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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순전한 신앙 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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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삶은 싸움이고 전쟁입니다. 인류 역사 흐름을 주도 하는 칼과 총으로 전쟁하는 것만이 비극의 싸움이 아닙니다. 인생의 삶 자체 속에는 얼마든지 불행과 파경과 괴로움을 야기 시키는 싸움이 언제 어디서나 매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전쟁터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이 치열한 싸움의 연속이요 상처만 남는 일생의 결국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싸움은 매우 지겹고 때로는 무섭고 살벌하고 갈등과 냉전의 연속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싸움이 없을 것 같은 가정에서도 여러 가지 다툼은 일어나고 있고 밖이 되는 세상과 사회는 전쟁터나 진배없습니다. 잠을 깬 인간은 아침부터 그 전쟁터로 나가야 합니다. 진짜 살기 위해서인지, 그렇게 서로 죽이고 망해 가자는 것인지 인간의 싸움은 일식 간에 지나가는 생애에 피할 수 없는 굴레요 괴롭고 힘든 상대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싸움 그 본질적 요인>
야고보서4:1-2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 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이 말씀에 보면 우리 인간들의 다투고 싸우고 전쟁하는 요인이 나오는데 그것은 욕망(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1-3절에 보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인생의 상태가 나오는데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좇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욕심, 그것은 만족할 수 없는 끝없는 욕구으로서 이 세상 죄로 죽게 된 형벌 받은 모든 인간에 있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죄의 속성이요 사망의 권세입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고 야고보 사도는 증거 했습니다.
욕심과 욕망은 더 가지려 하고 더 먹고 더 잘 먹고 더 살려고 하는 것이며 끝없이 더 높아지려 하고 남보다 앞서려 하고 남을 이기려 합니다. 때문에 누구나 상대가 될 수 있고 서로 다투거나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정한 친구와 라이벌 관계가 되어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한 혈육인 형제끼리도 살별한 싸움을 하고 심지어 한몸 된다고 하는 부부끼리도 갈등 지으며 파경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싸움은 형벌입니다. 죄인된 인간들의 굴레요 무거운 짐이 된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끝없이 화해하며 화평을 구하고 인류는 싸움 없고 전쟁 없는 평화의 세상을 원하지만 그럴수록 싸움과 전쟁은 치열하고 더 확장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원치도 않으면서도 마치 필요악처럼 해야 하는 것이 싸움이고 전쟁입니다. 결국은 이긴자나 진자나 다 처절하고 아픈 상처만 가지면서도 또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화평의 하나님이 없는 이기전 인간끼리들 로만 살아가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영원한 화평의 근원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죄로 인해 버림받은 인생의 형벌의 실재가 그런 것입니다.
창세기6:3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없는 육체의 소욕만 가지고 그 소욕을 따라 아귀다툼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증거 하기를 육체의 소욕상태는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와 투기와 술취함 등이라고 했습니다.(갈5:19-21참조) 주로 갈등과 다툼과 분쟁하는 상태의 인간 속성이 육체의 소욕들인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인간들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일이 있다고 했습니다(약3:14-16참조)
하나님과 단절되고 버림받은 인생의 불행과 비극,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육체의 소욕만 가진 인간의 상태로서 서로의 소욕을 위해 갈등과 다툼 그리고 전쟁의 처절함 이 모든 것이 다 죄로 타락하고 죄의 형벌을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배와 그 나라의 통치를 싫어하고 사탄의 미혹에 빠져 그의 지배하에 들어가 그의 본성을 따라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고 갈등 짓고 분쟁케 되는 저주의 세상으로 인생은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싸움은 우선 그 대적을 분별해야 한다>
교회를 일컬어 일명 전투적 교회라고도 합니다. 늘 싸워야 하고 싸워 가야할 교회의 특성상 그렇게 칭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2:3-4절을 보면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 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싸우는 군대로 비유한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중동의 한 분쟁지역에서 기독교 민병대로 조직이 되고 실제로 총을 가지고 자신들을 박해하고 미워하는 타종교와 전쟁을 벌이는 것처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성도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한 증거에서 성도의 싸움에서 그 대적을 이렇게 증거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성도에게 있어서 싸움의 대상과 싸움의 상태는 혈육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즉 인간적이고 세상적이 아닙니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이라는 것은 앞전의 내용에서 인간의 싸움에 대해 본것처럼 그러한 것인데 성도에게도 이러한 싸움이 많은 것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고 감정대립하고 욕망의 성취를 위해 쟁투하는 것인데 교회된 성도에게도 이러한 싸움이 있는 것은 육체의 소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분명하게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에 있지 않다고 밝혀주는 것입니다. 보면 성도라지만 형제끼리 재산다툼도 하고 부부끼리 자존심 싸움하고 삶의 터전에서 살벌한 경쟁이나 투쟁에 접전을 벌이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또는 교계 내에서도 서로 당파가 나뉘어 분쟁하여 나뉘고 어떤 자리나 이권으로 인해 암투하기도 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고발하며 쟁투를 벌이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디모데전서6:4-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착념치 않는 자들이 교만하여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며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에 빠져있고 마음이 부패하여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며 서로 다툰다고 말씀했습니다.
