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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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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2005-06-16 http://www.nosuchjesus.com/ |
주기도문(9)-왕의 자리에서 내려 오시오
마태복음 강해 77 주기도문 강해 (9)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까닭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고 특별히 예수님이 하나님 당신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는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어떤 도덕적 교훈과 고매한 사상이나 종교적 계명에 그치지 않고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며 새 생명을 주신다. 이전에 갖고 있던 약점과 허물 한 두개를 고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준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그 형식에 있어서도 단어 하나하나의 뜻, 용법, 순서 등이 반드시 그 형태로만 말씀 되어져야 할 충분한 이유와 근거를 갖고 있다. 그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미하며 인간의 영혼을 소성케 하므로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질 것이 없다.
본문에도 바로 그런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말씀의 형식이 완벽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하나님 당신이 아니고는 하실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뜻이 땅에서 이룬 것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하지 않고 그 반대로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뜻이 먼저 이뤄진 후에 그 뜻대로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너무나 당연하고 다 잘 아는 말씀으로 들리는가? 기도할 때에 자기 계획과 뜻대로만 하지말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어 기도하라는 것인가? 솔직히 주님 뜻대로 기도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든 기도하다 보면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하나님 뜻대로만 기도할 수 있는 자는 예수님 빼고는 아무도 없다. 물론 본문이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라는 권면인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본문을 알기 쉽게 풀면 이런 의미다. 인간이 땅에서 소원을 갖고 하늘에다 대고 빌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심사해서 들어 주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 아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늘에서 하나님이 땅을 향해 인간에게 비는 것이 성도의 기도라고 한 것이다. 설마 하나님이 인간에게 빌 리가 있겠는가 싶은가? 반드시 절하며 손을 비벼대거나 무릎 꿇고 엎드려야만 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간절한 소원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소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완전히 성취 안된 어떤 일이 있는데 그것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바로 간구이자 기도다. 좀 표현이 이상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에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도의 본질
예수님 당시까지 뿐 아니라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모든 종교인들과 하나님을 잘 모르는 자연인들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빌어야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빌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감히 절대자를 불경스럽게 대할 수 없고 두려워서라도 그런 생각을 못한다. 하나님 당신이신 예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이유가 그들이 기도를 할 줄 모르거나 하지 않고 있어서가 아니다. 마태복음 6:31-33으로 가보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는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문제로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하늘에다 대고 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32절 끝에 빌지 말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너희는 그들과 다르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꼭 현실의 물질적인 문제라서 빌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주기도문의 본문 다음에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절)라고 하셨고, 6:33절에도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기에” 하나님 나라 다음에는 먹을 것을 구해도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해서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현실에서 궁핍하고 힘들기는 신자나 불신자나 마찬가지다. 하늘에다 대고 빌어야 한다. 기도의 순서를 바꾸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속 마음에는 돈 달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도덕적으로 선한 일, 종교적 행사, 영적으로 경건해지는 일을 먼저 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만홀히 여김을 당할 리가 없으며 오직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주기도문과 마6:31-33에서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이방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에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제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다 성취시켜야 할 간절한 소원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하늘에서 땅을 향해 빌고 있다는 것을 제발 좀 알아라는 것이다.
기도의 순서를 바꾸라는 것이 단순하게 무엇을 먼저 혹은 나중에 기도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또 경건한 일만 빌라는 것도 아니다. 기도에 대한 근본 인식을 바꿔야 하는데 하나님이 지금 이 땅을 향해 빌고 있는 하나님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성도가 해야 할 기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럴 줄 알았어.
