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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순전한 신앙 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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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해 왔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있는 내 글에 많은 공감과 깨달음이 있어 관심차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고맙다고 했더니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 했습니다. 그것은 “목사님네 교회는 십일조를 하십니까?”라고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면서 더 이상 왜냐고? 어떻게 그렇냐?고도 묻지 않고 끊어 버렸습니다. 그분은 마치 이단이나 사이비임을 확인이라도 한 듯한 태도로 끊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에 십일조에 대한 논쟁이 극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근간에 인터넷을 통해 보면 십일조를 하느냐 안하느냐를 따져 서로 잘못된 교회요 잘못된 신앙으로 비판하고 공격하는 경향이 매우 심해진 상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글을 보면 주객이 전도된 듯한 경우도 많이 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에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는데 십일조 문제가 엄청 큰 문제요 이단 시비를 가릴 만큼이나 된것처럼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안하고는 신앙생활에 있어 매우 부분적 성경해석상 입장 차이일 뿐이지 마치 갱신의 최대 적이나 없애야 할 크게 잘못된 신앙이라도 되는양 무섭게 날을 세울 필요까지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삯군이나 잘못된 자들이 그것을 욕망의 필수적인 것으로 이용해 먹는 경우가 있어 문제지만 십일조 폐지론을 강조하는 교회나 교회구원을 이루어가는 모습에서 볼 때 정작 우리가 우선적으로 개혁해 가야할 진정한 문제는 다른 것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금문제에서 볼 것 같으면 “성전 건축헌금 문제”, “일천번제 헌금 문제”, “복채처럼 된 기복적 헌금 문제”, 연보가 가난한 자와 소외계층을 위한 기금이나 협조금 처럼 되어져가는 것 등, 이런 것들이 사실은 더 심각하고 헌금 문제에 있어 개혁의 일순위라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 폐지론, 반대론을 주장하는 자들>
“십일조를 폐지해야 한다, 없애야 한다”, “십일조는 없다”, “십일조를 반대한다”는등 십일조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며 반대론을 펴는 자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학자 중에도 목회자 중에도 평신도 중에도 각자의 입장을 나름대로 강조합니다. 이들의 부류를 나누어 볼 것 같으면 안티기독교 중에서도 강하고 진보주의자들의 경우는 더 강하고 일부 개혁주의자들 중에도 십일조 폐지를 강하게 주장함을 봅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같은 주장을 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십일조는 신약의 말씀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말씀하신 마태복음23:23에서 십일조 말씀은 율법의 준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는 완성되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분은 십일조는 구약에서 신정국가인 이스라엘만의 사회 보장적 세금제도였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십일조는 구약성전 제도요 율법제도며 십일조는 시내산 언약 가운데 구약 제사가 이루어지기 위한 제물의 일종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약 모든 율법의 성취자로 오셨기 때문에 구약제사의 일환인 십일조도 성취된것이라 강조합니다. 때문에 신약시대의 십일조는 불가하다고 합니다.십일조 불가론과 폐지론을 강조하는 자들은 다른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엄청난 차이와 좁힐 수 없는 이론을 가지면서도 십일조 반대 입장 만큼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동일합니다. 자유신앙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이나 십일조 반대론을 펴는 일부 안티기독교나 또한 일부 개혁주의자들 모두 십일조는 율법이고 구약적인 것으로 신약시대는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는 공동입장입니다. 어떤 분은 진정한 개혁주의는 십일조를 하지 않는데 있다고 주장하며 어떤 진보주의자는 십일조는 신앙의 자유를 찬탈하고 얽매는 짐으로 불의한 것으로 몰아붙이기도 하며 또한 어떤 네티즌은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지 않는데 돈을 좋아하는 삯군목자들이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의무화 시킨다면서 심하게 공격하기도 합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십일조 폐지론을 주장하는 어떤분은 “한국교회 십일조는 예수의 부활을 다시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이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모독하는 일이다”라며 엄청난 정죄를 당당히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를 하는 것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자들보다 더 문제가있고 크게 신앙이 잘못되어 있는 것처럼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십일조 폐지론에 대한 반론>
