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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로이드 존스............... 조회 수 3242 추천 수 0 2012.10.16 18: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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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상14:1 
설교자 : 로이드 존스 
참고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1127/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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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열왕기상 14:1)

 

느밧의 아들 여러보암 이야기는 구약이나 기독교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이 사람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의미와 중요성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열왕기와 역대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교훈도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그의 이야기가 계속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그 많은 왕들에 대한 전체 기록은 자주 등장하고 있는 이 한 구절 속에 요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으니.” 그것은 마치 “여러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이 범한 이 특별한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국 이 왕들 중 어느 한 사람의 경우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열왕기상 12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의 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바람에 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과 유다, 또는 북왕조와 남왕조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고 통치했던 열 지파가 반역을 하여 북왕조를 이룬 것입니다. 그들의 지도자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는데, 따로 갈라져 나가면서 여로보암이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에서 분리되어 나간 북왕조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세겜이라는 성을 건축하고 그곳에 거했는데, 즉시 한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항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나라가 둘로 갈라진 그때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만일 그들이 계속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면, 결국 자기가 그 백성을 장악하지 못하게 되므로 자신의 왕국 또한 잃어버리게 될 것은 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한 술책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다른 하나는 단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굳이 예루살렘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너무 먼 거리에 있으므로 그곳까지 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라고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는 자기 멋대로 성전 같은 것을 짓고 제사장을 안수하고 특정한 절기를 정한 다음, 백성들에게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던 것처럼 그 금송아지를 섬겨야 한다고 촉구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에서 그처럼 자주 언급하고 있는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항상 여기 열왕기상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 사건은 지금도 여전히 흥미로울 뿐 아니라 여로보암의 됨됨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다른 어느 구절보다 더 많은 것을 조명해 주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는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어 있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이 사건에 비추어볼 때야 비로소 그처럼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다른 이야기, 즉 여로보암의 죄에 관한 기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종교에 대한 그의 태도를 정말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이 두 사건을 동시에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이 두 번째 사건 속에는 우리의 주의를 끌 뿐 아니라 그 자체 내에  우리가 검토해 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단순히 드라마 차원이나 인간적 관심사에서만 보더라도 이 이야기는 정말 멋진 이야기입니다. 맨 처음에 나온 “그때에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든지라”는 이 짧은 구절은 하나의 걸작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사람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며 어떤 드라마가 전개될지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아주 흥미롭고 측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상반된 자질들을 동시에 갖고 있는 아주 요상한 피조물입니다. 어느 인간 속에나, 심지어 가장 잔인하고 강퍅한 인간 속에도, 부드럽고 온유한 영이 들어 있는 법입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은 아주 무섭고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그 속에 부드러움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난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그의 다정 다감하고 부드러운 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어린 아들 아비야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병들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지금 막 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이런 유형에 속한 사람들-세상의 강퍅한 사람들, 아무 거리낌없이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심지어 그들 생명까지 무참히 앗아가는 비양심적이요 무자비한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이들이나 아내에게는 아니 어떤 때는 개나 말에게까지 놀랄 만큼 많은 동정심을 베푸는 사람들-의 문제를 거기서 더 이상 분석하지 않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타락 교리를 분명히 입증해 주고 있는 증거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생각에 너무 오랫동안 붙들려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유의하고 싶은 점은 종교에 대한 여로보암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비야가 병든 이 사건을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며, 또 그 점을 우리가 지금까지 언급한 다른 문제들과 함께 관련지어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종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자기 편리한 대로 종교를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둘을 만든 것은 그가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자기 왕관과 자기 나라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무신론자가 되어 하나님 믿기를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되 자기 양심에 편리한 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고의적으로 수정 변경한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절대 종교인이 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의 종교를 자신의 계획과 목적에 맞게 조작한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그 금송아지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예배할 수 있으니 굳이 예루살렘까지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우상 숭배는 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와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관해 하나님이 특별히 정해 주신 계명들을 무시하고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고쳐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자기한테 적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이 덜컥 병이 났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섭니다. 그런 위기를 당하자 몹시 번민하던 끝에 아히야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올바른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는 하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당하자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 돌아선 것입니다. 이처럼 그에게는 하나님과 종교가 순전히 자기 편할 때 써먹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얼마나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입니까! 그렇지만 또 얼마나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입니까!

