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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렘11:18-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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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 참고 : | 2012.9.23 주일 http://dabia.net/xe/612607 |
정용섭 목사
예레미야의 탄원기도
예레미야 11:18-23, 창조절 넷째 주일, 2012년 9월23일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여러분은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 알고 계신가요? 그리고 왜 그를 알아야만 할까요? 예레미야는 오늘 우리와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긴 합니다. 기원전 627년부터 587년 이후 몇 년까지 대략 40년 동안 유대에서 선지자로 활동한 사람입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우리와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람이지만 예레미야는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영적 경험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영적 상황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기원전 587년은 예레미야를 이해하는데, 더 나가서 구약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해입니다. 유대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해입니다. 이로 인해서 다윗 왕조의 대가 끊어진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이 끝장난 것입니다. 그에 앞서 기원전 721년에는 형제 나라인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남유대는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멸망만은 면했습니다. 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에 남유대는 신흥제국 바벨론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격변기에 나름으로 개혁운동을 잘 펼치던 요시아 왕은 기원전 609년에 전쟁터에서 죽습니다. 그 이후로 유대는 점점 더 어려운 처지로 빠져들었습니다.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잘못된 외교정책으로 바벨론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결국 기원전 588년부터 유대의 수도이면서 다윗 궁과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에 의해서 포위당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밀사를 애굽에 보내서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제 시드기야를 비롯해서 백성들은 바벨론 군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에 젖었습니다. 그러나 애굽 군은 오지 않았고, 그렇게 1년을 버티다가 기원전 587년 7월에 천연 요새였던 예루살렘이 함락 당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알몸으로 야반도주를 했으나 결국 체포당했습니다. 시드기야 면전에서 아들이 처형당했고, 시드기야는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한 달 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을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다윗 궁과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처참한 일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뒤로 5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기원전 582년에 느부갓네살 국왕은 유대 지역에 3차 추방명령을 내립니다. 1차는 기원전 597년이었고, 2차는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587년이었습니다. 3차 추방명령을 내린 이유는 유대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은 유대를 함락한 뒤에 유대의 귀족 중에 한 사람인 게달리아를 총독으로 임명해서 식민 통치를 했습니다. 게달리아는 시드기야 왕 시절에 총리대신을 지낸 인물입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어려움 가운데서 구해준 아히감(렘 26:24)의 아들입니다. 게달리야는 피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자기 백성들을 도와서 무언가를 이뤄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민족에 의해서 반역자로 몰렸고, 그와 함께 한 사람들과 함께 학살당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를 문책하려고 추방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 뒤로 유대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난 현장에서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인들에게 모멸을 당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했을까요? 아무리 정세가 어두워도 하나님이 특별한 능력으로 구원하실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해야 했을까요? 민중들은 다 그런 소식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는 하나냐 선지자입니다. 그의 말씀 선포가 어땠는지 들어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곳으로 되돌려 오리라.”(렘 28:2,3) 어떻습니까? 신앙이 아주 깊은 설교처럼 들립니다. 민중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만한 메시지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신탁이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냐가 예언한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민족 전체가 큰 고통을 당할 것이며, 바벨론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당시 시드기야 왕을 비롯해서 귀족들과 백성들은 하나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옥에 갇혀서 죽음의 위험을 맞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마지막까지 백성들, 대중들, 민중들과 불화했습니다. 이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의 화두는 소통이라고 합니다. 정치, 경제, 교육에서 모두 소통 문제를 거론합니다. 그런 말이 나오게 되는 배경도 이해할만 합니다. 현직 대통령이 소통에 너무 서툴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통이 무조건 선한 것도 아닙니다. 소통은 자칫 포퓰리즘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태도라고 하더라도 그걸 대하는 사람에 따라서 의미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레미야는 겉으로만 보면 대중과의 소통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고독하게 하나님과의 소통에 집중하다가 자기의 삶을 마쳤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렘 11:18-23절도 예레미야의 이런 전체적인 운명을 배경으로 읽어야 합니다.
아나돗 사람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탄원기도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면서 어떻게 좀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기도입니다. 19절에 의하면 예레미야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음모를 꾸몄습니다.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행동과 삶을 모두 파괴하자는 말입니다. 감옥에 넣으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살해하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네거티브 소문을 퍼뜨려서 완전히 매장시키려고 했을까요?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도살장에 도살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순전한 마음만 믿고 있었을 겁니다. 그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명예를 얻으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탁을 전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을 당한 겁니다. 뒤통수는 맞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리는 중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렘 11:20) 그가 오죽했으면 복수해 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이런 구절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보복의 기도를 드려도 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시편에도 이런 구절은 제법 나옵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자기의 보복이 아니라 ‘주의 보복’이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벌을 말하는 겁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시편기자들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손상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나서서 보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을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보복하지 않으신다면 자기의 기도가 잘못된 것이 드러납니다. 보복하신다면 옳았다는 게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게 탄원기도를 드리는 이들의 영적 경지입니다.
예레미야의 탄원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십시다. 이 응답의 말씀에서 예레미야가 당한 어려움이 무언지가 더 정확하게 나옵니다.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렘 11:21) 아나돗은 예레미야의 고향입니다. 렘 1:1절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아나돗에서 활동하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작정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더 이상 예언하지 말라고 위협했습니다. 예수님도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고, 어떤 경우에는 돌에 맞을 뻔한 적도 있습니다. 이게 예언자들의 운명입니다. 아나돗 사람들이 왜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했는지는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예레미야서 전체를 통해서 보면 답이 나옵니다. 제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사람들이 원하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나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망한다는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유대 사람은 없습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소문이 점점 험악해졌습니다. 바벨론의 간첩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받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아무리 보호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자기들에게까지 불이익이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침묵의 형벌을 가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종교개혁 당시 교황청이 종교재판을 통해서 루터에게 내린 분서갱유 처벌과 비슷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징벌 운운하는 탄원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상황이었습니다.
지금부터 2천6백 년 전 유대에서 한 선지자로 살던 예레미야의 운명이 도대체 21세기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예레미야의 영적 실존을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아주 실질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위협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반복되었습니다. 로마 정권 아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오지 선교에 나선 이들도 순교당한 일이 많습니다. 20세기 나치 정권이나 공산당 정권 아래서도 이런 순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두려움은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 믿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로 불편한 걸 느끼지 못합니다. ‘나의 원통함’ 운운하는 예레미야의 탄원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이 좋아진 탓일까요? 세상 사람들의 이해심이 넓어진 탓일까요?
제가 보기에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에 하나입니다. 1)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살지 않는다. 2) 세상이 기독교의 복음에 대해서 완전히 관심이 없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민중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사는데 익숙하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일을 포기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정의를, 그 평화를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불의한지 말하지 않습니다. 남북화해와 통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외치지 않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적당하게 외면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위협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둡니다. 이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불행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었다, 혹은 죽었다는 의미이니까요.
예레미야가 경험한 세상과의 충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던 거의 모든 선지자들에게서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의 역사도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의 극단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과의 불화를 가리킵니다. 그 불화의 결과가 십자가 처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 예레미야처럼 ‘주의 보복’을 탄원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는 호소를 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의 호소에 응답하셨습니다. 거기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 사실을 온전히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세상과의 불화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렵기는 하겠지만 회피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고유한 능력으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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