성경이 분명 신구약으로 되어 있음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구속사로 볼 때 구약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된 것은 정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약교회나 신약교회나 성민이든 성도들이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모습과 삶에대한 내용의 규례는 구약에 대부분 다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성민으로 구별시키신 구약교회의 거룩한 모습과 생활을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도 신약에 없다고 안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구약을 부인하는 경우가 됩니다. 이미 구약에 잘 나와 있기 때문에 신약에 없는 것이며 때로는 구약의 규례의 미비점을 온전케 하려고 신약에서 간략히 더 다루어 말씀하기도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 마태복음5:21-22절을 보면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더하여 형제를 무시하고 욕하고 하는것 까지 금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살인의 계명을 생명을 직접 해치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러라”(요일3:15)고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다 더 하시기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 하였느니라”(마5:27-2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이 없다면 우리는 간음을 세상기준처럼 직접적인 행위로만 기준했을 것입니다. 또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율법이나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에 대하여 예수께서 더하여 다시 말씀해 주시기를 악한 자를 대적 말라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오히려 악한 자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38-48)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된 자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위한 지침이요 규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17-20)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교회인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교회나 다 이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서 거룩한 모습과 의의 규례로서 계명은 율법에 자세히 나와있고 예수님은 복음적인 얻음에 필요한 말씀을 더하여 완성케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증거 하기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 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5:5)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분명 믿음으로 천국 가지만 이런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모습의 삶이 되지 못하고 공의를 하나님 나라 됨으로 나타내고 실현 시켜가지 못함을 뜻합니다. 때문에 복음에 합당한 개혁주의는 무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신율법주의자인 것입니다. 신율법주의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와 본질이 다릅니다. 율법의 언약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의로운자다운 삶의 기준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 6:25를 보면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으로 유대인들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근거의 말씀으로 삼으나 이 말씀은 이미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의의 백성들이 이제 의인다운 모습과 삶으로서 계명을 지켜야 함을 말씀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의로 성도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다운 모습,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다운 모습이 어디 있냐 하면 하나님께서 삶의 규례로 주신 계명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에 이미 먼저 거의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먼저 교회되고 하나님나라된 이스라엘의 거룩한 모습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의 율법은 제사법, 의식법, 절기법등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모습과 삶에 대한 계명을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새계명이 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고 분명히 증거한 것입니다.
신약에는 없거나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다고 안해도 되고 소홀히 해도 되는 양 말하는 자들이 많은데 매우 위험한 발설임을 알아야합니다. 구약에 잘 나와있는데 신약에 똑같이 다시 기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약에 구약의 말씀들이 인용되고 반복이 되어 나오는 경우도 여럿 있지만 그것은 언약의 확증을 위함이거나 앞에서 언급함처럼 보완이나 완성을 위한 것입니다.
가령 성도에게 있어 우상숭배에 관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매우 중요하고 철저하고 분명해야 함을 모두 부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을 보면 우상숭배에 관해서는 드물게 나와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거의 없고 사도행전에 좀 나와있고 바울서신에서 당시 우상숭배 천지였던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향한 서신에 다루어져 있습니다. 그것도 주로 우상제물에 관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교회시대에 와서는 우상숭배를 소홀히 해도 되고 각자 양심에 따라서 형편에 따라서 상황윤리처럼 행동해도 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미신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십계명중 제 1-2계명으로 성민들에 잘 금지되어 있고 그 외에 구체적인 내용의 말씀은 구약에 너무 잘 나와 있는 것입니다. 우상이 뭔지, 왜 만들거나 거기에 절해서는 안 되는지, 그리고 우상을 좇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떠하였는지 구약에 빠짐없이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우상에 관해 다른 말씀을 보면 구약에서 잘 언급 되지 않는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와 교회시대에 완결의 말씀으로 우상숭배는 곧 탐심이라고 (골 3:5) 보완의 측면에서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3:8이나 12절에 보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했는데 그래서 예수님은 계명이나 율법을 압축해서 마음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며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 하시면서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하셨습니다. (마 22:37-39) 이것을 역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몸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 14:21, 요일 5:2-3)