어떤 완악했던 불신자가 이런 고백을 했다. “신실한 신자인 형이 크리스챤 친구들과 함께 동생인 내가 예수를 믿도록 몇 년 전부터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마 처음부터 알았다면 못하게 하고 온갖 신경질을 부렸을 것이다. 그 때는 영적인 일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갈수록 더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나님, 예수님 얘기만 들어도 괜히 심통이나 신경질을 부렸다. ‘하나님이 있긴 어디 있어 괜히 형이 의지력이 약하니까 마음에 위로를 얻으려고 아무 것이나 붙들려는 부질 없는 짓이지’라고 매일 형의 신앙을 조롱했다. 세상의 재미에 푹 빠져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자꾸 마음 문이 열리고 계속해서 몇 달 동안이나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 나의 지성, 감성, 의지와 상관 없이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갈급한지 깨우쳐 주었다. 세상의 쾌락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내 속은 텅텅 비어져 갔고 이것이 아닌데,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닌데, 내가 지금 자꾸 다른 길로 빠져 들고 있는데 라는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형 모르게 혼자서 하나님과 밤마다 씨름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어느 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였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여기까지는 중생 때에 누구나 겪는 체험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지금 바로 형한테 가서 이 사실을 이야기 하라는 음성이 내 속에서 들렸다. 나는 ‘주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제가 형한테 신경질을 부리며 형을 놀렸는데 그렇게 못합니다’라고 버티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도저히 거역 못할 힘으로 그 음성이 내 심령 속으로 밀려 들려왔다. 할 수 없이 형 방으로 들어가 ‘형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했어’라고 말했다. 워낙 그 때까지 완악하게 굴고 세상에 빠져 살았기 때문에 나는 형이 내 말을 전혀 믿지 않거나 깜짝 놀랄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놀란 것은 나였다. 형이 정말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럴 줄 알았어’라고 짤막하게 대답한 것이 그가 보인 반응의 전부였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 줄 잘 안다. 하나님의 왕국이 땅끝까지 실현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사람 위에 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또 그 일을 위해 어떤 형태로든 기도도 하고 있다. 이 예를 든 것은 전도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구태여 말을 안 해도 신자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기도에 동참한다는 것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아닌가의 문제만도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시키는 기도가 있다는 것이다. 기도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성령이 신자더러 기도하라고 강권하시고 성령의 인도 하에 기도한다. 신자의 기도는 절대 자기 생각만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다. 기도를 많이 할수록 하나님은 더 기도를 많이 시킨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원하는 자신의 소원을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시되 반드시 신자를 통해서 실현해 나간다. 그러나 신자를 슈퍼맨으로 만들거나 실력을 뛰어나게 하고 일류대학을 가게 만들고 세상에서 커다란 업적을 쌓게 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를 통해 그 일을 이뤄나가는데 그 기도도 하나님이 주관해서 신자더러 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소원은 물론 예를 든 동생처럼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사단에게 내어 준 자기 백성을 되찾아 오는 작업이다.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고 허공을 치듯 아무 가치와 의미가 없는 삶을 살며 방황하는 인생에게 새 소망을 심어주기 원하신다. 이 땅에선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급하고도 메마른 심령에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생명수를 부어주시기 원하신다.
하나님의 기도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애타고 갈급한 심령으로 간절히 그 일을 이루기 원하시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소원의 크기, 열심의 세기, 뜨거운 가슴의 깊이를 재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비나이다 비나이다 라고 한 것이 표현이 이상하다 그랬지만 사실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천하 보다도 귀한 한 영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정말 안타까이 기도하고 계신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죽이실 만큼 애절하게 땅을 향해 빌고 있다. 그 애절함, 그 안타까움이 성령을 통해 신자의 마음에 옮겨 담아진 것이 신자의 기도다.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는가?
예의 그 형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한 것이 자기 신앙 실력을 믿어서가 아니다. 몇 년이나 끈질기게 열심으로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 되리라 확신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특별히 잃어버린 영혼을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눈물로 애절하게 기도할 때에 절대로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 일어난 것이지 기도를 뜨겁게 한 정성과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예쁘게 봐 주어서 특별 취급 해주신 것이 아니다.
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생각하고 그때까지 형한테 대들고 놀렸던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형에게 그 즉시 찾아갈 수 없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 본인이 고백했듯이 자기는 그럴 마음이 꿈에도 없었고 또 성령의 음성에도 여러 번 거절했었다. 그런데도 하나님 만의 애절함이 성령을 통해 그를 강권했다. 하나님이 동생을 향해 하늘에서 비신 것이다.
그때까지 자기의 심술과 조롱으로 생겼던 형과의 모든 불화와 앙금과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온전한 동기간의 사랑의 관계로 회복하라는 뜻이다. 형은 동생이 아무리 조롱해도 단 한번도 동생을 미워한 적이 없고 심지어 둘 사이에 틈새가 벌어졌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하나님의 왕국 밖에 있던 동생 혼자서 형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으로 뛰쳐나갔으며 너무나 어리석게도 형과 형이 믿는 하나님을 우습게 알았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하나님 품안으로 되 돌려 놓았다. 죄악과 세상과 사단에 붙잡혀 있는 자기백성을 도저히 가만 두고 보지 못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형의 기도를 통해 하신 일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더러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종교적 의무와 책임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렇게 하면 축복으로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도 없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 뜻이다. “네가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았는가? 그 마음에 너희 마음을 연합해 보려고 소원하고 노력해 본 적이 있더냐? 이 땅에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전부인양 착각하고 사는 자들을 향한 너희들의 마음이 어떠하냐?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신령한 것을 알았다고 해서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저들이 수준이 낮고 어리석어 보이더냐 아니면 정말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겨지더냐? 바울 사도의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9,28)는 고백이 너에게도 진실된 고백이 될 수 있느냐?”