 

사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 여로보암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 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사람들은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모든 죄인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아주 뚜렷하고 명백한 유형의 죄인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곤경에 빠지면 항상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때로 성경도 읽기 때문에 성경 내용에 대해서도 꽤 많이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사랑과 자비와 인자와 불쌍히 여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뭐든지 다 믿습니다. 용서와 죄사함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도 즉시 받아들입니다. 천국에도 가고 싶어하며 하나님께 가기도 희망합니다. 그들에게는 아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죄인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 주는 복음의 소리를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소리를 듣고 너무 기뻐 웁니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이런 위대한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성경이 진리에 관해, 의에 관해, 거룩에 관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철저히 피하고 무시합니다. 즉 복음이 제공하는 것은 무엇이든 즐기고 받아들일 용의가 있지만, 복음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싫어합니다.

 

기독교를 원할 뿐 아니라 믿기도 하지만, 자기 멋대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도 마음에 드는 것은 쏙 뽑아서 취하고 나머지는 다 거부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산상수훈이라든가 복음이 말하는 윤리적 요구에 대해 들으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세상 길에서 나와 구별 되이 살라는 부르심에 대해 들으면,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을 들으면 몹시 싫어할 뿐 아니라 원망까지 합니다. 그런 것에 대해 들으면 대번 의심을 표명하며, 그런 것은 유별난 설교자나 사람들이 자신의 편협성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무시해버립니다.

 

그들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처럼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아니 적어도 자기 자신들은 올바로 예배드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방식대로 섬기는 게 아니라 자기들 방식대로 섬깁니다.

 

현대에는 이런 유의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더욱 가관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들먹여가며 이런 소위들에 대해 구구하게 변명을 늘어놓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사랑과 자비와 인자와 불쌍히 여김, 곤경에 빠졌을 때 도움-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고 명하시면 즉시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칩니다. 일이 잘못될 때는 언제나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기억하지만, 만사가 형통할 때는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들의 양심을 통해 역사 하시는 것마저 질식시켜 버립니다. 이 여로보암의 이야기가 바로 이런 유의 사람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아니 잘 묘사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그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사항을 관찰해 보겠습니다.

 

1. 우선, 이런 입장 속에 들어 있는, 이런 입장이 암시해 주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을 보십시오. 제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점에 먼저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켜드린 이유는 바로 그것이 이 문제 전체에서 가장 무서운 면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이런 입장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한지 깨달을 수 있다면, 이런 행동의 결과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면, 아마 잠시 이런 입장을 취했다가도 금새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결코 그런 입장을 계속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물론 A라는 죄와 B라는 죄를 구별해서 어는 죄가 더 가볍고 어는 죄가 더 무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무신론자의 죄가 이런 종류의 사람이 범하는 죄,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 범하는 죄보다는 훨씬 가볍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불순종과 반역의 죄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모욕하는 죄도 들어 있습니다. 그 모욕죄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1) 이런 자세 속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욕하는 행위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인격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정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이 행하시고 또 행하실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소원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자신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선물들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증명도 필요 없을 만큼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인간적인 체험에 근거해서만 보아도 아주 분명한 말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 이 점에 대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다음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히고 여러분을 모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공개적으로 여러분에게 동의하지 않으며 여러분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겉으로는 여러분을 좋아하고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을 뿐 아니라 여러분편이라고 말하면서, 실은 여러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여러분을 이용하는 사람입니까? 인간다운 인간이 진정으로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후자와 같은 태도일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으면 역사책이나 전기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얻고 싶으면 여러 정당들의 연대기를 한번 보십시오. 순전히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 정당이나 어느 이론 또는 가르침을 이용하는 사람은 항상 비열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장 악랄한 위선자입니다. 그는 명분이나 가르침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그 대의 명분을 지지할 경우,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거라는 사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거나 자신이 원하던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그 교훈을 더 이상 충성되이 따르지 않습니다. 역사는 이런 사람들을 가차없이 정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영혼이 저열하고 인품이 비열한 인간들이라고 질타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한 정당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에 대해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진리도 거룩합니다. 그러나 인격이 진리보다 훨씬 더 무한하게 거룩합니다. 진리는 비인격체로서 상처를 받을 수 없지만, 인격은 아주 민감하여 깊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인격을 이용할 만큼 저질적인 사람이 야비한 비열성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격이 위대하고 중요하면 할수록 불쾌감도 그만큼 커집니다. 이 땅의 왕을 배신한 자도 죽음을 면할 수 없거늘 하물며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한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필요로 할 때만 하나님께 향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분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해 가장 치욕적인 모욕입니다.