신약에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는데 분명 두 군데에 나와있습니다. 마 23:23과 히브리서 7:4-10에 보면 유대인들이 믿음이 없이 관습이나 외식적으로 행한 십일조 생활에 대해 믿음으로 행해야 함을 가르치는 예수님 말씀과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에서 믿음의 조상으로서 이행한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 폐지론을 주장하는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매우 소극적인 내용으로 본다거나 그 말씀 자체를 구약시대의 연장의 말씀으로서 제물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성취이후에는 더 이상 필요없는 율법적인 것으로 단정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예수님 말씀이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이전의 말씀들로 되어있고 또한 그 안에는 많은 구약의 말씀이 인용이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십자가 죽으심 이후로는 그 말씀들을 더이상 지키거나 따라서는 안된다는 말이 됩니다.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니라” (눅 16:16-17)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하는 십일조>
모든 십일조의 문제는 하든지 안하든지 믿음에 있습니다. 십일조 폐지론을 주장하는 측이나 십일조 이행을 주장하는 측이나 이제 십일조는 믿음으로 해야 함을 성경적으로 세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마태복음23:23절에서 예수님은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에 대해 어떤 분들은 이것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만 연관된 말씀이었고 또한 십일조는 그들의 제물이었기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사 자신을 구속의 제물로 드려 완성케 하신 것으로 교회 시대와는 무관하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신앙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그렇게 내려온 유대인들 모두에게 있는 것이었고 역시 그런 신앙의 흐름이나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개종한 초대교회 유대인 성도들 가운데 그런 외식적이고 인간적인 잘못된 신앙이 나타난 것을 우리는 압니다. 더욱이 사도로 부름받은 제자들 모습에서도 우리는 유대주의적인 메시야 왕국관과 외형적 외식적인 면을 볼 수 있었고 예수님은 그 점을 많이 지적하시고 가르쳐 주심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의보다 우리의 의를 나타내려함과 그것을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거나 잘못된 믿음이라며 비방하거나 유대주의자들처럼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외식적이고 인간적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나 오늘날이나 그리고 앞으로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복음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율법중심의 생활 속에서 대부분의 신앙생활이 습관적이 되었고 형편과 부류에 따라 그들의 신앙생활은 축복을 기대하는 열심이 많았고 보통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아야 할 지도자나 직분의 부류들은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역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십일조가 약초의 뿌리까지 헤아려 철저하게 세밀히하며 잘한다고 스스로를 인정하며 또한 사람들에게 보이려 했고 그것을 기준으로 유대종교사회는 신앙의 잣대를 가지고 높이며 인정 했지만 올바른 믿음이 없는 그들의 모습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시면서 인간적인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요 또한 진실한 마음의 사랑과 구원에 이르는 복음적인 믿음으로 십일조를 이행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와 신과 인을 가지고 함께 십일조 하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과거 유대인이나 교회된 이방인이나 하나님 백성이라면 인본적인 모든 요소들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올바른 믿음으로 생활해야 함을 말씀한 것입니다.칼빈은 마태복음23:23절 주석에서 십일조를 율법주의자들처럼 믿음이 없이 외식으로 하는 경우를 지적했고 십일조는 성도가 믿음으로서 이행해야 하는 예배의 한 일부로서 마땅한 것으로 주장했습니다.
율법이전의 시대에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십일조를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드렸습니다.(창14:17-20) 이것을 어떤 분들은 당시 주변 이방사람들이 왕에게나 족장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풍습이나 세금같은 의무적인 행동을 아브라함도 본받아 행한 것으로 여기며 고대에 신화나 전설 같은 얘기를 근거로 성경에도 없는 것을 주장하며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왜곡시키려 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7:1-10절에 보면 멜기세덱은 부모도 없고 족보도 시작도 끝도 없이 불쑥 나타난 자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무엇을 근거로 그에게 십일조를 주었겠습니까? 그는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자로서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요 별다른 제사장이었습니다. 히브리기자는 어떤 면에서는 막연하고 분명치 못한 멜기세덱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생각하고 저에게 좋은 것으로 주었을까 증거 하면서 아직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잠정되어 있던 제사장들도 십일조를 바치게 된 것이며 또한 받게 된 것으로 증거 하는 것을 보아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그대로 믿음으로 행한 십일조였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교의 풍습이나 그들의 관습적 행위를 따라 한 것을 왜 성경은 믿음으로 말씀하겠습니까?
