 한다. 매일 성경 보고 기도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불신자에게 전도하면 파이프가 뚫어지는가? 말하자면 그렇게 했더니 이웃과 화평해졌는가? 그렇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스캔들을 저지른 장로가 성경 적게 보고 기도 안하고 교회 봉사에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흔히 신자들, 심지어 목회자마저 복이 통과해야 할 파이프에 녹 쓸어 막힌 것은 청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 청소란 이미 속이 썩어서 막혔을 때 하는 것이며 더 중요한 것은 그 전에 썩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럴려면 물이 안 막히고 잘 흐르게 하고 흐르는 물에 불순물이 섞이지 않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지만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고 또 아무리 잘 흘러도 찌끼는 쳐져서 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신자들이 자신을 파이프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내 잔이 넘쳐나이다 하면서 컵으로 보고 있다. 또 가끔 남을 섬기거나 용서해줄 때도 자신의 자존심과 이해타산을 개입시키려 든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오직 그분의 은혜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전할 때도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여 받은 그대로 전해야 한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더러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고후3:3)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파이프가 제 기능을 못하는 이유는 어느 한쪽이나 양쪽이 막혀 있는 경우 뿐이다. 양쪽을 다 열어놓고 물이 콸콸 흐르게만 하면 썩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막힌 것은 일단 열어 제친 후에 청소해야지, 막힌 것을 열지도 않고 청소해봐야 여전히 속은 계속 썩어 들어가며 겉만 광택 내는 꼴이 된다. 교회에서 가장 존경 받는 장로가 너무나 희한한 일로 실족하는 것처럼 말이다.
신자는 한 쪽(입구)은 하나님에게 연결 되어 있고 다른 쪽(출구)은 가족, 성도,이웃불신자, 세상 등과 연결되어 있는 파이프다. 신자니까 이웃에게 해를 안 끼치고 또 내가 해를 당해도 복수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상대를 화평케 하여 새생명을 더 풍성하게 주는 일을 하지 않는 신자는 복의 출구가 막힌 신자다. 아무리 성경 공부하고 기도해야 출구가 막혔으니 파이프 속에 꽉 찬 찌끼가 씻겨지지 않는다. 가장 먼저 세상과 사람을 향해 자기 마음을 완전히 열어야 한다. 남들에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의 의는 일절 앞세우지 말고 100%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열망과 안타까움이 먼저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신자가 하나님을 향한 입구에 대한 감각은 대단히 예민하다. 영육간에 강건하지 못하면 당장 하나님과의 관계에 뭔가 가로막혀 은혜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솔직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기 싫어 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이 있는가? 오히려 입구 쪽은 너무 크게 열어 놓고 있지 않는가? 매일 새벽 기도, 삼일 저녁 예배, 금요 찬양, 구역 공부, 기도 모임, 전도 및 제자 훈련 눈코 뜰 새 없이 입구는 청소하고 넓힌다.
파이프란 양 쪽이 다 뚫려 있고 컵은 한 쪽이 반드시 막혀 있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를 파이프로 만들어 복을 부어 주고 있는데 신자는 출구 쪽을 막고 컵으로 그 용도를 바꾸어버렸다. 그러니 처음 하나님을 알고 난 후 그 컵이 다 찰 때까지는 은혜가 충만하다가 차츰 하나님이 부어주고 싶어도 부어 줄 여백이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당연히 그 동안에 고여 있던 물이 썩기 시작한다.
결국 신자의 막힌 출구를 열어 컵을 파이프로 바꾸지 않고는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출구를 열지 않아 물이 너무 썩어 신자의 기본적 신앙마저 위태로워지면 하나님이 새 물을 부어주시지만 여전히 썩은 물과 혼합되는 효과밖에 나지 않는다. 컵 전체가 완전히 깨끗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새물이 들어와도 잠시 산소 함유량만 조금 늘어난 상태가 되지만 또 다시 썩기 시작한다. 교회 오래 다닌 신자들이 어쩌다 은혜 받지만 곧 또 다른 환난이 겹치며 영적인 침체에 빠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네 꼴이 어때서?
신자가 되면 누구라도 이전과 다르게 남들과 화평하기를 소원하고 또 노력도 한다. 말하자면 출구를 뚫을 마음은 있다. 그런데도 잘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항상 “하나님 내가 지금 겨우 이 모양 이 꼴로 어떻게 남을 돕겠습니까? 내 코가 석자인데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과 여유가 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불평을 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남을 돕겠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컵부터 먼저 채우겠다는 심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당신이 소유한 것이라고는 하나 없이 전부를 바쳐 우리에게 더 풍성하게 채워주셨다. 예수님을 그대로 닮으려 한다고 꼭 순교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신자이므로 있는 것 없는 것 전부 다 끌어 모아 불쌍한 이웃에게 갖다 줄 필요도 없다. 우선 가장 먼저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과 형편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최고로 유익하게 마련해준 최선의 상태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어떤 현실적 형편에 처해 있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하신 영광이 반드시 드러나고야 만다는 믿음과 소망이 없고는 출구를 절대 쉽게 열지 못한다.