나아가 “네가 예수를 믿은 후의 삶이 진정 천국이라고 확신하느냐? 네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느냐?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 속에 살고 있느냐? 그런데 왜 전하지 않느냐? 왜 천국을 선포하지 않느냐? 왜 네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아직 그 맛을 모르는 자들에게 나눠 줄 생각을 하지 않느냐? 그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라고 해서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귀신 들린 무당처럼 자기 의사와 상관 없이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게 강제로 시켜지는 기도가 아니다. 또 항상 방언으로 기도하라는 뜻도 아니다. 기도자가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 본인이 동의 해야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 마음에 담아 주신다. 그러나 단순하게 성령의 존재와 그 임재를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 말하자면 “성령님 들어 오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도를 하기 원합니다”라고 성령님의 강림을 소원하는 것만으론 안 된다.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자기 마음을 일치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그대로 나도 생각하고, 하나님이 싫어 하는 것 나도 싫어 하며, 하나님이 좋아 하는 것 나도 좋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저주하는 것 나도 똑 같이 저주해야 하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 나도 원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이 안타까이 여기는 것 나도 안타까이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 세기와 열심까지는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는 그 때에 같이 울고 하나님이 한 숨을 쉴 때에 같이 힘들어 하고 하나님이 기뻐할 때에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그 무한하고 따뜻한 가슴의 크기와 그 뜨겁고 힘찬 심장의 박동 수만큼은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왕의 자리에서 내려 오시오
사도행전 26:28,29로 가보자.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바울이 유대인의 모함으로 유대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중에 당시의 로마 분봉왕이었던 헤롯 아그립바 2세 왕 앞에 자기를 변호하는 장면이다. 바울은 자기의 형벌을 감면해보려고 자기 변명을 하지 않고 오히려 전도의 기회로 삼아 자기가 회심한 경위를 간증하고 십자가 복음을 담대히 증거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아그립바 왕이 적은 말로 ‘권하여’ 라고 되어 있는 데 원어의 뜻은 힘을 실어 강하게 권했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왕의 말이 시쳇말로 “네가 말로 꼬셔서 나를 예수 믿게 하려는 모양인데 내가 함부로 속아 넘어갈 줄 아느냐”라는 뉴앙스로 들린다. 예의 동생이 형을 놀려 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원어적으로는 그런 뜻이 아니다. 바울은 인격적 관계에 입각해서 사랑하는 심정을 갖고 안타까워 하는 마음으로 증거했는데 그것이 왕에게도 전해졌다는 뜻이다.
바울은 마치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마약과 폭력같은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자식을 바라 보는 부모나, 술 주정뱅이 동생이 술에 취해 낭떠러지 위를 걷고 있는 것을 쳐다보는 형의 심정으로 아그립바 왕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증거했다. 아그립바의 그 말은 역설적으로 따지면 자칫하면 말로 전한 것 뿐인데도 내가 넘어갈 뻔 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바울의 호소에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저러면 안 되는데, 저러다 큰 일 나지, 저 길은 흑암과 죄악과 사망으로 가는 길인데, 빛과 거룩과 생명으로 가는 길은 이 쪽인데…” 그는 왕을 사느냐 죽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는 자로 보았다. 한 순간만 더 두고 보다가는 멸망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질 것이 너무나 환하게 보이는 데 누가 애끓는 심정이 안 되겠는가? 비록 자기는 죄수고 상대는 자기를 심판하는 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의 간증을 통해 그 왕에게도 전해진 것이다.
동생이 아무리 조롱해도 형으로선 동생이 살고 죽는 문제라 그 조롱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인간적 생각만으로는 “자식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을 비방하긴 왜 해? 믿기 싫으면 그냥 안 믿으면 되지. 누가 강요하나? 다 제 잘되라고 믿으라는 것이지”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동생이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이 보인다면 어떻게 강권하지 않고 가만 있겠는가? 나아가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이 성령의 간섭으로 형에게 기도를 강권하는 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있겠는가?
아그립바 왕의 진심 반 조롱 반의 힐문에 바울은 어떻게 대답했는가? 이렇게 결박한 죄수의 신분 외는 자기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고 했다. 왕의 자리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풍족하면 걱정 염려 없어지고 평강이 따르고 재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만큼 착각이 없다고 한 것이다.