 

(2) 그것은 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들먹이며 자신의 태도를 구구하게 변명하려 드는 현시대에 있어서 가장 많이 강조될 필요가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면 모든 것이 다 무사 통과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도덕적 교훈이나 윤리적 교훈 따위는 다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성경 속에서 그처럼 분명히 명하고 계신 것을 편협한 것으로 간주해 버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에 관한 복음의 가르침은 받아들이지만, 그 외의 다른 것은 모두 무시한다” 만일 이 사람들이 그 모든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가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 슬퍼하며 후회하는 거라면, 그것은 절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실 자신들이 그렇게 실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참회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은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처해 있는 입장은 이런 입장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싫어하고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르침을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구원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자기들 방식대로 받고 싶어합니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할 수 없이 모욕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곧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실제로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않고도 구원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구원하실 용의가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시며 실제로 우리를 그 죄로부터 구원해서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처럼 죄를 아주 가볍게 보신다고 생각합니다. 죄란 하나님 보시기에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율법과 계명과 규례들 속에서 말씀하고 계신 것들이 진짜 그런 뜻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체 구원 계획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악된 삶에 대해 어떤 형벌도 내리시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이런 식으로(즉 죄악된 삶을)살아도 된다.”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우습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런 소행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모욕할 뿐 아니라, 실은 하나님의 성품 속에 무언가 본질적으로 부도덕한 모순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처럼 기독교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 골라서 취하고 나머지는 버린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든지 이용할 용의가 있지만 하나님의 의와 거룩하심은 전적으로 무시한 적이 없습니까? 이 점을 명심하고 다음과 같이 자문해 보십시오. “너는 대체 어떤 근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중 일부분은 정확하고 중요 하지만 그 나머지는 모두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거냐? 스스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니 그런 네가 하나님의 재판관이란 말이냐? 그럼 네가 주인이고 하나님은 아무 때나 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꼭두각시란 말이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시 중 여러분 마음에 들거나 여러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받아들이고, 여러분을 정죄 하거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자가 되라고 명하는 것은 거절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한다면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2.이 입장 속에는 또 자기 기만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경우에서 잘 나타나고 있듯이 이런 유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장 놀라운 특징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자기 기만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평상시에는 그토록 빈틈없고, 지혜롭고, 명민한 사람들이 마치 어린애처럼 비논리적이요 분명하게 생각할 능력이 없다니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죄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결과입니다. 그럼 이 자기 기만을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여로보암의 경우에서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된 일임을 내내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제가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는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 체계를 바꾼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새로 세운 체계도 옛날 체계와 똑같은 것이니 그대로 실천하면 옛 것과 똑같은 효과를 얻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인 양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절대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알맹이 없는 모조품으로 완전히 쓸모 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내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는 계속 그 일을 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다른 목적에 꼭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들 아비야가 덜컥 병이 들자, 그는 자신의 진짜 생각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단이나 벧엘로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믿는 금송아지들한테 가서 의논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제물과 향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들이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보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될 것을 예언했던 사람, 자기에게 문둥병이 발하게 했다가 그것을 기적적으로 고쳐 준 또 다른 선지자(왕상13:4-6)의 하나님,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 속해있는 선지자 아비야에게 아내를 보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만들어 낸 그 종교 체계는 전혀 쓸모 없을 뿐 아니라 아무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가 진짜 유일한 참종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런 명을 내릴 수 있었죠”라고 반문할 사람들도 있을 텐데 그렇게 반문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반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속으로는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행하면서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고 자기 스스로를 속인 것입니다. 위기가 닥치자, 절망적인 필요가 닥치자 그의 진짜 태도가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만사가 형통할 때는,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하여 양심을 질식시킬 뿐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과 다툽니다. 이런 태도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쟁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양심의 도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통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또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듣습니다. 양심은 우리에게 성경 속에 있는 모든 말씀은 다 참되며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그분의 계명에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고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 분명히 압니다. 다만 정직하게 그 내적 충고를 듣기만 하면, 선과 악, 옳고 그름,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알 뿐 아니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여로보암이 한 것처럼 행합니다. 왠지 아십니까? 우리가 그토록 분명하게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계획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다른 어떤 것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다른 것을 너무 하고 싶은 나머지 결국 그 일을 행하며 우리 자신을 위해 이처럼 새로운 종교를 고안해 냅니다. 그런 다음에는 이 새로운 종교가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구구한 말들을 늘어놓습니다. “그 진짜 종교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 간단한 새로운 종교로 충분하다.” 우리의 견해에 반(反)하는 모든 이유와 주장들을 우리의 달변으로 꺾어 버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양심, 우리 안에 있는 빛과 쟁론을 합니다. 우리가 옳다고 우기며 우리 자신을 설득하고, 일종의 지적이요 철학적인 정당 방위로 우리의 삶과 행동 양식에 대해 구구한 변명들을 늘어놓습니다. 우리의 지성으로 우리의 양심을 억누르려 하며,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는 우리 자신의 생각들을 가지고 우리가 분명히 옳다고 알고 있는 지식을 누르려 합니다. 그리고 삶이 매끄럽게 진행되어 아무 문제가 없을 때는 모든 게 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젊고 힘이 있고 건강할 때는 그 체계가 완벽해 보입니다. 이따금씩 양심이 콕콕 쑤셔 아프긴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것을 묵살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아비야가 병이 납니다. 아니면 우리 자신이 병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그 동안 내내 자기 기만에 빠져 살았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들이받았을 때 그 배에 있던 밴드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저 잔꾀 부리는 짓만 중단하면 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큰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소리, 여러분의 지성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그 소리를 들으십시오. 여러분을 가르쳐 주는 그 내적인 지시와 충고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듣기에만 좋은 인간들의 이론이 아닌 하나님의 진리들을 들으십시오. 여로보암이 자신을 속였던 것처럼 여러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세워 놓은 그 금송아지들을 보십시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여러분이 주창하고 변호하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과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솔직하십시오! 경건치 못한 삶에 대해 진정으로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경건치 못한 삶을 매끄럽게 다듬거나 또 거기서 무엇을 빼지 말고 있는 그대로 정확히 조사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 영혼에 가져다주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을 영원이라는 빛 속에서 조사해 보십시오. 경건한 삶은 편협한 삶이라며 공격하지 말고 경건치 못한 삶의 어떤 면이 정말 그렇게 좋고 옹호할 만한 것인지 냉철하게 분별해 보십시오. 우리가 쟁론할 때 사용하는 멋진 말이나 의식들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우리를 기만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멋지게 꾸며 봤자 금송아지는 금송아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금송아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그것을 가장 필요로 할 때 그 금송아지 자신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