저도 가끔은 “진작에 예수를 좀 더 일찍 믿어 목회의 길로 더 빨리 들어섰다면 아주 큰 교회로 성장시킬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몸만 성하다면 남들 보란 듯이 번듯하게 목회를 할 자신이 있는데…”라는 생각이 스쳐지나 간다. 인간적인 욕심이며 하나님 앞에 큰 교만이다. 더 일찍 믿었더라면 신학적 지식은 분명 더 쌓였을지 몰라도 목회를 어떤 모습으로 하느냐는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그리고 남들 보기에 힘든 것 같지만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혜는 더 크다. 제가 가진 힘이 약해지니까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어 더 깊은 교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에게 꼭 맞는 형편의 교회와 너무나 좋은 성도들을 만나게 해 주셨다. 성도들이 다른 교회 교인보다 더 착하고 거룩하다는 뜻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꼭 전해주어야 할 은혜가 있고 또 여러분도 저의 재능과 은사에 꼭 적합한 성도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를 통해 여러분에게 흘러 들어갈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바로 이 모양 이 모습이 아니고는 안 되는 그분만의 필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생명을 더 풍성히 받느냐 못 받느냐는 오직 저와 여러분이 파이프와 컵 중에 무엇이 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부어줄 복의 근원이 되는 실력이다. 끊임 없이 컵이 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 파이프 상태로 남아 그 속을 깨끗케 하는 실력이다. 그런데 파이프 입구는 신자가 된 후로 항상 열려 있다. 때때로 내 욕심으로 막힐 때가 있어도 성령이 내주하여 미세한 음성으로 들려 주거나 강권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자가 실제로 노력하여 키워야 할 믿음의 실력은 출구를 얼마나 활짝 여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현실적 형편에 상관 없이 항상 들어오는 만큼 언제든 나갈 수 있도록 입구와 출구의 지름을 똑 같이 만들어야 한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을 삼을 때에 가장 먼저 하나님이 요구한 조건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다. 이제 너는 복이 통과할 파이프로 쓸 테니까 혹시라도 그것을 담아 놓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복이 오직 너를 통해서만 세상을 향해 나가기 때문에 네가 먼저 빈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란 자신을 통해 이웃을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자다. 자기 속에 어떤 숨김, 막힘, 썩음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을 그대로 깨끗하게 전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내 형편과 내 꼴이 왜 이런가? 하나님 내 형편이 도저히 마음에 안 듭니다” 하면서 자기 속부터 채우려는 심보를 없애지 않고는 어떤 도덕적 종교적 화평의 노력도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히려 “아니 그럼 현재의 그 꼴은 내가 해준 것이 아닌가? 그럼 지금 그 꼴에다 대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불평하는 것 아니냐? 왜 그 꼴이 어때서?”라는 질책만 받을 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 안에서 항상 신자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 물론 아직은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반드시 지금 그 길을 통과해야 목적지로 갈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 길을 불평하고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그 분이 정해 놓으신 목적지에는 절대 도달 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는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만나는 모든 사람, 처해 있는 모든 여건이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신비한 계획 가운데 있음을 확신하는 바탕 위에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것이다.
믿음이 좋아 보였던 장로가 마누라를 버리고, 돈을 떼 먹고, 자식을 정신 병원으로 보내는 뒤에 말 못할 개인적인 이유도 많겠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마누라와 자식과 돈을 빌려 준 사람들에게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서 부쳐주셨기에 속이 텅 빈 파이프로서 당신의 은혜를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이 없었다. 대신에 내가 잘못만 안 하면 된다는 식의 비폭력 무저항 주의로 덤덤하게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신자가 만나는 누구라도 육신적으로 병이 들었든,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았든, 경제적으로 궁핍하든, 영적으로 미혹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든, 그 모두가 화평케 해야 할 대상이다. 구태여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생명을 더 풍성하게 주어 생생하게 살려 내고 그와 나에게 샬롬이 동시에 넘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 파이프의 속을 비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통과시키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도 교회로 모여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에만 전념하여 이미 활짝 열려진 하나님 쪽을 향한 입구만 자꾸 더 크게 벌리려 하고 있지는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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