갈라디아서5:26절을 보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고 했습니다. 헛된 영광은 인간의 영광이요 세상 영광이며 썩어질 영광인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세상 인간은 서로 무섭게 쟁투하는데 성도들은 그런 싸움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구할 영광은 썩지 않는 영원한 영광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디도서3:9절에 보면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보면 잘못된 신앙의 논쟁이 많은데 재정러시아 당시 동방정교의 사제들은 손가락위에 천사가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는가에 대해 서로 논쟁하며 다투었다는데 이런 자들이 모두 복음에 합당한 신앙에 착념치 않고 어리석고 교만하여 언쟁을 좋아하는 자들의 행태인 것입니다.우리는 성도이면서 세상 정치문제를 가지고 서로 얼굴 붉히며 언쟁하고 사회문제나 이슈를 가지고 다투며 분쟁하며 서로 등지며 감정 대립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은 것과 바울은 심은 자요 아볼로는 물주는 자로서 다 같은 하나님의 집의 동역자인데도 그런 것을 따져 교회가 아볼로파, 바울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서로 분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그들을 책망하며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고전1:10-13)
오늘날도 보면 교회 안에 이런 분쟁이 많습니다. 젊은파, 노장파, 개척멤버파, 새로운 소장파, 원로 목사파, 현담임 목사파, 장로파, 권사파등 끝이 없는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심하면 서로 갈라지고 일층, 이층으로 나뉘어 따로 예배하기도 합니다. 서로 본당을 차지하려고 침투조, 방어조가 예비되고 방어선까지 구축되기도 합니다.사도 바울은 이런 식의 고린도 교회를 향해 나는 너희를 성숙한 신령한 신앙의 성도로 대할 수 없고 어린아이같이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는 너희가 아직 육신에 속한 자처럼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고전3:1-3)
성도된 우리들이 싸울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울 것은 서로 형제끼리 감정대립으로 인한 것도 아니고 자존심 상함으로 인한 것이나 무엇을 더 가지고 더 앞서고 더 크고자 하는 싸움이 아닌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싸움의 대적은 감정과 갈등이 오가는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그 무리들과의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성도의 마땅한 싸움>
디모데전서6:12절을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내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로 구별되는 부르심을 입은 또 하나의 목적은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임을 바울은 증거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이 아니라 육체의 소욕을 따라 혈과 육적인 악한 싸움을 주로 해온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거룩히 서가며 구원의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마땅히 싸워야 할 거룩한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전투적 교회라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딤후2:3-4)
믿음의 선한 싸움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외부적인 대적과의 싸움이요 또 하나는 내안에 내부의 적인 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인 것입니다.성도에게 있어 외부의 적이요 원수는 창세기 3:15에서 예고했던바 뱀이고 뱀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대적은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말씀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니까 분명 우리의 대적은 마귀요 또한 마귀의 권세를 부여받은 마귀의 세력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로서 세상 권세나 세력을 가진 자로서 교회 역사 속에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자들과 사탄의 하수인들로서 거짓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무너뜨리려 하고 성도를 미혹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과의 싸움은 어떤 무기나 힘이나 합력하는 연합세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사탄과 그 무리들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싸움을 싸우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의 전신갑주는 “진리의 허리띠”를 띠는 것이고 또한 “의의 흉배”를 붙이고 또한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된 신”을 신고 또한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또한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인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또한 “기도로 무장”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엡6:13-18)
성도가 외부의 대적과의 싸움에서 실제는 모세의 증거처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신19:21) 우리를 핍박하고 악으로 대해오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악한 자가 주리고 목말라 하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먹여주고 도와주며 그렇게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합니다.(롬12:20-21) 무엇보다 거짓된 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복음을 방해하며 교회를 요란케 하고 혼란케 하며 갈리게 하고 분쟁케 하려 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공격하고 성도를 미혹하려고 거짓 이적과 욕망에 맞는 다른 복음으로 계교를 부립니다. 이들과 상대하는 길은 오직 진리로 무장하여 대적하고 대항하는 길뿐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20:29-32)고 증거 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이후 복음으로 무장하여 악한자들을 용납지 않고 교활한 거짓사도를 분별하여 드러내고 잘 물리치어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는 교회모습을 가졌던 것입니다. (계 2:1-2)
이제 성도가 힘들게 때로는 처절하게 싸워야 할 또 하나의 대적은 내부적인 대적으로서 내 속에 있는 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달음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전9:26-27)고 증거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쳐야 할 적이 바로 내속에 있음을 깨닫고 증거한 것입니다. 이싸움이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 것인지 바울이 고백한 바를 볼 것 같으면 “내 지체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뱀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했던 것입니다. (롬 7:23-24) 성도의 속에는 늘 이런 싸움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17절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슬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슬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다 속에서 이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적은 내 속에 있는 옛 죄의 본성이요 사탄의 속성인 육신의 욕망(욕심)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명령을 따라 내 속에 있는 속사람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증거한 것입니다.(벧전2:11) 이렇게 성도의 싸움은 선한싸움이요 하나님 나라를 실현 시켜야 방해하며 하는데 거슬리는 대적과 욕심을 따르려는 내 소욕과 진리로 싸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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