복음적인 교회에 있어서 진정한 십일조에 대한 개혁이 있어야 함은 그것을 폐지함이 아니라 믿음으로가 아닌 기복적인 조건으로 하는 것이나 세금처럼 강압적인 요구로 강조되는 것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행위의 신앙의 기준으로 높임 받으려고 이름을 알리며 외식적으로 하는 그런 분위기나 교회내 전통으로 된 것 등을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더우기 십일조는 모두 목회자의 것이라거나 십일조 명단을 주보에 공개하는 것이나 일일이 호명하며 기도해 준다거나 교회 재정 충당을 위해 여러모로 강조하고 안하면 무엇이 잘 안되고 망할 것처럼 조성하는 설교나 그런식으로 강조하는 것들이 개혁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건축헌금이나 그밖에 일천번제 헌금이나 이런저런 이름으로 규정된 헌금 등을 개혁 폐지해야 합니다.
오래전에 소속 연합회 제직 세미나에 소속감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강사로 온 유명한 분이 모인 제직들에게 “여러분 교회에서 십일조 제일 많이 하는 자가 되길 축원 합니다”라고 하자 거기에 모인 분들이 하나같이 목이 터져라고 “아멘!”하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모두 믿음이 없는 잘못된 인간적 십일조관인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십일조 봉투도, 십일조 강조도, 십일조 명단이나 그것을 공개 내지는 호명기도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성경을 골고루 배워가며 그것이 나오게 되면 그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이 자란 분들이 자원해서 믿음으로 드릴 뿐입니다.
믿음으로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우리를 청지기로 맡기셨다는 것과 그 중에 하나는 주를 위해 그 나라와 교회를 위해 구별해 놓으신 것임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성도의 기본 도리인 것입니다. 여기부터 우리는 모든 것을 주께 드릴 수 있는 삶이 시작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는 교회 구원의 일을 위해 섬기는 또 하나의 삶의 기본규례>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십일조의 실제 목적은 구약교회를 섬기는 자들을 위해 기업으로 주신 것에 있습니다. 민수기18:21-24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 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제사장들이나 레위인 들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성전일 즉 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삶으로 예배의 삶을 바르게 살도록 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교회를 이루어 가기 위해 십일조는 서로 섬기는 믿음생활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증거 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성전에서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같이 주께서도 복음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3-14)고 했습니다.
분명 구약교회나 신약교회나 구원을 이룸에 있어 복음의 사역자들이 교회구원을 위해 성도 섬기는 일에 전념해야 함이 마땅한 것처럼 성민이나 성도된 자들은 그들이 그 일에만 전심하도록 섬기는 일 또한 마땅한 것입니다. 그래야 함께 교회를 세움에 합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중에 성도들이 섬기는 선한 일로서 기본도리중의 하나가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안 되는한 더 이상 우리는 교회를 위해 나를 드릴수가 없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드리기도 했는데 교회를 섬기는 귀한일의 다함이었지만 이것이 다 믿음으로 하는 십일조부터 출발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그러나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나의 권리를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고전9:15) 그것은 아직 고린도교회가 교회를 섬기는 일로서 헌금을 드림에 대한 믿음이 아직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가 억지로가 아니라 믿음이 되어 감사와 즐거움으로 행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믿음도 안되는데 십일조를 의무적으로 강조하여 십일조에 대한 거부감만 주는데 (그래서 십일조 폐지론 원인도 됨) 사도바울은 그렇지가 않고 믿음이 되도록 먼저 가르치는데 전념한 것입니다. 그 외에 신명기14:22-29절에 보면 십일조가 기업이 없는 제사장이나 레위계통 사람들뿐만 아니라 어려운 과부,고아와 객을 위해 함께 쓰여 지도록 했는데 이 또한 다 교회를 섬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십일조는 이렇게 먼저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요 그분이 주심을 인정하고 무엇이든지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하는 하나님 주신 성도의 마땅한 규례이면서 교회를 섬기는 선한일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라면 감사와 기쁨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것을 거저 받는 자로 더욱 교회가 신령한 은혜가 풍성하기 위해 아낌없이 인색하지 않고 구별시킨 주의 것을 믿음으로 드리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복음에 합당한 교회구원을 이루어가는 선한 일에 성도된 모두가 동참하고 합력하게 되는 은혜의 섬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안에서 의와 인과 신의 합당한 믿음이 서간다면 십일조는 마땅한 것으로 이행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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