 

(2)그러나 아주 객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자기 기만 속에는 그보다 더 비극적이요 불가해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자기 기만은 스스로 자기 꾀에 속아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아비야가 병이 들자 여로보암은 자신이 만든 가짜 종교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른 데서 도움을 얻기 위해 노심 초사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아내를 아히야 선지자에게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잠시 후 살펴보겠습니다만 그는 이런저런 이유로 직접 가지 않습니다-아내를 보냅니다. 그런데 아내에게 가난한 여자처럼 변장하고 가되 선물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만일 선지가가 자기 아내를 알아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가 아내에게 무슨 말을 할지, 그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변장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선지자를 멍청이로 만들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얻어 낼 작정이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아히야 선지자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지식과 도움을 얻어오게 하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영리한 생각입니까. 얼마나 간교한 생각입니까. 얼마나 완벽한 술책이요 완벽한 계획입니까. 또 얼마나 전형적인 죄의 모습이며 죄인의 모습입니까. 이따 여로보암은 자기가 평상이 똑똑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 영리함은 무지와 좀더 분명하게 생각하지 못한 데 근거한 영리함이었습니다.

 

자, 그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 잔꾀에 속어 넘어간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그의 분명히 생각하지 않고 정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교활함, 이 주도 면밀함, 이 약삭빠름은 모두 다 사람의 사고 능력을 항상 마비시키는 교만과 자기 기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틀림없이 자기가 아주 영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가 집을 나서기도 전에 벌써 그 계획이 성공할 것을 상상하며 속으로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좀더 분명하게 생각했더라면,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엉터리 계획인지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 바로 이것이 여로보암이 좀더 신중히 생각해 보았어야 했던 사실입니다. 자기 아내한테 찾아가 보라고 한 이 사람 아히야는 사실 그에게 이스라엘 왕이 될 거라고 예언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래까지 내다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 눈에는 감추어져 있는 지식에까지 접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시각이나 촉각처럼 평범한 인간적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도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미래를 읽을 줄 알고 미래의 사건들에 대해 미리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말 기적적인 능력을 갖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내한테 약간의 화장과 분칠을 하고 낡은 옷만 입히면 그 사람을 속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자, 그럼 여로보암이 어리석다는 사실이 여기서 얼마나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집에 도착했을 때 아히야 선지자는 실제로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연로한 선지자는 이미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여로보암의 아내가  방문으로 들어올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저가 문으로 들어올 때에 아히야가 그 발소리를 듣고 말하되 여로보암의 처여 들어오라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하느뇨 내가 명령을 받아 흉한 일로 네게 고하리니“(왕상14:6) 그렇습니다. 그녀가 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이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히야 선지자는 그녀를 알아보았으며 그녀에게 그녀에 관한 모든 것과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그 앞 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우리는 정말 어리석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이 굉장히 똑똑한 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당겼다 늦쳤다 할 수 있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내키는 대로 삽니다. 그러다가 위기가 닥치면 근심어린 표정을 짓고, 위선적인 눈물을 흘리며, 독실한 신자인 척 거룩한 가면을 쓴 채, 하나님께 약간의 선물을 들고 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그것이 정말 효력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입니다. 우리는 멋대로 살다가 하나님이 꼭 필요할 때는 막판에 가서 하나님께 돌아서면 된다고 우리 자신을 설득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우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이 말씀을 기억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생전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요, 절대적인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입니까. 한번 조리 있게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여로보암은 그렇게 조리있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자기 자신을 더 이상 바보로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3.