알기 쉽게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는 것 빼고는 내가 당신 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잘 살고 있소. 감옥 안에서 내 삶이 궁정 안의 당신 생활 보다 백배 낫소. 지금 그 왕의 자리에서 차라리 내려 와 이 자리에 서시오. 아무리 왕이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들어 오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른다면 쇠사슬 만 묶이지 않았다 뿐이지 죄수나 다름 없소. 더 괴롭고 힘든 세상의 노예요. 누가 정말 참 인간답게 사는 지 당신의 심장에 손을 얹고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오”라고 말한 셈이다.
예수 믿는 것 빼고는 다 갖춘 자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하라고 하면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고상하고 경건한 기도만 하려 든다. 한달 수입이 만불 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무슨 죄를 짓는 기분이다. 신자가 가는 길은 가시밭 길이어야 하며 궁핍한 고난에 자원해야 한다고만 생각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양 착각한다. 신자는 그런 가식적인 기도를 할 필요 없다. 우리 가운데 저를 비롯하여 대부분이 예수님의 참 고난에 동참할 만큼 실력과 믿음을 갖춘 자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이 성령을 통해 내 마음에 전해져 오는 것을 들어라는 것이다. 기도란 매일매일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작업이다. 하나님의 애끓는 심경이 내 입술을 통해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선포되어지는 것이 기도다.
그래서 신자가 기도할 때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돈이 없어 힘든 일이 생겨 기도하려고 무릎 꿇었는데 이상하게 평소 때 잊고 있던 친척이나 친구가 자꾸 생각난다. 기도 중에 잡념이 생긴 것은 아니다. 돈 문제로 기도하고 있는 데 잡념이 생길 리 있겠는가? 인간의 생각이 가장 잘 집중 되는 것이 돈 문제 아닌가? 신자인데도 이방인처럼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만 사로잡혀 기도하고 있으니 하늘에서 하나님이 안타까워 신자의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다 책임져 줄 테니까 너는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라고 성령으로 당신의 심정을 우리 마음에 옮겨 심어주었다.
물론 기도가 끝날 때 까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런 것을 알려 주는 것이 성령의 간섭이 아니다. 다만 계속해서 그 사람이 마음의 부담이 되어 남아 있는다. 그래서 전화를 해보거나 한 번 찾아가 보면 반드시 무엇인가 도와 주어야 하거나, 의논해 주거나, 위로 해주거나, 아니면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기만 하거나, 우리 얼굴만 비춰주어도 힘을 받는 일이 그에게 생겨나 있다.
그것도 나 보다 훨씬 더 잘 먹고 잘 사는 친구일 때가 대부분이다. 먹고 마시는 것이 너무 풍족해 평소 때 저 집만큼은 걱정거리라고는 도대체 없을 것이라고 부러워 했던 바로 그 친구다. 왕 같이 살고있는 줄 알았는데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떵떵거리고 더 부자가 되어 있지만 사는 꼴이 영 말이 아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있고 지옥이 따로 없을 지경이다. 하나님의 은혜라고는 눈을 닦고 보아도 없고 예수님은 꿈에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신자가 찾아 와 도와 준 아주 작은 정성, 자연스레 전해진 위로의 말 한마디, 간단하게 해 준 기도, 심지어 신자 친구의 사는 모습을 보고도 이 때까지 세상에서 받았던 어떤 위로나 도움 보다 더 큰 힘을 얻는다. 예의 동생 같이 완악하여 평생가도 예수 안 믿을 것 같던 그 사람이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한 마디 말에 그대로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본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려고 꿈도 꾸지 않았고 평소 때 아예 담을 쌓고 지냈거나 거의 잊고 있었던 자다. 신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시키신 기도를 대신 한 것 뿐이다. 갈급하고 애통해 하는 그 친구의 심령을 안타까워 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그를 구원하기에 가장 적합한 신자 친구의 마음에 전해진 것이다. 심지어 신자가 자신의 문제만을 위해 기도할 때에 말이다.
세상적으로 도저히 비교가 안 되는 그 잘 나가는 불신자 친구에게 신자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딱 하나 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한 말처럼 “단칸 방에 사는 것만 빼고는 모든 것이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할께” 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는 기도가 달라진다. 참된 기도를 하게 된다. 자꾸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전해야 할 일이 생기고, 그것에 갈급한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또 찾아가게 된다.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만으로 상대의 영혼은 소생되고 주님의 새 생명을 얻어 인생이 변화된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런 일이 더 이상 신비한 일이 못 된다.“그럴 줄 알았어” 라고 덤덤히 반응할 정도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신자는 자신이 기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시킨 기도를 했고 하나님의 심경을 헤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신자가 세상을 향해 이런 고백을 자신있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 믿는 것 빼고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보다 예수 믿는 것 빼고는 세상에서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의 삶이 더 아름답고 풍성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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