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라고 간청하는 이유는 여로보암이 밟은 그 행동 절차에 따라 나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는 그 불가피한 결과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여로보암의 자기 기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상태 속에서도 여로보암은 틀림없이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들이 병이 심해지자 여로보암은 자신이 저지른 소행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 그 모든 행동들이 전적으로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자기 자신을 경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그 수치심 때문에, 또 부분적으로는 그 하나님의 사람을 대면하는 것이 두렵고 그가 자기에게 무슨 말을 할지 그것이 두려워서 직접 가는 대신 아내를 보냈을 것입니다. 얼마나 딱한 사람입니까. 여러분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의 아내는 재앙과 저주가 담긴 무서운 메시지를 듣고 돌아오며(왕상14:7-16), 아비야는 결국 죽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진작부터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까? 여러분은 곤궁에 빠져 곤란할 때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때 여러분 자신이 정말 비열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혹시 여러분 안에서 이런 속삭임이 들리지 않습니까? ‘불쌍한 겁쟁이야, 잘난 척하면서 양심과 하나님의 소리 듣기를 그토록 거부하며 멋대로 굴더니 왜 하나님께로 돌아서니? 계속 그렇게 살지’ 여러분,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것이 있을까요? 이런 양심의 소리를 들은 다음에는 두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 돌아설 권리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이 아주 야비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는 그 종교 체계가 자신에게 맞고,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자기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이용할 수 있을 때만 하나님께 돌아서는 아주 야비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점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무기력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있으며 자기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 옹졸하고 비열한 행동에 대해서는 형벌밖에 돌아올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실을 알고 느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만일 없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이런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지 않은 체, 살아 계신 하나님 존전에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 동안 아프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갔습니다. 그때 이미 이런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날 하나님을 그렇게 대면해야 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우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뽑아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다 버리든지 둘 중 하나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우롱하고 기만함으로써 여러분 방식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눈을 떠보니 그 동안 여러분에게 속아 멍청이가 되었던 사람은 오직 여러분 자신뿐이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여로보암은 한번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회개했다면, 만일 그가 직접 아히야 선지자에게 갔더라면, 가서 그 동안 저지른 죄와 어리석음과 수치심을 고백했더라면 이야기는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달라졌을지는 순전히 상상에 속한 문제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만은 절대 상상이나 추측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 그 어리석음과 공허함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속이려고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정신나간 짓인지 깨닫는다면, 그것을 깨닫고 슬퍼하며 창피해서 하나님께 고백한다면-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에 내어 맡긴 채 그 모든 것을 자책하고, 이제부터는 그 악한 길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겠으니 용서해 달라고 빈다면-하나님은 여러분을 받아 주실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용서해 주시고 축복을 물 붓듯 부어 주실 것입니다.

 

제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요?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용서와 구원을 값주고 사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살다가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해주시려고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딛2:14)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나름대로 애써 왔습니다만, 아무튼 그것은 모두 십자가 속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이작 와츠(Isaac Watts)의 말은 정말 맞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정으로 본 사람,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와츠가 지은 “주 달려 죽은 십자가”라는 찬송가에 나오는 가사처럼 그렇게 조리 있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싫어합니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들을 소원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빛 속에서 이 다른 것들을 보십시오. 그 빛 속에서 여러분의 교만을 보고 여러분의 그 알량한 소유물들을 보십시오-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헛되게 보입니까 또 그것이 무슨 영원한 소유물이나 되는 것처럼 그것들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자신마저 내어주셨습니다-“큰 자비를 나타내신” 그곳을 다시 한번 더 보십시오. “그는 우리를 선하게 만드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화답해야 될까요? 아마 와츠가 지은 다음의 찬송가처럼 화답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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